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숨기고 싶은 것
선미에서 후방을 살피던 나는 한참 만에 눈에서 망원경을 떼고 옆에 서 있던 오펜에게 말했다.
“확실히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펜 항해사가 여기서 계속 확인하도록 해. 견시대에서도 확인하겠지만, 거기는 계속 뒤만 보고 있을 수 없으니까.”
“네, 선장님.”
오펜에게 경계 구역의 끝이라고 돌아가는 초계함들이 혹시 다시 돌아오는지 감시를 부탁하고 선교로 이동했다.
총독이나 일레드 해군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지만, 정보가 워낙 부족하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겠지.
선교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본 부선장님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아, 선장님, 마침 여기 계셨군요.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급한 이야기인가요, 부선장님?”
내 말에 하늘의 별을 확인한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지금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 방으로 가시죠.”
“네.”
내 방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술을 꺼내서 한 잔 따른 에른스트 부선장은 반쯤 채운 컵을 내려놓고 새 컵을 들며 물었다.
“너도 한 잔 할 테냐?”
“누가 보면 부선장님 방인 줄 알겠네요. 어휴… 네, 저도 한 잔 주세요.”
능청스러운 그의 태도에 내가 장난스럽게 투덜거렸지만, 그는 그저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술을 점점 더 많이 드시는 것 같다.
낮에도 종종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던데.
“부선장님, 요즘 술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평소에 낮에는 술 안 드셨잖아요.”
“지금은 밤이다만?”
“아, 오늘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글쎄다, 그런가?”
살짝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던 그가 갑자기 나에게 힐난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네가 갑자기 부선장을 시켜서 그런 것 아니냐, 갑판장을 관두니까 낮에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자꾸 술을 찾게 되잖아.”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시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톡 쏘듯이 말하자, 에른스트는 괜히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돌렸다.
“그만, 그만! 관두자, 내가 지금 너에게 술 가지고 잔소리 들으러 온 게 아니니까.”
“알았어요,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만, 내가 항해도를 좀 확인해 봐도 되겠냐?”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술을 마시며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췄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부선장은 항해도를 볼 자격이 있다.
하지만 에른스트의 출신이 갑판장인지라 그동안 항해도를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었다.
애초에 항해술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항해도를 보기도 쉽지 않고, 거기에 뭔가를 기록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항해도는 배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문서이기도 했다.
항해도를 분실하거나 잘못된 정보가 들어가면 항해 자체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조금이 아니고 많이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부선장님이 굳이 항해도를 확인하셔야 할 이유가 있어요?”
“노파심 같다만, 항해사 중에 이쪽의 해역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쪽 바다는 어떤 해로가 지나가는 곳도 아니었고, 해적들의 본거지로 알려진 케르빈 군도 인근이다 보니 굳이 이쪽으로 오는 배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로가 아니라고 해서 배가 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해로라는 것 자체가 어디까지나 조류와 풍향 등의 환경을 고려해서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루트를 말하는 것일 뿐이니까.
“그렇기는 한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그리고 그게 부선장님이 항해도를 보시겠다는 이유랑 무슨 관련이… 아, 부선장님은 소싯적에 이쪽을 많이 다니셨죠?”
에른스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크으, 네 말대로 이쪽에 익숙한 사람은 나밖에 없지. 내가 문제를 하나 내 보지. 붉은모래 해적단의 본거지가 여기 케르빈 군도라는 것이 알려진 이후에도 왜 여기가 공격당하지 않은 것 같냐?”
“공격당했잖아요? 전멸했다면서요.”
“정확하게 말하면 애쉬노르 항구 남서쪽, 케르빈 군도의 동남쪽 해역에서 포위, 전멸당했지.”
“본거지까지 탈탈 털렸다고 하던데?”
“한 번 전투로 싸울만한 녀석은 다 죽고, 살아남은 놈들은 도망갔으니 본거지라고 별수 있겠느냐?
“아! 하긴….”
내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야. 사실 그 전에 몇 번이나 각국의 해군이 토벌을 시도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해적선을 잡기는 힘드니 본거지를 치려고 한 것이지.”
“어? 진짜요? 그럼 그 토벌은 붉은모래 해적단이 이겼다는 말인가요? 저 군도를 끼고 싸워서?”
“이겼다… 라고 말하기에는 좀 민망하지. 하지만 토벌 함대가 아무런 수확 없이 철수했으니 전략적 승리랄까?”
