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89화 (189/420)

189화. 후작 저택에서 생긴 일 (1)

“선장님, 괜찮으시겠…?”

“제독, 괜찮으…?”

항구관리소에서 적당히 멀어지자 거의 동시에 말을 꺼낸 아인델프와 네이선이 서로를 보며 머쓱한 듯 똑같이 머리를 긁적였다.

코미디 같은 두 사람의 행동에 나는 크게 웃고 두 사람에게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하하하, 걱정 마. 거의 대부분은 감이지만, 최소한의 정황 증거 정도는 가지고 배짱을 부린 거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도 해 볼 필요가 있고 말이야.”

“하지만 혹시라도 후작이 앙심을 품으면….”

내 말에 걱정을 완전히 날려버린 표정을 짓는 네이선과 달리 여전히 불안한 표정의 아인델프를 위해 조금 더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에이, 고작 이 정도 일로? 일단 은행의 통신망을 이용하는 것은 후작 정도 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어. 그런데 그렇게까지 날 애타게 찾은 사람이 고작 하루 늦게 왔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정말 화급을 다투는 심각한 일이라면 일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항구에 상주하거나, 최소한 내가 도착했을 때 바로 보고받을 수 있는 곳에 있지 않았을까? 일등항해사도 알겠지만, 후작 저택이 여기서 아주 먼 것도 아니잖아.”

내 추가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아인델프는 겨우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오트라스 호로 복귀한 나는 선단 전체의 간부들을 호출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배를 비운 간부는 없었기 때문에 회의는 금방 성사되었다.

“혹시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특이점이 있었나?”

“특별히 눈에 띄는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을 붙잡아 둘 명분이 없어서 다 내보냈기 때문에 소문이 도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 겁니다.”

내 질문에 에른스트 부선장님이 대표로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특별히 다른 수작이 들어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선원들로 인해서 후작이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도는 것 정도야 예상했던 일이고.

“회계사, 교역소 쪽에서 혹시 이상한 것 못 느꼈어?”

“교역소는 아니고 오스팔트 가(家)에서 조금 이상한 소리를 듣기는 했습니다.”

나는 그가 말한 오스팔트 가문에 대해서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만 했다.

“아, 그 자네를 소개해줬던?”

“네, 오래간만에 시니아를 보러 갔습니다만….”

그래, 게론드 녀석이 배를 탄 이유가 그 시니아라는 아가씨와 결혼하기 위해서였지.

내가 보기에 그 결혼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것 같은데….

그동안 정이 들어서인지 게론드가 조금 불쌍해졌다.

“우리는 그 시니아라는 아가씨의 근황에 관심이 없으니까 들은 이야기만 하지.”

“…네. 요즘 들어 이상한 소문이 자주 들리는 모양입니다.”

“소문?”

항구에 소문이 도는 것이 대단한 이야기가 되나?

대중 매체가 없는 세상에서 소문은 거의 유일한 정보 전달 수단이고, 그런 만큼 온갖 소문이 떠돌게 마련이었다.

심지어 항구처럼 외부인의 유입이 잦고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라면 더욱 심할 수밖에 없고.

그런데 이 소문이라는 것이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보니, 손바닥만 한 동네 한 바퀴만 돌아도 사실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쉽게 말해서, 원래는 ‘철수가 영희에게 망치를 빌려줬대.’라는 사실이 입을 열 번쯤 거치면 ‘철수가 영희를 스토킹해서 감옥에 갔다가 탈옥했대.’가 되어버리는 꼴이다.

“무슨 소문인데?”

“저도 이해가 안 되기는 합니다만, 란데르 형이 진지하게 배를 삼키는 바다 괴물이나 유령선, 선박의 무덤, 집채만 한 고래 같은 것에 대해 묻더군요. 그런 것을 왜 묻냐니까 요즘 들어 그런 말을 하는 선원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게 특이한 일인가? 그런 소문이야 언제나 있었잖아.”

