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아홉의 진실에 하나의 거짓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진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제 적당히 때가 무르익은 것 같으니까 슬슬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거짓을 풀어야겠다.
괜히 백작을 더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가는 입을 열기도 전에 목부터 날아가게 생겼거든.
“사실은 얼마 전에 해적의 기습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해적이라, 흔한 일이지.”
“네, 외날의 라프나라고, 내해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녀석입니다만….”
“들은 적이 있네. 제법 유명하더군. 고작 중형 상선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텐데?”
“다행히 본격적으로 저희 배를 노린 것은 아니고 유희 삼아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꽤 위험했지요.”
그러자 백작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 말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다행히 저희 쪽에 그자를 상대할만한 사람이 있어 겨우 패퇴시키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해적선을 한 척 나포했는데….”
“잠깐, 그 라프나를 물리쳤다? 심지어 그 사람이 자네 배에 타고 있다고 했나? 호오….”
“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함께 왔습니다. 그 라프나를 물리친 녀석이죠. 저희 배에서 돌격대장을 맡은 네이선이라고 합니다.”
“돌격대장이라? 재밌는 직책이군.”
갑자기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네이선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애꿎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니, 농담이 심하군. 얼마 전에는 4척이나 되는 선단 하나를 다 털어버렸다는 자를 고작 운으로 이겼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실력이 대단한 모양인데, 한번 보고 싶… 지만 지금은 좀 그렇겠지?”
백작이 뒷말을 의문문으로 맺으며 집사장을 슬쩍 보았다.
그러자 집사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젓는 것이 보였다.
“흠, 흠, 계속해 보게.”
백작이 다시 시선을 내게 돌리며 재촉하자, 나는 네이선에게 잘했다고 눈을 한번 찡긋해준 뒤 말을 이었다.
“그때 라프나가 타던 배는 퇴각에 성공했지만, 갤리선 한 척은 저희 쪽에서 나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선장실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진주, 인어의 눈물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백작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믿기 힘들군. 외날의 라프나가 제법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결국 해적에 불과하네. 그런데 그자 본인도 아니고 일개 부하의 배에서 인어의 눈물이 발견되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백작님, 믿기 힘드신 것은 이해합니다. 저희도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고작 조금 큰 진주가 그렇게 비쌀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비록 선장실의 서랍 바닥에 있는 비밀 공간에서 발견되었지만, 백작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개 해적선에 있던 진주가 그렇게 비쌀 줄 알았겠습니까?”
“비밀 공간이라고?”
“네, 서랍의 바닥이 묘하게 두터운 느낌이 들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숴보았더니 이중 공간으로 되어있더군요. 풍문으로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비밀 공간이라…. 혹시 그 배에서 노획한 항해일지를 가지고 있나?”
나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해적 놈이 항해일지는 제대로 썼겠습니까? 입수는 했지만, 표기도 엉망이고 기록한 날짜도 중구난방이라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상황이 조금 난감했던지라….”
“무슨 일이 있었나?”
“사실 제가 아끼는 선원이 있습니다. 배를 타러 가서 실종된 제 형을 찾겠다고 저희에게 합류한 녀석이죠. 하필이면 그 녀석의 형이 나포한 갤리선의 노잡이 노예로 있더군요.”
“쯧, 하필이면….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겠군.”
“네, 발견 당시에는 숨이 붙어 있었습니다만, 곧 사망했습니다.”
내가 발드를 바라보자, 내 의도를 눈치 챈 발드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사실 그 배는 라프나의 직속 함대는 아니었습니다. 내해에서 작은 상선들이나 습격하던 별 볼 일 없는 놈들이었습니다만, 라프나의 눈에 띄어 그날 한탕에만 동원된 것이었죠. 물론 포로들을 노잡이 노예로 쓸 정도로 악질적이었으니 사악함 만으로만 따지면 라프나 못지않았습니다만….”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발드에게 눈길을 주던 백작이 내게 의문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발드 항해사는 당시에 노잡이 노예로 잡혀있었습니다. 지금 발이 불편한 것도 다 그때 생긴 부상이지요.”
“그렇습니다. 당시에 운 좋게 목숨은 건졌지만, 발이 이래서 생업이 막막하던 중에 리안 선장의 배려로 리버티 호에서 항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거니 받거니 소개를 마치자 옆에 있던 집사장이 백작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아까부터 계속 눈에 걸리는데, 의외로 집사장이 백작가의 실세인 모양이다.
단적인 예로 식탁에 함께 앉아있는 엣킨스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고, 백작은 대놓고 집사장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눈치를 본다는 것이 백작이 집사장의 허락을 구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저 어떠한 결정에 앞서 백작이 집사장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의지한다는 느낌에 가깝다.
