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그래야만 하는 이유
우르타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 뚜렷하다.
그리고 대포는 우르타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지.
덕분에 선원들은 뜬금없이 힘겨운 포격 훈련을 해야만 했다.
내가 말을 꺼낸 일이라 약간 가슴이 뜨끔했지만, 선원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까 그냥 우르타를 원망하도록 내버려 뒀다.
물론 해군의 정규 훈련처럼 전략적 기동 중에 포격이라던가, 표적을 띄워놓고 맞추는 본격적인 훈련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몇 시간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탄착점도 잘 모이는 것 같고, 포격 속도도 눈에 띄게 빨라지는 것이 보였다.
포병대 소속의 군인이 아닌 이상 포격에 숙달되기는커녕 포격을 해본 경험 자체가 드물기 때문에 그렇다.
솔직히 오트라스 호는 물론이고 리버티 호에서도 대포를 쏴본 적이 별로 없다 보니, 우르타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진귀한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선교와 포갑판 사이의 연계에 문제가 많다.
포갑판에서 우르타가 소리를 질러도 선교에서는 그저 웅웅거리는 소음으로밖에 안 들리니, 서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사람을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우현의 적을 포격하고 있는데, 변침과 함께 좌편의 포격 범위에 들어올 새로운 적에게 포격을 해야 한다고 치자.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포갑판의 우현에서 포격 중인 상황에서, 반대편인 좌현, 변침 전에는 거의 정면이나 후면 쪽에 있었을 적을 신경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중요한 순간에 급속한 변침이 발생하면 포격에서 문제가 생길 확률이 크지.
그러니까 이런 순간마다 전령을 보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전령을 보낼 곳은 많고, 전령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원수는 한정적이다.
게다가 전령이라는 것 자체가 정확성도 떨어지고 속도도 빠르지 않은 편이다.
심지어 이동 중에 다칠 위험까지 있지.
최악의 경우 전령이 이동 중에 사망 혹은 실종되었다고 하면, 전령을 보낸 쪽은 당연히 전달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령을 못 받은 쪽은 갑작스러운 작전 변화나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하게 되겠지.
제일 좋은 방법은 무전기를 쓰는 것인데, 무전기는 이미 두 배가 하나씩 나눠 갖기로 했으니 원….
“선장님?”
“…….”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응? 아, 미안,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차,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나 보다.
급히 대답하며 눈을 돌리자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인델프가 보였다.
그는 내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내 안색을 살피더니 희미한 의심 한 자락을 남기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항해도의 한 점을 짚었다.
“별이 뜨자마자 측량한 현 위치는 여기입니다. 이대로 진행하면 예상보다 반나절(약 6시간) 정도 빨리 도착할 것 같습니다.”
“반나절? 그러면 한밤중이지?”
“네, 어떻게 할까요?”
“포격 훈련한다고 제법 지체한 것 같은데도 꽤 빠르네?”
“평소보다 바람이 좋은 것 같습니다. 오펜 항해사가 제 몫을 하게 되면서 항해사들의 부담이 줄어든 것도 있을 겁니다.”
“입항은 어려울 것 같고….”
“네, 오차가 조금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아마 어두운 밤일 테니, 항구에서도 입항을 제한할 겁니다.”
나는 해도실을 나와 선교에서 바람과 마스트에 걸린 돛을 확인했다.
바람의 방향도 세기도 나무랄 곳 없이 좋았다.
하지만 돛을 보니 더 빠르게 달리는 것은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돛이 터질 것 같다는 뜻은 아니고, 이 정도 바람의 세기로는 이 속도가 최고라는 뜻이다.
“리버티 호는 별문제 없지?”
“네, 해가 지기 전에 이상 없다는 신호도 확인했습니다.”
“그럼 일단 이대로 진행하자. 아직 이틀 정도 여유가 있으니 말이야.”
“네.”
잠깐, 선교에 서니까 머릿속이 간질간질한 게 뭔가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
“선장님, 물 떠왔습니다.”
“어, 고생했어. 거기에 둬.”
선장이 된 이후로 내가 선장이라고 약간 우쭐하게 되는 순간이 몇 가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소한 심부름을 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도 그런 순간 중에 하나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가 귀찮음을 대신 감수해 준다는 것,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그런데 평소라면 금방 나갔을 수습 선원 녀석이 오늘따라 미적거리고 있었다.
“응? 뭐야? 할 말이라도 있니?”
“저, 선장님. 저 그릇은 뭘로 만든 것인가요? 혹시 저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릇? 아….”
