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애물단지 베르시아나 와인
어제의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소소한 보수를 마친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출항을 앞두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도 적당한 것이, 항해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늘 조심하게. 귀족 가문과 깊게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갑판 위에까지 올라와서 우리를 배웅하던 드웰 씨는 걱정이 되는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우리가 스코타 후작가의 호출을 받고 델라 항구로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계속 저 걱정이었다.
물론 드웰 씨의 걱정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지만….
“괜찮다니까요, 이만 돌아가세요. 이러다가 점심도 먹고 출발하게 생겼네.”
“그래, 알았네. 조심하게나.”
그렇게 겨우 드웰을 내려보내고 있는데, 한쪽에는 신파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언제나 하체 단련을 가장 먼저 하시는 것을 잊지 마시구요, 다치시지 않도록 늘 주의를….”
“그만 좀 하게. 데보라, 늘 조심하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드웰 씨에게 도움을 청하거라.”
“걱정 마세요, 교수님. 그리고 네이선 씨도 조심하시구요. 괜히 위험한 일에 먼저 나서지 마시고….”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데보라 양. 다음에 뵐 때는, 그러니까, 그게….”
오, 가운데 끼어있는 롱베르 씨도 불쌍하고, 연애 스킬은 전혀 없는 멍청이도 불쌍하고, 그걸 듣고 있는 데보라 양도 불쌍하다.
네이선 저거, 어쩐지 데보라 양에게 뭘 가르친다며 열심히 다니더라니.
그런데 네이선보다 더 어이없는 것이 데보라 양의 반응이다.
저 멍청이의 어디가 좋은 거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오트라스 출항 준비! 현문 걷어!”
내 말이 끝나자 현문을 지키던 선원들이 내 말을 받아 소리쳤다.
“현문 폐쇄합니다, 외부인들은 신속하게 내려주십시오!”
현문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드웰이 급하게 널빤지를 건너고, 데보라 양 역시 네이선의 부축을 받으며 현문을 건넜다.
약간 뒤쪽에서 당황스러워하는 롱베르 씨가 안쓰럽다.
딸이나 제자나 키워놓으면 제 짝 찾아 떠나는 것이 세상 이치랍니다, 아저씨.
***
항해는 순조로웠다.
해적으로 추정되는 선박이 접근하기도 했는데, 한쪽에만 9개나 뚫려있는 오트라스의 포구를 본 것인지, 리버티까지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것인지 적대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리버티 호의 포구를 막지 않은 것이 신의 한 수 같다.
물론 안쪽은 창고로 개장해서 리버티 호에 대포는 하나도 없지만, 포구를 열지 않는 이상 안에 대포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말이다.
외관만 보면 내가 해적이라도 해적선 한두 척으로는 감히 엉겨 볼 엄두도 안 날 것 같다.
“어? 선장님, 그 망원경은?”
“아, 이번에 새로 구했어. 괜찮아 보여?”
“네, 정말 좋아 보이는데요? 이런 물건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저도 하나 구했을 텐데.”
부럽다는 듯 내 새 망원경을 보며 아쉬워하는 아인델프에게 살짝 미안해졌다.
미안한데, 넌 못 구해.
이 세상에 하나뿐인 녀석이거든.
유리 가공 기술이 있고 유리병도 자주 쓰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지구의 기억에 있는 유리에 비하면 이 세상의 유리는 여러 부분에서 부족했다.
일단 생산량도 적은 편이고, 내구성도 굉장히 낮았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투명도였는데, 망원경 같은 고급 항해 용품에 쓰이는 유리조차 완벽하게 투명하지 않았다.
물론 기술적인 문제로 배율도 한참 떨어진다.
그래도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멀리에 있는 물체를 볼 수 있지만, 세세한 부분을 보는 것은 망원경을 써도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내 새끼발가락에 심대한 고통을 선사한 이 녀석은 수평선에 걸린 배의 국적기까지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고성능이다.
더 멀리 있는 적을 상대보다 먼저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이점인지, 전투를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
그래서 이 녀석은 공용으로 쓸까 생각 중이다.
선원들 아무나 손을 댈 수 있는 견시대용은 조금 그렇고, 선교 담당자용으로 말이다.
“어때, 한번 볼래?”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인델프에게 한참 망원경을 자랑하고 있는데, 어색한 발소리와 함께 약간 어눌한 음성이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선장님, 일등항해사님.”