하지만 그 정도만 되어도 백작이 내리는 대부분의 의사 결정은 집사장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엣킨스의 표정이 불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집사장의 귓속말을 다 들은 백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시간이 늦었군. 손님들은 이만 쉬도록 하고, 엣킨스 자네는 나와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집사장이 손님들 좀 방까지 안내해 드리게.”
갑자기?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그보다 쉬도록 하라니, 배로 다시 보내주는 것 아니었어?
얼떨떨한 기분으로 집사장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니, 언제 다가왔는지 하인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따라올 것을 재촉했다.
당황한 네이선이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급히 고갯짓으로 그의 입을 막은 뒤 묵묵히 하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가기 전에 백작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록 백작은 보는 척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성에 도착한 후 잠시 머물던 방에 되돌아와서도 우리는 한동안 서로 눈짓만 하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누가 어디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최대한 조심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하인 하나가 노크를 하고 들어오더니 방 안의 양초와 유등을 교체하고 떠났다.
“들었어?”
“음, 한 5m 정도. 그 정도까지는 들려. 그런데 상대가 발소리를 죽이면 어떨지 모르겠네.”
“그렇다고 문을 열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작은 소리로 말하는 수밖에.”
우리 중에 청각을 포함해서 감각이 가장 뛰어난 것은 아무래도 네이선이다.
그런데 그런 네이선이 발소리를 고작 5m밖에 듣지 못한다니, 기술적 한계를 감안하면 상당히 방음이 잘 되는 셈이다.
참고로 나는 하인이 문을 노크하기 직전까지 발소리는 개뿔, 하나도 못 들었다.
심지어 하인이 나갈 때는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문이 닫힌 후에는 희미한 발소리를 세 번쯤 들었으니 말 다했지 뭐.
“그나저나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요?”
“나도 그게 궁금해. 고작 이렇게 말랑말랑한 질문을 하려고 백작씩이나 되는 분이 우리 같은 뱃놈들과 식사를 함께했다고?”
“아무래도 본래 목적은 인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인 듯합니다만….”
나는 두 사람에게 눈치를 주면서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약간 톤을 높여서 말했다.
“인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있다면 이미 진즉에 발견되었겠지. 발드 항해사도 선원들이 하는 허풍을 믿는 것은 아니지?”
네이선은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 한 듯 표정에 의문부호만 띄우며 가만히 앉아있었지만, 발드는 눈치 빠르게 내 말을 받았다.
“하하, 물론 저도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믿지 않습니다. 차라리 집채만 한 오징어나 배보다 큰 고래… 가 더 신빙성이 있겠군요.”
너스레를 떨던 발드가 순간 멈칫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연기였다.
선원들이 떠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와 묶어서 털어버릴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생각해보니 우리는 인어만 본 것이 아니라 초거대 고래도 이미 보지 않았던가.
몸체가 50m쯤 되면 생긴 것을 떠나서 생물이 아니고 신화나 전설의 영역이다.
“그래, 유령선 같은 것이지. 한밤중에 졸다가 깨서 부유물 보고 여자로 착각하고, 술에 취해서 바다에 빠진 놈 보고 홀려서 빠졌다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 하긴, 빠진 놈은 홀린 게 맞긴 하네, 술에 홀렸지.”
“그런데 우리는 언제 가?”
겨우 상황을 파악하고 말을 꺼낸 네이선의 질문에 나는 다시 난감해졌다.
백작에게 초대를 받아서 성의 객실에서 하루를 자고 가는 것은 한 번도 상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글쎄? 자고 일어나면 아침 먹고 가라고 하지 않을까?”
가기 전에 백작이 잘 가라면서 인사를 해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내일 또 마차를 타야겠군요. 어서 자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또 그 긴 시간 마차를 탈 생각을 하니 벌써… 어휴.”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 눕는 발드를 시작으로 우리는 모두 자리에 누웠다.
사방팔방을 양초와 유등으로 밝혀놓은 잠자리가 영 어색하고 거북했지만, 우리 중에 누구도 감히 불을 끄자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
놀랍게도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솜으로 채워진 편안한 침대에서 자는데도 선잠을 잔 듯 피로가 거의 풀리지 않았다는 것과, 이런 나나 발드와는 달리 네이선은 아주 꿀잠을 잤는지 얼굴이 팽팽하다는 것 말고는 말이다.
“너는 그 상황에서 잠이 잘 오냐?”