원래 육표가 담겨있던 양철통은 내 물그릇으로 훌륭하게 재활용되고 있었다.
오염에 강하고 세척도 쉬우며 용량도 훌륭했다.
이전에 구해 놓은 평평한 나무판으로 덮어두면, 어디에 담아 둔 물보다 부패하는 속도가 느렸다.
수습 선원의 말을 들으니, 새삼 처음 이 녀석을 재활용하기 전에 대장간에 들고 갔던 것이 생각났다.
대장장이에게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은 복제 가능성이었다.
솔직히 철판에 주석을 도금하는 정도는 이 세상에서도 가능할 줄 알았지.
도금이라는 기술 자체는 지금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게 도금이라고? 이거야 원, 내가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군. 눈앞에 존재는 하니 내가 차마 안 된다고는 못하겠소만, 일단 나는 못 하는 일이오. 아니, 애초에 이렇게 얇고 균일한 철판을 만들어 낸 것도 신기한데, 거기에 더 얇고 균일한 주석… 이게 주석은 맞소? 하여간 그런 도금이라니? 인간의 기술이 맞기는 한지 궁금하군. 그러지 말고 내게 이걸 파는 것은 어떻소? 5만 로스를 드리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양철통에 적용된 기술에 감탄하던 대장장이는 불쑥 5만 로스를 제시했다.
다 쓴 양철통 하나에 500만 원이라니 혹하지 않을 수 없는 가격이었지만, 대장장이의 설명을 듣고 나니 팔기가 싫어졌더랬다.
적용된 기술이 오버테크놀로지라잖아.
그래서 거절하고 표면(뚜껑을 떼어낸 부분)만 깨끗하게 정리해 달라고 했는데, 막상 수리를 하고 보니 쓸데가 없는 거지.
그나마 목제 그릇이나 가죽 물통, 이런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물통으로 쓰면서 만족하고 있지만, 사실 그 가치에 비하면 정말 사소하게 쓰고 있는 꼴이다.
늘 뭔가가 떠 있는, 오묘한 맛이 느껴지는 물만 마시다 보니 깨끗해 보이는 내 양철통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이거 쇠판에 주석으로 도금한 건데, 못 구해. 세상에 이거 하나야.”
“에엑?! 주석이요?”
다시 말하지만, 주석도 꽤나 귀금속에 해당한다.
평민들은 늘 나무잔, 가죽 주머니를 쓰고, 주석 잔은 귀족들만 쓰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겠지. 그런데 가격이 어마어마할걸?”
정확하게 말하면 똑같이는 못 만든다.
그 대장장이가 말하길, 더 크고, 울퉁불퉁하고, 두껍고, 무거워지겠지만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일단 가격이 너무 비싸고, 내구성도 약하며, 무엇보다 무게가 너무 무겁게 될 게 뻔했다.
물통 무게만 한 2kg쯤 된다면 그게 무슨 물통이야, 운동 기구지.
“어, 얼마나 될까요?”
내 엄포에도 깨끗한 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수습 선원이 용기를 내서 내게 다시 물었다.
물통도 물통이지만 사실 내가 받은 물은 따로 관리되는 녀석이라 너희가 먹는 물과 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게 들 것 같은데….
“이 정도 크기면 한 10만 로스쯤 하지 않을까?”
“네에에?! 시, 십만이요?!”
사실 잘 모른다.
그런 거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나는 복제를 한다면 더 큰 사이즈로 하고 싶었지, 이렇게 애매한 크기로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
실망한 수습 선원이 떠나고 그가 놓고 간 양철통을 바라보다 보니, 갑자기 내 머릿속을 간질이던 녀석의 정체가 퍼뜩 떠올랐다.
돈은 조금 들겠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
이틀 후, 우리는 무사히 델라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려와 달리 항구에 도착한 시간은 이른 오후라서 입항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게론드에게 교역을, 네이선에게 선원들 상륙 관리를 맡긴 나는 내 방에서 어제 준비한 상자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실행하려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늘 그랬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더러운 꼴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것이랑,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든다고, 일부러 위험한 짓을 만들어 하는 것이랑은 느낌이 달랐다.
똑똑똑.
“누구야?”
“조나단입니다. 리안 선장님.”
아, 번거로운 녀석.
그래도 이제 앞으로는 볼 일이 없겠지.
나는 불쑥 치솟는 짜증을 꾹꾹 누르며 문을 열어 주었다.
“조나단 씨, 무슨 일이십니까?”
“후작 각하께 언제 가실지 여쭈러 왔습니다. 선장님께서 저를 불편해하시니 전 오늘은 항구관리관에게 신세를 지려고 합니다만.”
