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마무리는 확실하게
힘이 필요하다.
해적에게 위협을 받고, 귀족들에게 치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렇게 살다가는 제명에 못 죽게 생겼다.
지금까지는 임기응변으로, 혹은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하나뿐인 목숨을 판돈으로 계속 도박하듯이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힘이라는 것이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지만, 일단….
“와, 진짜 이건 선 넘은 거 아니야? 항구에서 이 난리를 치다니, 도대체 어떻게 수습하려는 거지?!”
과장된 행동, 가만히 있지 못하는 두 발, 아닌 척하면서 끊임없이 나를 힐끔거리는 눈빛까지.
우르타마저도 네이선의 못 봐줄 연기 실력에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네이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헛소리 말고 내놔.”
“으응? 뭐, 뭘?!”
“까불지 말고.”
“그래! 어서 내 돈 돌려줘!”
착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우르타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그게 왜 네 돈인데?
“그, 그래도 얼마 되지도 않는데 줬다가 뺏는 건….”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품에 손을 넣으면서도 조그맣게 반항하는 것을 보니 평소에 내가 급여를 너무 적게 줬나… 하는 반성은 개뿔, 돈도 많은 놈이 왜 저러는 거야?
심지어 빼앗길 것을 알고 이미 품에 들고 나왔으면서 말이지.
결국 모습을 드러낸 돈주머니를 내가 낚아채자, 네이선은 나라 잃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주머니를 배웅했다.
그리고 우르타는, 꼬리가 있었다면 이미 풍차처럼 돌리고 있었을 것 같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나는 할 수 없이 주머니를 열어 은화 두 개를 꺼내 우르타에게 내밀었다.
“으음, 이건 아니야.”
“뭐가?”
“네이선은 주머니째로 줬는데 왜 난 고작 두 개야?!”
네이선은 최소 4일짜리 호위 임무였고, 넌 고작 하루 했잖아.
하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았던 나는 내밀었던 손을 다시 회수하며 말했다.
“싫으면 말고.”
탁!
“싫기는 누가 싫다는 거야? 고마워, 리안!”
거의 빛의 속도로 내 손에 든 은화를 낚아챈 우르타는 희희낙락하며 재빨리 품에 은화를 집어넣었다.
은행 계좌에 수십만 로스를 쟁여놓고도 은화 몇 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두 사람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나는 코트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승 좀 그만 떨고 둘 다 일어나. 아까 내가 한 말 다 이해했지?”
“응!”
“알았어, 그냥 네 푸념에 동조만 하면 되는 거지?”
“어색하게 하지는 말고. 특히 네이선 너, 지금처럼 하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내가 뭘 어쨌다고….”
“가서 갑판장님이나 모셔와.”
***
어쩌다 보니 롱베르 씨와 데보라 양까지 합류하게 된 우리는 번화가에 있는 괜찮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달리 없어진 것은 없는데 항해일지만 없어졌다는 건가?”
“네. 금고에 금화 몇 개도 없어진 모양인데, 그거야 뭐….”
금화라면 몇 개만 없어져도 상당한 손실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상하거나 항해일지를 도둑맞은 것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다.
롱베르 씨와 데보라 양은 없어진 항해일지가 더미라는 것을 모르니까 표정이 아주 실감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우르타와 네이선은 데리고 올 필요도 없었는데.
“그렇다면 그놈들의 목표는 항해일지가 확실하군. 그런데 누가 항해일지를….”
“그건 모르지만, 해군도 아닌 상선의 항해일지를 왜 훔쳐 갔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덕분에 저만 귀찮게 된 거죠, 뭐.”
“항해일지에 중요한 내용이라도 있나?”
“중요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같은 항구나 해로를 지날 때는 과거의 기록이 참고가 될 때가 많으니까요. 계절별 해류라던가 바람의 미세한 방향 같은 것 말이죠.”
“그렇구만.”
대화에 집중하는 척하며 슬며시 주변을 살펴보는데, 의심스러운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나에게 걸릴 정도면 첩보원 같은 일은 때려치워야겠지.
“선장님, 혹시 의심 가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조용히 식사를 하던 데보라 양이 물었다.
지금 그걸 물어볼 타이밍은 아닌데….
내막을 알려주지 않으니까 이런 문제점이 있군.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도치 않게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네.
