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인력난
선박권리증.
“이, 이게 뭐야?”
“잠깐만, 내가 지금 난독증이 생긴 거냐, 마차가 흔들려서 제대로 안 보이는 거냐?”
“이거 그거 아니야? 선박권리증!”
“이제 제법 잘 읽는다? 나도 그렇게 보이기는 하는데.”
대충 읽어보니 배수량 650톤급의 신형 상선에 대한 권리증이다.
이제 막 진수되어 취항을 앞두고 있는 진짜 새 배다.
그런데 후작이 이걸 나에게 왜 줘?
“와인이랑 배를 바꾼 거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와인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설마 방금 건조한 배랑 바꿔주겠냐?
물론 선박권리증이 내게 있으니 내 배는 맞다.
그런데 증여자가 후작이라는 것이 문제지.
언제든지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줘야 하는 거잖아.
내가 감히 후작을 상대로 법정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역시 리안은 대단해! 술 한 병을 배로 바꿔오다니 말이야!”
이봐, 네이선. 너 지금 내 말 듣고는 있는 거니?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후작에게는 큰일도 아니었다.
증여나 양도를 했다가 다시 빼앗기 힘든 것은 쌍방의 힘이 비등할 때의 이야기다.
후작과 나처럼 힘의 강약이 명확하면 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선박의 개조나 운용을 편하게 하라고 선박권리증을 내게 주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선주는 스코타 후작이라고 봐야겠지.
후작은 내가 탐사와 개발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투자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두 척인 선단과 세 척인 선단은 무게감이 다르니 말이다.
내해에서 중형 상선 세 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을 공격할 수 있는 해적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오트라스 호는 무장상선 수준의 어마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한다.
해적들 입장에서 보면 사냥하기는 더럽게 힘든데, 사냥에 성공해도 먹을 게 별로 없는, 최악의 사냥감이 되는 것이지.
그나저나 배는 그렇다고 치고, 사람을 어떻게 채운담?
당장 선장, 항해사, 갑판장… 어휴, 골치야.
그런데 왜 이렇게 입꼬리가 올라가지?
***
오트라스 호가 정박한 부두의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준 마부에게 감사를 표하고 설렁설렁 걸어가는 중이었다.
“이보게, 젊은이.”
“응?”
“네?”
쓸데없이 잡담을 나누던 나와 네이선은 뒤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자네들, 저 배에서 일하는가?”
대략 50세쯤 되어 보이는 장년의 남자가 정확하게 오트라스 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고급스러운 복장을 보니 배랑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데 누구지?
정체가 의문스럽기는 해도 특별히 적대적인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요. 누구신지?”
“아! 다행이군. 나는 저 배에서 일하는 사람의 아비 되는 사람일세. 선장님을 만났으면 하는데, 혹시 밟아야 하는 절차라던가 그런 것이 있다면 좀 알려줄 수 있겠나?”
으엥?
한눈에 봐도 보통 부자가 아닐 것 같은 아버지를 둔 선원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있을 수가 있는 거야?
몇 번째 말하지만, 이 세상의 선원은 진짜 하층민들이 선택하는 직업이다.
앗, 그러고 보니 일반 선원이 아니라 간부일 수도 있구나?
“아니요. 그런 것은 없는데, 무슨 일이신지?”
“오, 그런가? 그렇다면 선장님에게 나를 좀 안내해 주게. 부탁하네.”
내 말에 반색하며 부탁을 하던 남자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급하게 품에 손을 넣어 은화 두 개를 꺼냈다.
“자, 약소하지만 받게.”
얼떨결에 은화를 받아 든 네이선이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고 은화를 품에 넣은 뒤 말했다.
“네, 따라오시죠.”
돈까지 주시는 손님을 밖에 세워두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지.
***
“선장님이 돌아오십니다!”
우리가 오트라스 호의 현문 근처에 이르자, 우리를 발견한 현문 당직자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에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기라도 했나? 왜 이렇게 호들갑이람?
우리를 따라오던 남자가 그 소리를 듣고는 살짝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당황한 남자를 데리고 현문을 지나자 미리 나와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반겼다.
에른스트 부선장을 필두로 아인델프, 바우어, 오펜, 우르타, 게론드, 행크, 비에론…. 세상에, 간부들이 죄다 배에서 대기 중이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오트라스 호의 맞은편에 정박하고 있는 리버티 호에서도 몇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선장님.”
