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봄바람과 사라진 기억
일단 면접이라도 볼 생각으로 모르아가 추천한 사람을 한번 불러오라고 한 뒤 내보내자, 네이선과 우르타는 제멋대로 내 술을 들고 와서 따르며 떠들기 시작했다.
“새 배의 선장은 일등항해사님이겠지?”
“그렇지 뭐. 일등항해사 말고는 할 사람이 없잖아.”
“리안! 선장은 일등항해사야?”
두 사람의 말대로다.
나도 믿을만한 사람은 아인델프밖에 없고, 본인도 꽤나 기대하는 모양이니까 말이다.
이미 발드 선장에게 한번 밀렸으니 이번에는 선장을 시켜줘야지.
갑판장은 모르아를 시키면 될 것이다.
원래 모르아가 왓킨 밑에 있을 짬밥도 아니고, 리버티 호에서 돌격대장은 말 그대로 허울뿐인 자리니까.
문제는 항해사인데, 슬레어와 바우어 모두 일등항해사를 시키기에는 결격 사유가 하나씩 있었다.
슬레어는 무엇보다도 경험 부족이 제일 문제다.
성격도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기보다는 약간 수동적인 편이라서 향상심이 부족하기도 하고.
당장 일등항해사를 시켰다가는 과중한 책임감에 몸져누울지도 모른다.
바우어는 더 심각하다.
전투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공포로 몸이 굳는 녀석을 어떻게 일등항해사를 시킨단 말인가.
부선장까지 임명하기 어려운 만큼 일등항해사가 선장을 도와 항해 일정을 총괄하고, 유사시에는 상황을 주도적으로 지휘해야 하는데… 바우어가 지휘를 했다가는 바로 지리멸렬(支離滅裂)해버릴 거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이쪽보다 대포가 더 많은 피오렐의 특성상, 포술장이 필요했다.
보통 상선에서는 갑판장이 대충 두루뭉술하게 포를 관리하지만, 확실히 포를 전담하는 포술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전투 상황에서 포격의 위력이 크게 차이 나니 말이다.
그리고 피오렐이 어딜 봐서 그냥 상선인가?
아무리 낮게 봐줘도 무장상선, 부선장님이 말한 대로 호위함 급 군함에 더 가깝지.
그리고 피오렐도 최소 운용 인원이 만만치 않으니 조리장도 필요할 것 같고, 업무가 너무 많아져서 게론드를 보조할만한 회계사나 산수에 능한 보조 인원도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닥터를 보조할 인원도… 데보라 양을…,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휴, 그나저나 진짜 큰일이네.
나는 절망적인 인재난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안으로 숨기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해줬다.
“그래, 아무래도 선장은 아인델프 항해사를 시켜야겠지. 갑판장은 모르아에게 맡기면 될 것 같고.”
“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 모르아 아저씨도 갑판장이었지?”
“멍청아, 모르아 갑판장님이 경력으로 따지면 왓킨보다 윗줄이지.”
“멍청이 아니거든?!”
“그럼 바보?”
“야!”
나는 별것도 아닌 걸로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떼어 내며 소리쳤다.
“시끄러워!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쳇, 리안은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
“리안이 언제 너한테만… 아, 알았어.”
또다시 구시렁거리는 네이선을 한번 노려보자, 그는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놈들은 왜 아직도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진짜 나 피곤하거든? 이제 그만 나가 주지 않을래?”
내 축객령에 삐진 척을 하고 있던 우르타가 깜짝 놀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앗! 자, 잠깐! 우리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그래! 할 말이 있어.”
언제 싸웠냐는 듯 네이선이 재빨리 우르타에게 동조하고 나섰다.
뭐야, 갑자기?
“뭔데 그래?”
내가 다시 자리에 앉아 술병을 빼앗아 한 잔 따르자, 둘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네이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섬 말이야….”
“어, 왜?”
“그 있잖아, 페리아 족….”
“어, 어.”
“그것도 다 밝힐 거야?”
나는 바로 고개를 내 저었다.
이 난리를 피우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들을 숨겨서 보호하는 것인데,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밝힐 이유가 없잖아?
“굳이 우리가 밝히지만 않으면 그들도 알아서 몸을 잘 숨기지 않을까? 사실 우리도 그들이 있는지 잘 몰랐잖아.”
“그런데 모르아 갑판장님은 알잖아?”
“어떻게 알아?”
“아, 그때 너 없어졌을 때….”
