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04화 (205/420)

204화. 밝혀진 비밀과 남겨진 시간

모든 사건 사고가 그렇지만, 본 사건보다는 뒤처리가 더 귀찮고 오래 걸리는 법이다.

태풍에 대한 후처리도 마찬가지라서,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는 선원들을 격려(?)하고 있는데, 막 선실에서 나오던 롱베르 씨와 마주쳤다.

보통 거동이 힘들 정도로 다친 선원들은 의무실에서 치료를 하지만, 이번에는 다친 환자가 너무 많았다.

덕분에 의무실에는 중환자들만 수용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선실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닥터! 다친 사람들은 괜찮아요?”

“아, 선장님.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가려고 했습니다만.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지금요? 네, 뭐… 급한 일은 없네요.”

선장실로 자리를 옮긴 롱베르 씨와 나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왜요? 혹시 누가 심각하게 아픈 겁니까?”

“그것이… 으음.”

좀처럼 말을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롱베르 씨를 보고 있으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누가 얼마나 아프길래 저렇게 말을 못 해?

설마 아인델프가 말한 것과 달리 많이 다친 건가?

붕대를 머리에 둘둘 감고 있는 아인델프가 갑자기 떠올라서 나는 다급히 닥터에게 물었다.

“설마, 머리 안쪽에 문제가 있다거나 그런 건가요?”

두개골은 충분히 단단한 뼈지만, 뇌에 전해지는 모든 충격을 완벽하게 흡수하지는 못한다.

21세기의 지구라면 간단한 내출혈 정도야 첨단기기로 빠르게 진단하고 수술로 후유증 없이 치료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내출혈은 그냥 손 놓고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내부 장기들은 물론이고, 뇌는 더 심하지.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진 급한 질문에 닥터가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알았나? 설마…! 이미 들은 건가? 내게는 자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만, 쯧.”

“말하기는 뭘 말해요, 그냥 넘겨짚은 거지! 겉보기에는 멀쩡하던데, 심각한 수준인가요? 아니지, 당장 가서 좀 쉬라고 해야…!”

내가 말만으로 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롱베르 씨가 다급하게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게.”

“놔요! 닥터도 진짜 너무하시네요! 그럼 아인델프를 강제로라도 쉬게 하거나 제게 말씀을 하셨어야죠!”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 응? 지금 누구라고 했나?”

“당연히, 네?”

소란스럽게 실랑이를 벌이던 나와 닥터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야, 아인델프가 아니야?

나는 빠르게 머릿속으로 배에 있는 사람들을 친분과 맡은 일 순서로 줄을 세워서 확인했다.

닥터가 굳이 이렇게 와서 말을 할 정도면 일반 선원은 아닐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인델프 말고는 머리를 다친 사람이 없었다.

“누구 이야기 하신 거예요?”

“일등항해사는 괜찮네. 모서리에 찍혔는지 꽤 많이 찢어져서 꿰매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어 보였어.”

“그건 다행인데, 누구 이야기를 하신 거냐고요? 아픈 사람.”

“으음….”

다시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롱베르 씨를 보며 나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닥터! 어차피 이야기하려고 오신 거잖아요! 빨리 말씀하세요!”

“그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잠시 시간을 끌던 롱베르가 결국 실토하기 시작했다.

“부선장님의 상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네. 내가 배를 탈 때만 해도 약간 의심이 가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거의 확실하다고 보네.”

뭐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부선장? 그 세월도 비껴가는 노인네가 심각하게 아픈 상황이라고?

“아, 진짜 농담하지 말아요. 아무리 닥터라도 그런 농담은 하는 거 아닙니다. 방금도 멀쩡하게 잘 돌아다니는 걸 보고 왔구만, 무슨….”

“으음….”

“닥터!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닥터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사람 머리통을 열어보지도 않고 어디가 잘못된 건지 어떻게 알아요?! 닥터도 그냥 짐작만 하는 거잖아요!”

“물론 그냥 내 짐작이기는 하네. 자네 말대로 산 사람의 두개골을 열어볼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럼 그렇지.

부선장님이 아플 리가 없잖아?

내가 알기로 머리가 아프더라도 실제로 뇌 쪽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이 목 위의 근육들에서 발생하는 근육통이라서, 머리 좀 아프다고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뇌 쪽에 문제가 생기면 머리가 아픈 것보다는 다른 부분에….

“잦은 두통에 어지러움, 코피도 자주 흘리시는 것 같네. 왼손은 이제 거의 제대로 제어를 못 하는 것 같더군. 요즘은 다리 쪽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고. 시력도 굉장히 약해지셨고, 다른 감각들도 상당히 둔해지셨어.”

