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최악은 아니었다
선원들 중 일부에게 부유물을 세세하게 훑으라는 명령은 곧 효과를 발휘했다.
최근에 부서진 것으로 보이는 판자 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물론 겨우 성인 손바닥 세 개를 겹친 크기의 판자 조각만 가지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 조각이 부서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조각이라는 점, 오트라스 호의 부서진 부분에서는 비슷한 조각이 들어갈 부분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리버티 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일 확률이 높았다.
“오펜, 해도실 가서 현 위치에 표시 남기고, 갑판장은 다른 거 또 뭐 있는지 더 찾도록 해봐. 이 주변을 조금 더 탐색하도록 하지.”
흐음, 조금 거리를 두고 부유물이 하나만 더 발견되면 좋겠다.
리버티 호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망망대해를 무작정 계속 헤맬 수는 없는 일이다.
넉넉하게 실었다고 하더라도 식료품과 식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태풍에 파손되거나 망실된 양도 꽤 되는 편이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여유 시간은 닷새 정도, 만약 에쉬노르 항구와 거리가 더 멀어진다면 여유 시간은 더욱 짧아지겠지.
내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부유물 탐색을 재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부유물이 발견되었다.
“…애매하네요.”
“그래도 안쪽을 보면 최근까지 쓰인 것 같으니까 리버티 호에서 빠졌을 확률이 높잖아.”
“그렇기는 하죠.”
“좋아, 오펜, 해도실로.”
새로 발견된 부유물은 나무통이었는데, 배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워낙 자주 쓰이는 녀석이라 리버티 호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정보가 워낙 빈약한 터라, 일단 부유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침로를 잡기로 했다.
그렇게 잡은 우리의 진행 방향은 조금씩 우리의 목적지인 에쉬노르 항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그 이후로도 리버티 호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부유물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거리를 두고 부유물이 떨어져 있는 것도 정상은 아닌데….
해도실에서 우리의 위치를 표시할 때 내 옆을 지키던 오펜이 물었다.
“선장님, 점점 에쉬노르 항구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데요?”
“응, 맞아. 그렇게 잡았지.”
“네? 도대체 왜…?”
오펜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리버티 호도 분명히 에쉬노르 항구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을 텐데요? 항해 도구가 없더라도 최소한 동서남북 정도는 구분이 가능할 테니….”
오펜의 말대로, 리버티 호가 살아남았다면 항해 도구가 전혀 없더라도 무조건 동남쪽을 향해 움직일 터였다.
우리가 태풍을 맞이한 곳에서 동남쪽은 현재 위치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결국 육지에 도착할 수 있는 방향이니까 말이다.
“오펜 항해사, 잘 봐. 부유물은 방향성이 없어. 그저 떠 있을 뿐이잖아. 그렇지?”
물론 부유물도 조류와 바람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기는 하지만, 바다의 상태를 봤을 때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상태는 아니었다.
“네. 물론 그렇지요.”
“그럼 부유물을 따라가는 방향은 두 방향이 되겠네, 정 반대 방향이겠지만. 그렇지 않아?”
“아…. 그렇습니다.”
그렇다.
지금까지 발견된 부유물을 연결하면 선이 되고, 오트라스 호를 선 위에 있는 점이라고 가정하면 점이 이동 가능한 방향은 두 방향이 된다.
배를 둘로 나눌 수는 없으니 무조건 한 쪽 방향은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무조건 한쪽을 포기해야 하니까, 나는 에쉬노르에 가까워지는 방향을 포기한 거야. 왜일까?”
내 질문에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오펜이 손뼉을 치며 눈을 빛냈다.
“알겠습니다! 에쉬노르 방향은 굳이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배들이 도움을 주거나 자력으로 에쉬노르 항구로 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오! 정답이야. 그리고 하나 더, 부유물을 마치 일부러 흘린 것 같지 않아?”
“그건 잘….”
“오펜, 잘 생각해봐. 우리가 뒷정리를 하더라도 목재는 잘 버리지 않아. 실수로 떨어뜨리거나 했다면 모르지만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장거리에 걸쳐서 부유물이 떨어져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잖아. 어떤 사정 때문에 목재까지 다 버려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보통 한 지역에 모여 있었겠지.”
