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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03화 (204/420)

203화. 새옹지마(塞翁之馬)

그나마 방향을 제대로 맞추고 나니 전보다는 견딜 만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파도는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제 슬슬 부선장님이 말했던 암초와 여울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오, 어떻게든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아서라, 지금 돌리려다가 무슨 꼴을 보려고?”

“그러니까요.”

나는 고개를 들어 메인 마스트의 견시대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에 쏟아지는 빗물과 바닷물 때문에 눈을 뜨기가 쉽지 않았다.

“우르타! 거기 있어?!”

“어! 나 여기 있어! 있습니다, 선장님!”

휴우, 다행히 별일 없이 올라가기는 한 모양이다.

“보이는 건?! 암초나! 와류 같은 거!”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으아, 저 앞에 엄청 큰 놈이 온다!”

잠시 후, 우르타가 말한 ‘엄청 큰 놈’이 내 눈에도 들어왔다.

미친, 무슨 놈의 파도가 오트라스의 선고보다 높은 것 같다.

“엎드려!”

나는 모두가 들리도록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렀지만 나와 부선장님은 엎드릴 수 없었다.

타륜을 놔버리면 어디까지 돌아가 버릴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냥 돌아가기만 하면 다행이지, 자칫 잘못하면 키와 연결된 부분이 부서지거나 하면 그대로 오트라스 호는 유령선이 되는 거다.

***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녹초가 된 네이선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서 보고했다.

“눈에 보이는 침수구역은 모두 막았습니다.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고생했어, 어휴… 날 샌 거 같은데 아직도 이 지랄이네.”

“선장님은 괜찮으십니까? 손이….”

“손?”

나는 여전히 타륜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피부 여기저기가 찢긴 상처로 가득했다.

“아직 괜찮아. 그보다 부선장님은 괜찮아요?”

“안 괜찮다, 아무래도 내가 다시 뜨는 해를 못 볼 것 같구나.”

“엄살 피우시는 걸 보니 괜찮으시네. 갑판장, 가서 일등항해사 좀 불러와.”

“그게… 일등항해사는 지금 부상으로 거동이 불가능합니다.”

“뭐?!”

아니, 걔는 또 언제 다친 거야?

내가 깜짝 놀라자 네이선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날아온 상자 같은 것에 머리를 맞은 모양입니다. 정신을 잃어서 의무실로 보냈습니다.”

“많이 다쳤어?”

“피가 좀 많이 나기는 하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잡담 그만해! 또 온다!”

제기랄, 지금 내가 다친 사람 걱정할 상황이 아니지.

또 한 번의 커다란 파도가 지나가고, 나는 얼굴까지 하얗게 탈색된 부선장님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부선장님은 좀 쉬세요, 네이선 네가 대신 나랑 타륜 좀 잡자.”

“그, 그래, 아무래도 안 되겠다.”

힘들기는 힘들었던지 자존심 강한 노인네 한번 사양하지도 않고 바로 타륜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이 휘청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내 손에 가해졌다.

늙었다, 늙었다, 해도 그 괴물 같은 힘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으갸갸갹! 네이선! 빨리 잡아! 이거 돌아가면 다 죽는 거야!”

***

두꺼운 비구름이 태양 빛을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밤보다는 주변이 밝아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희미한 빛 아래 드러난 오트라스 호의 갑판 위는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군데군데 부서진 난간도 눈에 띄었고, 굵은 로프에 몸을 묶은 채 기진맥진해 있는 선원들도 보였다.

어깨가 부러졌는지 잔뜩 부어서 비대칭 인간이 되어버린 놈부터 눈 한쪽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놈까지, 부상도 가지가지였다.

“우르타! 파고!”

“파고 보고! 최고 6m 정도입니다!”

간밤보다는 나아졌다.

그래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 앞으로 다가온 저 파도만 해도….

촤아아아악!

“푸우우우! 에퉤퉤! 지랄 맞게 짜네!”

다른 것보다 선원들의 체력이 걱정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바닷물과 빗물만 잔뜩 들이킨 채로 거의 만 하루를 폭풍과 싸우는 중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에 이골이 난 선원들이라도 한 명씩 쓰러질만한 타이밍이다.

“삼등항해사!”

“네, 선장님!”

내 부름에 선교에 있던 오펜이 비틀거리며 뛰어왔다.

“천천히! 괜히 뛰다가 넘어지지 말고!”

“죄송합니다, 시키실 일이라도?”

“선원들 중에 많이 다친 놈들 선실에 집어넣고, 네가 10명씩 데리고 뭐라도 먹게 해. 조리장에게는 술 빼고 뭐든지 선원들이 달라는 거 다 주라고 하고.”

