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제독, 선장, 그리고 항해사
다음 날까지 혼자서 고민을 하던 나는, 결국 아인델프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일등항해사,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
“네? 아, 감사합니다. 선장님. 그런데 갑자기 왜…?”
“에이, 알고 있잖아. 이제 배가 두 척이야. 선장 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말이지.”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눈치를 보자 아인델프는 역시나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선장이 되고 싶어?”
“…….”
“솔직하게 말해 줘. 원래 네가 선장이 되는 게 맞잖아.”
“…네. 하고 싶습니다, 선장.”
“으음.”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인델프를 보니 살짝 미안해졌다.
원래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건데 괜히 물어봐서 분위기만 어색해졌잖아.
“그래 뭐, 당연히….”
“그런데 이번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
“언젠가는 선장이 되고 싶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선장님이 금방 익숙하게 지휘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구요.”
“어, 어, 그, 그랬어?”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생각해보니 배를 탄 기간이 내가 길 수는 있어도, 다른 부분은 모두 아인델프가 나보다 나았다.
아카데미에서 항해사 교육을 제대로 받았고, 이클로나 호에 탑승하기 전에는 작은 경비함이지만 항해사로 3년 정도 일하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항해술을 날림으로 배운 것도 모자라 항해사 경력이라고는 반년도 채 안 되었던 나에 비하면 얼마나 훌륭한 경력인가?
그러니 내가 갑자기 선장이 되어서도 그럭저럭 지휘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저도 밤새도록 고민을 했습니다. 기대도 했지요. 선장님 말씀대로 제가 선장이 되는 것이 맞으니까요. 그런데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더군요.”
“아니 뭐, 나는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선장님 옆에 더 있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번 리버티 호의 선장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임명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오, 이 멋진 자식…! 조금 감동이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서운할 것 같은데.”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선장님의 행보를 보면 곧 더 좋은 기회가 올 것 같습니다. 솔직히 리버티 호의 선장 정도로는 제 성에 안 차서 말이죠, 하하하.”
“뭐? 하하, 알았어.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일등항해사.”
“물론입니다, 선ㅈ…. 아니군요.”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던 아인델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정중하게 군례를 올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독님.”
“어….”
순간적으로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린 것처럼 멍해졌다.
그 와중에 가슴이 간질간질한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다.
생각해보니 내 배는 고작 한 척이지만, 그래도 일단 선단을 이끌게 된 거다.
리안 제독.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이란 말인가.
물론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호칭은 아니다.
원래 제독이라 함은 함대를 이끄는 지휘관을 뜻하는 말이고, 꼭 군대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함대나 선단을 이끌어야 제독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법이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선장이라 부르건 선단장이라 부르건, 내부에서라도 나를 ‘제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이야?
자꾸 저절로 올라가는 광대를 부여잡고 겨우 정신을 수습한 나는 목을 가다듬고 화제를 돌렸다.
“으흠, 그나저나 배를 두 척이나 끌고 다니려면 아무래도 항해사가 한 명 정도는 더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야.”
“네? 한 명이요? 적어도 두 명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 오펜을 항해사로 올리려고.”
“오펜 말입니까?”
“응, 애초에 항해사를 시키려고 데리고 온 녀석이기도 하고. 우리랑 사선을 넘어온 사이 아니겠어?”
잠시 생각하던 아인델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똑똑한 아이이고 발드 항해사가 잘 가르쳐서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너무 어리다는 것이 조금 걸립니다만.”
“올해 몇 살이더라, 열여덟이었나?”
“열일곱일 겁니다.”
“진짜 어리기는 하네. 와, 그 나이에 나는 배도 안 탔었는데 말이야.”
“길거리의 아이들은 빨리 크기 마련이니까요.”
환경 자체가 워낙 적대적이니까 빨리 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겠지.
대견하면서도 좀 안쓰럽다.
“오펜을 삼등항해사로 올린다고 해도, 최소한 한두 명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이곳에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일단 최대한 구해보고, 정 안되면 조금 무리해서 델라 항구까지 가야지 뭐. 델라 항구까지 7일이면 가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오랜만에 선장님도 야간 당직을 서야겠군요.”
