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전쟁의 광기
본의 아니게 서로 충돌하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혼란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출항을 위한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는데, 그레이그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나를 불렀다.
“선장님, 저쪽으로 가셔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야?”
“징발이 시작된 모양입니다….”
“가지.”
우리는 급히 뛰어서 선수 갑판 좌현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옆 부두인 2번 부두에서 일단의 병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밍 소드 정도만 무장한 경비대가 아니라, 창과 활을 들고 갑옷을 입은 진짜 ‘군대’ 말이다.
숫자는 대략 50여 명.
지휘관으로 보이는 말을 탄 남자는 30여 명의 중무장 병력으로 부두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고, 20여 명의 분대를 이끄는 남자는 가장 가까운 곳에 정박한 상선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너무 공개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작업 중이던 선원들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
“젠장…….”
“선장님!”
“뭐야?”
“저기…!”
나는 다급하게 부르는 선원에게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다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신음을 삼켜야 했다.
오트라스 호와 리버티 호만 정박하고 있는 3번 부두가, 어디선가 나타난 50여 명의 병력에게 봉쇄당하는 중이었다.
“일등항해사! 지금 당장 선미로 가서 리버티 호 출항 준비 진행 상황 확인해! 빨리!”
“알겠습니다!”
다닥다닥 붙어서 정박할 필요는 없었지만, 오트라스의 뒤쪽으로 약 50m가량 거리를 두고 정박한 리버티 호였다.
오트라스 호의 선미에서 소리를 지르면, 어찌저찌 리버티 호의 선수까지는 목소리가 닿을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레이그가 선미로 뛰어가고, 나 역시 잰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는 선원에게 물었다.
“갑판장은?”
“우현 갑판에 있습니다!”
“좋아.”
***
“갑판장!”
“선장님! 곧 출항 준비가 끝납니다! 그런데….”
네이선이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30여 명의 병력을 향해 눈짓했다.
빠르게 훑어보니 절반은 창병, 절반은 쇠뇌병이다.
저 정도 병력과 백병전으로 맞붙으면 아무리 네이선이 있어도 우리가 필패다.
기량이니, 훈련의 차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저놈들은 갑옷을 입고 있잖아!
“지금 바로 현문 철거한다. 빨리!”
“네?”
“현문 철거하라고!”
“네! 현문 철거!”
네이선의 명령에 현문을 지키던 네 명의 선원이 급하게 현문을 고정하고 있던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이 정신 나간 놈들이 바빠 죽겠는데 뭐 하는 거야?
나는 단도를 뽑아 들고 가장 가까운 밧줄로 다가가서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서, 선장님!”
“이 멍청한 ㅅ….”
기겁하는 선원에게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데 쩌렁쩌렁한 음성이 내 말을 씹어 삼켰다.
“오트라스 호! 지금 작업 중인 모든 행동을 정지하고 대기하라!”
어느새 배의 선수에서 20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군대의 지휘관이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덕분에 나를 따라 칼을 뽑아 들고 밧줄을 끊으려던 네이선이 우뚝 멈춰 섰다.
“갑판장,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당장 계류색부터 끊어!”
“알겠습니다.”
현문을 고정하는 얄팍한 밧줄과 달리 선박을 고정하는 계류색은 날카로운 도끼로 내리친다고 해도 한두 번 해서는 끊을 수 없을 정도로 굵고 질기다.
그런 계류색을 끊으려면 네이선이나 행크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있던 행크와 몇 선원들을 선미 방향으로 보낸 네이선이 선수 쪽으로 떠나고, 선미 쪽에서는 그레이그가 잰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일등항해사! 상황은?!”
지금 한가하게 그레이그가 다가와서 보고하기를 기다릴 상황이 아니다.
나는 아직 잘라내지 못한 다른 쪽 밧줄을 잡고 칼을 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대답은 그레이그가 아닌 병사를 이끄는 자의 입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반복한다! 오트라스 호! 지금 당장 하던 작업을 중지하라!”
입술을 깨물며 속보로 걸어오는 병력을 보니, 대장의 손짓에 쇠뇌병들이 장전을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리버티 호 준비 끝났답니다!”
