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거래를 하시죠?
지금까지야 난파선에서 구했다고 대충 둘러대고 살았지만, 이번에는 씨알도 안 먹히겠지?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있던 후작이 자리에 앉으며 여유롭게 웃었다.
“농담이라도 난파선이니 하는 말은 관두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기에는 우리가 서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나?”
서로 많이 알기는 개뿔, 당신만 많이 아는 것 같구만.
사실상 거의 코너에 몰린 나는 결국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맞습니다.”
“그래, 역시 그랬군.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기는 했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후작은 이제 말라비틀어진 풀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그래도 고맙군. 자네 덕분에 말년에 호사를 누렸어. 그런데 이걸 한번 쓰고 나니 지금은 영 불편하단 말이지. 사람의 몸은 간사한 법이라서 더 좋은 것을 알게 되면 이전에 쓰던 것은 불편해지게 마련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 섬에 가면 다시 구할 수 있나?”
아무리 습기와 바닷바람에 안전한 저택의 침대라고 해도, 내장재를 지금까지 쓰기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후작의 힘과 재력으로도 없는 것을 구할 수는 없었을 테니, 그동안 꽤나 답답했겠지.
“네, 물론입니다.”
“목재도?”
“그것은….”
목재를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다.
생나무를 베어내서 다듬는다고 바로 목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가지고 온 목재도 죄다 우리가 지내던 임시 거처를 허문 잔재들 아니었던가.
물론 드웰이 리버티 호를 수리하면서 이미 배에 붙어있었던 양도 꽤 되었지만 말이지.
각설하고, 페리아 족이 우리가 돌아올 줄 알고 목재를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아닌 이상, 당장 목재를 가지고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곳이 무인도라고 알고 있을(실제로 인간은 없지만) 후작에게 사람의 손이 닿아야 하는 목재를 더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는 그것을 단서로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다.
역시 나를 떠본 것이었는지 후작은 바로 말을 바꿨다.
“목재라는 것이 풀처럼 아무렇게나 베어 오면 되는 것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좀 어렵겠군. 이전에 가지고 온 목재는 자네의 그… 리버티 호라고 했던가? 그 배의 선주가 오랜 시간 준비했다고 하던데, 맞나?”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배에 없는 모양인데, 혹시 죽였나?”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잘못 들었나?
‘죽었나?’도 아니고 ‘죽였나?’라고?
나는 너무 황당한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손을 내 저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향에서 편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군.”
방금 섬뜩한 말을 건넨 사람답지 않게 그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멜라나인은 교역항이 아니다 보니 후작의 정보력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정보를 구하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인력을 갈아 넣어야 하다 보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처음부터 내 배에 첩자를 심어서 정기적인 보고를 받은 것이 아닌 이상에야, 아무리 후작이라도 주요 지점에서만 정보를 받아 보는 것 정도가 한계이리라.
잠시 후작의 말이 끊긴 틈을 타서 나는 슬슬 딜을 위한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후작 각하, 이 세상에서 그 섬까지 항해할 수 있는 항해사는 딱 두 명입니다.”
“두 명?”
“네, 바로 저와 제가 데리고 있는 일등항해사죠.”
“흠, 계속하게.”
“그 섬이 탐나지 않으십니까?”
내가 가벼운 미끼를 던졌지만, 후작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그렇게 끌리지는 않는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종합해 본 결과, 본토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서 관리하기 힘들고, 전략적 이점도 거의 없네. 그렇다고 당장 상업적으로 특별히 큰 이익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심지어 울부짖는 바다 안에 있는 그 먼 외딴 섬에 항구를 건설하는 것 자체가 내가 살아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큰일 아닌가?”
말이 긴 것을 보니 관심은 있군.
“노던테라,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일레드 왕국의 북부를 빼앗지 않는 이상 노던테라에 접근하려면 이 섬을 중계지로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굳이? 식수가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고, 심지어 ‘울부짖는 바다’ 안에 있어서 접근도 어려운 섬을 중계지로 말인가? 농담이라고 해도 재미없군.”
어? 이게 아닌데?
내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다음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보던 후작이 말을 이었다.
“일레드 북부가 아니더라도 시논, 케르빈 군도를 쥘 수만 있다면, 굳이 그 섬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네만.”