“와, 제법이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해적이 해군을 이기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흐흐흐, 그때나 지금이나 군도에 대한 자세한 해도가 없었거든. 이제 일레드 왕국 정도는 해도가 있을 것도 같다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해전에서도 환경은 중요하다.
바람, 조류, 육지의 상황에 따라 불리한 전투가 유리해질 수도, 다 이긴 전투에서도 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환경이 압도적인 화력마저 무시할 수 있냐고 하면 조금 애매해진다.
해군 정규 함대의 화력이라면, 대포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해적들이 편법으로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쯧,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지금 네가 알고 있는 해적들과 붉은모래 해적단이 같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최소한 그때 두목이 직접 이끄는 7척의 해적선은 해군 군함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으니까.”
“아앗! 나 그 이야기 들어봤어요! 그, 공포의 칠공주파? 뭐 그런 거라던데?”
내가 아는 척을 하자 에른스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포의 칠공주? 그게 뭐냐?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는… 에잉…! 하여간 전투력도 좋았지만 알다시피 해군과 정면으로 붙을 정도는 아니었지. 실제로 마지막 해전에서 박살이 나버렸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최소한 해군을 격퇴할 정도는 되었었다.”
“허, 그 정도로 지형이 좋아요?”
“일단 군도라는 곳 자체가 익숙하지 않으면 기동이 어렵기도 하지만, 특히 이쪽은 숨어있는 암초와 여울도 많아. 그리고 군도 남쪽에는 조류가 수시로 바뀌는 곳도 있어서 진입이 쉽지 않지, 그래서 내가 해도를 보고 위험한 곳을 좀 짚어주고 싶어서 그런다.”
“그게 우리가 위험할 정도예요? 섬 근처로 가서 탐사하고 그럴 생각까지는 아닌데.”
여울이나 조류가 바뀌는 정도로 오트라스 호 같은 배수량 700톤이 넘는 배를 위험에 빠뜨리기는 쉽지가 않다.
암초는 선박의 크기에 상관없이 굉장히 위험하지만, 굳이 섬 근처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부딪히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고.
망망대해 한가운데 숨어있는 암초 같은 것은 굉장히 드문 편이다.
하지만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에른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확신은 못 하겠다. 하지만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 아는 것은 피하는 쪽이 좋지 않겠냐?”
부선장님의 대답에 나는 긴장을 바짝 끌어올렸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위험할 수도 있는 거다.
정말 재수 없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암초에라도 부딪히면 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부선장님이 해도실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부선장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겠고, 나도 당연히 괜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부선장님이 해도실에 들어갈 만한 적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부선장님이 예전에 이쪽을 좀 다녀봐서 아신대.’라고 하기에는 누가 들어도 부선장님이 예전에 해적이었다고 밝히는 꼴이니 말이다.
부선장님의 과거를 알았다고 갑자기 선상 반란이 일어나거나, 누군가가 부선장님을 암살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선입관이 생기거나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지 않겠어?
뱃사람들에게 ‘해적’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존재다.
“흐음, 네가 잠깐 들고 오면 안 되겠냐?”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기항 중이면 몰라도 항해 중에 어떻게 그래요?”
“그렇긴 하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손뼉을 치며 웃음을 지었다.
“부선장님, 지금 급하게 해야 해요?”
“아니, 그건 아니다만….”
“그럼 이렇게 하시죠. 내일 아침에….”
내 이야기를 들은 부선장님은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구나, 그럼 아침에 선교로 올라가마.”
“네, 그럼 쉬세요. 또 술 드시지 말고요.”
“에잉, 잔소리 좀 그만 하라니까.”
자리에서 일어서서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부선장님을 보다가 나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잠깐만요!”
“응? 왜 그러냐?”
자리에서 일어서 그에게 다가간 나는 확실히 전보다 근육이 줄어든 그의 몸을 한번 훑어보며
물었다.
“뭐지? 어디 아파요?”
“으응? 뭔 소리야, 갑자기?”
“방금 왼발을 좀 저시는 것 같던데?”
“어? 아, 아, 그것 말이냐? 엊그제 삐끗했다.”
엊그제 뭐가 있었나?
그리고 뭘 얼마나 삐끗하셨길래 이틀이 지나도록 다리를 절어?
“조심 좀 하시지, 많이 아파요? 닥터에게는 가 봤구요?”