“그렇군요!”
“아무래도… 리버티 호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밤에는 부유물을 찾기 힘들어서 현재 침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까지의 부유물 발견 위치가 거의 직선에 가까워서 크게 방향을 벗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선장님,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식사하고 오시지요.”
“아, 일등항해사. 자네는 식사했어?”
“네, 조리장에게 이야기해서 미리 먹고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지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현재 침로 유지하고 속도도 이대로 가자고. 괜히 너무 빨리 움직이다가 놓치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네, 그런데 견시대는 계속 포술장에게 맡기시겠습니까? 지금쯤 꽤 피곤할 겁니다.”
“으음…. 밤에는 포술장도 한계가 있으니 교대시키자. 쉬게 하고 낮에 다시 투입하는 게 나아.”
선교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우르타의 커다란 보고가 들려왔다.
“전방에 선박! 방향 015, 거리 15,000! 돛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다급히 메인 마스트 방향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선종은?! 리버티 호야?!”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등항해사! 우로 15도! 발견된 미확인 선박 쪽으로 접근한다! 갑판장! 풀 세일로!”
선교와 갑판에서 선원들이 복명복창을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3만 펼쳐져 있던 돛이 완전히 펼쳐지고 배가 조금씩 방향을 돌리면서 빨라지기 시작했다.
***
두어 시간이 지나고 조우한 선박은 예상대로 리버티 호가 맞았다.
양쪽 선원들은 함성을 질러 서로의 안전을 확인한 것을 기뻐했지만, 리버티 호는 문제가 심각했다.
“제독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리버티 호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 고생하셨어요, 발드 선장님.”
단단하게 연결된 널빤지를 타고, 리버티 호의 간부들이 오트라스 호로 넘어왔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리버티 호의 파손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이러지들 말고 내 방에서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조리장에게 미리 이야기해 놨어요.”
“감사합니다, 제독.”
내 방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는 발드 선장에게 리버티 호의 상태를 물었다.
이미 조우전에 교환한 신호를 통해 파손이 심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상태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상황이 심각한 모양인데, 뭐예요? 보니까 마스트는 괜찮아 보이던데.”
“마스트도 많이 망가지기는 했습니다만, 충분히 수리가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키가 망가진 모양입니다.”
“방향 조절이 전혀 안 돼요?”
“네…. 그래서 제독이라면 우리를 찾아줄 것이라고 믿고 돛을 다 내린 상태로 부유물을 던지던 중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방향이 북서 방향이라….”
“다행이네요, 역시 선장님에게 리버티 호를 맡기기를 잘한 것 같군요.”
마른세수를 한 번 하며 고개를 저은 발드 선장이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솔직히 사흘이나 지나서 믿음이 조금씩 떨어지던 중이었습니다. 세 시간에 한 번씩 물에 뜨는 물건을 던지라고는 했지만… 사실 발견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으니까요.”
“지나간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선원들은 많이 상했어요? 리버티 호 선원의 시체를 하나 발견했는데….”
“아, 페니의 시체를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무리하게 방향 전환을 시도하다가 실수로 떨어뜨려서 미안했는데….”
“우리가 대신 좋게 보내줬어요, 죽어서까지 리버티 호를 도와주다니 멋진 친구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쓴웃음을 지은 발드 선장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피해를 보고했다.
“리버티 호 사망 및 실종 6명, 부상 17명, 현재 인원 31명입니다.”
“부상자들은 심각해요?”
“골절 환자들이 꽤 됩니다.”
“닥터가 바로 치료하겠다고 하셨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네,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사람은 통증이 심해져서 힘들어하고 있었거든요.”
“특이 사항 없으면 오늘은 이대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예향 준비합시다.”
마음 같아서야 선원들을 독촉해서 빨리 예향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야간에 무리한 일을 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선원들의 사기가 더 바닥날 수도 있었다.
