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79화 (179/420)

179화. 발레리아 백작

엣킨스를 선장실로 안내한 나는 새끼 고양이를 어색하게 안고 의자에 앉았다.

점잖은 모습의 엣킨스가 연신 고양이에게 눈길을 주는 것을 보니 민망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놓아둘 수도 없잖아.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내가 꿋꿋하게 새끼 고양이를 안고 있자 살짝 한숨을 내쉰 엣킨스가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는데도 이렇게 반겨주셔서 고맙소, 선장.”

“아, 네. 그런데 바쁘신 분 같으신데 어쩐 일로….”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누가 봐도 반기지 않는 분위기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능청스러운 사람이 이 정도에 눈 하나 깜빡하겠냐마는….

“얼마 전에 이 항구에 작은 소란이 있었소. ‘인어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진주 때문이지. 선장도 아마 소문은 들었을 것 같은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하긴 백작씩이나 되는 자가 뭐가 아쉬워서 일개 선장인 나에게 사람을 보냈겠어.

보나 마나 우리 배를 찾아와서 깽판을 쳤던 그 자작인가 하는 놈이 소문을 냈겠지.

“으흠, 사실 오해를 받아서 조금 난감한 일을 겪기는 했습니다만….”

나는 일단 모르는 일인 척 시치미를 뗐다.

진짜 상대방이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그가 말하는 뉘앙스가 대충 묻어주겠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정신 나간 자작 놈이 쳐들어왔을 때 직접 행차한 사람이 항구관리관이었고, 항구관리관은 백작의 부하다.

자작이 백작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항구관리관은 무조건 백작에게 보고했을 것이고, 항구를 지배하는 백작이라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 역시 리바체 자작이 쓸데없이 소란을 일으킨 배가 바로 이 배였군. 대신 사과하지. 그 이유는 아니지만, 백작님께서 리안 선장을 보고자 하시오. 바쁜 일이 없다면 잠시 백작님을 뵈러 가지 않겠소? 백작님께서는 항해자들의 신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시거든.”

“죄송합니다만, 저는 경력도 짧고 백작님께 들려드릴 만한 멋진 이야기도 없습니다. 괜히 높으신 분께 폐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쓸데없는 겸손의 말을 하는군. 백작님께서는 그대가 스코타 후작가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계시오. 그 스코타 후작께서 평범한 자와 연을 맺을 리가 없지 않겠소?”

잠깐만, 굉장히 큰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스코타 후작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후작 각하와 안면이 있겠습니까?”

내가 급하게 잘못된 정보를 정정해주자 엣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적당히 하시오. 스코타 후작이 아무 관계도 아닌 자를 굳이 은행의 통신망을 이용해서 호출할 만큼 맹한 인사는 아니지.”

“아니, 그건….”

아오, 막상 변명을 하려니까 딱히 할 말이 없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니 왕녀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좀 마음에 걸리는 주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작만큼 거대한 세력을 가진 귀족이자 후작의 정적이라고 알려진 발레리아 백작 가문의 사람 앞에서 하기에는 말이지.

저쪽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일 수도 있고, 말을 해도 별 일 없을지도 모르지만, 떡밥이 떡밥인지라 진짜 제대로 얽히면 100% 나의 의문사로 결론지어질 판이다.

“밑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소.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옷이라도 갈아입을 시간을 주시지요. 높으신 분을 만나는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흠, 그럼 아래에서 기다리겠소.”

갑판까지 엣킨스를 배웅한 나는 천천히 선장실로 돌아오며 선원들을 시켜 고양이를 우르타에게 돌려주라고 전하고 항해사들과 갑판장님, 그리고 네이선을 호출했다.

마음 같아서는 갑판장님과 함께 가고 싶은데 그건 조금 무리일 것 같고, 항해사 중의 한 명과 네이선을 데리고 가야겠다.

***

급하게 모인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한 나는 네이선에게 고갯짓했다.

“넌 지금 당장 네 방으로 가서 제일 좋은 옷 입고 현문 앞에서 대기 해.”

“알겠습니다.”

“우르타 못 따라오게 하고. 이번에는 진짜 실수하면 다 죽을지도 몰라.”

“우르타도 바보는 아니니까 걱정 마시죠. 제가 알아듣게 말해 놓겠습니다.”