오자마자 비꼬는 것을 보니 그동안 내게 빈정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비꼼에 분노하기보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보통 신분은 아니로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실질적 위치나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단서를 주지 않던 조나단이었다.
그래서 내가 더 경계하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
완벽할 정도로 자신을 잘 숨길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심계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한 방증과 마찬가지니까.
그런 조나단도 항해가 끝나서 긴장이 떨어진 것인지, 방금 전에 자신의 신분에 대해 실마리가 될만한 말을 내뱉었다.
바로 항구관리관.
항구관리관은 평민이라고 해도 상당히 높은 취급을 받는 사람이다.
항구를 지배, 혹은 관리하는 귀족에게 직접 임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권력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진짜 권력과 가까이 있을수록 그 힘은 강할 수밖에 없고, 귀족과 직접 연결된 항구관리관은 사실상 평민 중에는 최고 계급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후작을 직접 모시는 것이라면 항구관리관에 비해서 그리 밀리는 위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구관리관을 평대하면서 사전 약속도 없이 집에서 잔다는 말을 할 정도는 아니다.
결국 조나단의 위치는 항구관리관보다 명확하게 위쪽이라는 뜻인데, 이쯤이 되면 진짜 뭐 하는 놈인지 궁금해진다.
그래도 귀족은 아닐 것이다.
귀족의 드높은 자긍심이 있는데, 설마 평민인 내게 공대를 해가면서 지금까지 무례를 참아왔을 리 없으니까.
“그동안 힘든 항해에 불편하셨을 테니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지요. 저는 내일쯤 후작 각하께 보고를 드리러 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좋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마차를 보내도록 하지요. 저와 함께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난 그냥 혼자 가고 싶은데?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선장실.
내가 내려 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오만상을 찡그린 에른스트가 그 침묵을 깨며 조심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에이, 이제 와서 무슨.”
내가 입맛을 다시며 설렁설렁 받아넘기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더 강하게 권했다.
“후작은 그렇게 만만한 자가 아냐. 실수 한 번에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물론, 네 목숨, 그리고 우리의 목숨까지 날아갈 수 있다.”
“알고 있어요.”
“아무리 잘 돼도 마지막까지 피 말리는 긴장감을 유지해야 할 테고.”
“안다니까요.”
“그 와중에 네게 소중한 사람들이 희생될 수도 있다.”
“….”
나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천천히 강해져서 경쟁자와 적들을 이겨내는 것은 게임이나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현실에서 내가 천천히 강해지도록 가만히 두고 볼 경쟁자와 적들이 어디 있겠는가?
보통 자기에게 위협이 되기 전에 무리를 해서라도 싹을 잘라버리겠지.
그러니까 그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설마’라는 생각이 들 때, 그때 허를 찔러야 한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다.
“모르아를 도대체 왜 내게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모르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단 확실한 것은 후작이 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구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지금처럼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뿐이에요.”
“으음….”
“저도 알아요. 이게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하며, 성공률이 낮은 도박인지.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잖아요?”
타앙!
갑자기 에른스트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
“왜 똑바로 말을 못 하는 거냐! 내가 이미 네이선과 우르타에게 물어봤다. 너, 나 때문에 이렇게 무리하는 거지?”
“아 진짜, 노인네가 정말 노망이 나셨나? 왜 이래요? 앉아요, 정신 사나우니까.”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일부러 쾌활하게 말하며 단단히 화가 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괘씸한 놈들이 제대로 이야기는 안 했지만,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 정도 눈치가 없겠느냐? 그 섬에 뭔가 있는 거지? 이 늙은 몸뚱이를 고칠 방법 말이야.”
하, 이 새끼들이 진짜….
내가 신과 만났다는 것은 정말 우리 셋 밖에, 그러니까 인간 중에는 우리 셋밖에 모르는 일이다.
아인델프를 비롯해서 그때 함께 표류한 핵심 멤버들도 내가 페리아 족의 마을에 방문했다는 정도까지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나 살자고 이러는 거라니까?”
“혹시라도 그런 생각이라면 빨리 관둬라. 난 살 만큼 살았어. 더 살고 싶을 정도로 세상에 미련이 많지 않단 말이다.”
“아, 걱정 말아요! 부선장님이랑 전혀 상관없으니까.”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표이지만, 그래. 가능하면 한번 부탁해 보고 싶기는 하다.
신이라면 그를 충분히 고칠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 마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술이 남아 있는 페리아 족이라면,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