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외전)스코타 후작 가문의 사람들
- 스코타 후작 저택 집무실 -
“후작 각하, 이튼 경입니다.”
“들라 하게.”
“네.”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이튼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앉게. 오늘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뭘 그리 급하게 왔나? 급하게 보고할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닙니다, 각하께서 지시하신 일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공자께서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흐흐, 안부는 무슨. 늙은이가 갈 때가 되면 가야지. 그놈도 이제 제법 머리가 굵어졌으니 사사건건 참견하는 내가 귀찮을 게야.”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직 정정하신데요. 그보다 오는 길에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서 말입니다만….”
그때까지 책상의 서류에 집중하던 후작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 늙은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흐린 빛 하나 없는 후작의 눈이 이튼을 훑었다.
“이상한 이야기라, 뭔가? 일단 들어보지.”
후작을 모신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 이튼이었지만, 지금도 그의 눈을 보면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마른침을 삼킨 이튼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조나단 님이 외부 상선을 타고 나가셨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그 상선이 아가씨가 말하던 그 상선입니까?”
“아, 그랬지. 그렇지 않아도 필요하던 참인데 시기적절하게 그가 왔더군. 그래, 그게 이상한 이야기인가?”
“각하, 그자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시논 총독에게 보내는 서신이 그리 가볍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게다가 조나단 님까지 딸려 보내시다니요?”
후작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쯧! 어쩌겠는가, 내가 죽기 전에 먹고 살 방도는 마련해 줘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공식적으로 내 유산을 받을 수도 없는 아이이니. 설마 큰 아이가 관심을 갖던가?”
이튼은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첫째 공자께서는 한 번도 조나단 님을 거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야지.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내 모든 것을 물려받을 녀석이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되지. 그런데 자네가 갑자기 이 이야기를 굳이 내게 찾아와서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군.”
“그게… 조나단 님께 선단을 맡기실 요량이시라면 본가 소속 선단도 있는데 굳이 왜 그런 신뢰할 수 없는 외부인에게 조나단 님의 신병을 맡기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후작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튼 경, 자네도 배를 타 본 적은 없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본가에서 바다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각하께서 델라 항구와 선단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계시는지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래, 당분간, 아니, 어쩌면 미래는 바다를 쥐는 자가 세상을 지배할 거야. 우리 가문도 그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지. 그래서 조나단 그놈을 바다로 보내기로 한 거고.”
“이해는 합니다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의 이튼의 말을 끊은 후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조나단이 우리 가문의 선단에 들어가서 뭘 배우겠나? 잘해봐야 내 아들이라면서 거들먹거리기나 하겠지. 하지만 조나단의 정체를 모르는 그자와 부대끼다 보면 뭐라도 배우지 않겠나? 거친 선원들을 제대로 휘어잡으려면 고생도 해봐야지, 흘흘흘.”
“하지만 각하,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선장이라는 자, 제법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못 배운 뱃놈 아닙니까? 고립된 배 위에서 일어난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딱 그 정도인 게지. 따로 시킬 일도 있어서 그랬으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어린 선장, 리안이라고 했던가? 그 친구는 함부로 움직일 녀석은 아니야. 조나단에게 문제가 생기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이튼은 조나단이 맡은 임무가 궁금했지만, 후작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이상 그 이야기를 더 캐물을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의 주군인 후작은 가신들에게만큼은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그에게 시간을 할애해줄 사람은 아니었다.
“그 선장이라는 자를 높게 보시는 것 같은데,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래봐야 비천한 출신의 애송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흐흐흐, 으하하하! 그러니까 자네는 고귀한 출신에 노련한 사람이라는 뜻인가?”
“그,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폭소를 터뜨리는 후작의 말에 이튼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튼 자신 역시 후작에 비하면 출신도, 능력도, 경험도 자랑할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평민 출신의 어린 뱃놈보다야 부족할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신경도 쓰지 않던 미미한 존재가 갑자기 후작의 관심을 독차지했으니, 내심 거슬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처음에는 괘씸했지. 내 집에서 내 허락도 없이 엘리안을 만났으니 말이야. 그다음에는 호기심이었네. 엘리안과 알렌 경을 밀항시킨 자, 그 과정에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한 자,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무려 선장이 되어버린 남자. 재미있지 않나?”