“하지만 그, 우리도 보지 않았습니까? 고래 말입니다. 그리고….”

말을 더 하려던 게론드는 한쪽에 앉은 왓킨, 행크, 오펜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아마 인어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회계사까지 그런 이야기를 믿어? 고래는 원래 큰 녀석들이니까, 특별히 더 큰 녀석이 있다고 해도 안 될 것 없잖아?”

“그렇기는 합니다만… 증언이 예전처럼 중구난방이 아니라 제법 일관성이 있어서 특이하다고 하더군요.”

“그런 것 말고 후작과 관련된 건 없어? 그 진주, 인어의 눈물이라거나.”

“네, 귀족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서 웬만큼 큰일이 아니면 언급을 꺼리게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인어의 눈물은 뭐, 인어와 관련해서 소문이 조금 도는 모양입니다.”

“뭔데?”

게론드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그건 그냥 우리가 알던 것이랑 비슷하더군요. 인어가 흘린 눈물이 진주가 된다느니, 진정한 사랑을 느낄 때 흐르는 눈물이 ‘인어의 눈물’이 된다느니, 인어의 심장에 들어있는 진주가 ‘인어의 눈물’이라는 뭐, 그런 소문들 말입니다.”

쳇, 죄다 망상이군.

우리가 만났던 존재가 인어라면 설마 자기 동료들의 눈물이나 유해에서 나온 진주를 우리에게 줬겠어?

인간 식으로 말하면 식사에 대한 보답으로 코 푼 휴지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넓적다리뼈를 주는 꼴이잖아.

“흐음, 아무래도 정보가 좀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출발은 내일 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고. 바우어 항해사와 슬레어 항해사가 각 선박을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는 오늘 흩어져서 정보를 좀 모아 보는 것으로 하지. 내일 아침 식사 때 이곳에 모이는 것으로 하고. 아, 돌격대장.”

“네, 제독.”

새 돌격대장인 행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믿을만한 선원들 편성해서 금고, 선장실, 해도실을 중점으로 지키도록 해. 필요한 자금은 회계사 재량으로 먼저 승인해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답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아인델프와 네이선에게 눈짓을 하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옷을 한 벌 사고 마차를 빌리도록 하지. 내일 항구관리관이 마차를 준비해 줄지 알 수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결론만 말하자면 정보 수집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항구관리관은 새벽부터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를 오트라스 호 앞으로 보내주었다.

덕분에 우리가 빌리기로 한 마차는 쓸모가 없어졌다.

계약금으로 걸고 온 돈이 조금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굳이 일반 마차를 탈 필요는 없겠지.

후작 저택에 동행할 사람은 어제와 똑같이 아인델프와 네이선으로 결정했다.

고작 얼마 전에 발레리아 백작에게 빈집을 털렸는데 똑같은 실수를 또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세 번째 방문하는 스코타 후작 저택은 이전과 달랐다.

저택이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그전에 받았던 대우가 잡상인 취급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진짜 손님으로 대우해 주는 느낌이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창문을 정중하게 노크하고 우리를 확인한 경비병은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창문을 닫아 주었고, 우리는 마차를 탄 상태로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건 좀 얼떨떨하네요. 불안할 정도로요.”

아인델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게,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진짜 뭣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가벼운 일은 확실히 아닌 것 같으니까 말이야.”

내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밀납 인형처럼 굳어버리는 것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요즘 따라 한숨 쉴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딱딱한 표정 짓지 말고. 웬만하면 두 사람은 말을 하지 마. 괜히 말이 꼬이면 골치 아프니까. 필요한 말만, 알았지?”

어차피 대표자도 나고, 초대받은 사람도 나니까 굳이 두 사람이 입을 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섰고, 우리는 마차의 문을 열어준 집사의 안내를 받아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문 앞에 섰다.

“각하, 리안 선장 일행입니다.”

