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의혹
“거리 500! 곧 포격 사거리에 접어듭니다!”
비명 같은 견시수의 보고가 쩌렁쩌렁 울렸다.
쾌속선의 화력은 오르타스 호보다 약간 부족한 수준이지만, 두 척이라면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뒤쪽에서 접근 중인 갤로아르급 군함은 솔직히 지휘력이나 용기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대충 봐도 최소한 900톤급의 육중한 덩치에 30문 이상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포격전 준비를….”
“아니, 포술장은 잠시 대기. 어차피 포격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야. 갑판장, 백기 올리고 아까 내가 전달한 내용, 수기 신호로 보내.”
“알겠습니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우르타의 의견을 기각하고 네이선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대의 반응을 보려고 조금 과격하게 대응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나도 승산 없는 싸움을 걸 생각은 없었다.
무장을 모두 해제하고 승조원 수도 30여 명으로 줄여버린 리버티 호는 전투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배 한 척으로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1:3이라면 오트라스 호가 무장상선이 아니라 군함이라도 이기기는 어려웠다.
네이선이 급히 선교를 내려가자, 아인델프가 물었다.
“왜 그러신 겁니까? 굳이 이렇게 긴장 상태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이봐, 일등항해사. 저기 멀어지는 상선을 위장한 해적들 말이야, 저 해군 놈들이 못 봤을까?”
내 말에 해군 함정들과 꽤 멀어진 해적선들의 위치와 속도를 계산하던 아인델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금 애매하군요. 봤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내가 보기엔 충분히 봤을 것 같은데. 최소한 지금은 보일 거 아냐? 그런데 해군의 반응을 봐. 저쪽은 전혀 경계하고 있지 않아.”
“당연히 저쪽은 멀어지고 있으니까요.”
“과연 그럴까?”
아인델프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중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사지역’에서 정체불명의 선박이 나타났을 때, 주변의 허가되지 않은 선박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멀어지는 저 두 선박이 해군의 허가를 받은 선박이라는 뜻인데, 해군 소속이 아니라면 해군의 허가를 득한 민간 선박이라는 말이 된다.
자, 여기에서 모순이 생긴다.
해적선으로 추정되는 두 선박이 향하는 방향은 일레드 왕국 쪽이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저 방향으로 계속 가면 케르빈 섬의 남안을 지나 해적들의 본거지로 알려진 케르빈 군도를 지나게 된다.
그런 위험한 곳을 지나야 하는 상선들을 호위도 없이 보낸다고?
멀어지는 두 선박이 진짜 일레드의 상선이라고 해도, 저 해군들은 우리가 아니라 저쪽을 오히려 더 신경 쓰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수기 신호입니다! 우리가 일레드 왕국의 군사지역을 침범했으니, 현 위치에 정선하랍니다!”
“응답해. 벨로키나 왕국 스코타 후작 각하께서 시논 총독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왔다고.”
내 말을 견시수에게 전달한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 위치에 정선합니까?”
“그래, 리버티 호도 정선하라고 해.”
***
나는 줄사다리를 잡고 올라오는 중년의 장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 번 노려보더니, 내 손을 무시하고 스스로 배 위에 올라왔다.
초면에 인상 구기기는, 지들도 잘한 거 없으면서.
아무리 군사지역이라고 해도 군함도 아닌 상선에게 사전 경고도 없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 것이 정상은 아니잖아?
하지만 괜히 기분 내키는 대로 해서 저들에게 빌미를 줄 필요는 없겠지.
“승선을 환영합니다, 오트라스 호의 선장 리안입니다.”
갑판 위에 올라와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 옷을 괜히 툭툭 털고 있는 장교에게 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었다.
이번만큼은 내 손을 거절하기 어려웠는지, 장교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내 손을 거의 쳐내듯이 잡았다가 놓으며 불퉁하게 대답했다.
“일레드 왕국 해군, 시논 섬 연안경비대 소속 카리사함의 해병대장 마쉬 소령이오. 귀하는 본국의 군사지역을 무단으로 침범했소. 이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
“잠깐, 이미 수기 신호로 스코타 후작 각하의 서신을 가지고 왔다고 전달했습니다만.”
자신의 말이 끊기자, 그렇지 않아도 냉막한 얼굴에서 더 강력한 냉기를 풀풀 풍기며 그가 대답했다.