알렌이라는 말에 잠시 굳은 표정을 지었던 이튼이 재빨리 표정을 지우고 동의했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특이하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 인물은 많습니다.”
“아니야, 고작 그 정도가 아니야. 제국 함대 창설의 주역이었던 테일러 제독이 특별히 선택하고, 1년 만에 무려 부함장에까지 오른 녀석이야. 더 재미있는 사실이 뭔 줄 아나? 제국 함대를 수장시킨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한 자가 바로 그 리안이라는 아이일세. 으하하하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혼자서 한참을 웃던 후작이 겨우 숨을 가다듬고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왕국 첩보부 부부장이 찾아왔더군. 내가 조사하라고 한 인물이 이자가 맞냐면서 말이야. 알고 보니 제국 함대의 기동계획을 빼돌린 첩자가 바로 그자이더군. 당연히 죽었을 줄 알았던 그자가 살아있다는 말에 부부장이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으니, 그 정도 운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지 않겠나? 게다가 이후의 행보를 보게. 떠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엉망인 배를 타고 그 유명한 울부짖는 바다를 탈출한 것도 모자라, 지금 무려 배 두 척을 끄는 선단의 장이 되었어. 이 정도면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그런….”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를 들은 이튼의 입이 절로 벌어져서 닫힐 줄을 몰랐다.
“물론, 아주 약간의 검증은 필요하겠지만 말일세.”
“그렇다면 이번 일은….”
“이런, 내가 긴 여행에 지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았군. 이만 쉬도록 하게.”
새로운 의문이 몇 개나 더 생긴 이튼이었지만, 후작의 부드러운 축객령에 군말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우겨서도 안 되고, 우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튼 경, 요즘 알렌 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지? 그 마음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내 손님과 내 가신이 싸운다는 이야기는 이 늙은이가 듣기에 좀 거북하다네.”
정중히 예를 올리고 조심스럽게 물러서는 그의 뒤에 꽂히는 후작의 말에 이튼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엘리안 왕녀 접객실 -
시녀들조차 물린 접객실 안에서 엘리안은 알렌과 마주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차는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찻잔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알렌 경.”
“…평안하셨습니까, 아가씨.”
“멀리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후작 각하께서 명, 아니, 부탁하신 일을 처리하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알렌 경.”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엘리안의 눈을 보던 알렌이 급히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네, 아가씨. 말씀하십시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 알렌도 엘리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할아버님께 충성을 맹세하세요. 저는 경의 충성을 받을 자격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제 주군이신 국왕 폐하께….”
“그만 하세요.”
엘리안은 이미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반사적으로 반복하려는 알렌을 저지했다.
“아바마마에 대한 충성을 계속 유지하시려면 제가 아니라 에논 오빠나 데이먼을 찾아가셔야지요. 왜 여자인 제 옆에 붙어 계십니까? 이 정도 하셨으면 아바마마에 대한 의리는 충분히 지키신 겁니다. 이제 새 주인을 찾으셔야지요. 지금 경은 공식적으로 기사조차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요! 아무리 방에 감금되다시피 한 저라도 경과 이튼 경과의 이야기는 들어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모욕을 감수하시는 건가요?”
물론 엘리안은 그 이유를 짐작,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별로 친하지도 않던 데이먼에게 돌아갈 생각까지 했을까?
그에게 돌아가면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왕녀님, 왕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왕녀님을 두고 저 혼자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그렇다고 후작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왕녀님을 더 이상 모실 수 없을 테니 그럴 수는 없지요.”
“저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왕녀라는 말, 이제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마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알렌은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 식으면서 더 강렬하게 올라오는 씁쓸한 향이 정신을 일깨웠다.
“그자가 왔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자라면….”
“리안이라고 했던가요, 저희를 도왔던 선원 말입니다.”
“아, 리안 선장… 그가, 그가 왔었나요?”
알렌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전보다 더 야윈 엘리안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사실상의 감금, 자신조차 없으니 외부 소식은커녕 저택 내의 소식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네, 후작의 명을 받고 떠났다고 합니다. 후작이 은행을 통해 호출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하려던 것을 할아버님이 하셨군요.”
“목적은 다르지만 말이죠.”
“다시, 다시 그를 볼 수 있을까요?”
간절함이 담긴 엘리안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돌려 반쯤 열린 문을 노려보았다.
느낌상 문 뒤는 아니다.