네이선이 나가자 나는 남은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자, 그리고 한 명 더 갔으면 좋겠는데….”

“제가 가겠습니다.”

아인델프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을 들며 자원했다.

평소라면 아인델프를 선택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세월의 무게가 있는 사람이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다.

아직도 안색이 별로 안 좋은 갑판장님은 힘들고….

상처가 아물었다지만 마차의 승차감이 얼마나 거지 같은지 아는 내게 환자를 마차에 태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이번에는 이등항해사가 함께 가지. 일등항해사는 갑판장님과 리버티 호를 관리해줘. 이번에는 진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책임자가 한 명 필요할 거야.”

“선장님, 그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차라리 도망가는 것은 어떨까요?”

아인델프가 걱정스럽게 제안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입항하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계류까지 마친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가겠어? 배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해도 이 근처는 죄다 백작령이라서 금방 잡힐 거야. 애초에 우리는 뭍에 익숙하지도 않잖아.”

“그렇기는 합니다만….”

“나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럴 생각이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만들 필요도 없으니. 하지만 상황이 예측이 어려운 만큼 배에 책임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특히 보안에 더 신경 쓰라고. 나 없는 동안 선장실에서 항해일지를 훔치려거나 해도실에서 해도를 훔치려는 시도가 있을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선장님.”

내 말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인델프에게서 시선을 옮겨 복잡한 표정의 갑판장님을 보았다.

“갑판장님도 잘 부탁드려요.”

“음, 걱정 마십시오, 선장님.”

나는 갑판장님과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을 교환하고 마지막으로 삼등항해사 슬레어에게 시선을 옮겼다.

“삼등항해사도 일등항해사를 잘 보좌하도록 해. 내가 없는 동안은 일등항해사가 선장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선장님!”

회의를 마친 나는 이등항해사 발드와 함께 현문으로 가서 네이선과 합류했다.

슬쩍 부두 쪽을 보니 엣킨스가 백작 가문의 사병으로 보이는 병사 여섯 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쪽에 말 여섯 필이 매어져 있었고, 근처에는 이두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세상에, 마차에 기병이라니, 너무 본격적인데?

말 자체가 워낙 고가의 장비(?)이기도 하지만, 말을 탈 수 있는 병사도 기본적으로 고급 인력이다.

그런 값비싼 기병을 여섯 명이나 끌고 왔으니, 백작이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귀족임에도 내게 묘하게 예의 바르던 엣킨스의 모습이 이해가 된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흠, 한결 보기 좋군. 뒤에 있는 사람들은?”

“배의 항해사들입니다. 괜찮다면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다시 엣킨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걸어가거나 자력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거절을 당해도 할 말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호랑이 굴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혼자 가기는 너무 무섭잖아.

“백작님께서 초대한 사람은 리안 선장이오.”

“그게, 사실 저는 나이도 어리고 말주변도 없는 편이라 여기 두 사람이 함께 가는 쪽이 백작님께 무슨 설명을 드릴 때 도움이 될 겁니다.”

“그것참….”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엣킨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함께 가도록 하지. 하지만 백작님과 접견에 함께 할 수 있을지는 백작님께 여쭤봐야 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엣킨스 님.”

“시간이 꽤 지체되었군. 어서 마차에 타시오.”

네 사람을 태운 마차는 곧 출발했고, 여섯 기의 기병은 마차를 호위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백작가의 문장으로 추측되는 깃발을 달고 있는 마차는 단 한 번도 제지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을 쉬게 하는 잠깐의 휴식을 제외하고 거의 6시간을 계속 달렸다는 말인데, 그동안 마차 안의 분위기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마차는 진동이 심하다.

정말, 정말 심하다.

그래도 귀족 가문의 마차라고 좌석에 쿠션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승차감은 온몸이 아프고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더 미치겠는 것은, 나와 마주 보고 앉은 사람이 바로 엣킨스라는 것이었다.

나를 마차에 태운 것으로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엣킨스는 더 이상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끼리 잡담을 하기도 그렇다 보니 마차 안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내가 조금만 더 있으면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드디어 마차가 속도를 줄이더니 마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엣킨스 님, 도착했습니다.”

“음, 나가지.”

