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Dummy
갑판을 가로지르는 사이에 눈에 들어오는 지난 밤 난리의 흔적이 가슴에 깊숙하게 박힌다.
부서진 난간, 닦는다고 닦은 모양이지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핏자국, 천으로 얼굴을 덮어놓은 시체 다섯 구….
“…이런 씨, 도대체가… 분명히 경계에 만전을 기하라고 했는데.”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선장님.”
“휴우….”
갑판장님의 조용한 제지에 묵묵히 선장실 앞까지 온 나는 더욱 기가 막혔다.
내가 당연하게 문 앞에서 열쇠를 꺼내고 있는데, 내 뒤에 있던 갑판장님이 문을 슬쩍 밀자 바로 열려버린 것이다.
선장실까지 털렸다고?
선장실과 금고의 잠금장치는 내가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다.
털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못해도 그렇게 쉽게 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잠금장치 부분을 살펴보니 약간의 긁힌 흔적(내가 만들었는지 새로 생겼는지 알 수 없는)을 제외하고는 깨끗한 것이, 진짜 전문가가 왔다 간 모양이다.
잠금장치를 보고 있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서 일단 방으로 들어 온 나는 외출용 코트를 아무렇게나 벗어서 집어던지고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털린 방치고는 꽤나 깨끗하다.
신사적인 도둑놈이 왔다 가셨나?
아인델프나 갑판장님이 도둑놈이 왔다 간 후에 치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애초에 두 사람은 선장실에 마음대로 출입할 권한도 없지만, 치웠다면 이렇게 난잡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도둑놈이 왔다 간 방 치고는 깨끗하다는 것이지, 객관적으로는 난장판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몇 가지 준비를 해 두기는 했지만, 애초에 내 방에 도둑이 들었는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지라 말이 곱게 나오지는 않았다.
“갑판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갑판장님이야 아직 몸이 불편하시다고 해도 아인델프에게는 충분히 주의를 준 것 같은데.”
갑판장님은 내 오른편의 의자에 천천히 앉으면서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등항해사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현문 당직 인원도 늘리고 선창과 금고에 경비 인원도 두 명씩 더 배치하더군. 그것도 부족한지 선원 두 명씩 두 조로 갑판 전체를 돌게 했으니까, 충분한 경계였지.”
가만히 갑판장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의문이 들었다.
그 정도로 경계를 했는데도 이 난리가 났다고?
“솔직히 나조차도 어제 일등항해사가 삼등항해사와 교대로 선교를 지키는 것을 보며 네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으니, 일등항해사에게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
선교를 지켰다면 그나마 해도실은 지켰겠군.
선교와 해도실은 지척이라서 선교에 있는 사람들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해도실을 털 수가 없다.
“잠깐, 설마 갑판장님 방도 털린 건 아니죠?”
“으음, 불행 중 다행으로 네 예상이 맞았다. 굳이 항해사들의 방까지 털지는 않았더구나.”
“휴우…. 그럼 어디가 털린 건데요?”
“일단 은밀한 침입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선장실, 귀빈실, 금고, 회계실이다. 그 외에는 양동을 건 녀석들과의 교전에서 발생한 피해고.”
“잠깐! 귀빈실이요?! 설마 데보라 양이?”
원래 닥터와 함께 나가기로 했던 데보라 양은 네이선을 내가 데리고 가는 바람에 내가 배를 떠날 때까지 나가지 못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데보라 양은 어제 선의 양반, 우르타와 함께 밖에 있었으니. 아까 선원을 보내 찾게 했으니 금방 돌아올 거다.”
“우르타요?”
“네가 나가고 나서 선의 양반이 내게 오더니 곤란해 하더군. 네이선과 함께 나가기로 했는데 네이선을 네가 데리고 갔다고 말이야. 호위를 붙여준다는 네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둘이서 밖에 나가는 것도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이왕이면 실력은 좀 부족해도 믿을만한 녀석인 우르타와 함께 보냈다.”
우르타가 실력이 좀 부족하기는 해도 건장한 젊은 남자가 일행에 포함된 것과 노인(?)과 젊은 여자만 있는 것은 사고 발생 확률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네이선이 없는 상황에서 갑판장님은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이선 이 자식, 분명히 경호원 노릇을 한다고 돈주머니를 들고 가놓고 입을 싹 닦았네?
