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기상이변과 괴선박
인간이 같은 환경과 조건에 장시간 노출되면 어느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방금 문득 깨어난 것도 비슷한 것이다.
컴컴한 선장실의 침대에서 눈만 뜬 채로 내가 갑자기 이 시간에 왜 깬 것인지 약간 혼란에 빠졌다가, 침대에서 전해지는 익숙한 진동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때서야 귀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며 은은하게 들리는 바람 소리와 배의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삐거덕거리는 소음이 인식되었다.
베개 위를 더듬어 랜턴을 챙긴 나는 코트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배의 흔들림 정도로 볼 때 아직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선교에서 내게 사람을 보냈겠지.
그래도 똑바로 걷기는 힘들 정도로 배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파도가 꽤 거친 모양이다.
걸음을 재촉해서 선교에 올라서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아인델프, 바우어, 에른스트 세 사람에 타륜을 잡고 있는 선원 한 명, 아인델프에게 무언가 지시를 받고 있는 선원까지, 애초에 그다지 넓다고 보기 힘든 선교가 더 좁아 보인다.
내가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인델프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선장님, 나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내게 말을 한 아인델프는 바로 지시를 내렸던 선원에게 명령을 취소했다.
“자네는 선실로 돌아가서 깨어있는 선원들에게만 상황 전파하면 되겠네. 가봐.”
“네, 일등항해사님.”
선원이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선교를 내려가고, 우리는 서로 대충 눈인사를 나눴다.
“어때? 좀 흔들리던데. 심각한가?”
“보시다시피 구름이 갑자기 심하게 끼었습니다. 파도도 꽤 거칠어졌구요. 방금 전에 확인한 바로는 파고가 약 2m 정도입니다.”
내 질문에 아인델프가 대표로 상황을 간략하게 보고했고, 나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을 한번 확인한 뒤 부선장님에게 물었다.
“부선장님, 혹시 예상하셨어요? 분명히 해 지기 전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저도 예상 못 했습니다. 저라고 제멋대로인 날씨를 다 맞힐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어때요? 폭풍 대비를 해야 할까요?”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부선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낮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고 위험이 너무 높습니다. 혹시라도 파고가 더 올라가면 그때 준비하시죠. 아직까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흠, 그럼 혹시라도 황천 준비가 필요하면 여기 제 랜턴 사용하세요. 사고가 꽤 줄어들 겁니다.”
내가 내 랜턴을 내밀자 부선장님이 반색하며 덥석 랜턴을 쥐었다.
“확실히 이놈이 있으면 사고가 많이 줄어들 겁니다.”
우당탕탕!
갑자기 통로 쪽에서 소음이 들리더니 네이선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쯧, 갑판장이라는 놈이 파도가 이렇게 칠 때까지 잠을 자? 잘하는 짓이다.”
에른스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질책했고, 네이선은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었다.
“저녁에 훈련을 좀 과하게 했더니, 헤헤헤.”
“같잖은 변명 집어치우고 이거나 받아. 선장님이 혹시라도 황천 준비에 들어가면 쓰라고 주셨다.”
네이선을 질타하기는 했지만, 저녁까지 아무런 전조도 없었기 때문에 부선장님도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만약 기상이 악화될 기미가 조금만 있었어도 네이선 역시 저녁 훈련은 간단하게 마쳤을 것이다.
네이선이 랜턴을 받아 조심스럽게 품 안에 넣는 것을 바라보던 부선장님이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선장님, 뒤로 잠시만….”
우리는 뒷걸음질을 쳐서 다른 사람들과 약간 떨어졌다.
파도와 바람 소리가 꽤 커서, 조용히 말하면 충분히 비밀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거리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날씨요?”
잠시 뜸을 들이던 에른스트는 작게 혀를 차고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도와 바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만, 지금 해무가 갑자기 끼고 있습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시겠지만….”
“해무요?”
“파도와 바람은 기상에 따라 언제라도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한밤중에 갑자기 해무가 끼는 경우라면….”