“그러게 말이다. 그러니 최대한 구하는 쪽으로 해 보자고.”
***
정말 싫다.
내가 왜 이런 정신 고문을 당해야 하는 거지?
나는 내 앞에 앉은 데보라 양의 시선을 피하며 애꿎은 물만 계속 들이켰다.
아, 물도 다 떨어졌네.
“선장님.”
“네, 데보라 양. 말씀하시죠.”
그래, 차라리 말을 해! 날 그만 괴롭히라구!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전 여기에서 내리겠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시는 교통편을 최대한 빨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튀어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그동안 다른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멜라나인 항구가 교역항은 아니라고 하지만, 육로를 이용하는 상단이 충분히 자주 드나들 정도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대규모 어업을 할 정도면 인구수가 어느 정도 된다는 뜻이니까 도시도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까지면 거리가 좀 멀기는 해도, 거기까지 가는 상단이나 귀부인 호위 전문 용병단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열심히 머릿속으로 돈이 얼마나 들지 계산하고 있는데 단호한 거절의 말이 들려오자 반응이 늦고 말았다.
설마 그 먼 거리를 혼자 가겠다고?
멜라나인 항구에서 제국 수도 엠페리움까지는 여자 혼자 갈 수 없는 정도의 거리가 아니고, 남녀노소를 떠나서 일반인이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애초에 이 세상은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모험이라고.
“데보라 양,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 제국 수도까지는 길잡이 없이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수백km는 되는 거리이고, 길을 따라간다면 천km가 훌쩍 넘을 겁니다.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괜찮아요, 가지 않을 거니까.”
“네? 방금 분명히 배에서 내리신다고….”
“그래요. 배에서 내려서 준비하고 있겠어요.”
불안해, 너무 불안하다.
우리 그냥 이 대화를 끝내고 평범하게 마무리하면 안 될까?
하지만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간인 법이지.
“그, 도대체 뭘…?”
“배를 탈 준비요. 뱃일을 배워야 한다면 배울 거고, 무력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배울게요. 어차피 이 항구로는 다시 오셔야 하는 거잖아요? 다음에 오실 때는 능력으로 입증할게요. 제가 배에서 짐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
그게 가능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정말 의지가 대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대로 하라고 할 수 없는 게 또 내 입장이었다.
롱베르 씨가 거의 딸처럼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인데 죽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휴우, 닥터와는 이야기가 된 겁니까?”
그러자 데보라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지며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스승님은 제 보호자가 아녜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휴우, 왕녀님은 현실과 타협이라도 할 줄 알지, 이 아가씨는 의욕만 가득하다.
막말로 여기까지 온 것도 닥터가 보물처럼 싸안고 온 거잖아.
처음부터 혼자 한 것도 없으면서 뭘 혼자 해?
낯선 곳에 홀로 남겨진 젊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열흘 안에 살해당하거나 창녀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좋아요, 그럼 데보라 양 마음대로 한다고 해 봅시다. 어디에 묵을 겁니까? 당장 식사를 할 돈은 있습니까? 무슨 일로 돈을 벌어서 생활을 하실 거죠? 뱃일은 누구에게 배울 겁니까? 무술이요? 하, 계획이라는 것이 있기는 합니까?”
“상관없어요! 여기도 어차피 빵집은 있을 테니 거기에서 일하면 되죠! 절 가르칠 사람은 어떻게든 구할 테니까…!”
도저히 참기 힘들어서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소리쳤다.
“그만! 어린아이도 아니고 왜 자꾸 우기는 겁니까? 닥터에게 인정을 받으니 세상이 쉬워 보입니까? 그 닥터조차 세상에 치여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지금 그 말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는 알 것 아닙니까?!”
소리가 조금 컸는지, 우리가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사이에 방문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살짝 열어놓은 문이 활짝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런, 데보라! 뭐 하는 거냐?”
“선장, 무슨 소리를 그렇게…?”
내 방은 여러 사람이 모이기엔 너무 좁았기 때문에 우리는 1층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고, 자초지종을 들은 일행들은 모두 침묵에 빠졌다.