“일레드 왕국도 시논과 케르빈 섬을 거점으로 노던테라 항로를 운용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당연하지. 시논과 케르빈 섬을 거점으로 움직이면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여도 타국의 눈을 피할 수 없으니까. 이미 동부에 은밀한 항로를 만들어 둔 일레드 입장에서는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지. 자네가 보고 온 것처럼 그 외에도 두 섬의 가치는 충분하니 말이야.”
제먼 씨에게 얻은 정보는 지금 외에는 후작에게 쓸 수가 없다.
제먼의 신병을 인도받은 후작도 조만간 거의 모든 정보를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제가 모종의 경로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노던테라의 서부 쪽은 케르빈 군도의 최북단에서도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실상 교역항로로는 활용하기 힘들 겁니다.”
배가 갈 수 있다고 해서 모두 항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교역항로의 경우는 ‘효율성’이 중요하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반(조류와 풍향)이 형성되어야 하고, 위험 요소(암초, 와류)가 없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에 최대한 많은 상품을 싣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중간에 재보급을 할 곳이 없어서 필요한 식량과 식수의 양 때문에 정작 교역품을 거의 못 싣는다면, 교역항로로는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모종의 경로? 추정이라…. 그런 모호한 말로 나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 않나? 게다가 아무리 두 섬의 가치를 깎아내려도, ‘울부짖는 바다’ 안에 있다는 입지 조건 때문에 자네가 말하는 섬은 사실 거의 가치가 없네. 잘해봐야 이 풀을 뜯어오는 정도겠지만, 감수해야 할 위험성을 생각하면 내 선단을 보내고 싶지는 않군.”
“그렇지 않다면요?”
처음으로 후작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이지?”
“만약 그 섬이 ‘울부짖는 바다’ 안쪽에 있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리안 선장, 나는 말장난과 거짓말을 싫어하네. 자네는 이미 내게 거짓말을 한 번 했어.”
“일 년 내내 폭풍이 몰아친다는 ‘절망의 바다’와 ‘죽음의 바다’의 범위가 줄어들었다는 소문은 이미 들으셨을 겁니다.”
“흐음….”
후작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다면 ‘울부짖는 바다’ 역시 범위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근거 없는 추론을 믿지 않네.”
“제가 보고 왔습니다.”
순간적으로 후작의 눈이 흔들렸다.
전략적 가치, 중계점으로서의 가치, 그런 이야기는 다 소용없는 이야기다.
애초에 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데 가치는 무슨 가치가 있겠나?
게다가 이미 후작은 우리가 탈출할 때의 흉험함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안전한 접근이 가능하다면 말이 달라진다.
“보고 왔다?”
“네. 폭풍을 만나서 생각보다 너무 북쪽으로 흘러갔었습니다. 어차피 조나단이 함께 타고 있었으니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방을 확인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했죠. 망원경으로 충분히 보여야 할 비구름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요.”
잠시 턱을 매만지던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접견실을 서성거렸다.
새로 들어온 정보의 진위 여부와 그로 인해 달라지는 상황에 대해서 계산하는 것이겠지.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방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된 듯 무표정으로 돌아온 후작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말을 꺼냈다.
“자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폭풍 해역들은 일 년 내내 폭풍이 몰아치지 않네. 그리고 그 범위도 원래 조금씩 변하는 편이고. 그러니 자네가 잠깐 구름이 걷힌 것을 보았다고 그것이 울부짖는 바다의 범위가 줄어들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지. 그리고 만약 범위가 약간 줄어들었다고 해도, 과연 자네가 말한 섬도 그 폭풍에서 벗어났을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제가 가겠습니다.”
“흠?”
“제가 직접 확인하고, 증거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후작 각하께서는 전혀 손해 볼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후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목숨을 걸겠다라. 그래, 그렇게까지 해서 자네가 얻는 것이 뭔가? 고작 이 노인네의 침대를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섬, 제가 가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으하하하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웃음을 터뜨린 후작은 한참 동안 그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대충 비슷한 반응을 예상했던 나조차도 무안할 정도로 말이다.
“어흠, 흠, 오래간만에 크게 웃어보는군. 정말 재밌는 농담이었어.”
“후작 각하.”
“그만.”
언제 웃었냐는 듯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후작이 냉랭하게 내 말을 잘랐다.
“왕국의 적법한 지배자는 국왕 폐하시다. 이 나라의 모든 영토는 그분께 귀속된 것이지. 그런데 새로 발견한 땅을 너 따위가 갖겠다고? 손바닥만 한 섬나라의 왕이라도 되겠다는 것이냐? 감히 그런 헛소리를 내 앞에서 지껄여?”