잘 벼린 칼날 같은 감각을 가진 그가 있는데도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서 말을 엿듣는 자가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저 모퉁이 뒤쪽이라면?
거기까지 말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사람이 서 있다고 해도 알렌 역시 알아차리기 어려운 거리였다.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그리고 아마도… 그를 다시 보시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그런가요….”
눈에 띄게 실망하는 그녀의 모습에 알렌은 가슴 어디쯤이 답답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 남자 때문에 그녀의 기분이 널뛰듯이 바뀌는 것이 거슬렸다.
그래서였을까, 알렌은 충동적으로 숨기려고 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이미 결혼에 대해서 조율이 거의 끝난 모양입니다.”
“네?”
깜짝 놀라는 엘리안을 보며 알렌은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경이 죄송할 일이 아니잖아요.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으니.”
“면목 없습니다.”
그녀의 결혼 상대로 예정된 사람은 브라키오스 백작이었다.
얼마 전에 아내가 병으로 죽어 두 번째 신붓감을 구하고 있다고 했지.
백작은 왕국 중남부의 대농장과 철광산을 소유한데다가 왕국의 군부대신으로 국정 발언권도 강한, 아주 이상적인 상대였다.
어디까지나 후작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정략결혼 상대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녀보다 무려 25세나 많은 아저씨일 뿐이다.
얼굴도 모르고 이미 한 번 결혼까지 했던 중년의 남자가 꽃다운 20세 아가씨의 마음에 들 턱이 있나?
그녀는 뭔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보통 귀족 가문의 영애라는 위치에 있는 여자의 운명이 그러했다.
태어나면 인형처럼 키워지다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가문에서 찾은 적당한 상대와 결혼하는,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
그나마 이런 삶을 사는 것은 평탄한 삶이었다.
최소한 결혼하기 전에 가문이 망해서 팔려가듯이 귀족가의 후처, 정부, 노리개가 되거나 하녀가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만약 데이먼에게 몸을 의탁했다면 달라졌을까?
리안이 조사해 온 귀족들을 상기한 엘리안은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후작에 비하면 데이먼 쪽이 상황이 더 좋지 않고, 반대로 엘리안의 가치는 더 높다.
왕국의 실세로서 안정적인 힘을 가진 후작에 비하면 데이먼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반란군의 수장에 불과했으니까.
심지어 벨로키나 왕국에서 그녀는 후작의 외손녀에 불과하지만, 데이먼이 있는 프레티아 왕국으로 가면 무려 전대 국왕의 고명딸, 왕녀가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데이먼 쪽이 그녀에 대한 대우가 더 좋을 것 같지만 현실은 또 달랐다.
세력이 약한 데이먼 입장에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그녀를 더 비싸게 팔아치우고 싶을 것이고, 그 말은 그녀의 결혼 상대가 더 나빠진다는 말과 비슷했다.
단적인 예로 리안이 뽑아 온 상대들을 봐도 그렇다.
그녀가 보기에 가장 유력한 상대는 유벤트 후작과 체르먼 백작인데, 둘 다 50세가 넘은 노인들이었다.
심지어 유벤트 후작은 정실부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상황이었고 말이다.
물론 그 자식들 중 한 사람과 결혼이 성사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기대하기에는 그동안 세상이 그녀에게 너무 냉정하지 않았던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는 걸까?’
내심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였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평민들조차도 작은 권력만 쥐면 저들 나름대로의 정략결혼을 하는 세상이다.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여자가 직접 고른다는 것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했다.
“브라키오스 백작이라고 했지요? 그분은 어떤 분인가요?”
“사생활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소문에 의하면 대쪽 같은 군인이라고 합니다. 몇 가지 정치, 군사적 현안에 대해서 후작 각하와 의견이 다른 모양입니다.”
“그래요…. 나쁜 분이 아니라면 좋겠네요.”
“…….”
목이 타는지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 엘리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경은 제가 결혼하면 데이먼에게 가실 건가요?”
“…….”
계속해서 말이 없는 알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요.”
“아가씨….”
“네?”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아니요, 제가 잠시 헛된 꿈을 꿨어요. 전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자유롭게 빛나는 그의 모습에 잠시, 그래요…, 아주 잠시… 잠시 눈이 멀었을 뿐이에요. 이제 다시 볼 수 없겠지만….”
엘리안이 아련한 눈빛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쫓든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알렌은 가슴에 묵직한 돌이 놓인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