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96화 (197/420)

196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꽤 멀리 있던 광원은 예상대로 리버티 호가 맞았다.

발광신호로 서로를 확인한 두 선박은 천천히 가까워졌고, 어느 정도 가까워진 후에는 발드 선장이 이쪽으로 이동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비록 날도 맑아졌고 파도도 가라앉았지만, 야간에 선박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충분히 위험한 일이다.

정선한 선박끼리 직접 근접해서 건너는 것은 물론이고, 단정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쪽도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발드 선장의 요청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뒤로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선교에서 내 뒤에 설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깜빡 잊고 있었던 불청객이 보였다.

“음, 조나단 씨가 선교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굳은 표정의 조나단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선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그 커다란 배가, 배가, 순식간에 사라졌단 말입니다!”

“그랬다더군요. 그런데 언제부터 나와 계셨습니까?”

조나단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던 터라 약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는 얼른 감정을 수습하고 이 기회에 조나단의 기를 죽이기로 했다.

“그 난리가 났는데 저에게는 한마디 말씀도 안 해주시다니,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나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조나단 씨,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바다는 위험하다구요. 그리고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손님인 조나단 씨를 굳이 부를 이유가 있을까요? 밤에는 가능하면 선실 안에만 계시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내가 오히려 왜 밖으로 나왔냐고 책망하듯이 말하자, 조나단의 얼굴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이것 보세요, 리안 선장님!”

“조나단 씨! 여기는 선교입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죠!”

발끈하는 조나단을 더 큰 목소리로 찍어 눌렀다.

원래 배에서 선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그 위치가 선교라면 말 그대로 무소불위가 된다.

선교에서만큼은 선장에게는 상대가 선주, 혹은 왕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물론 현실이 늘 이론과 이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서 명시적인 선장의 윗사람은 이런 관례를 무시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손님’에 불과한 조나단이 선교에 멋대로 올라와서 언성을 높이는 것 자체가 무례였다.

최소한 이런 관례에 대한 상식은 있는지 내 말에 움찔하며 기세가 사그라드는 조나단에게 쐐기를 박았다.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기상이변, 이어지는 미확인 선박과의 조우, 이 상황에서 내가 당신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손님이면 손님답게 계십시오. 난 당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했고, 내 생각에 당신이 가장 안전한 곳은 여전히 선실입니다. 내려가십시오.”

“이익…! 오늘 일은 반드시 후작 각하께 보고할 겁니다.”

오냐오냐했더니 아주 죽고 싶어서 용을 쓰는구나.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인내심 중 한 가닥이 끊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멱살을 잡고 바짝 끌어당겨서 이를 악물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 후작 각하께 살아서 보고를 하고 싶으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네놈이 아니더라도 지금 머릿속이 충분히 복잡하니까 말이야.”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거칠게 그를 밀쳐낸 나는 양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탁탁 털어주는 척하며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조나단 씨, 현재 상황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언제 위험이 다시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니 안전한 선실에서 기다리실 것을 다시 한번 권고드립니다.”

내가 옷깃을 놔주자 잠시 나를 노려보던 조나단은 바람 소리가 들리도록 세차게 뒤로 돌아 빠르게 선교를 내려갔다.

“괜찮겠습니까? 귀찮게 되지는 않을지….”

조나단이 사라진 통로를 응시하던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욱하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말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조금은 걱정이 된다.

그래도 자신이 선을 어디까지 넘을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 같은 조나단을 계속 봐줄 수만은 없는 일이니까.

“쯧, 어차피 선은 저놈이 먼저 넘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애초에 후작도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니. 제기랄, 저 망할 놈 때문에 후작에게 이번 일도 알릴 수밖에 없겠군. 나도 이해를 못 하는데 뭐라고 설명하지?”

“전 지금도 손이 떨립니다. 배를 오래 탄 것은 아니지만 진짜로 유령선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진짜로 그 안에 소문처럼 금괴가 있었을까요?”

호기심이 가득 담긴 질문을 던지는 아인델프를 살짝 노려본 나는 그의 호기심을 일축했다.

“있지도 않았겠지만,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안 들고 왔을 거야. 아니, 만약 들고 왔더라도 지금쯤 다 바다에 던져버렸을걸? 그런 미심쩍은 것을 왜 들고 다녀?”

“아무리 그래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저 새끼,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내 질문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아인델프는 약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선장님이 유령선으로 건너간 직후에 나왔던 모양입니다. 제게 와서 자기도 들어가 보고 싶다고 우기더군요.”

“들어가라고 내버려 두지 그랬냐.”

당연히 아인델프는 그럴 권한도 없고, 그럴 리도 없는 녀석이다.