“아니, 그렇게 무섭게 말하지 말구요! 그 나이 되면 눈도 좀 나빠지고, 미각도 떨어지고, 팔다리가 맘대로 안 움직이고 그러는 거죠, 뭐….”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보던 롱베르 씨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차라리 자네 말이 맞다면 좋겠지. 그가 죽어간다는 것보다는 내가 돌팔이라는 쪽이 더 아름다운 결론 아니겠나? 내가 괜한 말을 한 모양이네, 가보도록 하지.”

롱베르 씨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가슴 속에는 용암이 들어찬 것처럼 쉴 새 없이 들끓었고, 머릿속에는 최근 들어 점점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부선장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닥터의 말이 사실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말이다.

“잠깐만요, 닥터!”

나는 막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려는 닥터를 붙잡았다.

“응? 무슨 일인가?”

“다시 앉아 봐요, 말은 마저 하고 가셔야지!”

“배의 선의로서 해야 할 말은 다 했네.”

“그런 게 어딨어요! 환자가 어떻게 아프고, 어떻게 치료를 할 거다, 언제쯤 괜찮아진다, 이런 말을 해줘야지! 그냥 ‘이 사람이 아프다’ 이러고 가면 어떡해요?!”

“…….”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제대로 진단도 못 하는 뇌질환을 치료할 방법 따위, 이 세상에 없다는 것 말이다.

그래도 닥터라면 뭐라도 있지 않을까?

내가 강제로 그의 손을 끌어당기자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은 롱베르 씨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내가 배운 대로라면 부선장님은 머리 안쪽에 작은 혹이 생겨나는 병에 걸린 것으로 보이네. 그리고 치료 방법은… 없네.”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충격적인 말을 한 닥터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살짝 망설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론적으로는… 그래. 조심스럽게 두개골을 절개해서 혹을 떼어낸 후 다시 두개골을 접합하면, 환자는 살 수 있네.”

이 아저씨가 무슨 무서운 소리를?

절대 안 된다.

세균과 감염에 대한 가설도 제대로 없는 세상에서 두개골을 연다고?

그건 그냥 살인이다.

그리고 감염을 운 좋게 비껴간다고 해도 마찬가지, 닥터의 말대로라면 부선장님은 뇌종양인 건데, 종양의 위치는 어떻게 찾고, 어떻게 제거한단 말인가?

“후우우우…. 그래서, 지금 당장 요양을 해야 하는 상황인가요?”

“요양이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네?”

“비록 자네 말대로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내 짐작이지만, 이 병은 왜 발생하는지, 어떻게 하면 치료하거나 진행을 늦출 수 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네. 치료할 수도, 진행을 늦추지도 못하는데 요양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일세.”

“그럼 어떻게 하라구요! 닥터가 의사잖아요!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알려줘야지!”

“…미안하네. 하지만 이건 자네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네. 요즘 통증 때문인지 음주가 너무 잦으시더군. 술은 대부분의 병에 좋지 않아. 그러니 술이라도 피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싶네만.”

***

롱베르 씨가 떠난 뒤, 나는 신이 선물한 지구의 물건들을 꺼내놓고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뭘 받으면 부선장님을 치료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뚜렷한 뭔가가 없었다.

뇌종양이라니, 이건 뇌 질환 전문병원을 옮겨오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다.

죽음은 익숙하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 쓰레기 같기는 한데, 내가 죽인 사람도 벌써 두 자릿수를 넘었고, 나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 중에 죽은 사람도 두 자릿수가 넘는다.

하지만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그냥저냥 잘 산다.

물론 그중에는 아직도 가끔 꿈에 나와서 일어날 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다른 일을 하다가 뜬금없이 생각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에른스트 부선장도 똑같은 거다.

그냥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고, 죽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내 기억에서만 남게 되는 거지.

.

.

.

그게 되겠냐고!

똑똑똑.

“누구야!”

“부선장입니다.”

“…다음에 이야기해요.”

지금은 너무 혼란스럽다.

솔직히 부선장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문이 열려있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들어갑니다.”

부선장님은 감히 선장의 말을 거역하고 마음대로 선장실에 침입했다.

명령 불복종이네, 하극상이야!

나는 득달같이 부선장님에게 달려가서 소리를 질렀다.

“누가 들어오랬어요?! 누가! 누가 그렇게 아프랬어요?!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허어어엉!”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에른스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래서 원래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손이 끝내 부선장님을 끌어안고 말았다.

“흐어어엉, 왜, 왜 그랬어요! 허어어어엉… 미리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부선장님이 아니라 내가 어딘가 고장 난 것 같다.

이러다 탈수증으로 쓰러지는 거 아냐?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울고 있는데 등을 토닥이는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그만해라, 다 큰 사내놈이 계집애처럼 질질 짜기는.”