“지금 말입니까?”

나는 여전히 장대같이 쏟아지는 하늘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늘을 봐, 이거 금방 안 끝나. 그나마 지금이 유일하게 한가한 상황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그때 비명 같은 우르타의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좌현 전방 200, 소용돌이입니다! 선장님! 와류! 소용돌이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선교에서 바우어 항해사의 비명도 울려 퍼졌다.

“선장님! 우현 전방 150, 암초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봤나?

“우르타! 우현 확인해! 암초 맞아?!”

“자, 잠시!”

약간의 텀을 두고 우르타가 절망적인 보고를 해왔다.

“암초 맞습니다!”

타륜을 잡고 있던 네이선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이 정도는 굳이 항해술을 들먹이지 않아도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 줄 다 아는 거다.

거리만 좀 여유 있었어도 멀리 피해 갈 수 있을 텐데.

아니지, 아무리 멀리서 발견했어도 어차피 지금은 방향 전환 조차도 목숨을 건 도박이다.

이렇게 된 이상 미친 짓 같지만 와류와 암초 가운데로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오른쪽! 돌려!”

내가 네이선과 눈을 맞추고 동시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타륜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회전하고, 시간차를 두고 뱃머리도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파도, 파도! 선장님! 파도오오!”

뱃머리가 약간 돌아간 상태에서 우르타가 소리를 질렀다.

좌현 앞쪽을 보니 또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달려드는 중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다.

“모두 좌현으로 붙어!”

우르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탓에 상황을 인지한 선원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내 말에 따라 기를 쓰고 좌현 쪽으로 이동해서 몸을 고정시켰다.

가만히 서서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려울 만큼 흔들리는 배 위에서 이동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다들 바닥을 박박 기어서라도 어떻게든 좌현에 붙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네이선, 지금 이대로 버텨야 해. 만약 타륜이 돌아가면 우리는 그대로 암초에 대가리 박는 거야, 알았지?”

“응!”

파도가 배를 덮치는 순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흔들림이 발생했다.

순간적으로 우현이 수면에 닿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트라스 호는 놀라운 복원력으로 다시 균형을 찾았고, 나는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와류를 보며 세심하게 타륜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와류에 빨려들지 않는 선에서 가장 와류에 가깝게, 좌현에서 계속 몰려드는 파도로 인해 조금씩 틀어지는 선수의 방향까지 신경을 쓰려니 뇌세포가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니, 눈알이 불타오르는 건가?

그렇게 두 번의 큰 파도가 더 지나가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시야를 가리는 물기를 털어낸 후 전방을 주시했다.

지금이다.

“네이선! 왼쪽으로! 돌려!”

“으아아앗!”

잠시 후, 조금씩 배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고, 강렬한 진동이 오트라스 호를 강타했다.

쿠우우웅, 그그그극!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데, 사방에서 신을 찾는 선원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10초쯤 흘렀을까, 살짝 눈을 뜬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네이선을 불렀다.

“갑판장! 갑판장! 정신 차려!”

“어, 어? 우리 살았어?”

“정신 차리고 지금 당장 우현 하부 파손 점검해! 재수 없으면 그쪽 박살 났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괜히 위험 감수하지 말고,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하부갑판 폐쇄하고 양현 다 침수시켜!”

겨우 정신을 차린 네이선이 비틀거리며 선원들을 닦달해서 하부갑판 쪽 통로로 사라지고, 선원 중 일부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나온 것을 자축하는 함성을 질렀다.

아직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닌데 말이야….

충돌음과 배의 진행 상태를 볼 때 우현 하부 쪽이 암초에 쓸린 것 같았다.

충돌 후 좌초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험은 남아있었다.

우현 외벽의 파손의 심각할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충격으로 약해진 외벽이 언제 부서질지 몰랐다.

아직 태풍은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

우리는 결국 살아남았다.

그 난리를 겪었음에도 오트라스 호는 놀라울 정도로 파손이 미미했고, 다섯 명의 선원이 실종되었지만, 선원 대부분도 살아남았다.

무려 2박 3일 동안 이어지는 폭풍에서 이 정도 피해라면 기적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아이고,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네.”

나는 타륜을 바우어에게 인계하고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고, 고생하셨습니다, 선장님. 저, 정말 멋지십니다.”

“쉰소리는 관두고, 파고는 얼마나 돼?”

“이제 1.5m 정도입니다. 계속 낮아지는 중입니다.”

“진짜 끝났구나….”

“네.”

나는 안간힘을 써서 자리에서 일어난 뒤, 파업을 선언한 두 다리를 어거지로 움직이며 말했다.