리버티 호의 식수 손실이 너무 커서 위험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
더 이상 고난을 주기에는 하늘도 민망했는지, 다음 날 저녁에 세 시간 정도 비가 내렸다.
처음에는 먹구름이 끼어서 기겁했지만, 다행히 다시 폭풍으로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가 내린 덕분에 부족한 식수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별다른 문제없이 느릿느릿(예항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속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항해한 지 9일째 되는 날 아침,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견시수의 보고가 울려 퍼졌다.
“전방에 육지, 육지가 보입니다!”
이미 어젯밤에 해도를 확인하면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보고를 들으니 새삼스럽게 기뻤다.
나는 이번에도 어떻게 살아남은 모양이다.
우리가 항구에 접근하자, 항구 쪽에서 작은 보트 한 척이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항구관리관이 타고 있는 검문용 선박이었다.
줄사다리를 타고 오트라스 호에 오른 항구관리관이 인상을 찡그리며 내게 물었다.
“휘유, 엉망이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오는 길에 폭풍에 휘말렸습니다. 저희 뒤의 리버티 호는 키가 망가져서 저희가 인양해 왔구요.”
“고생하셨군요. 그런데 가지고 온 교역품이 없으시네요?”
“별다른 게 없기도 했지만, 폭풍이 워낙 심해서 교역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리버티 호도 마찬가지구요.”
내 말에 약간 미심쩍은 표정으로 항구관리관이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이익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상선의 선장이 교역품을 포기하고 왔다니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시논 섬에 특사로 다녀오는 길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좋습니다, 리안 선장님. 그럼 저희가 두 배의 선창을 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절차라서 말이지요.”
“네.”
뭐, 이 정도는 예상한 수준이다.
***
확실히 나와 오트라스 호가 의심스러웠는지 항구관리관은 꽤 철저하게 선창을 검사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선원의 수와 신원까지 확인하고, 창고와 선실까지 확인을 했다.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숨기는 것이 없다 보니 딱 귀찮은 정도의 일일 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선장실은 나와 동행한 항구관리관이 적당히 둘러보는 정도였기 때문에 총독의 서신은 걸릴 일이 없었다.
철저하게 뒤졌는데도 꼬투리를 잡을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아 약간 인상을 쓰고 있는 항구관리관에게 물었다.
“항구관리관님, 제가 이 항구를 처음 오는데 말이죠, 혹시 일레드 왕국 군함도 자주 볼 수 있습니까?”
“군함이요? 그건 왜 물으십니까?”
예상대로 항구관리관은 예민하게 반응하며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나를 보았다.
“하하, 일레드 해군의 위용은 세상이 다 아는 것 아닙니까? 에쉬노르 항구라면 일레드 2함대의 본거지니까 그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나 해서 물어보는 거죠.”
“선장도 알겠지만 같은 항구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해군 계류지와 일반 상선의 계류지는 구분되어 있습니다. 함대가 입출항할 때 멀리서 보는 것이라면 몰라도 직접 마주치지는 힘들 거요.”
“그건 좀 아쉽군요. 소문에 일레드 해군에서 엄청난 전투함을 새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꼭 한 번 보고 싶었거든요.”
내 말에 항구관리관은 피식 웃더니 약간 우쭐거리며 대답했다.
“아, 엘베도라급 전투함을 말하는 모양이시군. 여기 2함대의 기함이 엘베도라급 2번 함인 엘로이인데, 정말 대단하긴 하더군요. 하지만 잘 움직이지 않는 편이라 나도 몇 번 보지 못했으니, 아마 보기가 쉽지는 않을 거요.”
사실 이 정도는 기밀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는 쉽게 대답해 주었다.
적당히 경계심이 풀린 것 같아 나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해군들도 만나기 어렵습니까? 이야기라도 좀 듣고 싶은데.”
“해군? 그치들은 보통 자기들끼리 놀아서…. 굳이 원한다면 해군들이 자주 가는 술집 몇 군데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소.”
그의 표정이 떨떠름해지는 것을 보니, 일레드 해군도 내가 아는 다른 해군들처럼 타인에게 그리 사랑받는 존재는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얻고 싶은 정보를 다 알아낸 나는 적당히 그와 대거리를 해 주다가 보내주었다.
