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91화 (191/420)

191화. 자유를 위한 조건

볼살을 이 사이에 넣고 힘껏 깨물었다.

오른쪽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강렬한 고통이 내 정신을 일깨운다.

어우 씨, 너무 세게 깨물었나? 살이 너덜거리는 느낌인데….

후우, 정신 차리고 상황 정리를 좀 해보자.

일단 후작은 나에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내 상업 허가는 후작가에서 나온 것이니 굳이 이런저런 트집을 잡을 필요도 없이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셈이지.

그리고 후작의 정보력이 놀랍기는 하지만 딱히 내게 치명적인 정보를 가진 것 같지도 않다.

왕녀님을 탈출시킨 것이야 자신에게 도움이 된 부분이고, 제국 해군에서 탈영(?)한 부분이 조금 애매할 뿐인데….

비록 벨로키나 왕국이 몰로스 제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물밑작업을 한다고 하지만 반역자나 고위 간부도 아닌 나를 팔아서 얼마나 이득을 얻겠는가?

그리고 막말로 내가 제국을 배신하거나 적전도주를 한 것도 아니고, 함대가 전멸해서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노력한 거잖아.

그렇다면 내가 집중해야 하는 포인트는 바로 ‘후작이 뭘 원하는가’이다.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하려고 이렇게 멘탈을 흔들어대는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당할 수는 없지.

게다가 고작 중형 상선 두 척을 차지하려고 무리하게 일을 벌이기에 후작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

후작이 상업 허가를 내준 상선이 한두 척이 아닐 텐데 나에게 무리해서 일을 벌였다가는 다른 상선들이 모조리 등을 돌리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케르빈 섬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이런, 내가 사설이 너무 길었군. 리안 선장, 자네는 목표가 뭔가?”

“네? 갑자기 그렇게 물으셔도….”

당신이야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거나 그런 원대한 목표가 있겠지만 나 같은 소시민에게 뭐 그리 큰 목표가 있겠어?

그냥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게 목표지.

그러니까 번화가에 별장을 짓고 화려한 백수로… 막상 생각하니 되게 쓰레기 같네.

“자네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해. 일개 선원으로 시작해서 30세도 되기 전에 선장, 아니, 선단주가 되었으니. 아마 10년쯤 지나면 대규모 선단을 이끄는 거상이 될지도 모르겠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폭풍 칭찬을 하시나?

채찍과 당근이냐, 단짠단짠이냐… 언변 하나는 아주 끝내주는군, 정신을 못 차리겠네.

내가 미심쩍어하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데 순간적으로 후작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그 대단한 거상과 지금이 뭐가 다르지?”

“그건….”

움직이는 돈의 규모, 경제적 영향력, 사회적 인정 등등 달라지는 것이 한두 개겠어?

“그저 크기만 커졌을 뿐 여전히 해적을 걱정하고,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겠지. 그렇지 않나?”

규모가 커지면 해적들도 웬만해서는 잘 건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괴롭힐 수 있는 귀족 중에 제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바로 후작이고.

어휴, 평생을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사람의 화법은 도저히 따라가지를 못하겠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래서 자네도 제국 해군에 몸을 담았던 것 아닌가?”

“아닙니다! 그건 어쩌다 보니, 애초에 저도 테일러가 해군인지 몰랐으니까요.”

무슨 그런 무리한 논리적 도약을?

내가 그 놈 때문에 무슨 꼴을 겪었는데...

“그래, 확실히 테일러 제독 휘하에 있었다는 말이군.”

“…….”

뭐야, 떠본 거야?

떠봤다고 하기에는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정확했는데?

“뭐, 그렇다고 해도 내 제안은 달라질 것이 없네.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

이건 좀 예상 못 했는데.

갑자기 스카웃 제의라구요?

그런데 이게 좀 애매한 것이, 테일러에게 스카웃 제의를 받을 때랑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때야 내 한 몸만 책임지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챙겨야 할 사람도, 가진 것도 너무 많다.