부선장님이 대표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고, 그 말이 끝나자 다른 이들도 앞다투어 내게 잘 돌아왔다는 인사를 건넸다.
한 명만 빼고.
“아, 아버지?”
게론드가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그 말을 끝으로 모두의 입이 다물어지며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게리…. 후우, 사지 멀쩡하게 있는 걸 보니 다행이구나.”
“으으…. 아버지가 여, 여기를 어떻게?”
“란데르에게 물어보았다. 그 녀석에게는 꼬박꼬박 가면서 집에는 한 번도 안 들러?”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던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아버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이 배의 선장 리안입니다. 저를 찾아오신 것 아니셨습니까?”
“아, 선장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미리 말씀하셨더라면….”
자기 아들과 또래로 보이는 내가 선장이라니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일단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인사에 화답하고 비에론에게 말했다.
“조리장, 손님에게 접대할만한 게 있나?”
“네, 선장님. 준비할까요?”
“응, 선장실로 가져다줘.”
조리장 비에론이 급히 조리실로 떠나자, 나는 어색하게 서 있는 게론드를 향해 말했다.
“회계사도 함께 가지.”
“네? 네, 선장님.”
***
선장실에 도착한 뒤, 이제야 내가 선장이라는 것을 믿게 된 게론드의 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리안 선장님, 부족한 제 아들을 잘 살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게론드 회계사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현문에서 들었던 대화로 미루어볼 때, 게론드가 배에 탄 이후로 집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그런데 그게 엄청나게 특별한 일이냐고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게론드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대략 나와 비슷한 20대 중반, 가업을 잇기 위해 부모님을 모시는 상황이 아니라면 충분히 독립을 하고도 남을 나이다.
그리고 부모에게서 독립한 자식은, 현실적으로 부모를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휴무일이 정확하게 정해진 세상도 아니고, 노동 조건이 좋은 세상도 아닌데다가, 교통편이 좋은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다행히 서로 사는 집이 근처라면 짬을 내서 만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평생 몇 번 못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시내에서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는 케넌트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놈이 배를 타겠다는 쪽지 한 장만 남기고 떠나서는 일 년이 다 되도록 연락 한 번 없어서요. 부모 된 도리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오스팔트 가문의 자제에게 알아보니, 그곳에는 가끔 들렀다고 하더군요. 오늘도 혹시나 해서 찾아갔다가 선장님의 배가 정박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회계사가 잘못했네요. 회계사, 아버님께 사과드려. 아무리 우리가 연락을 자주 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부모님께 그러면 안 되지.”
…어우야, 게론드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그냥 일반론을 말한 거잖아, 이게 그렇게까지 노려볼 일이야?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게론드는 고개를 살짝 젓더니 케넌트 씨를 보며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제가 집에 들렀다면 바로 잡아 가두셨을 거잖아요. 배를 탄다고 하면 당연히 반대하셨을 거면서 무슨.”
“이놈아! 그럼 하나뿐인 아들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배를 탄다고 하는데, 그걸 좋다고 받아들일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이냐?”
으음, 배가 좀 위험하기는 하지.
“제가 다 써 놨잖아요! 이제 1년만 더 있으면 된다구요!”
“시끄럽다. 이만하면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짐 싸거라!”
저기, 아버님? 갑자기 이러시면 제가 조금 곤란합니다만?
“전 란데르 형과 약속한 2년을 다 채우고 시니아랑 결혼할 거라니까요?”
“아직도 시니아 타령이냐?!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그 아이는 널 싫어한다니까?”
“내 참, 아버지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시니아도 분명히 절 좋아할 겁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버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 회계사.
그리고 너, 란데르 그 작자한테 사기당한 거라니까?
“어휴…. 그래, 네놈이 원하는 건 시니아와 결혼하는 것이냐?”
“물론이죠!”
“그럴 줄 알고 혼담을 넣어 놓았다.”
“그래도 전 못… 네?”
순간 나도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아저씨가 지금 뭐라고 하신 거야?
기겁한 모습으로 잠시 굳어졌던 게론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소리쳤다.
“혼담?! 시니아랑요?”
“그래. 아직 답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집에 돌아오겠느냐?”