“당장 출항시켜!”
“네!”
내게 거의 다가왔던 그레이그가 다시 선미로 뛰어가고, 나는 주변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선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다 뒈지고 싶어?! 당장 엄폐해!”
쐐액!쐐액!쐐액!쐐액!쐐액!쐐액!쐐액!쐐액!쐐액!쐐액!
파파팍! 파팍! 파팍!
내 말이 떨어지자 선원들이 허둥지둥하며 가까스로 근처의 상자나 통으로 엄폐를 마치는 순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놈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근거리에서 쐈는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시위 풀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고, 거의 시간차 없이 배 여기저기에 쿼럴이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했는데 진짜 쏠 줄은 몰랐다.
이 정신 나간 놈이 타국의 민간 선박을 상대로 경고도 없기 살상 무기를 날려?
하여간 무식하기로 선원들과 쌍벽을 이루는 군인 놈들이란!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지만, 이래서야 뛰어오는 창병들이 배에 오르는 것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쇠뇌의 재장전 시간이 길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배짱 좋게 몸을 드러내고 현문을 철거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당장 나부터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몸을 숨기기 전에 확인해 본 바로는 다행히 해상이 봉쇄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 해군과 육군이 서로 손발을 못 맞추고 있거나, 해군 쪽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연안경비대가 해상까지 봉쇄했다면 진짜 꼼짝없이 달라는 대로 다 줘야 했을 판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나마 내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는 낯익은 선원에게 말했다.
“트레비스?”
“네? 네! 선장님. 이제 어떡합니까?”
“엄폐하고 이동할 수 있지? 당장 돛을 펼쳐야 해.”
“서, 선장님! 아직 계류색도 안 풀렸습니다! 큰일 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 다 죽어.”
“지금 갑판장과 돌격대장이 계류색을 끊는 중 아닙니까? 배가 움직이면서 계류색이 터지기라도 하면 끔찍한 대참사가 나올 겁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수백 톤의 선박을 고정하고 있는 계류색에 걸려있는 장력(張力)은 어마어마하다.
그런 계류색이 갑자기 끊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바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날이 되는 거다.
쉽게 생각해서, 팽팽하게 당겨진 질긴 고무줄을 가위로 한 번에 잘랐다고 가정하면 된다.
그러니까 계류색을 끊으려고 해도(계류색을 정상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부두에서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보통 근처에 정박한 선박 선원들의 도움을 받음.) 현실적으로 당장 끊지는 못하고 일단 줄을 조금 풀어서 장력을 낮춰야 했다.
물론 여유가 있다면 줄을 완전히 풀어서 바다에 던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속 편하게 작업을 할 상황이라면 굳이 계류색을 끊을 필요가 없겠지.
촤아악!
그때 선수 쪽에서 물보라가 튀며 계류색 하나가 힘없이 바다를 때렸다.
네이선이 하나를 제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공평하게 군인들에게도 들렸고, 예의 목소리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오트라스 호! 당장 모든 행동을 중지하라! 귀 선박은 지금 본국에 심대한 위협을….”
“개소리하지 마, 미친 새끼야! 네놈이 어떤 개잡종인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스코타 후작 각하의 깃발을 달고 있는 배를 향해 쿼럴을 날려? 내가 반드시 네놈의 행동을 후작 각하께 보고할 거다! 프레티아 왕국은 반드시 이 일에 대한 해명과 보상을 해야 할 거야!”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는 놈을 보고 있으니 배알이 꼴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들에게 우리의 뒷배인 스코타 후작 가문을 밝힘으로써 행동에 제약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아무리 귀족 출신 장교라고 해도 타국 귀족의 문장까지 외우고 있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뭐, 출신은 모르겠지만 진짜 스코타 후작의 깃발을 알아보지 못한 듯, 내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대장이 보였다.
그나저나 덜컹거리기는 해도 아직 현문에 붙어있는 현측으로 거의 접근한 병력이 문제였다.
저들이 승선을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밀어내기 힘들 텐데, 진짜 큰일이군.
“트레… 응?”
몰래 놈들을 훔쳐보는 것을 관두고 다시 트레비스를 부르려는데, 이미 트레비스는 자리를 이탈한 후였다.
