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말할 수 없는 부탁
너무 오래되어 종이 라벨마저 사라진 검은색 술병.
사실 물에 젖어서 사라진 것이지만, 그냥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그것까지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말에 후작은 테이블에 내려놓던 그 술병을 다시 들어 올려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거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곧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후작은 말을 흐리더니 술병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몸을 뒤로 젖혔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병의 디자인은 대략 400년쯤 전의 것이네. 라벨은 없지만, 이 자체로도 꽤나 가치가 있지. 알고 있었나?”
몰랐으면 내가 굳이 왜 보여줬겠어?
“물론입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니 유감입니다.”
“허허허….”
평온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짓던 후작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함께 찾은 와인이라. 자네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정도면 생각나는 것은 하나밖에 없네, 베르시아나 와인. 온전한 병만으로도 호사가들이 눈을 뒤집는다는 녀석이지. 혹시 함께 발견한 와인이 그것인가?”
“역시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그래, 이렇게 나와 줘야지.
여기에서 후작이 ‘그게 뭔가?’라고 했으면 진짜 완전히 다 망하는 판이었는데 다행이다.
보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나 보물이지,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빵 한 덩어리만도 못한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내가 이 두 병의 술을 얻은 것도 그렇게 얻은 거잖아.
“어디에서 찾았나?”
“각하께서도 제가 향료 제도에 갔다 온 것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향료 제도로 향하던 중에 폭풍을 만나서 향료 제도의 북동쪽 암초 지대를 통과한 적이 있습니다.”
“흐음…. 그곳은 너무 많은 암초로 인해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네만?”
“네, 실제로 가보니 항로로는 거의 가치가 없는 지역이더군요. 하지만 운 좋게 저희는 통과할 수 있었죠. 당시에 배에 첩자로 있던 해적 놈이 가진 해도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요.”
“그런데?”
“그곳을 지날 때 식량과 식수가 부족했고, 아주 작은 섬에 상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섬의 한쪽에서 잔해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난파선을 제가 발견했고, 위에 보고하기 전에 제가 이 두 술병을 챙겼지요. 처음에는 이렇게 비싼 것인 줄 몰랐습니다. 그저 눈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것을 급하게 챙긴 것이라서요.”
나는 미리 준비한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늘어놓았다.
나와 이클로나 호를 타고 향료 제도로 갔던 이는 네이선과 우르타밖에 없다.
심지어 오펜조차도 우리가 향료 제도에 도착한 이후에 합류했으니, 아무리 후작이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알기는커녕 차후에 확인하기도 힘들 거다.
만약 우르타나 네이선이 배신하고 후작에게 붙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 정도 상황이면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것이니, 죽어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이것들의 가치는 어떻게 알았나? 자네 스스로 원래 귀한 물건인 줄 몰랐다고 한 것 같은데?”
“제가 선원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뒷골목의 인연이 조금 있습니다. 그중에는 감정을 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뒷골목에?”
괜히 회계사 게론드를 노출시키기 싫어서 만능의 뒷골목 핑계를 대었지만, 이번만큼은 잘못 말한 것 같았다.
뒷골목이라는 말에 후작은 바퀴벌레라도 본 듯이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급히 부연 설명을 붙여야 했다.
“장물을 거래하려면 최소한 그 장물의 가치를 공인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뒷골목이라.”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던 후작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뭔가를 집어 들고 돌아왔다.
“확인이 필요하겠군. 선물은 고맙게 받겠네.”
내게 슬쩍 웃으며 말한 그는 거침없이 테이블에 놓인 병의 마개에 오프너를 찔러 넣었다.
어우야, 게론드의 말에 의하면 베르시아나 와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녀석도 꽤 비싼 녀석인데 저렇게 거침없이 따버린다고?
“나이가 들어서 힘이 드는 일은 어렵군. 자네가 한번 따 보겠나?”
“네? 네….”
나는 후작이 주는 위스키 병을 얼떨결에 받아들고는 떨리는 손으로 병마개에 박혀있는 오프너를 움켜쥐었다.
이미 오프너에 의해 마개가 손상된 이상, 이 병은 이제 따는 수밖에 없다.
20만 로스는 충분히 할 거라는 초고가의 위스키병을 내 손으로 따는 날이 올 줄이야.
뽕!
경쾌한 소리와 함께 400년이 넘은 위스키 향이 접견실에 퍼지기 시작했다.
감상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냥 위스키 향이다.
내가 즐겨 마시던 녀석에 비하면 글쎄,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오프너를 내려놓고 공손히 병을 후작에게 내밀자, 후작은 병을 받아 테이블 한쪽에 보기 좋게 놓여 있던 유리잔에 두 잔을 따랐다.
황금색의 보기 좋은 위스키가 병에서 흘러나오며 공기 중에 흩어져있던 위스키 향이 조금 더 짙어졌다.
“자네가 가지고 왔으니 직접 마셔보게.”
후작은 술이 반쯤 담긴 유리잔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반사적으로 잔을 들기는 했지만, 술잔 속에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자 살짝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한 잔이면 가격이,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최소한 수백 년간 바닷속에서 제멋대로 방치되어있었을 것이 분명한 술이 아직 괜찮은 걸까?