롱베르 씨는 얼굴이 벌겋게 변해서 이마를 싸쥐고 있었고, 데보라 양은… 음, 우는 것 같다.
“오, 다들 모여 있… 응? 왜들 그러나?”
그때 여관의 문이 열리며 드웰이 들어오다가 당황하며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아, 좀 일찍 오시던가... 설명을 또 해야 하잖아.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드웰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데보라 양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그러면 꼭 내가 악역 같잖아요.
“쯧, 아가씨의 입장을 이해는 하지만, 리안 선장의 말이 맞소. 외지인이 정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게다가 젊은 여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아니, 여운 남기지 말아요.
이상한 말 하기만 해봐, 선주님이고 뭐고 진짜 가만 안 둔다.
“드웰 씨, 방법이 없겠습니까? 현지인인 드웰 씨라면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돈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뭐, 비올라의 옆집이 비었는데 내가 차마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그냥 보고만 있었으니 거기에서 지내면 될 거요. 하지만 뱃일이면 몰라도 검술 같은 것을 가르칠 사람은….”
“오, 고맙습니다, 드웰 씨.”
나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일을 점점 크게 만드는 사람을 급하게 제지했다.
“잠깐만요, 왜 이렇게 전개가 되는 건데요? 여자 혼자서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산다고! 그리고 선주님은 이 시간에 여기에 왜 있어요? 일해요 일! 우리 배 빨리 고쳐 놔!”
그러나 드웰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수월하게 대답했다.
“뭐, 안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럭저럭 살 수는 있을 게다. 그 마을에서 나와 뤼샨을 무시할 녀석은 없으니 말이야. 먹는 것이야 나와 비올라가 조금씩 도와주면 될 일이고. 아, 나는 의사 선생이 오늘 와서 진찰받으라고 해서 온 거다. 말 나온 김에 상처 좀 봐주시오, 요즘 가끔씩 조금 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최대한 폐가 되지 않도록, 저 아이가 살 돈은 제가 어떻게든 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상처는 이쪽으로 와보시죠. 한 번 봅시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내가 어이가 없어서 두 사람과 눈물범벅인 얼굴을 치켜든 데보라 양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는데, 네이선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럼 출항할 때까지 데보라 양에게 내가 검술을 가르칠까?”
“…오늘 내가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냐?”
***
결국 데보라 양은 드웰의 도움을 받아 멜라나인 항구 근처에 있는 비올라의 마을에서 살기로 했다.
원래라면 텃세를 부려야 할 마을 사람들은 드웰이 어떻게 소개를 했는지 오히려 환영한 모양이다.
마을에 제대로 된 약초사도 의사도 없었기에, 데보라가 의학과 약초학을 배웠다고 하니까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나 뭐라나.
이런 시골 마을에서도 대학물 먹은 사람은 환영받는 모양이다.
뭔가 좀 떨떠름하기는 한데, 내가 그렇다고 데보라 양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그냥 응원해 주기로 했다.
다시 배에 탄다고 억지만 안 부린다면야, 잘 적응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뭐.
“네이선은? 또 갔어?”
“어? 어! 아침 새벽부터 나가는 것 같던데?”
“얼씨구?”
네이선은 며칠째 데보라 양에게 검술을 가르치겠다고 열심이다.
순수한 목적은 아닌 것 같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그걸 빌미로 뭔가 할 만큼 어리석은 녀석은 아니기도 하고, 어차피 곧 출항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진짜 좋다!”
“그래? 난 지금도 좀 꿈같은데.”
“멋지잖아! 우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갑판장님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청소하고 그랬는데 히히힛.”
“그러네, 고작 1년쯤 지났나?”
나와 우르타는 조선소에서 개장 중인 오트라스 호와 리버티 호를 보고 있었다.
교역항이 아닌 멜라나인은 시장도 물건이 별거 없었고, 유흥시설도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며칠 놀고 나니 할 게 없어진 것이다.
그나마 생선을 이용한 요리들이 꽤 발달해 있고 맛이 좋다는 것 정도가 유일한 위안이다.
그렇게 우르타와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한 추레한 몰골의 남자가 우리에게 접근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서 근육을 살짝 긴장시키며 물었다.