“…저를 높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작기는 해도 후작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 집단의 수장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이렇게 쉽게 그들을 내팽개치고 각하께 의탁할 수는 없습니다.”

“허허허, 그렇지. 집단의 수장, 아무리 작아도 자네가 대장이지. 그래서 내 밑으로는 못 들어오겠다는 건가?”

말 더럽게 꼬아서 듣네.

물론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데, 말의 의도는 그게 아니잖아.

하지만 여기에서 괜히 질질 끌어봐야 답이 안 나온다.

최악의 경우 상업 허가가 회수되겠지만, 그 정도는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역시 이야기해보기를 잘했군. 하지만 조금 성급해. 아직 젊으니 그렇겠지만 말이야. 자세한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도 되지 않겠나?”

“네….”

들으라면 들어야지, 내가 이 상황에서 거부권이 있기나 한가?

후작은 자신 앞에 있던 잔을 들어 내게 살짝 흔든 다음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나도 상선을 운용하고 있네. 두 개의 상선단을 운용하고 있지. 하지만 그놈들은 타성에 젖어있어. 그놈들로는 새로운 뭔가를 해볼 수 없다는 말이야. 그런데 자네 같은 사람이 갑자기 딱 나타난 것이지. 자네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걸세. 내 비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위험성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혹시 제가 거절할 수 있는 제안입니까?”

“으하하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물론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자네 마음일세. 하지만 제안을 거절당하면 내 마음이 조금 불편하겠지.”

차라리 강요라고 하지 그러세요?

이건 뭐 거절하면 후폭풍은 내가 알아서 감당하라는 말이잖아.

내 불경스러운(?) 생각이 표정에 드러난 것일까? 후작은 이어서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설득했다.

“다시 말하지만, 자네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야. 자네에게 내 상선단처럼 움직여 달라는 것은 아니야. 지금처럼 교역으로 계속 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좋네. 내 깃발을 달고 다닐 필요도 없어. 단지 가끔 내가 시키는 일을 해주면 되네.”

“생각할 시간을….”

“아, 물론 일을 시킬 때마다 따로 진행비를 주겠지만, 오늘 수락을 하면 바로 면세권을 주도록 하지, 델라 항구에서는 더 이상 세금은 물론 뇌물도 바칠 필요가 없도록 말이야.”

면세권이라면 물론 큰 도움이 되기는 한다.

대규모 거래에서 면세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순수익이 무려 두 배까지 차이가 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니까 말이다.

비록 델라 항구에 한정되더라도 그 위력은 엄청나다. 그만큼 얻기도 어렵고 말이다.

솔직히 제시하는 당근이 달콤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채찍이 너무 무섭다.

상대가 진짜로 나를 개미 짓밟듯이 밟은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서 더욱.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역시, 말이 통할 줄 알았네.”

후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얼떨결에 일어서서 그를 따라가니, 그가 자신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내게 넘겨주었다.

“첫 번째 일일세. 시논의 총독에게 이 서신을 전달하게.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집사에게 착수금과 문장기를 받아 가도록 하고.”

“후작 각하, 시논 섬은 군사지역으로 어떤 나라의 상선도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문장기를 주는 걸세. 평소에 문장기를 게양하라고는 하지 않겠네. 가능하면 앞으로의 임무를 위해서 문장기는 굳이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좋기도 하고.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문장기가 있어야겠지. 경비 함대의 순찰 영역에 접근하면 문장기를 게양하게.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 말이야.”

이 정도 일을 굳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뽑아서 시켜야 하나?

단순한 서신 전달 정도면 그냥 후작 소유의 배, 아니, 후작에게 상업 허가를 받은 아무 배나 시켜도 될 것 같은데?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물론 서신을 전달하고, 총독에게 답장을 받아오는 것일세. 공식적으로 말이야.”