“흥, 그 신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선장은 이 배의 선창 아래 어디쯤에 있었겠지. 서신을 가지고 왔다면서 우리를 보자마자 전투 준비를 한 이유가 뭐요?”
“저는 후작 각하께 이미 이야기가 끝났으니 서신만 전달하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선박들이 있다면 그게 해군기를 단 해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 근처는 해적이 많은 곳 아닙니까?”
천연덕스러운 내 대답에 그는 살짝 짜증스러운 어조로 비난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여기는 본국의 군사지역으로 해적 따위가 지날 수 있는 곳이 아니오.”
“그렇습니까? 제가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이라고는 근처의 제도에 해적들의 본거지가 많다는 소문뿐이니까요. 후작 각하의 중요한 서신을 옮기는 자로서 맥없이 해적들에게 항복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됐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전달하라는 서신이나 넘기시오. 만약 우리를 속인 것이라면 살아서 돌아가는 것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요.”
자신을 따라온 인원이 모두 갑판 위에 올라온 것을 확인한 마쉬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서신을 요구했다.
무려 세 척의 단정을 동원하여 배에 올라온 인원은 20명 내외, 마쉬가 자신을 가질 만도 했다.
저 인원이 모두 해병대라면 세 배가 넘는 선원으로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전병기 네이선이 없다면 말이지.
나는 난처한 표정을 연기하며 손사래를 쳤다.
“마쉬 소령님, 저는 후작 각하께 서신을 총독께 직접 전하라고 명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답장도 받아야 하구요. 소령님은 그 서신을 받을 자격이 없어 보이십니다만?”
상당한 도발이었지만 마쉬의 표정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 공격에 강한 타입인 모양이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마쉬는 결국 양보하고 물러섰다.
고작 소령 따위가 천상계에서 노니시는 후작 각하와 총독 각하의 서신을 까 볼 권한은 없었으니까.
“…좋소, 그래도 나는 그 서신을 확인해야겠소. 그 서신이 가짜인지 정도는 알아야 위에 보고를 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소령님만 저를 따라오시죠.”
충분히 예상했던 말이기 때문에 선선히 수락하고 몸을 돌리는데 마쉬의 콧방귀 소리가 들렸다.
“흥, 내가 귀하를 어떻게 믿고 혼자 가지? 호위를 데리고 가겠소.”
와, 한순간에 나처럼 착하고 순박한 사람을 비열한 암살자로 만들어버리네?
너도 한 대 맞아봐라.
“그럼 갑판장도 함께 가지. 소령님이 강압적으로 뭘 하려고 하면 나는 저항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야.”
이번에는 도발이 먹혔는지 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는 듯했지만, 그는 더는 말하지 않고 자신의 뒤에 도열해 있는 부하들 중에 세 사람을 불러냈다.
“앞장서시오.”
“무슨 호위를 셋씩이나….”
“귀하가 혼자 간다면 나도 호위를 한 사람으로 줄이겠소.”
“그냥 다 함께 가시죠. 다행히 제 방이 좀 넓으니 다섯 사람 정도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선장실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네이선과 호위 셋이 문 앞에서 눈싸움을 하는 사이에 내가 고이 모셔둔 후작의 서신을 확인했다.
꼼꼼하게 봉투의 재질과 밀랍 봉인, 봉인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한 마쉬는 신경질적으로 서신을 내려놓았다.
“진짜 스코타 후작 가문의 서신인 모양이군.”
“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제가 왜 하겠습니까?”
“감히 본 함대를 보고 바로 전투를 준비한 선장이 하기에 적절한 말은 아닌 듯하오만?”
“그러는 그쪽도 동쪽으로 사라진 해적으로 의심되는 선박들은 내버려 두고 다짜고짜 우리에게만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순간적으로 마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동쪽으로 사라진 상선들은 이미 허가받은 선단이오. 무단 침입을 한 그대와 다르지.”
“상선이라고요?”
“그렇소.”
“고작 두 척의 상선이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한 지역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근처는 본국 해군의 중요 경계 지역이고 위험할 일은 없소.”
전혀 당황하지 않고 모범답안을 내놓는 그에게 나는 기습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말씀은, 동쪽의 군도, 케르빈 군도에 해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
어쩌면 예전에 부선장님이 말했던 가설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귀하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본관이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군. 함장님께 전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마쉬 소령은 급히 내 방을 나가서 카리사함으로 복귀하기 위해 단정으로 옮겨 탔다.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뜨고 마쉬 일행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네이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웬 한숨?”
“아닙니다.”