조선소 인부 복장은 아닌데, 우리에게 볼일이 있다고?
“저, 혹시 저기 있는 두 배에 타시는 분들이십니까?”
나를 따라 일어섰던 우르타도 슬쩍 자세를 바꾸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접근한 사람, 일단 경계를 하는 것이 맞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묻기 전에 먼저 본인을 밝히는 게 순서 같은데요?”
“앗, 실례했습니다. 저는 바우어라고 합니다. 항해사죠.”
어? 항해사? 이게 웬 떡이람?
“항해사시라구요? 제가 선장 리안입니다. 반갑습니다, 바우어 항해사.”
“아? 그, 보통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선장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선장이라는 내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보인다.
나도 그렇고 우르타도 복장부터 일반 선원 복장은 아니라서 선원으로 착각할 일은 없다.
그래도 우리가 너무 젊으니까 선장과 그 일행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술장 우르타입니다!”
“네? 포술장이면, 아, 네….”
우르타를 보는 바우어 항해사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자리를 옮기자고 권했다.
항해사가 선장을, 아니, 배의 고위 관계자를 찾아온 이유야 뻔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조선소는 적당하지 않으니 말이다.
***
우리가 머물고 있는 여관의 1층 홀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맥주 한 잔씩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초면에, 그것도 면접 비슷한 분위기에 술을 놓고 앉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모르는 소리, 뱃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술을 한잔하면서 친해지는 게 정상이다.
“사실은 선주님이나 그 가족 분들이신 줄 알았습니다. 너무 젊으셔서….”
“선주이기도 해요, 반쪽짜리지만.”
“아, 그러시군요.”
바우어의 표정에 옅게 깔려있던 불신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능력이 필수인 선장에 비해서 선주는 아빠 돈이건, 도박으로 딴 돈이건, 사기를 친 돈이건, 돈만 있으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대충 내가 선주라는 이유로 선장 직을 꿰찬 철부지 정도로 보이려나?
설마 지금 잘못 온 것 같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거야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이렇게 찾아오신 이유는 아마도 고용 문제겠죠?”
“그게….”
왠지 찔끔하며 머뭇거리는 바우어에게 나는 시간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조선소까지 와서 저를 찾으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네, 맞습니다. 이번에 베니에르 호를 인수하셨으니 항해사가 필요하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베니에르? 아, 오트라스 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아, 이름이 바뀌었겠군요. 맞습니다, 지금 조선소에서 개장 중인 선박이요.”
“갑자기 배를 인수하게 된 터라 항해사가 필요하기는 한데…. 어쩌다가 이런 어항에 계셨던 겁니까?”
내 질문에 살짝 당황하며 우물쭈물하던 바우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베니에르, 아니, 오트라스 호의 이등항해사였습니다….”
“으아앗! 그렇다면 선주를 죽였다는!”
우르타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쳤고, 바우어는 50배쯤 더 크게 놀라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선주님을 죽이다니요! 그건 선장과 갑판장이 한 짓입니다! 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나는 일단 우르타의 정강이를 발로 차면서 억지로 끌어 앉혔다.
“넌 좀 조용해! 한마디만 더 하면 내쫓는다?”
“네, 선장….”
우르타가 움찔하며 구석에 찌그러지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바우어에게 사과했다.
그런데 내가 들었던 말이랑 좀 다르네?
선장과 갑판장이라….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제가 자세한 내용을 몰라서 그러는데, 그 난장판에서 어떻게 몸을 빼신 겁니까? 얼핏 듣기로는 아주 난리가 났다고 하던데요.”
“그게 그러니까….”
그때 홀의 문이 열리면서 아인델프가 들어왔다.
“아, 선장님! 마침 계셨군요. 제가 항해사를 구해왔습니다.”
아인델프가 한껏 밝은 목소리로 외쳤고, 아인델프의 뒤를 따라 들어온 장년의 남자가 우리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어?! 바우어?!”
그리고 소리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바우어 역시 얼굴색 확 변하면서 신음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이, 일등항해사님?”
뭐지? 이산가족 상봉이야?
같은 항구에 있으면서 서로 몰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