적어도 3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문이 조용히 열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스코타 후작을 대면할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눈앞의 노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조그만 배를 끌고 있는 리안이라고 합니다.”

“허허, 정말 소문대로군. 정통 예법과는 차이가 있지만, 충분히 예의가 바른 청년이야. 뒤의 두 사람은 부하들인가?”

“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저를 돕는 친구들입니다.”

“셋 다 젊은데도 대단해. 그래, 오는 길은 편안했나?”

“배려해주신 덕분에 안전하게 왔습니다.”

“그래도 길이 꽤 멀었을 텐데, 일단 여독이라도 풀도록 하지. 식사도 좀 하고 말이야. 입항하자마자 불러서 피곤하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는 젊은 자네처럼 여유를 부릴 수가 없어. 오늘 잠이 들면 내일 일어날 수 있을지가 걱정이거든. 허허허, 밖에 누구 있나? 리안 선장 일행이 쉴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게.”

뭐야, 이럴 거면 왜 불렀는데?

후작은 아주 온화한 할아버지인 것처럼 말했지만, 기껏 불러서 한 말이라고는 고작 ‘왔어?’ 정도였다.

심지어 애초에 우리의 의견 따위는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듯이 자기 할 말만 했을 뿐이다.

게다가 말하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말로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면서 실제로는 우리에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말이 좋아 대접이지, 언제까지 뭘 하겠다는 말도 없었으니 그냥 기약 없는 억류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다 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굳은 표정이 드러날까 싶어서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후작 각하.”

“허허허.”

“따라오시지요.”

내가 인사를 마치자 소리 없이 접근한 한 남자가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후작에게 깊게 예를 표하더니 방을 나와 우리를 데리고 한참 동안 복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안내된 곳은 2층? 아니, 3층이었나? 하여간 1층이 아닌 다른 층의 긴 복도에 늘어선 방 세 개였다.

그러니까 백작의 성에서와는 다르게 1인실을 배정해 준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백작보다 후작이 우리를 더 후대하는 것 같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모여서 의견을 나누거나 탈출 같은 것을 모의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더 강한 것 같다.

별 효과는 없지만, 우리의 경계심을 낮추려는 의도도 있을지도 모르겠고.

“안에 목욕물은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쉬고 계시면 식당으로 모실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세 방의 문을 열어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떠났고, 나는 미적거리는 두 사람에게 무던함을 가장해서 밝게 말했다.

“두 사람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지? 괜히 후작 각하께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

입조심을 하라는 말이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내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선장님.”

“걱정 마십시오, 선장님.”

우리는 긴밀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태연하게 각자에게 배정된 방에 들어갔다.

***

“…끝내주는군.”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심결에 중얼거리고 말았다.

문을 열어줄 때 힐끗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방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다.

캐노피가 달린 거대한 침대와 금박과 은박으로 장식된 가구들, 고풍스러운 문양의 촛대는 죄다 은으로 만든 것 같았고, 그런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천박해 보이지 않는 것이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물을 데워 두었습니다, 리안 선장님.”

“히익! 으갸갸갹!”

너무 놀라서 나조차도 이해 못 할 신기한 소리를 흘리며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서자, 언제 나타났는지(원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메이드 복장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 언제부터….”

“욕실은 이쪽입니다.”

그녀는 내가 뭐라고 하건 자기 할 말만 하는 게임 속의 NPC처럼, 부드럽지만 기계적인 동작으로 몸을 돌려 나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벽 한쪽에 있던 커튼을 들추자, 안쪽으로 커다란 욕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이 담겨있는 것이 보였다.

다섯 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될 것 같은 크기의 욕조, 여기에 들어가는 물을 모두 데우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장작이 필요했을까?

내가 욕조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메이드 아가씨가 스스럼없이 내 옆에 다가오더니 내 옷을 벗기려고 했다.

“으악!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집사장님이 손님들이 편하게 씻으실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내가 기겁하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물러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하며 다시 내게 다가왔다.