“왜? 상대하기 힘들어 보였어?”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네이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붙어봐야 확실하게 알겠지만, 상당히 단련된 녀석들이었습니다. 우리 배에서 저들을 맞상대할만한 사람이라고 해봐야 열 명 내외일 겁니다. 만약 그들과 싸웠다면….”
“어휴, 끔찍한 소리를! 우리가 해군이랑 왜 싸워?”
네이선의 말에 내가 결과를 예상해보고는 진저리를 치고 있는데 부선장님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쨌든 아무 일 없이 물러나서 다행입니다.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흐음, 확실한 것은 아니고… 혹시 부선장님이 전에 하셨던 말씀 기억나세요?”
“무슨 말을 말씀하시는지?”
“아니에요, 다음에 이야기하죠.”
나는 부선장님에게 다음을 기약하고 크게 소리쳤다.
“전투 배치 해제! 모두 무기 반납하고 항해 준비해! 갑판장은 무기 확실히 수령하고, 저놈들을 따라가야 할 테니까 선교는 일등항해사가 맡도록 해. 이등항해사는 리버티 호에 내가 한 말 수기로 전달하고. 모두 움직여!”
***
내 예상대로 곧 해군 측에서 따라오라는 수기 신호가 올라왔다.
카리사함이 길을 인도하고 그 뒤를 오트라스가, 마지막으로 리버티 호가 따랐고, 쾌속선 두 척은 우리의 좌우 양쪽 후방에 따라왔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도주를 시도하더라도 완벽하게 막아설 수 있는 배치였다.
기분이 딱히 좋지는 않았지만, 별수 없지, 뭐.
저녁나절이 되었을 때, 우리는 거대한 섬, 아니, 작은 대륙 수준의 땅덩어리를 시야에 넣을 수 있었다.
섬의 좌우가 시야에 닿지 않는 곳까지 이어지는데 섬이라니, 섬이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그냥 대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꼴을 보아하니 해가 지기 전에 기항은 못 할 것 같은데 어쩌려는 걸까?
한밤중에 배를 부두에 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야간에 항구 근처에 배가 접근하더라도 급한 일이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박을 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다.
그리고 애초에, 대부분의 배들은 항구에 들어가는 시간이 낮이 되도록 그 전에 속도를 조절한다.
항구 근처를 경계하던 군함들과 약간의 신호를 주고받던 카리사함은 결국 입항을 강행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강요에 의해 한밤중에 입항을 하는 묘기를… 하지는 않았다.
야간의 위험을 인지해서인지 우리가 입항할 부두에는 수많은 횃불이 켜졌고 돛을 완전히 내린 오트라스 호는 네 척의 예인선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어휴, 이 난리를 치면서까지 굳이 야간에 배를 대야 하나?”
선원들을 지휘하던 네이선이 툴툴거리며 선교로 올라왔다.
“그러게 말이야. 당연히 항구 근처에서 날 밝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선박의 통행이 잦은 대형 교역항에서 항구 근처에 배를 정선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항구 경비대에게 혼쭐이 날 일이다.
하지만 이곳은 교역항도 아니고 딱히 배가 많이 들락거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까지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별 사고 없이 오트라스 호는 부두에 접안하는 것에 성공했고, 우리가 현문을 설치하기 무섭게 완전 무장한 십여 명의 병사들이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왔다.
현문을 설치하던 선원들이 발끈하며 질펀한 욕을 내뱉었지만, 그들의 단단한 보호구와 더 단단해 보이는 무기를 보고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이 배의 선장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나라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어두운 데다가 투구를 써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남자가 기계적으로 말을 이었다.
“상황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항구에 기항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누구도 이 배를 벗어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선장님은 특별히 관사 별실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봐요, 그쪽의 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예의 아닙니까?”
“관사 이용은 거절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아침까지 조용히 쉬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애초에 관사는커녕 내 말 따위 들을 생각이 없었구만?
말을 마친 놈은 내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대로 뒤로 돌아 다시 현문을 향했다.
그리고 현문을 내려가기 전에 깜빡했다는 듯이 돌아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아, 밤에 횃불의 수는 세 개 이하로 유지해 주시고, 수상한 움직임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은 삼가십시오. 군사지역에서의 수상한 행동은 첩보 행위로 간주되어 경고 없이 제재당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뭐지? 인간이 아니고 입력된 말만 내뱉는 안드로이드인가?