“아닙니다, 후작 각하.”
“한 번의 기회를 주지.”
내일모레 관 짜야 할 것 같이 생긴 노인네가 무슨 박력이….
그리고 저 눈빛을 봐라.
호랑이도 ‘엇 뜨거!’ 하고 도망가게 생겼다.
“새로운 섬, 당연히 국왕 폐하의 영토가 되겠지요. 하지만 본토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섬입니다. 결국 쿠샤 왕국이나 일레드 왕국처럼 총독을 파견해야겠지요. 하지만 지금 있는 시논 총독과 마다카트 두 총독은 각 섬에 다스려야 할 주민이 있지만, 제가 말한 섬에는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무인도이니 말입니다. 물론 중계점으로 활용하려면 이런저런 시설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넘어가야겠지만, 어차피 그 규모는 마을 수준도 되지 않을 테지요. 훗날에는 어찌 될지 몰라도, 당분간은 총독을 파견할 가치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은 여전했지만,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괜찮은 것 같다.
“각하께서 그 섬을 개발할 권리를 저에게 보장해주신다면, 제가 직접 개발해 보겠습니다. 어느 정도 개발이 끝나고, 섬의 가치가 온전해졌을 때, 그때 왕국에서 관리를 파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후작 가문의 영지로 추가될지도 모르지요.”
“말은 그럴듯하군. 하지만 그러면 자네에게는 뭐가 남지? 실질적인 위험은 자네가 다 무릅쓰고, 결과물은 왕국에 바치겠다?”
“물론 아닙니다. 저는 그 섬을 개발하면서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노던테라라….”
“그리고 섬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돌아가건, 적어도 제가 개발한 섬의 이권은 제가 많이 쥘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후작 각하께서 제 권리를 인정해 주실 때 이야기입니다만.”
내 눈을 노려보던 후작이 드디어 눈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그 섬을 내가 영지로 받으면, 자네에게 봉지로 주기를 원하나?”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허허허, 귀족도 아니고, 우리 가문의 가신도 아닌 자네에게 봉지를 달라?”
“공식적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적당히 제가 섬에서 이권을 지킬 수 있을 정도만 보장해주신다면, 중계지로서의 섬과,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를 바치겠습니다.”
재미있다는 듯 나를 보던 후작이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내가 악당이 된 기분이지만, 자네의 말은 그리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는군. 차라리 내 가신들과 선단을 보내 그 섬을 개발하는 것이 내게는 더 안전한 길인 것 같거든.”
“…밖에 있는 친구를 잠시 들어오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음?”
“각하께 진상할 물건을 그 친구가 들고 있습니다.”
“…물건만 가지고 오지.”
***
잠시 후, 네이선이 마차 안에서 소중하게 품고 있던 상자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상자를 툭툭 쳐본 후작이 피식 웃었다.
“나름 노력한 모양이지만, 포장이 엉망이야.”
“죄송합니다, 배운 것이 없어 예를 차리지 못했습니다.”
“술인 것 같은데?”
“네.”
“뇌물이라면 실수한 것 같군. 이제 나이가 있다 보니 술을 그리 즐기지는 않거든.”
나는 후작의 말에 따로 대답하지 않고 바로 뚜껑을 열었다.
“…….”
“마음에 드십니까?”
“…으으음….”
천천히 손을 뻗어 병을 집어 든 후작이 꼼꼼하게 병을 살피기 시작했다.
특히 마개 부분을 공들여서 살피던 후작이 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구하기 쉽지 않은 녀석인데. 용케도 구했군.”
“바다에는 많은 것들이 묻혀있으니까요.”
“주는 것이니 고맙게 받겠네만, 이런 것으로 청탁하기에는 너무 큰 건이지 않나?”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상품입니다.”
“응?”
“거래를 위한 것은 따로 준비했습니다.”
“거래? 내게 거래라는 말을 할 정도의 물건이라?”
약간의 비웃음, 불쾌함, 호기심이 뒤섞인 후작의 표정.
마지막 패를 던질 순간이다.
“이 위스키는 제가 찾은 난파선의 선장실에서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장실에서 온전한 와인 한 병도 구할 수 있었지요.”
잠시 후, 내 말을 이해한 후작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후작도, 없는 것을 만들어 낼 재주는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