“아, 진짜. 하지 마세요. 아니죠? 부선장님까지 이러시면 곤란한데?”
에른스트의 말에서 생각나는 괴담이 있어서 얼른 말을 끊고 정색을 하자, 그는 헛기침하며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크흠,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조금 긴장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이, 겨우 그 말씀을 하시려고….”
왠지 모르게 바람이 더 쌀쌀하게 느껴지며 닭살이 돋았다.
에이 씨, 노인네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는.
***
다행스럽게도 이후로 30분가량이 지나도록 파도는 더 높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에른스트의 말대로 지독한 해무가 오트라스 호를 감싸기 시작했다.
“견시! 리버티 호 위치 확인!”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해무였다.
구름이 하늘을 가린 시점에서 이미 바다는 충분히 어두웠지만, 지금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앞에 손바닥을 가져대 대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농밀한 안개는 마치 실체라도 가지고 있는 듯, 끈적끈적한 느낌에다가 기묘한 냄새까지 났다.
“견시 보고! 리버티 호 확인 불가! 리버티 호 확인 불가능합니다!”
“이런 젠장. 갑판장! 당장 돛 모두 내려! 조타수, 우현 전타! 060도 잡아!”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이던 리버티 호가 안 보일 정도면 언제 충돌 사고가 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방향을 돌려서 정선하기로 했다.
괜히 움직이는 것보다는 제자리에 서는 것이 맞다.
다행히 최근에 얻은 망원경이 있으니, 날만 밝으면 엄청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상 다시 합류는 가능할 것이다.
네이선이 짧은 대답을 마치고 급히 선교에서 나가고, 조타수가 부지런히 타륜을 돌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에른스트를 보며 말했다.
“정말 지독한데요? 이렇게 지독한 해무는 처음 봐요.”
“…….”
“…부선장님?”
대답 없는 에른스트의 어깨를 슬쩍 치자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그래, 아니, 네, 선장님.”
“응? 부선장님?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정말 지독한 안개로군요.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쁠 정도로 말이죠.”
나는 살짝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애써 무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발드 선장도 이 정도 상황이면 당연히 정선했겠죠?”
“네? 정선? 아, 정선 말입니까? 지금 정선을 하기에는….”
“부선장님? 도대체 왜 그러세요?”
“후우,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아 진짜, 무섭게 왜 이러신담?
“리버티 호요! 발드 선장도 정선 했겠죠?”
“네, 발드 선장이라면 우리를 놓치자마자 정선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렇게 넋이 나가 계세요?”
“허허, 제가 늙기는 했나 봅니다. 갑자기 예전 일이 생각나서 말이죠. 그보다 상황이 이렇게 심해질 줄 알았으면 차라리 황천 대비를 할 것을 그랬습니다.”
“쩝, 파도가 더 심해지는 건 아니니까 충돌 사고만 안 나면 되죠, 뭐. 다행히 이쪽은 배가 많이 다니는 항로는 아니잖아요? 리버티 호만 정선했다면 딱히 충돌 사고가 날 일은 없겠죠.”
“네….”
잠시 후 네이선이 돌아와서 모든 돛을 내렸다고 보고했고, 그렇게 오트라스 호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타종이라도 해 볼까요? 근처에 리버티 호가 있다면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괜히 오판을 부를 수 있으니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시죠. 특히 이렇게 해무가 짙으면 소리의 방향과 거리도 이상하게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괜히 리버티 호에서 우리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으로 오해하거나 방향과 거리를 오판하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부선장님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나는 깔끔하게 타종하는 것을 포기했다.
“으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이러면 오늘 밤에는 움직이기 틀린 것 같은데, 다들 좀 쉬죠?”
내가 제안을 했지만 다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대답이 없었다.
일을 더 하자는 것도 아니고 쉬자는데 반응이 왜 이래?
“일등항해사, 지금 당직이 누구야?”
“곧 제 당직 시간입니다.”
“삼등항해사는?”
보아하니 아인델프도 거의 못 잔 것 같은데, 지금부터 당직을 또 서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지금은 딱히 선교에서 지휘를 할 일도 없으니 그냥 오펜에게 맡겨도 될 것 같은데.