“잘하셨네요. 금고가 털린 건 좀 크기는 한데, 그래도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까 보니까 시체가 나왔던데, 우리 애들 많이 죽었어요?”
“일단 금고에 침입 흔적은 있지만, 겉보기에는 크게 털린 것 같지는 않아. 회계사가 와서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선원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금고에 맡겨둔 자기 돈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사망자는….”
잠시 뜸을 들이던 갑판장님이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네 명이 죽었다. 금고를 지키던 녀석들인데, 어떻게 당한 건지 제대로 반항도 못 한 모양이다.”
리버티 호에 진짜 마(魔)가 낀 모양이다.
왜 하루가 멀다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거야?
경계 인원을 혼자 세우지 않는 이유는 서로를 감시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소리 없이 한 명을 제압하는 것보다 두 명을 제압하는 것이 몇 배나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원이 네 명쯤 되면, 소란 없이 네 명을 제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게 가능하려면 특별하게 훈련을 받고 합을 맞춘 팀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런 팀이 흔할 리가 없지.
이러면 용의자는 뻔하다.
설마 전에 트러블이 있었던 그 멍청한 자작인가 하는 이가 그런 정예 팀을 운용할 리 없으니.
…발레리아 백작, 아주 강수를 두셨네?
나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에른스트를 재촉했다.
일단 상황 파악이 먼저겠지.
“어떻게 된 거예요? 자세하게 좀 말해 봐요.”
“그러니까….”
놈들의 침입은 금고 당직자들의 근무 상태를 확인하던 삼등항해사 슬레어에게 발견되었다.
금고 근처에서 공기 중에 섞인 희미한 피 냄새를 맡은 슬레어는 그대로 선교로 돌아와 이 사실을 일등항해사 아인델프에게 보고했고, 아인델프는 그 즉시 경보를 울리고 선내에 남아있는 모든 인원을 소집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그런 상황이면 보고보다는 상황 확인부터 할 텐데 말이죠.”
“나도 그게 궁금해서 슬쩍 물어봤더니, 자기가 네 명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데 네 명이 있는 금고 앞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확인하다가 자기도 죽을 것 같아서 먼저 보고했다는군. 겁은 좀 많은 것 같지만 상황판단이 빨라.”
그리고 비상경보가 울리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침입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숫자는 대략 6~8명.
배에 남아있는 선원의 수가 21명이었으니, 침입자들은 발각된 시점에서 이미 승산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놈들, 제대로 뭉쳐있지도 않았다더군. 일등항해사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런데, 그놈들 실력이… 휴. 뒤늦게 나도 소란을 듣고 선교로 올라갔는데, 그놈들 하나하나가 선원 서너 명이 달라붙어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실력자들이었다.”
“…네?”
선원들의 싸움 실력은 개인적인 편차가 심한 편이고, 합공을 특별히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4명쯤 뭉쳐도 시너지 효과는커녕 서로 공격로를 방해하는 수준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게 여럿을 상대하기가 쉽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선원 네 명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실력자라면 우리 배에서 네이선 정도일까?
그놈은 네 명을 상대로 우위 정도가 아니고 손쉽게 목을 딸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하여간 이 정도면 이번 일의 주동자로 추측되는 백작이 작정하고 손을 썼다는 뜻이다.
아무리 왕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라고는 해도, 이런 특수 목적(?) 실력자들이 흔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막말로 백작의 휘하에 있는 기사라던가, 기사이거나, 기사 같은 경우에는 실력은 충분할지 몰라도 이런 비겁한 일을 해달라고 하면 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상대가 모여 있기라도 했으면 선교에서 일등항해사가 뭔가를 해 봤을지도 모르겠네만, 사방에 흩어져서 산발적으로 교전이 벌어지니 어쩌겠나? 그래도 그 와중에 내가 도착할 때까지는 선교를 지키다가, 내가 도착한 후에 선교를 맡기고 직접 전투에 뛰어들더군.”
아, 내가 깜빡깜빡하는데 아인델프도 칼질 실력은 만만치 않다.