…시발!
깜빡하고 있었다.
“우르타! 빨리 가서 모르아 갑판장 잡아 와!”
“자, 잡아?!”
“아니! 데리고 오라고!”
“그런데 아직 갑판장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한바탕 난리가 나면서 우르타와 네이선이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모르아는 왜 그런 이야기를 전혀 안 했지?
분명히 먼저 이야기를 할 법도 한데?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금방 선장실로 잡혀(?) 온 모르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제독님? 무슨 문제라도?”
“아니, 그게 아니고… 혹시 그러니까….”
막상 말하려고 보니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 싶네.
생각해보니 네이선 이 멍청이가 싸우면서 얼마나 떠들었는지를 모르잖아.
“그 섬에서 내가 없어졌을 때 말이지….”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모르아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언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때 있잖아, 내가 없어져서 드웰 씨랑 여기 네이선이랑 한 판 했을 때.”
“글쎄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처음에는 모르는 척하는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진짜 모르는 표정이다.
그게 기억이 안 난다고?
분명히 두 사람이 싸울 때 모두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한동안 내가 말없이 사라진 적이 있었잖아?”
“혹시 제가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까?”
“…….”
모르아가 한동안 아파서 누워있었던 것은 맞지만, 내가 페리아 족의 마을을 방문한 시점은 이미 그가 다 나은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소한 일들이야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네, 아마 그때 있었던 일인 모양이네요. 제가 착각한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그러니까 그게, 아니, 혹시 음…. 아, 그 후작 밑으로 들어간 녀석 이름이 뭐였지? 몬데스?”
횡설수설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모르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몬데스입니다.”
“그 몬데스에게는 뭔가 들은 거 없어?”
“글쎄요, 저에게 이미 마음이 떠난 녀석이라 길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신경쓰지 않아도 돼.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네….”
모르아는 애매한 내 태도에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고, 우리 셋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참을성이 가장 부족한 우르타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때 분명히 모르아 갑판장도 있었어…. 내가 봤단 말이야.”
“음, 나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모르아 갑판장이 날 말렸던 것 같아.”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분명히 모르아 갑판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뜻인데….
“그 몬데스라는 친구 이야기도 들어보면 좋겠지만… 안 되겠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모르아 갑판장을 통하는 것뿐인데, 싫어한다잖아. 아마 힘들걸?”
그때 우르타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한 명 더 있잖아?”
그래, 한 명 더 있지, 드웰 씨.
그렇지 않아도 한번 보러 가야 할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이게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할 문제일까?
***
이후로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늘어놓던 두 사람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단순하게 모르아가 기억을 못 한다고 생각하면 굳이 고민까지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전투에서 패배하고, ‘울부짖는 바다’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서 난파당하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섬에 표류당해서 죽을 뻔하고, 잊혀진 고대 이종족(이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네이선의 주장대로라면 그냥 ‘마을’이라고만 했다고 하고, 다른 선원들은 그들을 직접 만나 적이 없다.)의 흔적을 발견한 것을 잊는다고?
이 정도 강렬한 기억이면 보통은 죽을 때까지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을까?
다음 날 아침부터 간부들은 정신이 없었다.
몇 명은 어제 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네이선은 왓킨과 행크, 모르아와 함께 선원을 모집하기 위해 술집을 순회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도 항해사, 조리장, 회계사, 포술장을 맡길 사람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나도 슬슬 나가보려고 복장을 갖춰 입고 갑판으로 나갔는데, 기묘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난처한 듯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우르타와 그 뒤를 졸졸 쫓아가는 낯익은 아가씨, 그리고 한숨을 쉬며 그 뒤를 쫓는 남자 두 사람.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지나가는 선원을 붙잡고 물었다.
“저거 뭐야?”
“아, 선장님. 아까부터 저 아가씨가 포술장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포술장이 얼굴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러는 모양인데… 부럽네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선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40세쯤 되어 보이는 강인한 뱃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새까맣게 탄 피부, 그 와중에 하얗게 핀 버짐이 보이고, 떡 진 머리카락도 눈에 들어왔다.
피부가 균형 있게 탄 것도 아니라서 약간 얼룩덜룩해 보여서 더 지저분한 것은 물론, 그로 인해 이미 단단하게 자리 잡은 굵은 주름살 부분이 더 부각되어 보인다.
이런 남자들을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힘내라고. 배는 몇 년이나 탔어?”
“한 5년쯤 탔습니다.”
