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열혈! 일등항해사
-현재, 오트라스 호 갑판장실 -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우르타 녀석이 걱정이 되는 웃기는 상황에 스스로 어이없어하는데, 자꾸 거슬리게 꼬물거리는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풀려났는지 네이선의 품에서 벗어나 내 주변을 얼쩡거리는 고양이.
나를 노려보며 경계하는 모습이 제법 맹수 느낌이 난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저 녀석을 남긴 거야?”
“그, 그냥?”
어이, 어이! 눈 피하면서 더듬거리지 말라고.
누가 봐도 거짓말이잖아!
“네이선, 그런 쓸데없는 거짓말로 우리 상호 간의 신뢰를 깨버리지 말자.”
“화낼 것 같은데….”
“빨리!”
내가 단호하게 소리를 치자, 네이선이 내 눈치를 보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제독이 다른 배로 파견 나가는 경우는 없다고 했어.”
빠직.
잠깐만, 나 머릿속에서 분명히 들렸어, 뭔가 끊어지는 소리.
“이런 개%#^@#&^*! 읍! 읍!”
“밖에서 다 들린다, 조용히 해라.”
한 박자 늦은 내 발작은 전광석화 같은 부선장님의 손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우, 짜.
여전히 두텁고 거친 부선장님의 손길은 내가 괜찮다는 제스처를 세 번이나 취한 후에야 거두어졌다.
“아, 진짜 손 좀 잘 씻으시라니까요?”
“어제도 씻었다.”
…지금 내 입에 닿은 손이 이틀이나 안 씻은 손이라는 뜻이다.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오려고 한다.
“후우, 후우, 우르타 두들겨 패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너 요즘 왜 그래?”
“응? 뭐가?”
“요즘 선원들 쥐 잡듯이 잡는다며?”
“아, 그거?”
내 말에 별것 아니라는 듯 네이선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포대가 제 역할을 못 하니까 좀 빡세게 굴린다고 했잖아.”
“부선장님이 우려할 정도로?”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신입들이 단체로 떽떽거리잖아.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해줬지.”
옛날, 그렇게 옛날까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배가 리버티 호 한 척일 때는 선원모집이 쉽지 않았다.
중형이라고는 해도 작은 편에 속하는 리버티 호, 간부라고는 죄다 애송이들이니 잘 모르는 선원들 입장에서는 애들 소꿉장난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때 갑판장을 맡았던 부선장님이 아니었다면 죄다 신출내기들만 뽑아서 다녀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가 세 척이나 되는 지금은 조금 다르다.
선장이 어리건, 갑판장이 애송이건 간에 무려 세 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을 이끈다고 하면 일단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덕분에 최근에는 선원을 모집할 때 꽤 경력 있는 선원들도 선선히 배에 타곤 한다.
오트라스 호만 해도 경력 10년 차 이상인 선원이 거의 스무 명에 달한다.
10년이 넘도록 배를 탔다는 것은 꽤 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소리니까, 나름 칼질 좀 한다고 자부할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20대인 애송이가 갑판장이랍시고 훈련을 시키면 아니꼽기는 했을 것 같다.
“적당히 해, 너무 힘 빼놓으면 네가 말하는 비상 상황에서 오히려 힘을 못 쓰잖아.”
“응, 그렇지 않아도 이제 적당히 하려고. 이제 덤비는 놈이 없거든.”
그 사이에 몇 놈이나 두들겨 팬 거냐….
“알았어. 잘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줘. 알다시피 내가 이제 선원들 하나하나 챙기기는 어렵잖아. 네가 말을 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
“으응, 미안해. 앞으로는 이야기할게.”
“부선장님도 괜찮으시죠?”
“그래, 나도 조금 더 챙기도록 하마.”
“몸도 좀 챙기시구요. 먹는 게 부실하신가, 어째 계속 마르시는 것 같아요?”
“험!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
슬쩍 눈치를 주는 것을 보니 아픈 것을 네이선에게 아직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빨리 방법을 찾든가 해야지, 원.
***
“선장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깜빡 졸았나 보다.
내가 남은 졸음을 쫓아내며 대답하자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피오렐 호로부터 수기 신호입니다! 신호 0번이라고 합니다!”
“뭐?!”
나는 뭉그적거리는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호 0번은 무전기를 켜야 할 때만 보내기로 약속한 신호다.
지금 무전기는 리버티 호가 아니라 피오렐 호로 옮겨 놓았다.
“선교는?!”
“지금 오펜 항해사가 지휘 중입니다!”
“너는 부선장님과 모든 항해사, 갑판장까지 선교로 모이라고 전달해!”
“이미 오펜 항해사가 모두 호출했습니다!”
역시 똑 부러지는 녀석이다.
그나저나 무전기를 켜라고 할 정도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급하게 선교로 올라가니 이미 그레이그 일등항해사와 네이선이 도착해 있었다.
“선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신호 0번이 뭐죠?”
아, 그레이그에게는 미처 알려주지 못했구나.