분명히 상황만 보면 장르가 에로여야 할 것 같은데, 왜 기분은 자꾸 호러인 것 같지?

“아, 아니! 내가 할게요! 나 혼자서도 옷 잘 벗거든요!”

내가 급히 그녀를 제지하며 말하자 그녀는 그제야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빤히 나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

“저기요?”

“네, 리안 선장님.”

“옷을 벗으려면 좀 나가 주셔야…?”

“괜찮습니다. 편하게 벗으십시오.”

왜 당신이 괜찮냐고!

나는 안 괜찮은데!

“진짜 제발 부탁입니다. 목욕은 제가 알아서 잘할게요. 좀 나가 계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결국 몸을 돌려 커튼 밖으로 사라졌고,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돌아올까 싶어서 재빨리 옷을 벗어버리고 탕에 몸을 던졌다.

분명히 어제 목욕을 했는데도 우리에게 냄새가 나는 건지, 그냥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목욕을 그렇게 강조하는데 안 하겠다고 버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나저나 이렇게 큰 욕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목욕한다니,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최고로 호강하는 것 같다.

한겨울에도 양동이 한두 개의 뜨거운 물을 사서 겨우 씻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말이야.

심지어 그조차도 배에서는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내고, 항구의 여관에서 묵을 때도 큰맘을 먹어야 가능한 호사였다.

그러니까 일단 이 상황을 즐기….

“목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으악!”

도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나는 소리 없이 들어온 것도 모자라 욕조 바로 앞까지 접근한 하녀의 말에 기겁하며 최대한 몸을 숨겼다.

그래봐야 맑은 물 안에서 뭐 얼마나 숨겨지겠냐마는….

“괘, 괜찮으니까 나가세요!”

“리안 선장님, 죄송하지만 그것은 어렵습니다. 반드시 손님들의 목욕을 도와드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혹시라도 이상한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미리 말하지만, 나는 신체 건강한 남자다.

당연히 여자를 좋아하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노출과 하녀 아가씨의 감정이 배제된 업무적인 태도는 어색한 정도가 아니라 좀 무섭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몇 차례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자기 입장을 고수했다.

이건 뭐, 거의 벽보고 말하는 기분이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나가떨어진 것은 결국 나였다.

상대방이 반응이라도 보여야 설득이건 교섭을 하지, 아예 반응이 없으니 방법이 있나.

결국 나는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정말 꼼꼼하게 내 온몸을 구석구석 씻겼다.

기분이 묘하다는 것만 빼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길은 정말 부드러웠고, 세심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의 신체 구조상 스스로는 씻기가 조금 어려운 부분까지 깨끗하게 씻기는 기분은 나쁠 수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따뜻한 물 안에서 남에게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으니, 말도 못 하게 편안했다.

귀족들이 목욕할 때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제 잘 알겠다.

시간이 지나서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어느 정도 가시고 긴장이 풀리자 내 몸도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은 다 내려놨다고 생각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건 좀 많이 창피했다.

물론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노력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원래 인간의 몸 중 일부는 자신의 의지와 별 상관이 없게 마련이잖나.

“끝났습니다, 이만 욕조에서 나오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저 이제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그만….”

편안하고, 행복하고, 창피하고, 부끄럽고 뭐 그런 애매한 시간이 겨우 끝났다.

목욕이 끝났음을 알리는 그녀에게 나는 몸을 비비 꼬면서 나가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내 몸의 한 부분을 향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다.

…X발, 진짜 죽고 싶다.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 뭘 도와줘요?!

아니야! 벗지 말라고!

***

혼돈의 목욕이 끝나고,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려온 하인을 따라 밖으로 나가니, 거의 동시에 다른 두 사람도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흐뭇한 표정의 네이선과, 왠지 내 눈을 피해 천장의 무늬를 관찰하는 아인델프.

네이선을 조용히 째려보자 녀석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아, 왜 갑자기 억울한 기분이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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