제 할 말만 하고 내리는 엣킨스를 따라서 마차 밖으로 나오니, 석조 성채가 우리를 반겼다.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는 않아서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니 어떤 성의 안쪽에 있는 내성 입구인 모양이었다.

얼핏 봐도 성벽의 높이나 두께가 보통이 아닌 것을 보니, 본격적으로 수성전을 위해 지어진 성이었다.

“구경은 일을 마치고 해도 되니 따라오게. 시간이 지체되어 백작님께서 기다리실 것 같군.”

“네, 알겠습니다.”

솔직히 이쯤 되면 꽤나 아니꼽기는 했지만, 여기는 저놈의 안마당이고 우리는 적지(敵地)에 들어선 꼴이니 참는 수밖에.

리버티 호에서 나름 선을 지키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지금은 노골적으로 우리를 깔아보는 느낌이다.

우리의 기분이야 어떻건 이제 엣킨스를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내성의 벽을 지나고, 중앙의 큰 건물에 들어서자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엣킨스 님.”

“집사장이군. 혹시 백작님께서 손님들에 대해 지시를 내리셨소?”

“네. 손님‘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엣킨스 님도 함께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셨구요.”

“손님들? 흐음…. 그럼 손님들의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소? 나는 복장을 좀 갖춰야겠군.”

“알겠습니다. 리안 선장님 일행이시죠? 집사장 오르하임이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

집사장이라는 오르하임을 따라 들어간 곳은 침대가 네 개나 있는 꽤나 널찍한 방이었다.

방안의 장식이나 뭐 그런 것들을 보면, 귀족 손님을 위한 곳은 아니고 귀족들의 수행원들을 위한 방으로 보였다.

귀족을 위한 방에 1인용 침대가 네 개나 있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잠시 쉬고 계시면 식사 준비가 끝나는 대로 하인들이 부르러 올 겁니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정중하게 이야기를 마친 집사장이 떠나자, 네이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우…. 수, 숨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

“그나저나 백작이 식사에 초대를 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심각한 표정의 발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귀족, 그것도 백작쯤 되는 고위 귀족이 일개 평민 선장을 불러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일단 나도 처음 듣는 경우다.

일반적으로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호의를 표현하는 것이기는 한데, 상대가 백작쯤 되니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발드 항해사도 들어본 적 없어?”

“귀족 중에 희귀한 이야기를 수집하거나 하는 기벽(奇癖)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보통 귀족도 아니고 백작 아닙니까? 심지어 발레리아 백작이라면 이 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귀족인데….”

그때 우리의 심각한 표정을 뚱하게 바라보던 네이선이 침대에 몸을 날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합니까? 설마 밥 먹자고 불러서 죽이지는 않겠지. 끽해봐야 지금처럼 숨 막히는 정도 아니겠어요? 그러면 밥 먹기는 좀 힘들지 몰라도 한 끼 안 먹는다고 별일 있는 것은 아니니 뭐. 선장님도 이등항해사님도 그냥 좀 쉬어요.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도망갈 체력은 있어야지. 아오, 허리야.”

하긴, 우리가 여기에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네이선 말대로 체력이나 보충하는 쪽이 남는 장사 같다.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은 나와 발드는 각자 침대를 하나씩 정하고 드러누웠다.

애써 차려입은 옷이 조금 더 구겨지겠지만, 이미 마차에서 구겨질 만큼 구겨진 터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

침대에 눕고 열을 세기도 전에 코를 골기 시작하는 네이선의 무신경함에 혀를 내두르며 잠시 쉬다 보니 어느새 나도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똑똑똑.

“손님들,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노크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 살펴보니, 발드는 이미 몸을 일으킨 상태였고 네이선은 벌써 허리춤의 단도에 손을 갖다 댄 채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나는 손짓으로 네이선을 물러나게 하고 목소리를 살짝 가다듬고 대답했다.

“크흠, 지금 나갑니다.”

두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은 뒤 문을 열고 나가자,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에는 여기저기에 촛불이 붙어 있어서 몰랐는데, 이미 완전히 어둠이 내린 후라 그는 작은 등불을 들고 있었다.