하지만 지금은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오펜! 타륜 잡아! 네이선, 크리스티앙! 각자 선교 좌우측 통로 봉쇄해! 선원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내 명령에 따라 영문을 모르는 조타수는 선교에서 쫓겨났고, 나는 급히 해도실의 비밀 장소에 숨겨진 무전기를 꺼내서 전원을 켰다.
“여기는 오트라스. 피오렐, 들리나?”
“제독님이십니까? 아인델프입니다.”
“아인델프 선장, 무슨 일이야?”
“선단의 진행 방향으로부터 우현 145도 방향, 교전 중인 선박이 있습니다.”
“잠시 대기.”
나는 무전기를 내려놓고 급히 망원경을 꺼내서 우현 145도 방향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수평선 근처에 이쪽을 향해 달리고 있는 선박 두 척이 보였다.
얼핏 보면 같은 선단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앞쪽의 선박에는 분명하게 교전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무전기에 대고 말을 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무전기에서 변조된 음성이 들리자 화들짝 놀라던 그레이그는 이제야 겨우 패닉에서 벗어났는지 입을 놀려 말다운 말을 뱉어냈다.
그전까지는 ‘아, 으, 어’ 같은, 말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음성만 나왔었다.
“일등항해사,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나는 망원경을 부선장님에게 넘겨주며 다시 무전기를 잡았다.
“확인했다. 거리가 멀어서 우리와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변조된 음성으로도 난처함이 느껴지는 아인델프의 말이 들려왔다.
“참전해도 되겠습니까?”
“…….”
도의적으로 해적에게 공격을 받는 상선이 보이면 함께 싸워주는 것이 옳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양심적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자국 상선이 공격받는 것을 본 해군 군함이 아니고서야, 누가 손해를 무릅쓰고 해적과 싸우려고 들겠는가?
물론 내가 그동안 해적들과의 전투로 인해 큰 이득을 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운 좋게 해적선을 나포했기 때문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인명 손실에 화물 손실, 선박 수리비까지 손해만 옴팡지게 나는 거다.
만약 포격전을 벌인다면 승리하더라도 화약과 포탄값에 수리비만 날리는 것이고, 해적과 백병전을 벌이는 것은 절대 추천할만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백병전에서 이겨서 배도 나포하고 그랬지만, 매 전투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냐는 말이다.
익숙해졌다고 해도 아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 여전히 속이 쓰리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배를 돌리면 간당간당하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선장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구해야지요! 뭘 망설이십니까?!”
그레이그…. 당신 배 아니라고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야?
쓰읍, 그래, 몰랐다면 몰라도 알았는데 무시하기는 좀 그렇지.
심지어 어려운 상대도 아니고 고작 해적선 한 척이다.
우리는 리버티 호를 제외해도 무장상선 두 척이고.
“총원 전투 배치.”
나지막한 내 말에 네 사람이 밖으로 뛰어나가며 ‘전투 배치’를 복창했다.
나는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무전기에 대고 마지막 말을 전달했다.
“피오렐, 침로 변경한다. 방향은 교전 중인 선박 방향, 선두는 피오렐이다. 교신 끝.”
“지금부터 피오렐이 선도합니다. 교신 끝.”
무전기를 제 자리에 보관한 나는 오펜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지휘한다. 오펜, 우현 전타!”
“우현 전타!”
***
최대로 가속한 피오렐은 상당히 빨랐다.
개장을 하면서 속도를 많이 희생했다지만, 원래 커티스급 쾌속 상선인 오트라스 호보다 조금 더 빠를 정도였다.
리버티 호는 당연히 가장 느렸지만, 어차피 전투에 도움이 될 전력은 아니라서 우리보다 한참 뒤쪽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신형이라더니 제법 잘 만들어진 배네요.”
“피오렐 말입니까?”
“네. 무장도 그렇고, 속도도 그렇고. 아주 대놓고 무장상선용으로 개발한 것 같은데요?”
“후작은 왕이라도 되고 싶은 걸까요?”
“설마요.”
부선장님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후작이 야심이 많은 남자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왕이라니, 그건 절대 무리다.
애초에 다른 나라들이 인정할 리도 없고, 가문의 사활을 걸고 그런 것을 노리기엔 후작의 나이가 너무 많다.
“그보다 조금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선수포까지 달고 있는 놈들이군요.”
부선장님이 내게 망원경을 넘겨주며 말했다.
망원경으로 부쩍 가까워진 상선을 보고 있으니, 근처에서 물기둥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그러네요. 그래도 구경이 큰 녀석은 아닌가 봐요. 물기둥이 별로 안 커요.”
“크건 작건 포탄은 맞으면 위험합니다.”
“그건 저도 알죠.”
이후로 한동안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대기 중인 그레이그와 크리스티앙에게 말했다.
“일등항해사, 피오렐에게 수기 신호. 우리는 우측으로, 피오렐은 좌측으로 가서 해적선을 포위한다.”
“알겠습니다.”
“크리스티앙, 포대에 전달해, 좌현포 장전, 못 맞춰도 좋으니까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무조건 쏘라고 해.”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급히 선교에서 내려가고, 나는 타륜을 잡은 오펜에게 명령했다.
“오펜, 우로 10도.”
“우로 10도 잡습니다.”