“그래? 배를 늦게 탔군?”
“22살에 탔으니까 그리 늦은 편은 아닙니다만.”
“…….”
갑자기 미안해져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우르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지런히 갑판 위를 도망 다니는 우르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릴리안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잘생긴 오빠! 거기 좀 서 보라니까요?”
“아니요, 저 바빠요.”
“아까부터 할 일 없어서 빈둥거리는 거 다 봤거든요?”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일이 제 일이라구요. 그만 좀 따라와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귀찮은 표정으로 릴리안을 따라다니던 건장한 남자 둘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확인한 두 사람은 이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배 위에서 이 난리를 쳤으면 좀 미안해야지.
“포술장, 무슨 일이야? 그리고 릴리안 아가씨 아니십니까?”
“앗, 리안, 선장님! 살려주세요!”
“어머, 선장 오빠, 안녕!”
나를 발견한 우르타는 우는소리를 하며 부랴부랴 내 뒤로 숨었고, 릴리안은 내게 손을 흔들며 쾌활하게 인사했다.
정말 대책 없이 천방지축인 아가씨다.
“좋은 아침입니다, 릴리안 아가씨.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다른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배가 궁금해서요. 조금 구경해도 괜찮죠?”
“물론입니다. 안내할 사람을 붙여드릴까요?”
“네! 그 뒤에 있는 잘생긴 오빠요.”
그게 목적이셨구만.
릴리안은 첫인상이 그래서 그런지 여자라기보다는 소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우르타가 부럽다거나 질투가 생기기는커녕 그냥 귀엽다는 느낌뿐이었다.
솔직히 우르타도 나이만 많지 정신연령은 릴리안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포술장, 아가씨 좀 안내해드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아니, 그게 아니고, 자꾸 나한테 막….”
“시끄러. 괜히 다른 선원들 방해하지 말고 아가씨 안내나 해드려. 아니지, 아예 저기 비어있는 피오렐 호나 안내해드려.”
“아, 내가 왜….”
“내가 선장이니까. 어서!”
울상을 지은 채로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서는 우르타.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말은 잘 듣는다.
“역시 선장 오빠가 최고야! 고마워요, 선장 오빠!”
‘다다닥’ 소리가 나도록 우르타 옆으로 달려가서 신나게 재잘거리는 릴리안을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우르타라면 쓸데없는 짓은 안 하겠지.
그리고 어차피 호위들도 따라다닐 테니 뭐….
그나저나 게론드 회계사는 괜찮으려나?
어제 보니까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기는 하던데.
***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묶어서 쓸 수 없는 것처럼, 급하다고 사람을 함부로 들이면 안 되는 법이다.
일반 선원도 아니고 간부쯤 되면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는 운 좋게도 적당한 사람들이 시기에 맞게 나타나 줬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리는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사람 거르는 법을 연습해야겠지.
그래서 오트라스 호를 나온 나는 뱃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술집, 식당, 도박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네이선 일행과도 몇 번 마주치고, 우리 배의 선원들과는 더 자주 마주쳤으며, 술집 구석에서 몰래 술을 마시던 부선장님을 적발해서 다시 배로 돌려보내 드렸다.
나와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모르는 뱃사람들과 술잔을 주고받는 아인델프와 발드 선장도 보았다.
음, 다들 열심히구만.
“다시 한번 말해봐.”
어라? 이 목소리 익숙한데?
“너 같은 야만인 따위가 항해사일 리가 없다고 했다, 왜?”
“난 야만인이 아니야. 그리고 분명히 항해사고.”
“흥! 어이가 없네. 너 같은 야만인을 항해사라고 데리고 다니는 선장은 뭐 하는 놈이지? 뭐, 손바닥만 한 어선 정도 끌고 다니나?”
퍼억!
“악, 이 자식이!”
쿠당탕탕!
어이쿠야, 이게 무슨 난리람?
시간이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뱃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술집에서 이 정도 싸움이야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몇 명 있는 손님들은 말리기는커녕 박수를 치며 구경하기에 바빴다.
평소였다면 나도 그냥 구경이나 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처맞고 있는 사람이 오펜이라서 말이지.
분명히 이 녀석이 선빵을 날리는 걸 봤는데 왜 이렇게 맞고만 있는 거야?
터억!
잠깐 사이에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져 바닥에 널브러진 오펜에게 내리꽂히던 주먹이 내 손에 가로막혔다.
“그만하지?”
“넌 또 뭐야?”