물론 고민은 짧았다.
그래봐야 술인데 설마 마신다고 죽기야 하겠냐 싶기도 했고, 만약에 안 마신다고 했다가는 후작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고 즉결처형당할 것 같았으니까.
20만 로스의 향기를 음미… 하기는 개뿔, 급하게 들이 삼킨 술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고, 뒤이어 화끈한 느낌이 식도와 위장의 위치를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
“어떤가?”
그냥 위스키 맛인데?
솔직히 약간 정제되지 않은 맛이랄까?
내가 주로 마시는 위스키보다 저급 위스키 같은 느낌이다.
아니면 그냥 내 입맛에 안 맞는 것일지도 모르지,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괜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천상의 맛이 어쩌고, 싱그러운 포도의 어쩌고 하는 시답잖은 말을 해봐야 후작에게는 먹히지도 않을 것 같고.
“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웬만한 대귀족도 함부로 따기 어려운 수십만 로스짜리 위스키일세. 그게 감상의 전부인가?”
“저는 그냥 평소에 마시던 것이 더….”
내가 쭈뼛거리며 입장을 바꾸지 않자, 후작은 무릎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그래? 뭐, 그렇겠지. 400년 동안 양조 기술이 발달했는데, 지금 사람에게 어찌 옛날 술이 입에 맞겠나? 베르시아나 와인? 살아있는 사람 중에 그걸 마셔 본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저 호사가들의 헛소리에 의해 부풀려진 허상일 뿐이지.”
아, 왠지 망한 느낌인데?
아무래도 판매 상대를 잘못 고른 모양이다.
차라리 전에 만났던 발레리아 백작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쪽은 괜히 와인 꺼냈다가 인어로 바로 연결시킬 것 같아서 엄두도 못 냈지만 말이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그냥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후작이 웃음을 그치더니 자신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흐음, 그리 좋지는 않군.”
향을 잠시 맡고는 입술을 축일 정도의 술만 마신 후작이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좋은 술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게 정상이겠지. 아무리 400년 전이라고 해도 선장 따위가 고급술을 마시지는 못했을 테니. 베르시아나 와인은 뭐, 그 당시에는 흔한 와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급한 마음에 내가 뭐라도 말하려고 했지만, 후작은 손을 들어 나를 제지하고는 말을 이었다.
“조급하게 굴지 말게. 아무리 허상이라지만 내가 그 가치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그 와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아는 장소에 숨겨두었습니다. 가치만큼이나 위험하기도 한 물건이니까요.”
“흐흐흐,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군. 자네, 내 가신이 되고 싶다고 한 것 아니었나?”
능청스러운 후작의 말에 나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후작 각하께서는 제게 확답을 아직 주지 않으셨습니다.”
“자네와 이런 귀찮은 거래를 때려치우고 그냥 빼앗는 방법도 있네.”
“그렇다면 각하께서는 저를 얻지 못하시겠지요.”
“선장을? 크하하하, 그래, 그렇지. 고작 술 한 병 때문에 죽여 버리기에 자네는 좀 아깝지.”
제기랄, 죽이겠다는 말보다 더 무섭네.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후작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내 잔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 잔 더 필요한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일단 자네의 제안은 잘 들었네. 오래간만에 참 재밌었어. 그럼 밖에 있는 친구를 보내 와인을 가지고 오도록 하지. 일단 와인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나?”
휴우, 어쩌다 보니 내 패를 다 까버렸네.
어쩔 수 없는 것이, 후작과 나의 힘 차이는 그 정도로 절대적이다.
동등하고 공정하게 카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고, 힘을 써서 우격다짐으로 내 패를 다 보고 게임을 할 정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느냐고?
후작은 내 카드를 다 깠지만, 내가 손목에 카드를 숨기는 것을 보지 못했잖아.
그리고 하나 더, 이제 후작은 내게 숨긴 카드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 어느 정도는 나를 믿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방심을 하거나.
***
와인을 숨겨둔 위치를 전해들은 네이선이 마차를 타고 떠나고, 나는 이전처럼 후작 저택에 감금(?)당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내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해줄 하녀와의 기묘한 동거(?)는 없었다.
혼자서 외로운 식사를 마치고 샤워를 한 뒤 배정된 방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안 선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무슨 일입니까? 아니,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온 하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문 옆으로 살짝 비켜섰고, 그가 비켜 선 자리에 예상치 못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어?! 왕ㄴ… 아니, 아가씨!”
“오랜만이네, 리안 선장. 잠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아가씨. 그런데….”
반가운 마음도 잠시, 나는 바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원래 약자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지금 나는 더욱 후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첫 만남에서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말라는 말을 직접 듣기까지 했으니, 그녀를 이 타이밍에 만나는 것은 이후로 좋게 작용할 리가 없었다.