“글쎄요, 해군의 항해일지라면 군함의 작전 내용을 알 수 있으니 상당히 중요한 정보지만, 아시다시피 리버티 호는 상선이니까요. 저에게는 꽤 중요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무슨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상선의 선장이라던가, 그런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정보 아닐까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데보라 양의 말에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건 아닙니다. 다른 선장들도 어차피 항해일지는 쓸 테니 굳이 남의 항해일지를 탐낼 이유가 없죠. 물론 적대적 경쟁 상대라면 어느 정도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우리에게는 그런 경쟁 상대가 없습니다.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어제 같은 난리를 치면서까지 얻어야 할 정도는 아니구요.”
내 말에 데보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묘하게 잘못 전달되거나 누락된 정보를 가지고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걸 알 수 없으니 답답한 일이지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항구를 뜨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녀와의 대화를 대충 마무리 지은 나는 롱베르 씨에게 다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그보다 닥터, 환자들은 어때요?”
“아, 걱정할 것 없네. 크게 상한 사람은 없어. 세 사람은 당분간 과한 일은 못 하겠지만 나머지는 상처 부위만 조심하면 일을 해도 상관없을 정도네.”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 갑판장님. 그래서 말인데 선원을 조금 더 모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왓킨이라는 친구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서 선원으로 받아줄 수 있냐고 문의해 왔습니다.”
“왓킨? 그라면 믿을만하죠. 어떻게 아는 사람이래요?”
“전에 함께 배를 타다가 이곳에 정착한 친구에게 소개받은 사람이랍니다. 원래 내일 만나 볼 생각이었습니다만….”
“내일이면 조금 늦네요. 내일 뜨고 싶은데.”
“운항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니 굳이 선원을 새로 모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오전쯤에 보고 판단하시죠. 출항은 오후로 할 테니.”
살짝 한숨을 내쉰 갑판장님이 잠시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추가 인원을 더 모집할까요?”
“오늘 저녁에만 좀 구해보죠.”
“그럼 식사 후에 돌격대장과 함께 선술집을 돌도록 하겠습니다.”
갑판장님은 여전히 여기 론 항구에서 신규 선원을 모집하는 것에 반대하는 모양이다.
이해가 되는 것이, 아무래도 여기에서 선원을 모집하면 백작의 끄나풀이 딸려 들어올 공산이 크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있다면 조금 이상하려나?
이 사건의 배후에 백작이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백작을 의심하지 않는 척하더라도 백작은 우리가 알면서도 연기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백작이 제일 의심스러운데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잖아.
게다가 선원이 부족한데도 선원을 모집하지도 않고 부랴부랴 항구를 떠나기까지 하면 그 의심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될 거다.
하지만 끄나풀을 배에 태운다면?
갑판장님은 내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왜 일부러 위험을 감수하냐며 역정을 내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내해에서 계속 교역을 하려면 론 항구는 무시할 수 없는 항구다.
그렇다 보니 론 항구를 지배하는 발레리아 백작가와 관계가 틀어져서야 답이 안 나온다.
마음 같아서야 가만히 있는 우리를 상대로 도발하는 발레리아 백작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하고 싶지만,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일부러 배에 끄나풀을 태우려는 것이다.
어차피 선원들은 인어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니 간부들만 입을 조심하면 걸릴 일도 없다.
끄나풀도 적당히 의심이 풀리면 백작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배를 내릴 테니, 후유증도 없을 거다.
어차피 부족한 선원도 채우고, 백작의 의심도 풀고, 일석이조 아닌가?
***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항구관리관이 경비병들을 잔뜩 대동하고 리버티 호를 방문했다.
“리안 선장, 습격이 있었다고 들었소만.”
“네, 항구관리관님. 없어진 물건은 별로 없지만, 선원들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것참, 요즘 뒷골목 놈들이 부산스럽더니…. 일단 조사를 하도록 하겠소.”
갑자기 여기에서 뒷골목 이야기를 꺼낸다고?
대충 결론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되는구만.
이미 백작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항구관리관이었지만, 나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항구관리관의 조사에 협조했다.
경비병들이 조사한답시고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데, 자세히 보면 건성건성 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백작과 이번 일이 관련이 없더라도 건성이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적당히 시간을 끌던 항구관리관은 아깝다는 듯이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넘겨주었다.
“이게 뭡니까?”
“백작님께서, 아니, 선장이 백작님의 호출을 받고 간 사이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았소? 피해 규모가 작다고는 하지만 백작님을 모시는 입장에서 그냥 넘어가기 어려워서 주는 거요. 범인으로 의심되는 자들은 우리가 따로 잡아서 처벌하도록 하겠으니, 그걸로 피해를 수습하시오.”