“이등항해사가 삼등항해사랑 같이 현 위치 좀 파악해서 보고해. 그리고 갑판장에게 정리, 아니다, 그냥 선원들 좀 쉬게 해. 북쪽으로 엄청 올라왔을 테니까 일단 침로는 남동쪽으로 잡고, 살살 이동하자고. 돛은 1/4만 펴자.”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좀 자야 겠어….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는데 사람이 살아있다니, 기적이야.”

리버티 호의 소식도 궁금하고, 다친 아인델프의 상세도 궁금하지만 일단 좀 자야겠다.

***

몇 시간이나 잤을까?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통에 잠에서 깬 나는 수마(睡魔)의 유혹을 물리치고 선교로 향했다.

선장은 배의 머리나 다름없으니, 다시 내려와서 쉬더라도 배가 산으로 가기 전에 앞으로의 이동 계획 정도는 던져줘야 했다.

으으으,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뼈가 분해되었다가 조립되는 기분이다.

선교에 들어서니 머리에 흰 붕대를 둘둘 감은 아인델프가 반색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아, 선장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많이 다친 거야?”

“닥터가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랍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 조금 더 쉬지 왜 벌써 나왔어?”

내 말에 아인델프는 민망한 표정으로 턱을 긁으며 말했다.

“저는 많이 쉬었습니다만 다른 두 항해사는 제대로 쉬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둘 다 들어가서 눈 좀 붙이라고 했습니다.”

“알았어, 괜히 무리하지 말고. 몸이 이상한 것 같으면 차라리 내게 말해.”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해도실로 가시죠, 바우어 항해사가 현재 위치를 파악해 놓았습니다.”

“그러지.”

해도에 표시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기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허어, 우리 여기까지 온 거야?”

“네, 바우어 항해사가 두 번이나 측정했다고 했으니 거의 정확할 겁니다.”

“흐으음….”

잠시 해도를 노려보던 나는 아인델프에게 물었다.

“리버티 호는?”

“그게, 아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꽤 멀리 떨어진 모양입니다.”

“설마 난파한 것은 아니겠지?”

내 말을 들은 아인델프가 시선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야지요.”

무전기가 조금 더 일찍 나타나서 리버티 호에 하나를 주었다면 그나마 좀 수월하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타이밍이 너무 아쉽다.

“천천히 내려가면서 흔적을 찾아보면 되겠지. 그런데….”

나는 거듭 오트라스 호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아인델프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선장실에서 내 항해일지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건 왜 가지고 오신 겁니까?”

“우리 위치가 여기라면, 대충 여기서는 이쯤이겠지?”

내가 항해일지에 조악하게 그려놓은 지도의 한 점을 짚자, 한참 동안 인상을 찡그리고 그 지도를 보던 아인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충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왜…?”

“기다려봐.”

급히 해도실을 나온 나는 선미로 가서 망원경을 들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망원경으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급히 나를 따라온 아인델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뭘 찾으십니까?”

“응, 그런데… 자, 일등항해사도 저쪽을 한 번 봐.”

내가 망원경을 건네주자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아인델프게 내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했다.

“뭐가 보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렇지?”

“네….”

“이상하지 않아?”

망원경을 내린 아인델프가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 눈에는 아무것도….”

“그게 이상하잖아. 여기를 봐.”

나는 다시 항해일지를 펴서 아인델프에게 보여주었다.

“우리가 여기쯤이면, 당연히 울부짖는 바다가 보여야 하는 거 아냐? 최소한 먹구름이라도 보여야지.”

그제서야 이상함을 깨달은 아인델프가 깜짝 놀라며 맞장구를 쳤다.

“아! 그, 그렇군요! 이 정도 위치면 충분히 보여야 할 텐데… 설마 바우어 항해사가 측량을 잘못했을까요?”

“두 번이나 했다며?”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항해술은 뛰어난 친군데 그런 실수를 했겠어? 흠….”

원래 이번 항해의 목적은 시논 섬의 일레드 왕국군과 케르빈 군도의 해적들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알아볼 수 있으면 해적들 본거지도 좀 알아보고...

하지만 태풍 때문에 엄한 짓을 한 꼴이 되어 약간 속상하던 판이었는데, 어쩌면 더 큰 걸 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이건 무조건 비밀 엄수해야 해. 알았지?”

“물론입니다, 선장님.”

이 사실을 공유해도 되는 사람은 저 빌어먹을 울부짖는 바다에서 함께 탈출했던 사람들뿐이다.

특히 조나단, 그놈에게는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된다.

폭풍우 속에서 내가 조금만 마음에 여유가 있었어도 지금쯤 그 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운이 좋은 놈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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