“이 방에서는 내가 손님인 듯한데, 언제까지 세워 둘 셈인가?”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온 집주인(?)을, 심지어 반가운 사람을 내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서 테이블 한쪽의 의자를 빼 주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를 따라온 듯한 하녀가 문을 연 하인에게 조용히 뭐라고 하더니 하인을 밖에 두고 문을 닫았다.
귀한 아가씨를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와 단둘이 놔둘 수는 없겠지.
“그러니까… 으음, 펴, 평안하셨습니까?”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녀를 보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생겨서 일단 되는대로 지껄여 보았다.
그런데 평안은 개뿔, 그녀의 얼굴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는지 알겠다.
화장으로 가리기는 했지만, 확연히 푸석해진 피부, 홀쭉해진 뺨, 더 커 보이는 눈까지.
이건 가녀린 정도가 아니라 숫제 환자다.
“훗, 나야 늘 똑같지. 그대는 어떠한가? 나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지?”
“아, 아닙니다! 아가씨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 그럼 곤욕을 치르고는 있다는 말이군.”
쓸데없이 예리한 아가씨의 말에 나는 살짝 눈치를 주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서 고작 2m가량 떨어진 곳에 하녀가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무슨 말을 하건 충분히 다 들릴만한 거리다.
하지만 그녀는 내 눈치에 하녀를 힐끗 보더니 작게 웃었다.
“걱정 말게. 그녀는 내 사람이니. 그대가 후작 각하를 암살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오늘 일을 함구할 거야.”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라고 왕궁에서 안 가르치나?
잠깐, 그러고 보니 방금 ‘후작 각하’라고…?
그녀는 후작의 외손녀다.
실제로 전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할아버님’ 정도로 부르지 않았던가?
분명히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뜻인데?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오셨습니까?”
“곤욕을 겪고 있다기에 사과를 하고 싶었네.”
“괜찮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고작 이런 의미 없는 사과를 하려고 직접 행차하셨을 리는 없으니, 이게 본론이겠지.
“나는 곧 결혼하게 될 것 같네.”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뭐랄까,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귀족 가문의 여자들은 보통 10대 후반이면 결혼을 하게 된다.
당연히 상대는 부모님, 혹은 가주가 정한 정략 상대이고.
그녀의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결혼 적령기는 이미 지난 것 같으니 후작도 그녀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결혼을 시키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로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아마도 스스로 뭔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그녀의 소망을 알기 때문이겠지.
.
.
.
겨우 감정을 수습하고, 열리지 않는 입술을 떼어 쥐어짜듯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축하… 드립니다.”
“…그런가. 고맙군.”
굳이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그녀는 결혼하기가 싫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녀를 도울 수 있겠는가?
이건 이전에 도와주었던 밀항이나 정보조사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녀를 빼돌린다고?
후작 면전에서 침을 뱉고 욕을 하는 쪽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눈빛으로 자신의 말을 전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는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할 영웅이 아니고, 그녀 역시 마왕에게 사로잡힌 공주가 아니다.
더 이상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는가? 이제 그대의 배를 탈 수 없으니 잠시 시간을 내어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려주게.”
“그렇다면….”
그녀는 내 의사를 확인하고는 담담하게 화제를 돌렸고, 나는 최선을 다해 배에서 겪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즐거운 듯이 내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반응은 완벽한 귀부인의 그것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끝까지 공허한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
다음 날 정오가 되기도 전, 네이선이 찾아왔다.
“어? 너 뭐야?”
“어우, 말도 마. 어제 항구로 갔다가 너무 늦은 시간이라 오늘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미친 마부 놈이 새벽부터 난리인 거야, 빨리 가야 한다고. 그래서 아침도 못 먹고 왔어.”
“내가 가지고 오라는 것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집사인가 하는 사람이 가지고 가던데? 후작이 가지고 오라고 했다고.”
평소처럼 쉽게 후작을 말하는 네이선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고 작게 속삭였다.
“미친놈아, 여기에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후작 각하’라고 해야지!”
“읍읍읍!”
“뭐라는 거야?!”
“읍읍!
“아, 미안.”
내가 급히 손을 떼자, 네이선은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했다.
“에퉤퉤! 너 손 씻었어? 그리고 뭐, 우리 둘밖에 없는데 어때?”
“시끄럽고, 그걸 그냥 그렇게 줬어?”
“어쩔 수 없잖아. 말이야 정중하게 달라고 해도,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을 하겠어?”
“그렇기는 하지….”
“별일 없었고?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답답해 죽겠네.”
네이선도 어제 급하게 와인을 숨겨둔 위치만 듣고 출발한 터라,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와인 이야기는 나와 게론드, 그리고 에른스트 부선장만 알고 있던 이야기라 조금 서운한 부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좀 앉아. 방은 배정받았어?”
“어? 어, 옆 방. 그런데 들어가기 전에 일단 너에게 할 말 있다고 들른 거야.”
나는 시간을 가늠해보고 빠르게 네이선에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아직 후작이 나를 호출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후작이 직접 보기보다는 아마 전문가를 불러서 확인시키려고 할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거 게론드의 말만 믿고 지른 건데, 만약 아니면 어떡하지?
게론드도 전문가는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