그리고 메인마스트 방향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몇몇 선원이 눈에 띄었다.
이러면 시간을 끌어줘야지.
촤아아악!
타이밍 좋게 선미 방향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당황하며 느려졌단 병사들의 발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아무래도 우리를 약탈하고 증거를 인멸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래도 이제 남은 계류색은 두 가닥이다.
***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예닐곱 명의 쇠뇌병들이 나를 조준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미간이나 심장이 쿼럴에 꿰뚫리는 대참사는 면했다.
“내가 이 배의 선장 리안이다! 그쪽은?”
내 질문에 병사들의 움직임이 조금 흐트러졌다.
그리고 지휘자 역시 낯빛이 조금 변한 것 같았다.
짜식, 정체를 밝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겠… 아니구나.
지휘자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1/3쯤 돛을 펼치고 부두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리버티 호가 보였다.
일단 큰 고비는 넘긴 것 같고.
촤아악!
남은 계류색은 선미 방향의 단 한 가닥.
돛이 조금씩 펼쳐지고 있는지 오트라스 호도 슬슬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완전히 자유를 되찾은 오트라스 호의 선수 방향을 한 번 보더니, 지휘관이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리안 선장! 지금 무슨 짓이오? 아직 출항 허가를 받지 못했을 텐데? 귀 선박에 본국의 중대한 범죄자가 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소. 순순히 협력한다면….”
“헛소리는 그만하지. 누가 봐도 흉흉한 기세로 부두를 봉쇄하고 다짜고짜 쿼럴부터 날리는 도적놈들을 내가 어떻게 믿지?”
“도적?! 감히!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모두 본관과 왕국을 무시한, 어어어?!”
촤아아아악!
드디어 마지막 계류색이 떨어져 나가고, 완전히 자유를 되찾은 오트라스 호가 조금씩, 하지만 육안으로 충분히 식별될 정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익, 끼이이익….
“제기랄! 사격!”
현측과 부두에 고정되어 있던 현문용 널빤지가 비명을 지르며 조금씩 부서지고,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의 지휘관이 바로 사격을 명령했다.
쐐애애애액! 쐐액! 쐐액! 쐐애애액!
파파파파팍!
쇠뇌의 현과 쿼럴이 공기를 가르는 흉험한 소리와 오트라스 호에 상처를 입히는 잔인한 소리가 재차 들려왔지만, 이미 다시 몸을 숙인 나에게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앉은 상태로 목청껏 소리쳤다.
“오트라스 호! 지금 당장 현 위치를 벗어난다! 도적들의 쿼럴에 주의하고 풀 세일로!”
“네, 선장님!”
내 말이 끝나자 배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대답이 들려왔고, 돛이 조금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으아악!”
“으악!”
풍덩! 풍덩!
기괴한 소리에 슬쩍 고개를 빼서 현문 쪽을 보니, 완전히 박살나서 파편을 휘날리며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는 널빤지가 보이고,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나를 노려보는 지휘관 놈도 보였다.
아무래도 가장 근접한 병사들에게 부서지고 있는 현문을 통과해서 배에 침입하라고 시킨 모양인데, 타이밍이 조금 늦어서 애꿎은 병사들만 쫄딱 젖게 만든 것이다.
무거운 갑옷을 입어서 자력으로 물속에서 나오지는 못하겠지만, 근처에 일행들이 있으니까 죽지는 않겠지, 뭐.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보통 사람이 뛰어서 건너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부두에서 멀어졌지만, 이후로도 두 차례나 쿼럴이 쏟아졌다.
어차피 우리를 모조리 죽이지 못하면 의미 없는 짓일 텐데 꽤나 열이 받은 모양이다.
조준사격이 힘들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고 느껴서 내가 고개를 들어 부두 쪽을 보자, 부두를 봉쇄하고 있던 진짜 대장(그렇게 추정된다)에게 수차례나 싸대기를 맞고 있는 분대 지휘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정도면 우리가 굳이 후작에게 고자질하지 않더라도 며칠 내에 군복을 벗어야 할 것 같다.