“사실 혼자 간다고 우겼다면 저도 막을 명분이 부족했겠지만, 선원을 차출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선장님 명령에 선원들을 통솔하라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뭐? 이 미친놈이?! 지가 뭔데 내 선원을 차출해 달라고 해? 앞으로도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면 무조건 거절하고 나에게 알려.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의시키고. 특히 선원들도 그놈이 뭔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시키거나 부탁하면 절대로 들어주지 말라고 해.”

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우리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고 했구만?

***

우리와 약 50m 정도 떨어진 상태로 정선한 리버티 호에서 단정을 타고 발드 선장과 모르아 돌격대장이 선원 네 명과 함께 건너왔다.

“제독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가 내려준 줄사다리를 타고 가장 먼저 올라온 발드가 어수선한 갑판을 한번 둘러보며 내게 물었다.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죠, 발드 선장. 리버티 호는 별일 없어요?”

“네, 지금 슬레어 항해사와 갑판장이 선교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아끼는 사이 모르아와 리버티 호의 선원들도 모두 갑판 위에 올라왔다.

나는 안면이 있는 선원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리버티 호의 선원들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자네들도 좀 쉬고 있으라고.”

그리고 근처에 있던 낯익은 선원에게 그들이 쉴 곳을 안내하라고 말한 뒤, 발드와 모르아에게 눈짓을 했다.

“내 방에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일등항해사는 부선장님 모시고 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내 방에는 발드, 모르아와 에른스트, 아인델프, 네이선, 게론드, 행크, 우르타가 모였다.

“자, 먼저 리버티 호 이야기부터 듣도록 하지. 해무가 걷힐 때 우리가 꽤 떨어져 있던데,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이 모이는 동안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발드 선장이 차분하게 상황을 진술하기 시작했다.

리버티 호에서 이상을 느낀 것은 우리와 비슷했다.

갑자기 파도가 높아졌고,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해무가 차올랐다고 한다.

문제는 그 해무에서 조금 달랐는데, 배를 둘러싸고 해무가 발생한 우리와 달리 리버티 호는 우리 배를 중심으로 해무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발드 선장의 말에 의하면, 그때 우리를 향해 계속해서 발광신호를 보냈고, 그래도 반응이 없자 타종까지 울렸음에도 우리는 그대로 해무 안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오트라스의 간부 중 몇 명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보였다.

우리 중 누구도 타종 소리도, 발광신호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발광신호는 놓칠 수도 있지만, 타종 소리를 놓쳤다는 것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해무가 끼기 전까지 두 선박의 거리는 50m 남짓, 그 사이에 거리가 좀 벌어졌다고 해도 100m 정도에 불과했을 테니 소리가 안 들렸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오트라스 호가 순식간에 해무 안으로 사라지자 저는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짙은 해무는 저도 처음 보는 데다가 기상상황도 좋지 않아서 괜히 오트라스를 따라가면 자칫 대참사가 날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해무가 걷힐 때까지 그 자리에서 대기하던 중이었습니다.”

“좋은 판단이었네요. 어차피 목적지도 아니까 우리 행적을 완전히 놓쳤더라도 리버티 호 혼자서 움직일 수 있었을 테니. 그럼 리버티 호 쪽은 전혀 피해가 없는 거죠?”

“네, 혹시 오트라스 호는 피해가… 있습니까?”

나는 대답을 네이선에게 미뤘다.

나보다는 방금 전까지 인원 파악을 하고 온 네이선이 더 잘 알겠지.

내 신호에 목소리를 가다듬은 네이선이 보고를 시작했다.

“흠, 오트라스 호 인원 보고합니다. 현 시각 선장님 외 76명 모두 이상 없습니다. 외부인 1명까지 문제없는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네이선의 보고가 끝나자 나는 발드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우리도 딱히 피해를 입지는 않았어요. 굳이 피해라면 정신적인 부분이랄까?”

그렇게 말한 나는 우리가 겪은 일과 이상한 점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발드 역시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고, 턱을 만지작거리던 모르아 돌격대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제독의 말을 들으니 묘하게 최근에 들었던 유령선 이야기랑 비슷하군요. 물론 술집에서 떠드는 놈들은 그곳에서 금괴를 찾았다느니, 보물 지도를 찾았다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습니다만.”

“유령선 이야기가 다 그렇지 뭐.”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그 이상한 해무도 그렇고, 외형묘사까지. 진짜로 자주 출몰하는 모양입니다.”

“미치겠군. 도대체 이유가 뭐지? 뭔가 목적이 있으니까 나타날 것 아냐?”

“글쎄요….”