네이선에게 비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지금은 다치지 않은 갑판장님과 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처음 봤을 때는 우유부단하고 어딘지 모르게 맹한 구석도 있었는데, 워낙 노력파라서 그런지 지금은 내가 꽤나 의지하는 핵심 인력이 되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던 모양이다.
믿었던 사람이 내 말을 무시하고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여준 줄 알고 말이다.
“확실히 일등항해사 잘못은 아닌 것 같네요. 그냥 상황이 좀…. 제가 네이선이라도 두고 갔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네이선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선의 양반과 함께 배를 떠나 있었을 테니 의미 없는 가정이지. 그보다 놈들의 실력은 둘째 치고 싸우면서도 워낙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는 통에 일등항해사가 직접 전투에 투입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전투가 이어졌지. 내가 놈들을 ‘양동’이라고 말한 이유네.”
“네? 수가 밀리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갑판장님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야. 놈들 중에 사망자가 한 명이네. 나머지는 몸을 빼서 도망쳤지. 이상하지 않나? 왜 교전을 지속했을까? 놈들은 누구를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파괴하려는 것도 아니었네. 그냥 싸웠을 뿐이지. 그런데 고작 싸움 좀 벌이자고 배에 침입하지는 않았을 테니, 다른 목적이 있는 거지.”
“아!”
“심지어 그 사망자 한 명, 다른 녀석들은 다 바다로 뛰어들어 탈출하고 혼자서 탈출이 어렵게 되자, 자살했네. 일등항해사가 생포하려고 한 모양이지만 거의 손도 못 썼다는군.”
“누가 했는지는 뻔하군요….”
그래, 너무 뻔하다.
문제는 그걸 증명할 방법도 없고, 상대를 몰아붙일 힘도 없다는 것이지.
사건의 전말을 대충 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흐트러진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역시나 항해일지가 사라져 있었다.
“…역시 항해일지를 가져갔네요.”
갑판장님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혹시 그간에 있었던 일을 다 적은 것은 아니지?”
“당연히 적었죠. 그러라고 쓰는 항해일지 아닙니까?”
“이런 제길.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장 출항 준비를….”
“에헤이, 갑판장님. 일단 진정하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당황하는 갑판장님을 진정시킨 후, 나는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항해일지를 잘 보이는데 뒀어요. 아주 ‘평범하게’ 쓰여진 항해일지 말이죠.”
“평범하게?”
“네, 진짜 항해일지는 잘 숨겨뒀죠. 항해일지를 노리는 누군가가 선장실에 침입한다면 항해일지를 찾을 때까지 수색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아무리 잘 숨겨도 항해일지가 발각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잘 보이는 곳에 진짜 같은 가짜 항해일지가 있다면? 굳이 진짜 항해일지를 찾지 않겠죠?”
내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갑판장님은 잠시 후 불안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잠깐만. 만약 그걸 훔쳐 간 놈이 항해일지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요?”
“자기가 원하는 내용이 없으니….”
“아니죠, 갑판장님. 보통 그런 경우라면, 항해일지가 가짜라고 생각하기보다 제가 항해일지에 자기가 아는 내용을 안 썼다고 생각하겠죠. 제가 그 항해일지는 가짜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말이죠.”
내 말이 끝나고 잠시 생각하던 갑판장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갑판장님을 안심시킨 나는 내 재산 목록 1호인 인어에게 얻은 와인과 위스키의 안부를 물었다.
“그보다 내 새끼들은요? 멀쩡해요?”
“그래, 왜 안 물어보나 했다.”
“그게 얼마나 비싼지는 갑판장님도 아시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그것의 가치보다는 그게 놈들에게 털리지 않았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주라면 몰라도 수백 년 전의 와인과 위스키, 그것도 바닷속에서 따개비가 붙었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들이 발각되면 그렇지 않아도 인어와 나의 관계를 의심하는 백작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네 말대로 내 주류 상자 안에 곱게 모셔놓았다. 방금 전에도 잘 있는 걸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그럼 일단 이번 습격은 죽은 선원들 말고는 큰 손해는 없네요. 그런데 한밤중에 기습당했다면서 왜 지금까지 수습 중인 거죠?”