“얘네 선장. 네 말대로라면 손바닥만 한 어선을 끌고 다니는.”
선장이라는 말에 내게 주먹을 잡힌 남자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재밌는 싸움을 말리는 내게 한마디 하려고 폼을 잡던 구경꾼들도 재빨리 태세를 전환하는 것이 보였다.
언제 무슨 배를 타게 될지 모르는 선원의 입장에서 아무리 다른 배의 선장이라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렵게 마련이니까.
“이, 이건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그쪽이 우리 항해사를 모욕해서 벌어진 다툼이지. 그런데 말이야, 총배수량 1,800톤이 넘는 선단을 이끄는 나를 ‘어선 선장’이라고 할 정도면 그쪽은 뭐 얼마나 대단한 배를 타시는 거지?”
“그건….”
‘1,800톤이 넘는 선단’이라는 말에 상대가 더욱 당황하며 내게 잡혀 있던 팔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제 막 20대 초중반, 애송이다.
심지어 선이 가늘고 피부가 맑은 것이, 꼭 우르타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런 얼굴로 싸움을 잘하니까 그것도 되게 느낌이 이상하네.
오펜에게 직접 싸우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네이선이다.
특별히 재능이 있지는 않은지 내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우르타를 가르칠 때처럼 불만을 토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주 못하지도 않는 모양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오펜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실력은 아니라는 뜻이다.
덩치도 나이답지 않게 이미 충분히 크고, 외모만 놓고 보면 우르타보다 형으로 보인다.
몇 번의 전투를 겪으면서 살인까지 해봤으니, 일반인이 오펜을 싸움으로 이기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봐야 한다.
“어떻게 할까. 내가 지금 굉장히 모욕감을 느끼는데, 나랑 칼 들고 한번 붙을까, 아니면 이대로 이 녀석을 놔 줄래?”
“이익….”
멋지게 놈을 때려눕히고 오펜에게 으스대고 싶지만, 솔직히 나는 오펜도 이긴다고 확신을 못 한다.
오펜에게 선공을 당하고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버릴 정도라면 아마 나와 싸워도 결과가 비슷하지 않겠어?
그래서 약간 비겁하지만 ‘칼’이라는 말을 꺼냈다.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뱃사람끼리 시비가 붙었을 때 날붙이를 든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을 하자는 뜻이다.
그런 만큼 진짜 심각한 사안이 아닌 이상 날붙이까지 들고 싸우자고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만약 상대가 진짜 칼을 들고 싸우자고 하면 어떡하냐고?
만약 주먹이 아니라 칼로 붙으면 그건 확실히 내가 이긴다.
저놈, 사람 안 죽여 봤거든.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검대와 검집, 손으로 잡기에 미묘하게 위치가 틀어진 왼쪽 허리의 단검 위치까지, 모든 것이 이 녀석이 초짜라는 것을 어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죽여 본 사람은 그 특유의 그 느낌, 기세? 그런 것이 있다.
살기(殺氣)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것은 아니고, 싸울 때 보이는 미묘한 차이점들인데, 말 그대로 몸을 움직임에 있어서 뒤가 없이 망설이지 않는 그런 것들과 상대를 보는 눈빛 같은 것들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내 예상대로 거칠게 내 손을 떨쳐내며 물러섰다.
목숨을 걸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가 이겼으니 망정이지, 애초에 시작도 그의 잘못으로 시작된 일이 아니던가.
“저, 선장님….”
“제독….”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오펜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아까부터 나를 알아보고 뒤쪽에서 눈치를 보던 두 남자가 쭈뼛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오트라스 호와 리버티 호의 선원들이다.
나는 두 사람을 쏘아보며 말했다.
“너희는 항해사가 개처럼 처맞고 있는데 그걸 구경만 하고 있어?”
“그게,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배에서 내리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이라도 나와서 참는 거야. 같은 식구끼리 서로 보호해줘도 부족할 판에 이러면 되겠어?”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쯧.
보아하니 아직도 오펜을 제대로 된 항해사라고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차라리 선원일 때는 막내라고 보호라도 해줬을 텐데, 지금 위치가 굉장히 애매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오펜이 직접 권위를 세우는 수밖에….
휘이익!
갑자기 한쪽 구석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리더니 걸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으하하하, 멋지구만! 두들겨 맞는 항해사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선장! 어이, 선장 나으리. 그래서 그쪽 배 이름이 뭐요?”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개뼉다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