그럼 그렇지, 비공식적인 임무가 진짜 임무겠군.

“항구의 경비 태세, 총독의 반응, 그 외의 모든 것을 최대한 알아 오게. 일레드 놈들이 시논 섬과 케이라 섬을 군사지역으로 선포한 이후로 정보는 구하기가 너무 어렵거든. 알아 온 정보의 수준에 따라 성과금을 지급하도록 하지.”

“각하, 목표를 명확하게 해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자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야, 그냥 최대한 많이, 자세히 알아 오게.”

제길, 중요한 내용은 아예 알려주지 않겠다는 건가.

뭐라도 알아야 꿈틀대기라도 할 텐데 말이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군. 이만 나가보게. 돌아갈 때는 굳이 내게 말할 필요 없네. 그럼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기를 기대하지.”

“네, 후작 각하.”

***

나는 아인델프와 네이선에게 돌아가자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방에 후작의 눈과 귀가 있는 곳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두 사람 역시 표정에 의문을 담으면서도 군말 없이 내 뜻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가 무사히 오트라스 호에 복귀하자 난리가 났다.

다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괜찮으십니까? 너무 늦어져서 걱정하던 중이었습니다.”

“오늘도 복귀하지 않으시면 사람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다들 모여 있네요. 늦었지만 내 방에서 모이도록 하죠. 조리장은 간단하게 요기할 것 좀 준비해줘.”

“아, 알겠습니다, 선장님.”

잠시 후, 내 방에 모여든 간부들에게 나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후작을 비난했지만,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가진 힘의 차이가 명백한데 괜히 억지를 부려봐야 우리만 박살 나는 거지.

“그래도 후작이 시킨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냥 적당히 설렁설렁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능력이 없어 보이는 쪽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

“발드 선장님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후작이 알아채지 않을까요? 괜히 그자가 앙심을 품으면 더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서신 전달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고, 정보 수집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갈렸다.

발드를 대표로 대충 해서 무능함을 보이자는 의견이 절반, 아인델프를 대표로 시킨 일은 똑바로 하면서 기회를 보자는 의견이 절반.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보니 좀처럼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만, 오늘은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이만 해산해서 쉬도록 하지. 지금 당장 결론을 내자고 회의를 소집한 게 아니고 상황 전파를 위해서 소집한 것이니 말이야.”

“선원들에게는 어떻게 알릴까요?”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말했다.

“정보 수집 건만 빼고 사실대로 알려. 어차피 내가 후작을 만나고 온 것도 다 알고 있고, 시논 섬으로 가는 항로를 숨길 수도 없으니까. 후작이 왜 우리를 콕 집어서 일을 시키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하자고.”

“알겠습니다.”

모두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설 때 에른스트 부선장을 보며 말했다.

“부선장님은 저랑 술이나 한잔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선장님 저도 남을까요?”

술이라는 말에 네이선이 냉큼 고개를 들며 슬며시 끼어들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 저었다.

“아니, 오늘은 부선장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

“알겠습니다…. 가자, 우르타.”

“아앗, 나도, 나도, 끼… 면 안 되겠구나. 안녕히 계세요, 선장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네이선과 우르타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방을 떠나자,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잠갔다.

“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게냐?”

부선장님이 어느새 스스로 술을 잔에 따르며 물었다.

“혹시라도 쓸데없는 말이 돌까 봐요.”

“늙은이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라, 늙어서 그런지 요즘 부쩍 피곤해.”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것을 보니 진짜 피곤하신 모양이다.

아마도 우리가 복귀하지 않으니 신경이 많이 쓰인 것이겠지.

고작 2년 전만 해도 3일 밤낮으로 싸우고 나서 황소도 때려잡을 체력이었던 것 같은데, 노인은 이렇게 갑자기 늙어버리는 모양이다.

“갑판장님, 어떻게 하면 이런 더러운 꼴을 안 보고 살 수 있을까요?”