***
도주 중인 상선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던 피오렐과 오트라스는 조금씩 침로를 틀어 각각 좌우로 흩어졌다.
잠시 후 스쳐 지나가는 상선의 갑판 위에서 선원들이 환호성을 질러 감사를 표하는 모습이 보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해적선 역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대충 봐도 선측포가 한쪽에만 열 개쯤 달려 있는 무장상선이 좌우로 달려들고 있으니 말이다.
돛을 반쯤 접어서 속도를 줄이던 해적선은 결국 도주를 선택했다.
방향은 당연히 피오렐이 있는 좌측 방향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피오렐의 덩치가 더 작아서… 는 아니고, 애초에 두 배의 크기 차이는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이쪽의 포술은 눈감고 쏘는 수준이지만, 그걸 해적들이 알 리가 없다.
해적선이 좌측을 도주로로 잡은 이유는 그쪽이 순풍 방향이기 때문이다.
쿠구구궁!
“피오렐, 발포했습니다!”
“굳이 안 쏴도 될 텐데….”
아차,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그런데 사실 그렇잖아.
어차피 럭키샷이 나와서 해적선의 마스트라도 부러뜨리지 않는 이상에야, 퇴각 중인 적에게 포를 쏴봐야 포탄 낭비다.
“빗나갔습니다!”
“제기랄! 저런 멍청이들!”
그레이그가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가 욕을 내뱉었다.
저 거리에서 초탄 명중이 나올 리가 없잖아, 이 사람아.
“우리는 적당히 피오렐의 뒤를 받친다. 포대는 잠시 대기.”
“알겠습니다.”
우리는 뒤에서, 피오렐은 해적선과 나란히 달리며 추격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저 놈들이 엉뚱한 생각, 예를 들어 미친 척하고 돌격해서 피오렐과 충돌한다던가, 백병전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견제만 했고, 피오렐은 해적선과 몇 번이나 포격을 주고받았다.
“저쪽 포는 6문인 것 같군. 포술은 형편없고.”
“피오렐도 엉망이기는 마찬가집니다.”
내 말에 그레이그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해적을 제대로 두들겨 패지 못하는 것이 꽤나 화가 나는 모양이다.
그때, 견시대에서 신이 난 견시수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명중! 명중입니다!”
“뭐?!”
선교에 있던 간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망원경을 들어 상황을 살폈다.
이쪽에서는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해적선의 현측이 부서진 것 같기도 하다.
해적들도 아까보다 더 소란스러운 것 같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피오렐에게 수기 신호. 추격 중지.”
“네, 선장님.”
“에엑!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크리스티앙이 내 말을 전하러 달려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레이그가 깜짝 놀라며 펄쩍 뛰었기 때문이다.
“뭐야, 일등항해사?”
“선장님, 아니, 제독.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이제 와서 추격 중지라니요? 저런 해적 놈들은 싸그리 바다에 처넣어야…!”
어디서 이런 열혈남아가 튀어나온 걸까.
“이봐, 일등항해사. 우리는 상선이야. 구출하려던 상선은 안전하게 피했고, 해적은 도주 중이야. 목표는 달성된 거잖아. 우리가 왜 더 싸워야 해?”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그렇게 해적이 때려잡고 싶으면 차라리 해군을 지원하던가! 지금까지 쏜 포탄이랑 화약값만 해도 얼만 줄 알아?”
말을 하다 보니 욱해서 나도 모르게 역정을 내고 말았다.
어차피 포술 훈련 겸해서 지금까지 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돈은 아깝단 말이다.
그리고 돈 이야기가 나오자 그레이그는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의기소침해져서 물러섰다.
“크리스티앙 항해사. 어서 전달해.”
“네, 선장님.”
***
“신시엘라 호로부터 신호입니다. 자력 항해 가능하며, 우리 선단과 함께 멜라나인 항구에 기항하겠다고 합니다.”
“음, 좋네.”
300톤 정도 되어 보이는 캘리언 급 중형 상선인 신시엘라 호는 우리가 구출한 상선의 이름이다.
추격을 끝내고 돌아와서 가까이에서 보니 여기저기 포탄 자국이 있기는 했지만, 자력 항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니 주요 구조물에는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일단 포탄을 맞았으니 수리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우리가 멜라나인 항구까지 간다고 하니 따라가겠다는 신호를 전달해왔다.
저 꼴로 혼자 다니다가는 다른 해적에게 타겟이 되거나 해적을 겸업하는 다른 상선의 먹잇감이 될 테니 우리에게 묻어가겠다는 것이다.
그 정도야 충분히 해줄 수 있지.
그리고 사람이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 인사 정도는 하지 않겠어?
모름지기 감사와 사과는 물질로 하는 것이 최고인 법이지.
“신시엘라 호에서 신호입니다. 저쪽 선장이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답니다.”
“어차피 같은 항구에 갈 건데 굳이 뭘….”
“허허, 선장님에게는 별일이 아닐지 몰라도 저쪽은 목숨을 빚진 것 아닙니까? 고마울 만도 하죠.”
하긴 나도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받았을 때는 진짜 눈물 날 뻔했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신시엘라 호 선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방문을 환영한다고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