내 질문에 잠시 대답을 못 하던 아인델프가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삼등항해사에게 선교를 맡기기에는 좀….”
“…그 말은 원래 삼등항해사의 당직 시간이라는 말이지?”
“…네, 죄송합니다.”
“아니야, 뭘 또 죄송까지. 삼등항해사를 배려하는 건 좋은데, 자네는 괜찮겠어? 내일 일도 만만치 않을 텐데, 피곤하지 않아?”
“네, 전 괜찮습니다.”
“쯧, 그럼….”
나도 아인델프가 선교를 맡아주는 쪽이 더 믿을 수 있기에 잘 부탁한다고 하려는 찰나, 선교에서 비명 같은 보고가 울렸다.
“선교, 선교! 전방에 선박입니다! 거리 10, 아니, 5! 으아아악! 충돌합니다!”
예상치 못한 보고 때문에 모두 그 견시수의 말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짧은 정적이 끝나자 선교는 난리가 났다.
“뭐?!”
“이런 씨발! 총원 충격 대비!”
“뭐라도 잡아!”
“엎드려!”
그런데 전방? 이 근처의 배라면 리버티 호밖에 없을 텐데 언제 우리를 앞지른 거야?
***
배의 속도에 따라 다르지만, 선박 간의 거리가 5m라는 말은 ‘붙어있다’ 혹은 ‘충돌했다’라는 말과 거의 비슷한 말이다.
그러니까 견시수의 보고가 농담이 아니라면 지금쯤 충돌을 했어야 하는데….
“…?”
“응?”
“뭐야…?”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어, 부선장님은?”
“저도 괜찮습니다.”
“견시수 이 새끼를 당장…!”
네이선이 이를 갈며 분노를 토했지만 나는 일단 그를 제지했다.
“갑판장, 잠깐만.”
그리고 마스트 쪽을 향해 소리쳤다.
“견시! 어떻게 된 거야?!”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소리치려는 순간 당황한 티가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 견시 보고, 전방의 서, 선박…. 정, 정선 중입니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헛소리야?
요즘 다른 배들은 무슨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거야? 아니면 브레이크를 달고 다니나?
“야이 씨! 견시 너 똑바로 보고 못 해?! 무슨 헛소리야?”
내가 짜증을 팍 내고 있는데, 내 뒤에 있던 부선장님이 떨리는 손으로 나를 말렸다.
“아, 부선장님 잠깐만요 저 새ㄲ… 응? 부선장님 손이?”
“앞, 앞을 봐! 저, 저게 지금, 으으, 내가 뭘 보는….”
맹세코 부선장님이 이렇게 당황하고 놀라는 모습은 처음 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공포에 질려있으신데, 부선장님과 공포라니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이잖아.
도대체 뭘 보고 저렇게, 헉!
***
방금 전까지 눈앞을 가리던 해무는 잠깐 사이에 상당히 옅어져서, 오트라스 호의 선수와 딱 붙어있는 괴선박의 실루엣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괴선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실루엣만 봐도 리버티 호는커녕 도저히 정상적인 선박이라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메인 마스트는 위쪽 1/3 정도는 부러진 것 같았고, 선체도 기괴하게 비어 있는 부분이 눈에 띄는 것이 도저히 정상적인 선박으로 보기 힘들었다.
“…갑판장, 랜턴 내게 넘기고 선원들 모두 깨워서 무장시켜. 그리고 바우어…. 어휴, 미치겠군.”
바우어 이등항해사에게 간부들을 깨워서 집합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나는 그의 꼴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바로 포기했다.
바우어는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한 채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다.
“부선장님, 간부들 좀 집합시켜주세요. 이등항해사 꼴이 말이 아니네요.”
“으음, 알겠습니다.”
그래도 부선장님은 언제 공포에 떨었냐는 듯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였기 때문에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부선장님께 명령을 내렸고, 네이선과 에른스트는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선교를 내려갔다.