어딘가 주눅 든 듯한 표정, 조심스러운 말투, 어색한 자세까지.
나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밝게 인사했다.
“어서 와, 이등항해사. 무슨 일이야?”
“그게, 당직 교대 시간입니다, 선장님.”
“그래?”
아인델프에게 눈길을 주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선교를 잘 부탁해, 이등항해사. 일등항해사는 잠깐 내 방에서 이야기 좀 하지.”
“네, 선장님. 먼저 가 계시면 인수인계 후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잠시 후, 선장실에서 아인델프와 마주 앉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바우어 항해사는 어때? 나도 눈여겨보고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많이 부딪히는 사람은 자네잖아.”
“흠, 글쎄요.”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단 항해술은 뛰어납니다. 이쪽 해역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능숙하죠. 겁이 좀 많은 편이고 소심해서 장악력은 많이 부족합니다만, 기술적인 부분만 봤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솔직히 저보다 더 나은 부분도 있구요.”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 아인델프의 말을 들으니 입맛이 썼다.
항해사가 항해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냐 싶겠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다.
항해사는 이견의 여지없는 선박의 지휘관 중의 한 명이다.
최소한의 지휘력도 없다면 평시에는 몰라도 전투나 위기의 상황에서 선원들이 명령에 불복하거나 지휘 붕괴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바우어 같은 경우에는 많이 아쉬운 타입이다.
“역시 기항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 나을까?”
“바우어 항해사는 어쩌시려고요?”
“미안하기는 하지만 내리라고 해야지. 불쌍하다고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계속 안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흐음….”
채용 확정 전에 바우어의 경력을 확인하면서 이미 느낀 부분이기는 했다.
총 경력은 5년 남짓으로 짧은 편은 아닌데, 최장기간 근무한 기록이 고작 14개월이다.
심지어 처음 배를 탄 시기가 거의 10년 전이라고 했으니 절반쯤은 무직 상태로 지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것도 숨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성실함과 정직함은 가산점을 줄 만했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니까.
“선장님, 조금 더 두고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응? 일등항해사는 원래 채용 반대 입장이었잖아?”
“그렇기는 합니다만, 생각해보니 더 좋은 항해사를 채용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바우어 항해사에게 알리지 않고 채용을 진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그렇지, 인터넷에 조용히 모집공고를 올릴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니까 말이야.
대놓고 항구에서 항해사를 고용하는데 그걸 바우어가 모르기도 힘든 일이다.
그러니까 일단 바우어를 해고하고 새 항해사를 찾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바우어 항해사도 그렇지만, 오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직 삼등항해사라고는 하지만 오펜의 지휘를 달갑게 받을만한 선원은 몇 안 될 겁니다.”
오펜은 나이에 비해 덩치도 큰 편이고 얼굴도 조금 노안이지만, 그렇다고 앳된 티가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새로 모집한 선원들은 몰라도 기존에 있던 선원들은 오펜의 나이를 대충 알고 있기도 하니, 항해사로서 위엄을 찾기는 힘들었다.
성격 자체도 누구에게 모질게 대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라서 항해사가 된 지금도 선원들에게 서글서글하게 대하는 편이니, 선원들도 오펜에게는 과하게 편히 대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까 문제잖아. 당장 나랑 부선장님, 너까지 지휘가 불가능한 상태면 배를 지휘할 사람이 없어.”
“그런데 저, 아시다시피 항해사들은 선원들보다 눈이 더 높습니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던 아인델프가 눈을 질끈 감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나를 공격했다.
“경력 좀 되는 선원들도 저와 갑판장, 그리고 선장님을 보면 도망갈 판인데, 항해사들은 더 심하지 않겠습니까?”
…쩝, 할 말 없게 만드네.
“오트라스 호가 선장님께 인수되기 전에 바우어 항해사가 이 배를 탔던 이유도 알만합니다. 젊고 아는 것은 없는 선주에 도박중독 선장, 비열하고 권위적인 일등항해사와 기회주의자 갑판장까지, 이 난장판 구성을 바우어 항해사라고 전혀 몰랐겠습니까? 최소한 한두 가지는 알았을 겁니다. 그래도 고용해줄 만한 배가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탔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겉으로 보기에 조건은 거의 비슷한 우리 배에 태울 수 있는 항해사 수준이 딱 그 정도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괜히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항해사를 들이는 것보다 단점이 명확하게 보이는 바우어 항해사 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듣고 보니 또 그렇기는 하네. 그럼 일단 지켜보자고. 아직 특별히 실수한 것도 없으니.”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아인델프와 잡담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일등항해사, 가서 문 좀 열어줘.”