잠시 말을 아끼던 모르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제독의 대응이 정말 좋았다는 거죠.”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본 유령선이 최근 회자되는 유령선이 맞다면, 그 이야기를 떠드는 녀석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령선에서 가지고 온 것이 없다는 거죠. 정확하게 말하면 ‘증거품’을 가진 녀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까요?”

아까와는 다른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르아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한 것이다.

그의 말은, 유령선에서 뭔가를 발견해서 들고 나온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 수도 있고, 뭔가를 들고 나온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네이선 갑판장. 지금 나가서 유령선에 탔던 인원들 소지품 검사 다시 해봐. 가지고 올만 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확실히 하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네이선이 급하게 방을 나가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끝내지. 다들 피곤하기도 하겠고, 발드 선장도 계속 배를 비울 수는 없으니까. 발드 선장님, 동이 틀 때까지 일단 이대로 대기하도록 하죠. 특이사항 발생하면 바로 알려 주시고요. 일정이 조금 늦어지겠지만 그쪽도 식량과 식수는 문제없죠?”

“물론입니다, 제독.”

“좋아요, 해산합니다. 일등항해사는 동이 틀 때까지 이등항해사와 삼등항해사에게 선교 당직 할당하고 좀 쉬어. 돌발 상황 발생했을 때 자네가 피곤하면 골치 아프니까.”

모두가 다 떠날 때까지 미적거리던 아인델프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선장님, 저… 이등 항해사에게 선교를 맡겨도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나는 마지막까지 얼이 빠져있던 바우어 항해사를 기억해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꼴을 봤으니 못미덥기는 한데….

“겁이 많은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없잖아. 그런데 당직도 못 선다면 차라리 배를 그만 타는 편이 좋지. 이등항해사에게 이 점 확실히 주지시키고, 문제 생기면 자네나 나에게 바로 보고하라고 해.”

“저는 걱정이 됩니다만….”

“정 그렇다면 삼등항해사랑 같이 세워. 오펜 녀석이 실력은 부족해도 상황판단은 빠른 녀석이니까.”

“하긴, 몇 시간 안 남았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자네도 좀 쉬어.”

***

수많은 우려와 불안을 비웃듯이 아침이 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날씨는 또 얼마나 맑은지, 어젯밤의 일이 지독한 악몽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항해를 시작했고, 며칠이 지나 모두의 기억 속에 유령선이 흐릿해질 때쯤, 견시수가 선박을 발견하고 보고를 해왔다.

내가 있어서 긴장한 것인지 뻣뻣한 자세를 견지하던 바우어 항해사가 망원경으로 방향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선장님, 한번 보시죠. 아무래도 일레드 왕국 해군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 바우어는 더 소심해진 것 같다.

바우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멀리서 날렵한 선박 두 척이 지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새로 얻은 망원경 덕에 나는 두 배에 해군기는 없고 일레드 왕국의 국적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일반 망원경으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거리였다.

“어떻게 알았어? 저 배들이 해군이 아닌 줄.”

“선박의 형태도 그렇고, 물에 잠긴 정도도 해군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흐음, 흘수선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렴풋이 보이는 선박의 형태를 보고 정체를 추측할 정도면 정말 능력만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어휴….

“그럼 이등항해사 생각에 저놈들, 뭘까?”

“그, 글쎄요….”

“해적일 것 같은데. 그런데 곧 일레드 왕국 해군의 경비 구역 아냐?”

“네? 해적이요? 그게… 그 해군 경비 구역에는 거의 근접했습니다.”

“재밌네. 고작 두 척의 해적선으로 일레드 왕국 해군 경비 구역에서 놀고 있다니.”

바우어가 우물쭈물하더니 겨우 말을 꺼냈다.

“해적선이 아니고 수송선이나 상선 같은 것은 아닐는지요.”

“애초에 여기는 상선이 들락거릴 일도 없고, 수송선이라면 해군 소속 아닐까?”

“해군 소속이라도 군함이 아니라면 제 추측은 틀릴 수도….”

아, 바우어는 해군기가 없는 것을 모르지.

나는 그의 오류를 정정해 주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내 망원경이 성능이 좋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정말 어느 정도로 잘 보이는지 아는 사람은 부선장님과 일등항해사, 그리고 우르타 정도다.

어차피 공용으로 쓰지 않고 혼자 쓰기로 했으니 괜히 이런저런 정보를 노출시킬 필요는 없겠지.

나는 바우어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재빨리 말을 돌렸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우리 아직 후작가 문장기 안 올렸지?”

“네! 준비는 시켜두었습니다. 바로 올리라고 할까요?”