우리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돛을 다 올리지도 못하고 천천히 나아가던 리버티 호는 우리가 완전히 부두에서 벗어나자 우리와 보조를 맞추어 본격적으로 바람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피오렐 호와 약속된 장소로 나아갔다.
부디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해야 할 텐데.
***
“좌현 270도 방향, 선박입니다! 피오렐인 것 같습니다!”
견시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선교에 모여 있던 간부들 중 몇몇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장 군함에게 쫓기고 있다니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눈짓을 보내자 의미를 눈치챈 오펜이 견시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견시! 피오렐 호 확실한가?!”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다시 견시수의 대답이 들렸다.
“피오렐입니다! 뒤에 군함으로 보이는 선박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현재 거리 2km입니다.”
견시수의 확신이 담긴 보고가 들어오자, 이미 망원경으로 피오렐 호를 확인하고 있던 나는 망원경을 내리고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총원 전투 배치. 갑판장은 무기고 열어서 선원들 무장 시키고, 크리스티앙 항해사는 리버티 호에게 오트라트 호와 거리를 500m 이상 유지하라고 신호를 보내. 포술장은 포구 개방하고 좌현 포 장전하도록.”
“네! 선장님!”
명령을 받은 간부들이 선교에서 뛰쳐나가고 곧 소란스럽게 전투 배치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르타는 미적미적하며 내게 물었다.
“선장님, 정말 쏩니까? 아무리 그래도 해군인데….”
“일단 장전만 하고 대기. 적함이 포를 쏘더라도 대응하지 않는다.”
“에? 그렇다면 굳이 장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적함의 공격이 아군에게 적중할 경우 지체없이 반격하도록.”
“알겠습니다!”
드디어 우르타도 선교를 떠나고, 피오렐 호를 계속 관찰하던 그레이그가 나를 불렀다.
“선장님, 다시 보셔야겠습니다. 이미 피해를 입은 것인지 속도가 생각보다 느립니다. 설마 이 난장판에서 교역품을 사거나 식료품을 충분히 챙긴 것도 아닐 텐데 말이죠.”
“뭐?”
그의 말에 나는 다시 주의 깊게 피오렐 호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레이그의 말대로 피오렐 호의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바람도 약간 역풍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피오렐 호는 너무 느렸다.
멀쩡하게 펼쳐진 돛으로 봐서 저렇게까지 느려질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솔직히 뒤쫓는 군함이 공격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진작 포를 쏴 재낄 수 있는 거리에 진입해 있었다.
아마 이대로 10분 정도만 지나면 접현도 가능할 판이었다.
우리를 발견했는지 피오렐 호에서 미친 듯이 신호기가 흔들리며 메시지를 전달했고, 공격당하고 있음을 표시하는 교전기가 올라왔다.
“우리도 교전기 올리지.”
“알겠습니다, 선장님.”
바로 대답한 그레이그가 난간 쪽으로 가서 소리쳤다.
“갑판장! 교전기 올려!”
네 선박은 빠르게 가까워졌고, 우리의 의도를 눈치챈 군함은 상당히 당황하는 것 같았다.
일단 돛이 반개로 바뀐 것이 그 방증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도 해군과 충돌하는 것은 정말 싫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애초에 목격자가 너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처럼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퇴거를 선택한 선박들이 여기저기에서 죽을힘을 다해 큰 바다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그냥 돌아가라….”
다른 연안경비대의 함정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방을 둘러봐도 군함으로 보이는 선박은 피오렐의 뒤를 쫓는 녀석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해군이라고 해도 고작 저 소형 초계함 한 척으로 우리 선단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조금 걸리적거리는 것은 여기저기에 설치된 해안포대였다.
그래서 우르타에게 포를 쏘지 말라고 한 것도 있지.
설마 이렇게 많은 선박들이 있는 곳에서 타국 상선을 향해 해안포를 쏴버리는 몰지각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상황은 이미 충분하게 비상식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교전이 발생할 것 같은 위치는 아슬아슬하게 해안포대의 사정거리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는 피오렐, 오트라스 응답 바람.”
한동안 불러도 침묵을 유지하던 무전기에서 변조된 아인델프의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