아인델프가 문을 열어주자, 들어온 사람은 부선장님이었다.
문을 열어준 아인델프를 보고 살짝 당황한 부선장님이 나를 보고 물었다.
“지금 곤란하시면 다음에 올까요, 선장님?”
“아니요, 잡담하던 중이었어요. 무슨 일이세요?”
“아, 그럼 일등항해사는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나?”
“알겠습니다. 선장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 그래, 가서 쉬어.”
아인델프가 떠나고 위스키를 한 잔 손에 든 부선장님이 방금 전까지 아인델프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 애물단지들은 언제 가지고 갈 거냐? 계속 내가 가지고 있기에는 좀 애매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선장실 다음에는 부선장실을 털고 싶지 않겠냐? 그걸 못 알아보더라도 깨질 수도 있고 말이야.”
“이번에 기항하면 개인 금고 같은 것을 알아볼까 해요.”
“그것도 소문이 안 나기는 어려울 텐데.”
은행의 큰 지점에서는 개인 금고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문제라면 이용료가 어마어마하고, 보안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일개 상선 선장이 개인 금고에 술을 맡겼다는 소문이 돌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냥 선창 어디 구석에 처박아 버릴까요?”
“아서라, 괜히 그랬다가 너처럼 눈치 빠른 놈이 귀신같이 찾아서 마셔버릴 거다.”
“끄응, 언제적 이야기를.”
부선장님이 고드실카 호의 갑판장일 때 누군가 교묘하게 숨겨둔 술을 찾아서 네이선과 신나게 마신 적이 있는데, 그게 발각되어서 부선장님께 죽도록 맞은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부선장님은 자기 방에만 술을 두신다.
“그런데 그 백작 놈의 첩자들은 다 내린 걸까요?”
“전에 말했다시피 론에서 고용한 놈들 중에 복귀하지 않은 놈이 넷이다.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던 세 놈이 전부 다 그 안에 포함되기는 했는데, 솔직히 나도 확신은 못 하겠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쪽 해역은 가지 않는 편이 좋겠죠?”
“나도 그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애물단지도 어떻게든 처분해 버리고. 계속 신경이 쓰여서 못 살겠거든.”
인어들이 선물한 그 귀하신 술들을 제일 처분하고 싶은 사람은 접니다.
그런데 고작 진주 한 개를 처분하고 이 난리를 치렀는데, 더 큰 폭탄인 베르시아나 와인을 처분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길까?
지금 상황에서 그 결과가 두렵지 않다면 사람이 아니지.
어떻게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제값을 받고 처분할 방법이 없을까?
“그건 조금 생각해 볼게요. 진주 하나에 그 난리가 났는데, 그 와인 풀렸다가는 진짜 우리 다 죽을 수도 있어요.”
“에잉, 하여간 빨리 내 방에서 치워라. 계속 두면 언젠가 내가 따버릴 테니까.”
무슨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말씀을 저렇게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하신담?
***
인생 최대 수익률을 만들어 준 인어와의 물물교환을 다시 한번 시도하고 싶었지만, 부선장님과 나눈 이야기도 있고, 나 역시 찜찜했기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아인델프에게 몰래 근처 해역을 지날 때 음식을 담은 양동이를 바다에 띄워놓게 했다.
어차피 멈춰서 대가를 받지만 않으면 선원들이 알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한 편으로는 저번에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미안한 감도 있었고, 앞으로 우리가 또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안전만 잘 확보되면 다시 시도해볼 만한 거래 아닌가?
거래에 앞선 뇌물은, 종족을 초월해서 통할 것이다, 아마도.
***
멜라나인 항구에는 구매할만한 교역품도 없었고, 교역품 중 일부는 그곳에서 처분했기 때문에 두 선박 모두 상당히 가벼웠음에도 불구하고 항해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선원들이 선박에 익숙하지 못하기도 했고, 선원 중 절반이 새로 모집한 선원들이라 손발이 잘 안 맞기도 했으며, 두 척을 운용하는 것이 처음이라 생긴 문제도 꽤 있었다.
그래도 큰 사고는 안 났으니 이만하면 순조로운 항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충 내일쯤이면 입항하겠네?”
“네, 예상보다 나흘쯤 더 걸린 셈이군요.”
“괜찮아, 어차피 식량과 식수는 넉넉하니까.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고.”