“일등항해사가 선교 지키고, 저기 저 인간(바우어) 좀 수습해 봐. 그리고 조타수는 날 따라 와.”
“어디 가십니까?”
“네, 선장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고, 나는 아인델프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미확인 선박이면 확인을 해야지.”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아인델프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바로 나를 막아섰다.
하지만 나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저런 괴선박을 다른 사람의 말로 듣는다고 제대로 파악이 될 리가 없잖아.
약간 위험하더라도 내가 직접 확인하는 쪽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일등항해사, 그냥 유, 아니, 난파선일 뿐이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유령선’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재빨리 난파선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세상에 유령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어차피 근처에서 확인만 할 거야. 내부 진입은 갑판장이 선원들 무장시킨 후에 진행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휴우….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전히 불안해하는 아인델프에게 나는 랜턴을 한 번 켰다가 끄면서 안심시켰다.
“이 정도 빛이면 여기서도 보이잖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할 필요 없어.”
***
중간에서 합류한 견시수까지 데리고 선수로 다가가자, 괴선박의 흉물스러운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배수량은 대략 700톤 전후로 오트라스 호와 비슷한 것 같았고, 선체가 여기저기 부서지고 구멍이 난 것뿐만 아니라 이미 삭을 대로 삭아서 도저히 배의 본래 기능(물 위에 뜨는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 꼴로 배가 뜰 수 있다니, 신기하네.”
“흐으으으, 선장님, 이거 유령선 아닙니까? 괜히 저주라도 받기 전에 빨리 뜨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선장님. 아까부터 으슬으슬한 게 영….”
두 선원의 말에 나는 오트라스와 괴선박의 간격을 확인했다.
가장 가까운 부분의 간격은 고작 30cm 정도. 이 정도면 붙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실제로 파도에 흔들리면서 미약한 충돌이 발생하고 있었고, 괴선박은 충돌 부위가 비스킷처럼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었다.
“쯧, 출발하더라도 일단 이놈을 좀 밀어내야 움직일 수 있겠다. 시끄러운 걸 보면 갑판장이 선원들 다 깨운 모양인데, 너희도 무기고로 가서 무기 수령해.”
“알겠습니다.”
두 사람을 무기고로 보내고 혼자 선교로 복귀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유령선에 대한 전설과 소문은 많고도 많다.
하지만 유령선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내게 그런 전설이나 소문은 판단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난파선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였다.
유령선에 전설과 소문이 많은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바다 위에서 배가 동력을 잃으면 일반적인 인간 사회의 가치 서열이 붕괴한다.
최고의 가치를 가지던 사치품과 귀금속은 줘도 안 갖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고, 비싼 옷보다 한 컵의 식수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버티던 승조원이 죽고 유령선이 되면 배에 뭐가 남아 있을까?
당연히 난파 상황에서 가치가 없었던 귀금속 같은 고가치 물건만 남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녀석들은 식수와 음식과 다르게 잘 망가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보물선이 아니고 유령선이라는 무서운 별명이 붙고, 공포스러운 소문과 전설이 따르는 걸까?
당연히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만약 소문처럼 어떤 배가 우연히 난파선을 만나서 엄청난 금괴를 얻었다고 하자.
한 개만 챙겨도 새 삶을 살 수 있는 금괴(10kg)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도덕적 수준이 절대로 높다고 할 수 없는 선원들이 수십 개의 금괴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 것 같나?
단적으로 내가 리버티 호를 지휘해서 섬을 탈출할 때도 금괴 한 개의 가치도 안 되는 돈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 않았나 말이다.
결국 운이 좋다고 생각했던 그 배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되고, 그런 내용들이 사람들의 입을 타면서 ‘유령선의 저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 괜히 위험을 감수하지 말자. 저렇게 삭은 배에 뭐가 남아 있겠어?”
나는 괜히 혼잣말로 아쉬움을 털어냈다.
…….
으음, 그런데 금괴를 가지고 다니는 배가 많은 것도 아니고, 적당한 수준의 이득이면 챙겨도 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