“그만, 그만! 고작 삐끗한 것 가지고 뭘 치료까지 받아?”
“노인네가 진짜! 그러다가 심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뭐라고? 노인네한테 한번 맞아볼 테냐?”
“무슨 말만 하면 때린대? 그리고 이제 저 때리면 하극상이거든요?”
“에잉, 더러워서 배를 그만 타던가 해야지.”
짐짓 진짜 때리려는 듯 오른손을 들어 올렸던 부선장님은 혀를 차며 다시 몸을 돌렸다.
“아, 내일 선교 오기 전에 닥터한테 먼저 가봐요! 늙으면 뼈랑 관절은 잘 낫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시끄러워!”
아, 진짜 은퇴시켜야 하나?
***
다음 날 아침, 부선장님과의 약속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비몽사몽간에 침대에서 내려오던 내 발에 뭔가가 걸려 넘어지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뭐야? 어제 다 치웠는데?”
뭔가 싶어 바닥을 보니 처음 보는 기묘한 물건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그 형태에 나는 홀린 듯이 무릎을 굽혀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 재질이 손에 닿으며 기이한 전율이 몸에 흘렀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사용 방법은 알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바닥을 훑으며 다른 한쪽을 찾았다.
그런데 이거, 전기로 작동하는 거 아냐?
마음 같아서야 새로 얻은 물건을 연구해 보고 싶었지만, 부선장님과 약속해 놓은 것이 있어서 계속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침대 뒤쪽 깊숙한 곳에 물건을 숨기고 선교로 올라갔다.
“좋은 아침!”
“서, 선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별일 없었지?”
“네,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괜히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좌현 쪽으로 멀리 흐릿하게 섬 같은 형태가 보였다.
“저쪽에 섬이 있는 것 같은데?”
“네?”
내 말에 황급히 망원경으로 그쪽을 확인하던 바우어가 한참 후에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걸 보니 꽤나 당황한 모양이다.
“그, 제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오래된 망원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는 안 보일 수도 있겠네. 이걸로 한번 보겠어?”
내가 내 망원경을 넘겨주자 조심스럽게 망원경을 받아서 좌현 쪽을 살피던 바우어가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정말 좋은 망원경이군요. 선장님이 말씀하신 섬, 확인했습니다. 거리는 꽤 되는 것 같은데요, 적어도 10km는 넘는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면 바우어 항해사도 망원경 정도는 좋은 녀석으로 하나 구하는 게 어때?”
내가 망원경을 돌려주던 바우어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조금 민감한 말이기는 하지만, 항해사가 항해 도구는 좋은 걸로 가지고 있어야지….
“뭐, 다음 항구에 기항하면 급여는 충분히 나올 테니 말이야. 괜히 쓸데없이 창관에 가서 돈 탕진하지 말고 먼저 망원경부터 하나 사라구.”
“네, 네, 알겠습니다.”
내가 괜한 말로 이상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편안한 밤 되셨습니까?”
“응? 부선장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이미 이야기된 상황이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물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이등항해사, 선장님과 잠시 이야기해도 되겠나?”
“네, 물론입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나는 조타수와 함께 자리를 뜨려는 바우어에게 손을 내저으며 급하게 말했다.
“아냐, 뭘 그렇게까지 해? 당직 항해사가 선교를 비우면 되나? 어디 보자… 아, 지금 해도실에 아무도 없지?”
“네? 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부선장님, 해도실에서 이야기할까요? 이등항해사는 잠시 주변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알겠습니다.”
부선장님과 함께 해도실로 자리를 옮긴 나는 문을 꼼꼼하게 닫은 뒤 부선장님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어때요? 자연스러웠죠?”
“역시 잔머리 하나는… 쯧, 이럴 시간 없다, 괜히 오래 걸리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심을 받을지 모르니까 빨리하자꾸나.”
“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그럼 일단 우리 위치가 지금 어디쯤이지?”
“어디 보자, 여기가 오늘 새벽에 표시한 위치니까….”
나는 부선장님과 머리를 맞대고 부선장님이 기억하는 위험한 지역을 차근차근 기록해 나갔다.
우리가 가려는 항로와는 겹치지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것이 까딱했으면 위험할 뻔했다.
역시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미리 대비하는 편이 더 좋은 것 아니겠어?
이제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새로 얻은 세상에 유일한 장난감(?) 사용법 좀 공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