“그, 별일 없겠죠?”
“그러기를 바라야지….”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와 아인델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검문을 위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배에 올라탄 관리관은 리버티 호라는 말에 동공이 다섯 배쯤 확장되더니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화물도 제대로 검사하지 않고 부랴부랴 입항허가서를 내주었다.
“입항하시고 최대한 빨리 항구관리소를 찾아주십시오. 저는 미리 가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아, 네….”
우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항구관리관 일행을 보내고 델라 항구에 기항했다.
일단 항구관리관의 행동으로 봐서는 후작이 나쁜 의도로 호출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니지, 의도가 나빠도 그걸 아랫사람들에게 숨겼을 수도 있겠구나.
하여간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니 일단 항구관리소부터 가야 할 것 같다.
“회계사는 남은 교역품 처분하고, 살만한 물건 좀 알아봐. 아직 구매 계약은 하지 말고. 후작저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혹시 선원들 입출금 문제로 사람 필요하면 삼등항해사나 포술장에게 도움 요청하고. 저번처럼 바로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일등항해사랑 갑판장은 나와 동행하지. 그리고 발드 선장과 부선장님이 배 좀 지켜주세요. 선원들도 좀 고용해 주시구요. 리버티 호는 지금 있는 서른 명 정도로 충분하지만 오트라스 호는 조금 더 있어야 하잖아요? 적어도 80명은 되어야 운항에 차질이 없겠더군요.”
“걱정 마십시오, 선장님. 그런데 두 사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늘 말하지만, 후작이 마음을 먹으면 우리가 다 달려가도 결과는 똑같아요. 그러니 적당히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빠르게 회의를 끝낸 나는 옷을 갖춰 입고 항구관리소를 향했다.
우리가 항구관리소 앞에 도착하자 경비병들이 마중을 나오며 물었다.
“혹시 리안 선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어서 오십시오, 안에서 항구관리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지? 뭔데 이렇게까지 환대를 하는데?
솔직히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과도한 환대를 받으면 부담을 넘어서 두려워진다.
경비병의 안내로 바로 항구관리관의 집무실까지 안내된 우리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반기는 항구관리관의 환대를 받아야 했다.
“하하, 리안 선장님이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항구관리관님. 그런데 왜…?”
“으응? 후작 각하의 호출을 받고 오신 게 아닙니까?”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하하하, 후작 각하의 호출을 받으셨으니 후작 각하의 손님이신 셈인데,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모셔야지요. 어떻게, 지금 저택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혹시 빨리 가야만 하는 일입니까?”
내가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당당하게 드러내자 항구관리관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는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 허세도 부려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한 허세를 부리다가는 일이 꼬이는 법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전혀요. 저도 후작 각하의 호출을 받고 그냥 온 것이라.”
“그럼 빨리 가시는 것이 어떨지?”
“이 꼴로 후작 저택을 방문하기에는 조금….”
“아이구,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다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후작 저택은 내일 방문하는 것으로 하죠.”
항구관리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리고 약간의 경악을 담아 질문을 던졌다.
“지, 지금 후작 각하를 기다리시게 하겠다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 각하께서는 언제까지 오라고 하신 것도 아닌데요. 예의를 갖춰서 방문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따로 전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준비하려면 목욕도 좀 하고 옷도 새로 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아니, 그게…!”
내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당황한 항구관리관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입장에서는 최고 권력자인 후작의 호출에도 여유를 부리는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이점도 없고, 손에 잡히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건방지지 않은 정도에서는 배짱을 부려도 될 것 같다는 그런 느낌말이다.
원래 내 몸값은 내가 올려야 하는 법이다.
결국 문밖까지 우리를 쫓아 온 항구관리관은 쩔쩔매며 내게 물었다.
“그럼 혹시, 소식을 후작저에 전해도 괜찮겠습니까? 저도 받은 명이 있는지라.”
“그러세요, 항구관리관님이 받은 명령을 실행하시는 것을 제가 막을 수는 없죠. 그럼 이만.”
아인델프와 네이선은 궁금한 점이 적지 않을 텐데도 묵묵히 나를 따라 움직였다.
만약 우르타를 데리고 왔다면 지금쯤 인내심이 바닥나서 왜 그러냐고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항구관리관의 반응으로 볼 때 ‘혹시 왕녀님이 호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예측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다.
후작이 직접 부른 것 같은데, 일면식도 없는 나를 후작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