“뭘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관리관님.”
개자식. 사람을 네 명이나 죽여 놓고 고작 푼돈 몇 푼을 던지는 건가?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출항 신청을 하셨더군?”
“네, 아무래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선원들 사기도 그렇고, 빨리 떠나려고 합니다.”
“선원이 부족해 보이는데 선원은 보충하셨소?”
“어제 몇 명을 고용하기로 했고, 오늘도 추천받은 사람들이 오기로 했습니다.”
“흐음, 그럼 그쪽은 좀 편의를 봐주도록 하지. 여기 출항 허가서요.”
제기랄, 신경 써주는 척하기는.
배알이 꼴리지만 어쩌겠나, 나는 힘없는 일개 상선 선장인데.
“…감사합니다, 항구관리관님.”
***
출항 준비에 한참인 와중에 배로 하나씩 다가오는 낯선 얼굴들이 있었다.
새로 고용한 선원들이다.
그리고 아마 백작의 끄나풀도 있을 것이다.
“갑판장님께 새로 모집한 선원들 계약서 가지고 선장실로 오시라고 해.”
적당히 출항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 한 나는 지나가는 선원에게 지시를 내리고 선장실로 향했다.
선장실에서 문을 열다 보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잠금장치가 망가진 것은 아니라서 그대로 사용 중이기는 하지만 한 번 털렸던 잠금장치를 계속 사용하자니 영 찝찝하다.
잠시 후 갑판장님이 서류 몇 장을 들고 선장실로 들어왔다.
“선장님, 여기 이번에 새로 고용한 선원 8명에 대한 계약서입니다. 그리고 수습 선원 두 명을 받을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수습 선원이요?”
얼마 전 전투의 포상으로 수습 선원들이 모두 일반 선원이 되면서 리버티 호에 수습 선원은 없는 상태였다.
안 그래도 애들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굳이 더 안 뽑고 있었는데….
“이제 수습 선원이 없다 보니 선원들 일부가 불편해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일반 선원이 된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당장 수습일 때 하던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여전히 그들이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겠구나.
담당하는 사람이 없어진다고 그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애초에 수습 선원이 없었다면 선원들끼리 알아서 했을 일들도, 이미 수습 선원의 일로 굳어진 이상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리고 수습 선원이 없다면 당연히 그 일은 얼마 전까지 수습 선원이었던 막내들의 일이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하지.
“그런데 수습 선원 알아볼 시간이 있었어요? 제가 수습은 아무렇게나 안 뽑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자 갑판장님이 머리를 몇 번 긁더니 서류뭉치에서 두 장을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왓킨의 친구라는 남자의 아들과 그 친구라고 합니다. 나이는 둘 다 18세로 어린 나이는 아니구요. 똘똘해 보이기는 했습니다.”
“흐음….”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실컷 목숨 걸고 싸워서 수습을 벗어났는데 정작 하는 일은 변함이 없다면 그건 좀 너무하잖아.
“갑판장님이 괜찮다면 그렇게 하시죠. 애들 다치지 않게 잘 관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다른 녀석들도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직접 한 번 보시겠습니까?”
“잠시만요.”
갑판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봤지만, 딱히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계약서라는 것이 뭐 대단한 정보가 적혀있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거짓으로 작성하기도 쉽고 확인할 방법도 없고 말이다.
“출항하고 나서 하나씩 보도록 하죠. 갑판장님은 어때요? 의심 가는 사람이 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갑판장님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녀석이 있었다면 애초에 제가 안 뽑지 않았겠습니까?”
아, 갑판장님 아직도 반대 중이시지?
***
뭐, 결론부터 말하면 나 역시 의심이 가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여덟 명 모두 선원답게 적당히 무식하고, 적당히 허세를 부렸으며, 젊은 선장을 무시하던 한 놈은 손목이 꺾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네이선의 신입 특별 훈련이 시작된 것은 적당히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런 일에 경험이 있는 오펜에게 은밀하게 감시를 지시했고, 보안에는 한층 신경을 써야 했다.
특히 신경 쓴 부분은 해도실이었다.
외부 침입이 까다로운 곳 중의 한 곳인 해도실은, 선원이라면 그래도 접근 자체는 쉬워진다.
물론 해도실은 일반 선원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작정하고 정보 털러 온 놈이 그것까지 신경 쓰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닷새의 항해가 끝나고, 한산한 작은 어항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드웰 씨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정말 힘들게 판을 깔아줬는데 그날 이후로 딸이랑 말 한마디라도 섞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