“아니, 이대로 접근한다. 견시에게 지금 포착된 선박들 지속적으로 확인하라고 해.”

잠시 의문에 찬 눈빛을 보내던 바우어는 곧 체념하고 내 명령을 전달했다.

***

서로의 마스트에 매달린 깃발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가 되자, 해적으로 추측되는 두 선박의 침로가 살짝 어긋났다가 다시 동쪽으로 향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방위 030, 거리 12,500m 미확인 선박 두 척, 일레드 왕국 상선입니다! 국적기 확인했습니다!”

나는 견시수의 보고를 귓등으로 흘리며 비틀어진 웃음을 지었다.

이놈들, 방금 전에 왜 침로가 서로 어긋났을까?

단순히 침로 변경 중에 서로 신호가 안 맞았을 수도 있지만, 왠지 우리를 보고 털지 말지 서로 의견이 달랐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의외인 점은 여전히 상선을 위장하며 천연덕스럽게 동쪽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흘수선의 깊이나 무장 상태를 보면 높은 확률로 해적선인데 말이야.

우리도 두 척이라서 맞상대하기에는 부담스러웠으려나?

내가 계속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던 두 척이 적당히 멀어진 후에, 전방에서 개량형 슬루티급으로 보이는 쾌속선 두 척과 육중한 갤로아르급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수량이 약 300톤 전후로 보이는 쾌속선들은 우리를 포착하기 무섭게 노골적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덩치만큼 기동성은 조금 떨어지는 갤로아르급 군함 역시 돛을 활짝 펼쳐서 이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있는 해적선(?) 두 척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바우어에게 말했다.

“문장기 올리라고 해. 그리고 총원 전투배치.”

“네? 저, 전투배치입니까?”

눈에 띄게 두려워하는 바우어의 모습에 살짝 짜증이 치솟았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몰랐던 일도 아니고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 아닌가?

“어 빨리! 전투배치 발령하고, 자네는 바로 일등항해사 불러와. 아 참, 가는 길에 그놈, 조나단인가 뭔가. 그놈에게 선교로 튀어오라고도 전하고.”

“네, 넷!”

바우어의 명령에 따라 고이 모셔두었던 스코타 후작 가문의 문장기가 게양되고, 바로 급박한 타종 소리가 울리며 전투배치 명령이 하달되었다.

예상치 못한 전투배치에 선원들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지만, 숙련자들을 중심으로 그럭저럭 전투 준비는 천천히 갖춰지고 있었다.

나는 준비 상황을 지켜보다가, 꽤나 근접한 일레드 군함 두 척을 다시 확인했다.

놈들도 우리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갑판 위에서 어지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속도를 늦추는 중이었다.

후작 이 새끼, 벌써 다 이야기되어 있다며?

이게 이야기 다 된 놈들의 태도야?

내가 문장기를 일부러 늦게 게양하기는 했지만, 후작의 말대로 사전 교감이 있었다면 우리의 국적기만 확인했어도 저렇게 죽일 듯이 달려들 일은 아닌 거다.

“무슨 일입니까, 리안 선장님?”

언제 올라왔는지 뺀질이(조나단)가 딱딱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저놈, 그때 이후로 늘 저런 태도다.

그전까지 얼마나 가식을 떨어댔던 것인지, 그냥 한번 삐지면 오래가는 타입인 건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물었다.

“후작 각하께서 총독과 이야기가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혹시 들은 이야기가 없습니까?”

“알지도 못하고 있다고 해도 알려드릴 이유는 없군요. 선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도 그런 명령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아오, 짜증나네.

나는 아인델프를 비롯해서 간부들이 선교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나단의 협조를 구하는 것을 깨끗하게 포기했다.

어차피 이놈이 협조 안 해도 일에는 전혀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분간 선실에서 문을 잠그고 계십시오. 어쩌면 조금 험악한 충돌이 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후작 각하께서 선장에게 내린 명령은 전투가 아닐 텐데요?”

“전투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원하면 해야 하는 법입니다. 지휘에 방해되니 이만 내려가시죠.”

“이이익...!”

조나단이 쿵쾅거리며 선교에서 사라지자 방금 도착해서 눈치를 보고 있던 아인델프가 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전투배치라니요?”

“그냥 인사야, 인사. 전투까지 갈 일은 없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당혹스러워하는 아인델프에게 나는 살짝 웃어주며 대답했다.

“그냥, 후작이 도대체 뭘 알고 싶은 건지, 내게 뭘 준건지 궁금해서 찔러보는 거야.”

“지금 이 상황이랑 그게 무슨 관련이… 저쪽은 일레드 해군 아닙니까?!”

“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