남자를 따라 식당으로 이동하자, 미리 대기하던 하녀들이 우리의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한 20인용 정도 되어 보이는 테이블은 이미 그 크기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는 맞은편에 앉은 발드와도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옆에 앉은 네이선 정도는 가깝기는 한데, 그래도 우리 사이에 한 명이 충분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도대체 뭘 얼마나 차려서 먹기에 테이블이 이렇게 크지?”

네이선이 나름대로 조용히 말한 모양인데, 근처에 있던 하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별로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창피하니까 닥쳐, 네이선.”

잠시 어색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엣킨스와 집사장,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발소리는 그보다 많은 것 같았는데 바로 앞에서 끊긴 것을 보면 호종하던 인원 대부분은 식당에 못 들어오고 대기하는 모양이다.

중년의 남자가 발레리아 백작이라는 것 정도는 모두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등장과 함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이거 손님을 초대해놓고 기다리게 했군. 반갑네, 내가 조반니 발레리아, 발레리아 백작일세.”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이동한 백작이 가볍게 자신을 소개하더니 정확하게 나를 보고 물었다.

“그쪽이 리안 선장이군.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네. 혹시 불편한 점은 없었는가?”

“아닙니다. 백작님의 배려 덕분에 편안하게 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 모두 그만 앉지.”

백작의 말이 끝나고 우리가 자리에 앉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식의 면면은 화려했다.

향신료와 조미료를 마음껏 쓴 여러 가지 고기 요리가 접시에 그득히 담겼고, 빵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그걸 먹을 만한 지식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겠지.

일단 테이블의 폭이 넓은 만큼 테이블의 중앙에 자리한 메인 요리들의 위치는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먹고 손을 뻗으면 닿기는 하는데, 그렇게 하면 뭐랄까… 되게 품위 없는(?) 자세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눈치를 살살 보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백작이 옆에 선 하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자 하녀가 작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갖다주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접시에 담긴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던 백작은 잠깐 우리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에게 식사 예절을 원하는 것은 아니네. 편하게 식사들 하지. 다만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것만큼은 피해줬으면 하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진 백작이 식사를 시작하자, 어색한 가운데도 식사가 시작되었다.

먹고 싶은 것을 일일이 하녀에게 부탁하는 것은 귀찮았지만 맛은 훌륭했다.

이 세상에서 먹어본 음식 중,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요리였다.

눈이 반쯤 돌아간 네이선이 마지막으로 식기를 놓자, 그때까지 백작의 옆에서 시립하고 있던 집사장이 백작에게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는 하녀들을 지휘해 음식을 물리기 시작했다.

네이선이 분투했음에도 먹은 양은 전체의 절반이 될까 싶을 정도였지만, 설마 저걸 다 버리지는 않을 거다.

보통 이런 경우 지구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랫사람들이 남은 음식을 먹게 마련이지.

“표정들을 보아하니 식사는 괜찮았던 것 같군. 먼저 엣킨스, 수고했네. 자네라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줄 알았어.”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먼저 엣킨스를 치하한 백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선장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는 하군. 흥미로울 정도야. 스코타 후작이 왜 관심을 가지는지 알겠어.”

“백작님, 그게… 약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스코타 후작가에 대한 것이라면 자네보다는 내가 더 잘 알 거야. 그러니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네.”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왜 사람들이 믿지를 않는 거야?

내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약간 숙이자 백작이 말을 이었다.

“뭐, 사실 스코타 후작과 자네가 무슨 관계인지는 상관없지.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거든. 자네, 혹시 ‘인어’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나?”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컥하고 멎는 기분이 들었지만, 필사적으로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

지금 당황하면 최선의 결과가 인어의 멸종, 최악의 결과는 나의 죽음이다.

“인어 말입니까? 뱃사람치고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역시 알고 있나? 그 인어 이야기가 궁금하네. 최근에 재밌는 소문이 많이 들리거든.”

그 ‘재밌는 소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딱히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백작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야 거짓말도 적당히 할 것 아냐?

“저도 특별한 이야기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한밤중에 암초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가슴을 드러낸 미녀라던가, 아름다운 미모와 노래로 선원들을 미혹시켜 바다에 빠뜨리는 이야기, 바다 깊은 곳에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사는 인어에 대한 전설, 이런 것들입니다만.”

일단 나는 모르쇠로 나가기로 했다.