게론드의 집안도 재력이 상당한 것 같으니 시니아라는 아가씨와 격은 대충 맞는다.
란데르라는 친구는 게론드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 아직 가주는 아닌 것 같으니 아무리 자기 여동생이라도 집안의 결정에 반대하기는 힘들 것 같고….
“아니, 분명히 계속 반대만 하셨잖아요.”
“이놈아, 나도 이제 늙었다. 언제까지 상회를 내가 운영하게 할 테냐? 이제 네가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지.”
잠깐만! 그럼 우리 회계사는?
“저, 게론드 회계사? 이렇게 갈 건 아니지?”
“지금 당장 짐 싸겠습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이미 게론드의 귀에 내 말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게론드가 나를 보지도 않고 급히 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한발 먼저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똑.
“선장님,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오펜?”
내가 눈짓을 하자 게론드가 문을 열었고, 문 앞에 있던 오펜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내게 사과했다.
“손님과 계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쪽 문제도 조금 급해서….”
“무슨 일인데?”
내 말에 오펜이 머뭇거리며 게론드의 눈치를 보았다.
“뭐야? 비밀스러운 이야기야?”
그때 뒤쪽에서 케넌트 씨가 말을 걸었다.
“이런, 선장님. 바쁘실 텐데 일을 보시지요. 저와 게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배에서 내리는 것도 무슨 절차가 필요합니까?”
배에서 내리는 거야 타는 사람 마음이긴 한데... 아저씨, 그렇게 갑자기 회계사를 빼 가시면 나는 어떡해요?
“게론드 회계사, 일단 아버님 배웅하고 이따가 이야기 좀 하지. 아무래도 우리가 좀 정리해야 할 내용이 있잖아?”
게론드는 단순하게 상품을 사고파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선원들의 선박 은행(?) 이용도 책임지고 있고, 오트라스 호뿐만 아니라 리버티 호의 재무 상황까지 겸임으로 살피고 있다.
지금 갑자기 게론드가 빠지면 내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진다는 말이다.
내 필사적인 말에 게론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인수인계는 필요하겠지요. 그러면 아버지를 바래다 드리고 오겠습니다.”
“그, 그래….”
내가 답답한 마음을 감추고 겨우 대답하는데 쭈뼛거리던 오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아무래도 회계사님도 같이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응?”
“저 말입니까?”
“네….”
***
게론드, 케넌트 씨와 함께 오펜을 따라 갑판에 나오는 순간, 나는 골치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비켜욧! 당장 선장 오빠에게 안내하라니까요?!”
“아가씨, 선장님은 지금 바쁘….”
“앗! 선장 오빠!”
릴리안이라고 했던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성숙해진 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릴리?”
내 뒤에 있던 게론드도 맹한 목소리로 그녀의 애칭을 내뱉었다.
그때 우리를 발견한 선원들이 잠깐 몸을 틀며 방심했고, 릴리안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선원들을 통과해 이쪽으로 달려왔다.
다다다다닥!
빠악!
어억? 분명히 뭐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아아아악! 리, 릴리! 무슨 짓이야?!”
“이 멍게해삼쥐며느리바퀴벌레같은게!”
나에게 달려온 그녀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내 뒤에 있던 게론드의 정강이를 힘껏 발로 차 버린 것이었다.
축구선수 저리 가라 할 강력한 킥이었다.
“릴리! 무슨 짓이니?!”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나도 반쯤 얼이 빠져있는데, 현문 쪽에서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 시니아!”
게론드의 그녀, 바로 시니아 양이었다.
릴리안이 달려든 시점에서 이미 그녀들을 막기를 포기한 선원들은 힘없이 자리를 비켜주었고, 시니아 양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이쪽을 향해 다가와서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선장님. 그리고 케넌트 아저씨.”
그녀의 모습을 본 게론드는 아픈 것도 잊었는지 얼굴이 빨갛게 변해서 허둥거렸고, 아직도 씩씩거리는 릴리안은 팔짱을 낀 채로 그런 게론드를 노려보았다.
케넌트 씨도 적잖게 당황한 모습이다.
그녀들이 온 이유는 뭐,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로멘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배 위에서 갑자기 이게 무슨 막장 전개야?
그나저나 나, 새 배의 선장, 항해사, 갑판장도 모자라서 회계사도 새로 구해야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