“잘 자는 것도 기술이라고, 엣헴. 잘 수 있을 때 잘 자야 싸울 때 체력이 딸리지 않거든!”
“오냐. 그래, 너 잘났다.”
네이선과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집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밤에는 편안하셨습니까?”
“아, 네. 그, 식사도 좋았습니다.”
아침에 우리가 일어나자마자 하인과 하녀들이 아침 식사라면서 빵과 스프, 치즈 같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들고 들어오더라.
배에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가본 고급 식당에서도 본 적 없는 최상급 식단이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먹는 내내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우리가 언제 일어나겠다고 말하고 일어난 것도 아닌데 바로 식사가 나왔다는 말은, 계속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이랑 똑같잖아.
어제 연기를 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기를 바란다.
“백작님께서는 오늘 일정이 바쁘셔서 손님들을 배웅하기 어려우십니다. 다만 항구까지 타고 갈 마차는 준비해 두었으니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문밖에 길을 안내할 하인을 두고 가겠습니다.”
정중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축객령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들 챙길 짐 없지? 백작님께 폐를 끼치기 싫으니 어서 가자고.”
“네, 선장님.”
“다 챙겼습니다, 선장님.”
“그렇다는군요.”
내가 집사장에게 사회생활용 미소를 지으며 준비가 끝났다고 말하자, 집사장은 거의 바뀐 적이 없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표정 그대로 평온하게 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시지요.”
집사장을 따라 밖으로 나가니 우리가 타고 왔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보니 어제의 끔찍한 악몽이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마차로 6시간이나 걸린 거리를 걸어가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막 출발하려는데, 열 명쯤 되어 보이는 일단의 기병 무리가 내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밤새도록 달려온 모양인지 두꺼운 망토에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차의 문을 점검하는 척하며 슬쩍 돌아보니, 우리 때문에 밖에 나와 있던 집사장에게 기병들의 대표로 보이는 자가 뭔가를 보고하고 있었고, 집사장은 굳은 표정으로 보고를 듣고 있었다.
마지막에 기병 대표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갑자기 집사장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얼른 눈인사하고는 문을 닫았다.
“뭐야?”
“아무것도 아냐.”
“이제 끝난 거지?”
“아마도?”
“선장님, 저는 영….”
나도 그렇지만, 찜찜하다는 말을 생략한 발드뿐만이 아니라 네이선 역시 표정에 찜찜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사실 백작이 직접 호출했다고 해서 뭔가 큰일이 날 줄 알았다.
아니, 적어도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시한폭탄이 들어있다고 확신을 하고 상자를 열었는데, 폭탄은커녕 장난감 폭탄도 없는 꼴이다.
나는 두 사람에게 손짓으로 입을 막은 뒤 마부석을 가리켰다.
마차가 출발해서 소음이 심하기는 하지만 어제 방에서의 대화도 누군가가 들었을 것이라 의심되는 판이니 일단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맞겠지.
그래도 어제보다는 상황이 좋았다.
민감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우리끼리 잡담 정도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승차감이 편했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지만 말이지.
***
부두 근처까지 우리를 데려다준 마차와 기병 두 기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 리버티 호를 찾아서 돌아왔을 때, 리버티 호는 한참 부산한 상태였다.
우리가 현문을 통과할 때서야 아인델프가 헐레벌떡 뛰어나올 정도로 말이다.
“뭐야, 일등항해사. 무슨 일 있었어?”
“선장님, 잠시 이쪽으로.”
나를 보고 급하게 인사한 아인델프가 굳은 얼굴로 나를 한쪽 구석으로 이끌었다.
“뭔데 그래? 중요한 이야기면 내 방에서 이야기하지.”
“놀라지 마십시오. 선장님 우려대로 오늘 새벽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뭐?!”
“상세한 보고는 상황을 정리하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피해가 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만, 침입자들이 워낙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서 말입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짜증이 확 치솟았다.
내가 분명히 비슷한 뉘앙스로 주의하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침입자들이 배 안을 제집처럼 싸돌아다녔다니, 이게 말이야 망아지야?
“일등항해사, 침입자들이 선내를 돌아다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히 대비하라고 한 것 같은데.”
고생한 티가 역력한 사람에게 그러기는 싫지만, 아무래도 짜증이 묻어나는 어조로 내가 질책을 하자, 어느새 다가온 갑판장님이 내 어깨를 살짝 잡으면서 말했다.
“선장님, 저와 이야기하시죠. 지금 일등항해사가 할 일이 많습니다.”
“갑판장님!”
“제가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초췌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빛나는 갑판장님의 눈빛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살짝 들었다.
“휴… 좋아요. 제 방으로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