이 정도 이야기들이야 배 좀 타본, 아니, 배를 안 탄 사람들도 아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백작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어떻게 생겼던가?”

“미녀라고 합니다. 대부분 그렇게 말하지요. 세상에서 처음 보는 미녀라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본 자가 있다?”

날카로운 음성으로 질문하는 백작에게 나는 약간 움찔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뱃놈들의 허풍이 워낙 심해서 말입니다. 그렇지, 발드 항해사?”

“뱃놈들이 하는 얼토당토않은 말이 한두 가지겠습니까? 저는 인어도 그런 이야기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인어나 유령선이나 다 거기서 거기죠.”

나는 눈치 빠른 발드의 지원사격을 받은 뒤 백작에게 확실하게 쐐기를 꽂았다.

“백작님께서도 짐작하셨겠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 거짓인 이유는 명백합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그런 것을 보면 무조건 그 인어라는 것을 포획하거나 하다못해 비늘이라도 떼어 오지 않겠습니까?”

“흠…. 그런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우리가 인어를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나는 혹시라도 그때 깨어있던 선원이 있어서 어딘가에서 말을 흘린 것은 아닌가 걱정했거든.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백작은 더 이상 내게 캐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리면서 은근하게 물었다.

“이 녀석을 판 사람이 자네라지?”

오, 신이시여. 왜 저게 저기서 나와?

나는 화려한 상자 안에 담긴 커다란 진주를 보며 터져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아, 아, 이걸 비싸게 파려고 장난을 조금 친 것을 탓하려는 것이 아닐세. 리바체 자작은 자네가 귀족을 사칭했다고 했지만, 알아보니 딱히 사칭을 한 것은 아니더군. 귀족으로 착각하게 한 것은 조금 괘씸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로 자네를 벌할 생각은 없어.”

제기랄, 역시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군.

그나저나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면 역시 이놈, 뭔가 알고 있는 거다.

뜬금없이 인어에 대해서 물어본 것도 그렇고 말이지.

“이미 다 알고 계신데도 용서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진주라면 저도 워낙 우연히 얻은 것이라… 혹시 장물입니까?”

“하하하, 장물이라. 장물이면 내가 굳이 자네를 불렀을까? 그냥 체포하면 그만인 것을. 그렇지 않기에 문제지.”

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럴듯한 핑계야 이미 준비했고, 떡밥도 던졌으니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정말 의문이다.

그놈의 진주가 뭐라고 다들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거야?

그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백작이 말을 시작했다.

“인어의 눈물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이 무려 120여 년 전일세. 그러니까 자네가 판 그 인어의 눈물이 바로 120년 만에 나타난 출처 미상의 인어의 눈물인 셈이지. 물론 장물일 수도 있지만, 인어의 눈물 정도 되는 고급 보석이 도난을 당하면 소문이 퍼지지 않을 수 없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무려 100년이 넘도록 얻는 방법을 알 수 없었던 인어의 눈물을, 자네는 어디서 구했을까?”

“저도 어디까지나 우연히….”

사람의 심리는 이상해서 쉽게 얻은 것은 가볍게 여기곤 한다.

그러니까 조금 더 뜸을 들여야지.

“우연, 그래 우연이겠지. 그래서 난 그 우연을 알고 싶은 걸세. 내가 다방면으로 알아봤지. 진주는 진주조개에서만 나오고, 인어의 눈물이 될 정도의 크기까지 키울 수 있는 진주조개는 없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발견한 조개 중에 인어의 눈물을 품을 만한 조개는 없지. 그래서 인어의 눈물이라는 허황된 이름이 붙은 것이고 말이야. 그나마 믿을 만한 가설이,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깊은 바다에 거대한 진주조개가 있어 인어의 눈물을 만든다는 정도일까?”

“그, 그럴듯한 가설입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치자, 백작은 서서히 웃음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가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채취 방법이지. 애초에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진주조개를 누가, 어떻게 꺼내서 인어의 눈물을 채취했을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지난 120년 동안 인어의 눈물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지? 리안 선장,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가설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 혹시 인어를 만나 본 사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가설을 내세웠을 리가 없잖아.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인어의 존재를 세상에 밝히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로 나 역시 인어의 존재를 숨겨줄 수밖에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