“푸흐흐흐,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살겠냐? 나는 내가 키운 네놈 눈치 보고 살고 있잖느냐? 그리고 갑판장이 아니고 부선장이다. 네놈이 시켰잖아.”

“언제 또 눈치를 보셨다고. 우리끼리 있는데 부선장이나 갑판장이나, 뭐 그게 중요한가요?”

처음부터 갑판장님이었고, 최근까지도 갑판장님이라고 불러서 부선장이라는 말이 입에 안 붙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는 그냥 옛날 생각나서 한번 불러 본 것이지만.

“세상에 남 눈치 안 보고 사는 사람이 어딨겠느냐? 한 나라의 왕도 귀족들 눈치를 본다고 하더구먼.”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물어봐도, 나이를 헛먹은 내가 뭘 알까? 차라리 선의 양반을 불러다 놓고 물어보는 것이 더 낫지.”

“닥터는 뱃사람이 아니잖아요. 내가 이제 와서 학자가 될 것도 아니고.”

내가 툴툴거리며 술잔을 원샷하자, 기묘한 눈으로 나를 보던 부선장님이 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 뱃놈 중에 남의 눈치 안 보는 놈은 딱 한 종류뿐이다. 바로 해적 놈들이지.”

“저보고 해적이 되라는 건 아니죠?”

“해적에게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가 있다, 뭔지 알겠느냐?”

“글쎄요, 배, 동료, 칼?”

내가 대충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기자 그는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혀를 찼다.

“쯧쯧, 생각한 게 고작 그거라고? 잘 들어라, 해적에게 필요한 세 가지는 무력, 거점, 상품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른 배를 압박할 수 있는 무력, 물건을 처분하고 보급할 수 있는 거점, 약탈할 대상이 되는 상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뭐, 그럴듯하네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미리 말하지만, 해적은 안 해요.”

배를 탄다는 것 자체가 반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기는 한데, 해적은 그냥 목숨을 포기한 놈들이다.

상선은 상행에 실패하거나 태풍, 해적을 만나도, 희박하지만 살아서 재기할 확률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해적은 그런 거 없는 거다.

해적에게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약탈에 실패해도 죽고, 사로잡혀도 죽고,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죽고, 욕 한번 했다고 밤에 칼 맞고, 장물 거래하다가 죽고, 해군에 걸려도 죽고, 그냥 다 죽는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 물건 빼앗고 즐거워할 정도로 나쁜 놈이 아니다.

“상선도 똑같지 않겠냐?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할 무력, 마음 편히 쉬면서 보급할 수 있는 거점, 아무리 금지를 시켜도 사람들이 살 수밖에 없는 상품이 있다면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겠지.”

뭐야, 마약이라도 팔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 세상에는 마약이 없다.

담배도 없는 세상에 무슨 마약이 있겠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존재를 모르니 원하는 사람도 없고 말이야.

“말도 안 돼요. 아무리 무장이 잘된 선단이라도 한 나라의 해군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요. 거점도 마찬가지죠, 결국 그 나라에서 입항 금지시키면 그만인데. 상품은 말할 것도 없고.”

“붉은모래 해적단은 거의 다 이루었었지.”

“네?”

“어느 나라의 행정력도 닿지 않는 거점, 어느 나라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화력, 싸게 넘기는 약탈품까지. 일레드에서 함대 하나를 다 희생할 각오로 들이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붉은모래 왕국이 생겼을걸?”

“헐, 그 정도였다고요?”

“그래, 더러운 꼴을 보기 싫다고? 내가 알기로 뱃놈이 그 꼴을 안 보는 방법은 이 방법뿐이다. 가능성은 따지지 말거라.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국왕도 눈치를 보고 산다고. 국왕도 못 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지.”

“에휴, 알았어요. 그냥 술이나 마셔요.”

“싱겁기는.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지금처럼만 해라.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으니 말이야.”

부선장님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킬킬거리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그가 말한 내용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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