“끄윽, 끅, 많이 아파요?”

“아프긴, 나는 선의 양반이 말해줄 때까지 내가 아픈 줄도 몰랐다.”

거짓말이다.

이렇게 안고 보니 확실히 알겠다.

부선장님이 한창때에 비하면 얼마나 몸이 약해졌는지 말이다.

문득 그런 사실까지 인지하고 나니 다시 설움이 터져서 조금씩 말라가던 눈물샘이 다시 차오르는데, 부선장님이 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만! 언제까지 질질 짤 셈이냐? 사람이 늙으면 뒤지는 거지, 뭘 또 새삼스럽게. 너도 어차피 내가 오래 못 살 줄은 알고 있었잖아?”

“그게 이거랑 같아요?!”

물론 이 시대의 평균 수명과 에른스트의 나이를 생각하면 내일 당장 침대에서 못 일어나더라도 이상할 게 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전조 없이 갑자기 죽는 거랑, 이렇게 죽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봐야 하는 거랑 같냐고.

“호들갑 떨 거 없다. 어차피 나는 살 만큼 살았고, 남겨질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 미련이 남을 것도 없다. 그러니 내가 배를 못 타는 날까지, 그냥 조용히 이렇게 지내게 해다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이라도 쉬면서 치료 방법을 찾아야죠!”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선의 양반에게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이미 들었을 것 아니냐?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라.”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놈의 하지만! 그냥 내 말대로 하자꾸나.”

“부선장님….”

그는 내가 처음 그를 만났던 그 날처럼 거칠게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씨익 웃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바다의 사나이지!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집구석에 처박혀 천천히 죽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내 마지막 숨이 다하는 날까지 배를 탈 거고, 마지막에는 어머니의 품에 안길 거야.”

어느새 더 늘어난 깊은 주름살, 눈가에 이는 잔 경련, 약간 탁해진 듯한 눈동자.

이제 네이선은커녕 나는 이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늙은 에른스트였지만, 그의 의지는 강철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의지를 느끼면서 깨달았다.

내가 뭐라고 해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사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이 시대에는 이 시대의 방법이 있는 거다.

괜히 같잖은 지구의 지식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어.

물론 고려해야 할 변수와 감수해야 할 위험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리기에는 에른스트가 내게 가지는 의미가 너무 크다.

“그 고집을 내가 어떻게 이겨, 그래서 닥터가 얼마나 버틸 수 있대요?”

“뭐가 말이냐?”

“천년만년 배를 탈 수는 없을 거 아니에요? 난 거동도 못 하는 부선장님 똥오줌 받아낼 생각은 없거든요?”

“아주 아픈 노인네에게 저주를 퍼붓는구나. 선의 양반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진행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나? 그래도 한 1년은 괜찮지 않겠냐?”

“술 줄이세요.”

“안 돼.”

“술은 진짜 몸에 안 좋단 말이에요!”

“술 안 마시고 1년을 사느니, 그냥 술 마시고 한 달만 살 거다.”

“이, 이, 고집쟁이 늙은이가?!”

따악!

“아악! 왜 때려요?!”

“맞을 말을 하잖아!”

하극상이다, 하극상이야!

***

잠깐 나와보는 것이 좋겠다는 선원의 보고에 갑판으로 나가자, 한쪽에 선원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내가 선원들을 헤치고 들어가며 묻자, 그제서야 나를 알아본 선원들이 분분히 인사하며 내게 길을 터주었다.

“선장님 오셨습니까?”

쭈그려 앉아있던 네이선도 손을 털고 일어나며 내게 가볍게 인사했다.

“뭐야? 시체?”

“네, 얼굴이 많이 손상되기는 했지만, 리버티 호에 타던 선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인은? 닥터에게 연락했어?”

“제가 봐서는 사인은 모르겠습니다. 선의님에게는 이미 사람 보냈구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선원들에게 지시했다.

“뭐 한다고 여기에 모여 있어? 시체 처음 봐? 모두 흩어져서 부유물 다 찾아!”

선원들이 분분히 흩어지고, 잠시 후 도착한 롱베르 씨는 시체를 살펴보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내부 출혈에 의해서 사망한 모양이네. 내 생각에 폭풍 중에 부상을 입었고, 그게 악화되어 사망한 후 버려진 모양일세. 그런데 보통 이렇게 버리지는 않을 텐데?”

나와 네이선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선원이 사고로 사망할 경우 그 시체를 바다에 수장한다.

하지만 보통 시체를 곱게 싸서 무거운 추와 함께 바다에 던짐으로써 뱃사람들에게 어머니라고 불리는 바닷속에서 영면에 들도록 한다.