여기 진짜 이상하다.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비밀을 숨기려고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는 거야?
안에서 마왕이라도 소환하는 중인가?
현문 쪽을 보니 방금 내려간 놈과 비슷한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오트라스 호 주변의 부두를 완전히 점거하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 30여 명, 현문 외에는 제대로 된 통로가 없는 우리를 완전히 봉쇄하기에 충분한 병력이었다.
굳이 저렇게까지 안 하더라도 굳이 나갈 생각도 없는데 말이야.
“선장님, 어떻게 할까요? 선원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리버티 호는?”
“오른쪽 뒤쪽,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 정박한 모양입니다. 견시대에서는 보이는데 갑판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기랄, 만나지도 못하게 만들어놨군. 선원들 동요는 심해?”
“아무래도 땅을 밟지도 못하게 하니까요. 유령선 일도 있었고….”
“아오, 총체적 난국이네. 술 남았나?”
술이라는 말에 눈알을 굴리던 네이선이 한참을 갈등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겨우 대답했다.
“술은 안 푸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상에, 진짜 별일이 다 생기는군, 네이선이 술을 거절해?
“왜? 남은 술이 없어? 그럼 상품으로 챙겨온 거라도 풀어, 어차피 팔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괜히 술을 풀었다가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대응을 못 하지 않겠습니까?”
새삼스러운 눈으로 네이선을 보았다.
내 생각에 딱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생긴다고 해도 음주 여부와 상관없이 뾰족한 대응 수단이 없을 것 같지만, 네이선의 속 깊은 마음이 대견했다.
“그럼 돈이지 뭐. 여기 정박 하루당 항해 수당 두 배씩 쳐준다고 해.”
“네?! 그렇게 해도 되겠어?! 아니, 되겠습니까?”
“당연히 후작에게 청구해야지. 그리고 돌아가는 꼴을 보니 우리 내일 출항해야 할 것 같아.”
***
내 예상대로 날이 밝기 무섭게 일단의 병사들이 배에 올라왔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일찌감치 선교에 나와 있던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미리 현문으로 나가서 맞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분위기인데 괜히 트러블이 일어날 기회를 주느니 내가 직접 상대하는 게 나았다.
“선장님 되십니까? 총독 각하께서 접견을 허락하셨습니다. 서신을 들고 따라오시지요.”
“혼자 가야 합니까?”
인사도 없이 무뚝뚝하게 용건만 전달하는 군인에게 불퉁하게 묻자, 그는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서신이 두 사람이 들어야 할 정도로 무겁습니까?”
“…기다리시오, 서신을 가지고 올 테니.”
나는 방에서 서신을 가지고 나오며 나를 따라오는 아인델프에게 말했다.
“나 없는 동안 배를 잘 부탁해. 특히 그놈, 조나단. 돌발행동 못 하게 꼭 막고.”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내 부탁 중 두 번째는 불필요한 말이었다.
내가 다시 갑판에 나왔을 때 이미 ‘그놈’이 난장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불편한 표정으로 묻자, 무표정한 군인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이 사람이 자신도 총독 각하를 봐야 한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하, 이 새끼 진짜 아예 진상이 되기로 한 건가?
“저는 잘 모릅니다. 전 후작 각하의 명으로 그를 태웠을 뿐이고 그가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리안 선장님! 저는 이번 일의 모든 과정을 볼 권리가 있습니다!”
“이봐요, 조나단 씨. 말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만? 분명히 처음에는 항해를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고 이번 일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경험해야 하는 것은 항해뿐만이 아니라 이번 일도 포함된 겁니다.”
내 실수다.
그냥 죽였어야 해.
일단 죽여 놓고 후작에게 사고로 죽었다고 해야 했다.
선원 중에 후작의 끄나풀이 있을 확률이 높고 굳이 끄나풀이 없더라도 비밀 유지는 힘들 것 같아서 참았는데, 일단 저지르고 볼 걸 그랬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군인에게 결정을 미뤘다.
“뭐, 그렇다고 하는군요. 이 사람은 제 관할이 아니라서.”
나와 조나단을 번갈아 가며 보던 군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준비한 마차에 두 사람은 태울 수 있으니 그럼 같이 가시지요.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군요. 더 준비하실 것이 없다면 지금 바로 움직이셨으면 합니다만.”
“갑시다. 총독관저가 멀지 않았으면 좋겠군.”
후작의 명령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 되면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일레드 왕국은 이 커다란 섬을 통제해가면서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