정보 이용료로 주머니 하나를 품에 넣어서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해군에게 내 정체가 들통 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 그가 알려준 술집만 피하면 해군과 만날 일은 거의 없는 모양이니.
***
나는 에른스트, 우르타, 네이선과 함께 일전에 말했던 대구 요릿집을 찾았다.
오트라스 호와 리버티 호 전부 수리를 맡겨서 모두가 육지로 올라온 김에 함께 식사를 위해 찾은 것이다.
“역시 리안의 입맛은 확실하다니까!”
“맞아, 그리고 여기 럼도 끝내주네.”
“그거 독하지 않냐?”
“에이, 이 정도는 딱 좋지 뭐!”
“그럼 나도 한 잔….”
네이선의 술부심에 에른스트가 조용히 잔을 내밀었다.
“부선장님!”
“아니, 식사 중에도 술을 마시지 말라는 거냐?!”
“거기 와인 시켜드렸잖아요! 와인 드세요.”
“술맛도 안 나는 이런 냄새 나는 음료수를 왜 마시라는 거야?!”
나름 비싼 거 시켰는데 어휴….
내가 계속 부선장님이 술을 마시는 것을 막아서자 우르타와 네이선의 표정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계속 그러니까 슬슬 이상한 모양이다.
“리안, 왜 그래? 부선장님이 언제 술 마시고 때렸어?”
“뭘 때려, 이놈아!”
“부선장님이 술 드시고 때리겠냐! 술 안 드시고도 때리지!”
“그게 무슨 말이야!”
“리안, 그러지 말고 한잔하게 해드려, 술값이 아까워서 그러면 내가….”
“야! 네이선! 내가 지금 술값 때문에 이러겠어?!”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병에 대해 더 이상 아무도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선장님의 간곡한 부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병을 알릴 수가 없으니 할 말이 옹색했다.
“……아, 노인네가 아직도 자기가 젊은 줄 알고 술을 많이 마시니까 그렇지.”
“하긴 부선장님 요즘 술 많이 드시긴 하지. 그래도 지금은 좀 드셔도 되지 않겠어?”
“…그래, 부선장님 딱 한 잔 만이에요?”
결국 내가 힘없이 항복 선언을 날리자 부선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네이선이 마시던 독한 럼주를 한 컵 가득 따라서 들이켰다.
“크으! 화끈하구만. 네이선이 확실히 술만큼은 잘 보는구나. 한 잔 더 따라봐라.”
“부선장님!”
내가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이미 네이선과 부선장님에게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휴우, 부선장님이 술을 요즘 많이 드시는 이유는 안다.
평소에 통증과 손 떨림이 너무 심하다고 했다.
그나마 술을 마셔야 조금 나아진다고….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면 알콜 중독을 의심해야 할 지경이 아닌가.
정말 답답하군.
“야, 나도 한 잔 줘.”
술이나 마셔야겠다.
***
다음 날 아침, 과음으로 인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침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허락 없이 내 앞에 앉았다.
우르타나 네이선, 혹은 부선장님이겠거니 해서 고개를 들어 보니, 낯선 노인이 내 앞에 앉아있었다.
“누구십니까?”
“그쪽이 혹시 리안 선장이시오?”
나는 대답을 미루고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상대를 찬찬히 살폈다.
복장을 보니 군인은 아니었다.
복장만 본다면 오히려 롱베르 씨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눈빛이 장난이 아니다.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얼굴은 확실히 50대인데, 눈빛만 보면 20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그를 살피고 있자, 그는 갑자기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아, 이런 실례를. 내 소개를 깜빡했군. 미안하오, 나는 제먼이라는 사람이오.”
“제먼 씨군요. 말씀하신 대로 제가 리안입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다름이 아니라 선장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소, 혹시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자기소개까지 한 노인을 매몰차게 내치기는 민망한 일이라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는 포즈를 취했다.
부탁이라고 했으니 일단 들어 보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거절하면 그만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