추도 없이 그냥 쓰레기 버리듯이 버려지는 시체는 보통 전투에서 패배한 자들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상황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아무리 친하던 선원이라도 일단 바다에 던진다.

괜히 예를 갖춘답시고 시체를 방치하다가 썩기라도 하면 살아 있는 사람마저 죽어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부러 버리지 않더라도 정리 중에 실수로 빠뜨리는 경우도 꽤 있었다.

“더 큰 오트라스 호가 이 정도로 망가졌으니, 리버티 호는 침몰을 피했다고 해도 손상이 더 심할 겁니다. 인원도 많이 부족할 테니 수리도 우리보다 늦었을 거고요. 상황의 여의치 않아서 그냥 시체를 투기했거나, 부서진 틈으로 시체가 빠졌을 수 있어요.”

“그런가?”

“어쩌면 근처에 리버티 호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견시를 강화해야….”

“무슨 일입니까?”

반사적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배에서 내가 유일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조나단이었다.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고, 질문을 받은 이상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나는 대답을 해줘야 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제적인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갑과 을의 관계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갑이 이래라저래라 딱히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기어야 하는 게 바로 을이지.

아, 거지 같은 을의 입장이여.

“리버티 호의 선원입니다. 최근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윽, 시체를 굳이 왜 건진 겁니까? 어차피 배에서 시체가 나오면 다 바다에 던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리버티 호를 찾아야 하니까요.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흔적을 놓칠 수 없죠.”

“어차피 목적지로 정해놓은 항구로 가면 만날 텐데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있어요?”

나는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꾹 참고 최선을 다해 그를 상대해 주었다.

“그쪽 상황이 어떤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쩌면 항구까지 올 수 없는 상황이라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흠, 그럴 수도 있군요.”

내 설명에 만족했는지 말을 마친 조나단은 군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선원들의 불편한 시선이 그를 따르는 것이 보였다.

“자, 우리 때문에 안식에 방해를 받은 이 친구에게 미안한 짓은 그만하자고. 최대한 예를 갖춰서 어머니께 안겨드려.”

“네, 선장님.”

“갑판장은 선원들 추가 배치해서 주변에 부유물 있는지 확인해 줘.”

“알겠습니다, 선장님.”

“그리고 포술장은 어디 있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해 본 네이선이 대답했다.

“이 시간이면 아마 자기 방에 있을 겁니다.”

“그래? 알았어.”

내가 우르타의 방 근처까지 왔을 때 조그맣게 ‘다다다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작은 무언가가 내 앞을 막아섰다.

“뭐, 뭐야?”

“냐아아옹!”

어처구니가 없군.

솔직히 엄청 많이 크기는 했는데 그래봐야 아직도 내 팔뚝 길이보다 작은 새끼고양이였다.

이름이 넬이라고 했던가?

새까만 털에 목덜미 일부랑 네 발만 하얀 녀석인데, 워낙 작고 검은색이라서 구석에 숨었던 것을 내가 못 본 모양이다.

자기보다 덩치가 100배쯤 큰 나를 상대로 하악질을 하며 막아선 것을 보니 조금 귀엽기는 했다.

“뭐야? 넬? 너 거기서 뭐… 어? 리안?”

“뭐하냐?”

방문을 열고 나와서 주섬주섬 넬을 집어 들어 품에 안은 우르타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친구를 잃고 외로워하는 아이들을 위로하는 중이야.”

“친구?”

“리안이 보내라고 했잖아! 그래서 ‘우리’가 지금 리버티 호에 타고 있다고! 불쌍한 우리….”

우르타의 품 안에 있는 까만 고양이나, 방문이 열린 틈으로 몸을 반쯤 드러내고 우리를 관찰하는 하얀 고양이 모두 그리 슬프거나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너 지금 일하는 시간이잖아.”

“다 했어!”

“아니야, 지금 견시대 올라가.”

“어?”

나는 내 망원경을 건네주며 말했다.

“방금 리버티 호의 선원 시체가 발견되었어. 어쩌면 근처에 리버티 호가 있을지도 몰라. 빨리 올라가.”

“어? 어, 어, 그런데 리버티 호도 알아서 에쉬노르 항구로 가지 않을까?”

“만약에 돛이 부러졌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해도나 측량 도구가 없어졌다면?”

“아? 그, 그렇구나! 알았어.”

내 말에 느낌표가 떠오르는 듯한 표정을 지은 우르타는 재빨리 망원경을 받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앗, 리아! 어디 간 거야?!”

밖에 있잖아, 멍청아….

그나저나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에쉬노르 항구 쪽은 선박의 통행량이 엄청 많은 편도 아니고, 심지어 현재 위치는 에쉬노르 항구보다 약간 북쪽이라 일반 항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만약 리버티 호가 위기에 처해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배는 우리가 유일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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