“일등항해사가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잖냐. 놈들이 물러간 후에도 날이 밝을 때까지 내부 수습보다는 외부 경계에 총력을 쏟더구나. 뭐, 삼등항해사가 보고한 게 있으니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금고 쪽을 확인하다가 사망자들은 좀 일찍 발견한 모양이다만…. 덕분에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가 싸운 놈들이 ‘양동작전’에 동원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
“그럼 진짜 선장실과 금고 따위를 턴 녀석들은요? 꼬리도 못 잡으신 건가요?”
내 말에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짓던 갑판장님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크흠, 내가 무슨 도둑질 전문가도 아니고, 이미 사라진 녀석을 어떻게 잡겠냐. 녀석인지 녀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력 하나는 끝내주더구나. 선장실도 그렇지만 금고도 아주 깔끔하게 열었어. 그런데 항해일지 말고는 없어진 게 없는 거냐? 잘 보이는데 두었다는 항해일지만 찾았다고 보기에는 방이 너무 난장판인데.”
“원래 목표는 제 항해일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어차피 그건 없거든요. 제가 없다고는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봤을 겁니다.”
“쯧, 정리하는 데 시간 좀 걸리겠구나. 나는 이만 나가보마. 선의 양반 돌아오면 애들 상처 좀 봐달라고 해야 해서. 다행히 싸우다가 죽은 놈은 없는데, 놈들 실력이 실력인 만큼 여기저기에 칼 맞은 놈이 적지 않아.”
***
돌아온 닥터 롱베르가 깜짝 놀라며 데보라 양과 함께 선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고, 함께 돌아온 우르타가 덩달아 호들갑을 떨며 배 위를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회계사 게론드는 엉망이 되어버린 금고에서 다시 동전을 분리하며 연신 욕을 내뱉었다.
그래도 그렇게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었고,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무렵 최종 보고를 위해 아인델프가 선장실에 들어왔다
“나 없는 동안 고생했어, 일등항해사.”
“죄송할 따름입니다, 선장님.”
고개를 푹 숙이는 아인델프의 어깨를 툭툭 털어준 나는 진심을 담아 말해주었다.
“죄송하긴. 갑판장님께 이야기는 다 들었어.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너보다 잘했을 것이라고 확신은 못하겠던데 뭘. 이게 최종 피해 보고서야?”
“네, 그리고….”
“항구관리소에는 연락했고?”
“네? 그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인델프가 바보도 아니고 이 난리가 백작의 사주일 확률이 높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러니 백작의 심복(?) 중 한 명인 항구관리관에게 이 이야기가 들어가도록 해야 하는지 애매한 것이리라.
“어제 그 난리를 쳤는데 우리가 입 다물고 있는다고 모르겠어? 오히려 이야기를 안 하면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하는 게 더 좋아. 그리고 피해목록에 내 항해일지를 반드시 넣도록 해.”
내 말에 깜짝 놀란 아인델프가 반문했다.
“항해일지 말입니까? 설마 놈들이 항해일지를 노리고!”
“괜찮아, 어차피 놈들이 가져간 것은 더미(dummy)니까. 그러니까 걱정 말고 목록에 넣어. 그래야 놈들이 그 가짜 항해일지가 진짜인 줄 알고 우리에게 관심을 끄지.”
“아, 알겠습니다. 언제 그런 걸 다 준비하셨는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안심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는 아인델프를 괜히 한 대 때린 나는 기지개를 켜며 첨언했다.
“아, 가는 김에 우리 내일 출항하겠다고 전해. 장거리 뛰었으니까 좀 쉬려고 했는데 불안해서 쉴 수가 있나. 오늘 갑판장님이랑 나가서 선원이나 몇 명 모아야겠다. 이따 저녁이나 같이하지? 자네도 어제 고생했잖아.”
내 말에 아인델프가 피식 웃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배에 누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선장부터 일등항해사까지 죄다 밖에서 술을 마시면 누군가가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오늘까지만 고생해줘. 수당은 넉넉하게 챙겨줄게.”
잘 키운 아인델프가 열 에른스트 부럽지 않구나, 캬!
…….
열은 좀 심한가?
하여간 오늘따라 아인델프의 어깨가 듬직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