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입항 허가
“재분배는?”
“조리장들이 지휘하고 있습니다. 두 시간 정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좋아, 식량 수준은 어때?”
“일단 서류상의 물량으로 볼 때 식량은 이틀, 식수는 나흘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심각하네….”
보고를 마친 게론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항해 예상 시간은 얼마로 잡고 계십니까?”
“어제 이야기한 대로 피난민들을 나누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야. 피오렐이 우리 배 중에 가장 성능이 좋다고 해도 저 인원과 물자를 싣고 빨리 달릴 수는 없으니 최소 4일? 재수 없으면 5일 이상도 걸릴 수 있어.”
“그렇죠, 안정된 지금과 달리 괜히 사람을 나누면 말이 많아지거나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으니까요. 약한 짐승들이 무리를 짓는 것처럼, 피난민들도 자신들을 셋으로 쪼개면 불안감이 가중될 위험도 있죠. 그나저나 식량 문제가 이틀이 넘게 지속되면 선원들의 불만이 엄청날 겁니다.”
고작 불만?
게론드는 배 위에서 식량부족 사태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보급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 뻔히 보이고, 식량을 구할 곳도 없을 때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뱃일은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고된 직업이다.
적당한 양의 칼로리가 공급되지 못하면 업무 효율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남은 식량이 이틀분이니 배급량을 절반으로 줄이면 버틸 수 있겠지만….
“…피난민들에게 제공하는 식량을 1/3로 줄이지.”
“네?”
“피난민들은 특별히 칼로리를 소모할 필요가 없으니 며칠 정도는 그 정도만 먹는다고 해도 괜찮아. 하지만 선원들은 다르잖아.”
“하지만 선장님! 그렇지 않아도 영상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피난민들에게 그렇게 부실한 식사를 제공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냉정한 눈빛으로 게론드를 보며 소리쳤다.
“게론드, 정신 차려! 우리는 원래 저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 따위는 없어! 그리고 선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서 운항에 차질이 생기면 모두에게 더 힘든 일이 될 뿐이야! 모두가 고통받는 것보다 일부가 고통받는 것이, 내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것이 나아.”
“선장님!”
게론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회계사, 명령이네. 지금 당장 가서 분배율을 조절해. 그리고 식수도 80%만 제공하도록 하지.”
식수는 4일 항해할 양이 있다고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식량은 몰라도 식수가 부족하면 정말 대형 사고가 되어버린다.
4일 안에 비가 내린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5일은 항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현명하다.
내가 명령을 내렸음에도 게론드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나를 노려보았다.
그도 머리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해봐야 선원들에게 돌아가는 식량은 평소의 2/3 정도에 불과할 겁니다.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하는 거지. 자네 생각처럼 선원들과 피난민들에게 같은 양의 식사를, 그것도 평소의 절반 수준으로 지급하면 대번에 선원들이 불만을 터뜨릴 거야. 재수 없으면 피난민을 향한 적대행위가 이루어질 수도 있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게론드의 표정이 몇 차례나 빠르게 변했다.
그리고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리장들에게 전달해서 분배 비율을 변경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상황이 조금 좋았다면 오히려 피난민들을 다른 배에 나누어 수용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나빠질 것이 확실한 지금, 피난민들을 나누었다가는 난리가 날 거다.
당장 먹는 양이 현격하게 줄어들면 다른 배에 탄 피난민과 달리 자기들만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특히나 슬레어 항해사의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 가족들이 각 선박으로 분산 수용되지 않는다면 무조건 그런 말이 돌 수밖에 없다.
***
짝짝!
게론드 항해사가 밖으로 나간 뒤 나는 손뼉을 쳐 분위기를 전환했다.
논의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식량과 식수 문제는 방금 들은 대로 하고, 다음은 피난민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움직이냐는 건데 말이야, 일단 아인델프 선장의 이야기부터 듣도록 하지.”
내 말에 아인델프가 준비한 종이를 보고 읽기 시작했다.
“다음 기항지인 벵가로쉬 항구에서 내리겠다는 사람은 27명입니다.”
“고작 스물일곱이요?!”
“아인델프 선장님,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여객선도 아니고….”
선장실에 모여있던 간부들이 웅성거리자 아인델프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내리겠다는 사람들은 벵가로쉬 근방에 친척이나 지인이 있는 경우입니다. 그 외에는 벵가로쉬에 내려 봐야 피난민 생활을 청산할 수 없으니, 우리가 쫓아내지는 않는다면 좀 버텨보겠다는 입장인 듯한데….”
“어차피 항구에서 많이 내려주는 것도 문제입니다. 벵가로쉬 항구 측에서도 그리 좋아할 일은 아니니까요. 출입항 기록 문제로 불편하게 될 우리 입장에서는 피난민 문제까지 그쪽에 트집이 잡히면 정말 피곤해집니다.”
“단정을 이용해서 항구 인근의 다른 곳에 내려주는 것은 어떨까요?”
“당장 우리가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그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자고?”
해안가라고 모두 마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업이 어렵거나 항구로 기능하지 않는 곳은 마을까지 꽤나 거리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지리도 잘 모르는 사람을 식량도 없이 그런 야생의 땅에 내려준다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며칠 먹을 식량을 나눠 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말 그대로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거기서 거기인지 특별히 뾰족한 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방법이 없네. 그럼 벵가로쉬에서 다 내리는 것으로 하지.”
“네?”
“선장님, 아까 말했듯이….”
“제독, 벵가로쉬에서 받을 불이익을….”
“그만!”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간부들의 입이 조개처럼 오므라들었다.
“일단 지금까지는 딱히 불합리한 대우를 받지 않았으니 피오렐 호가 편하게 느껴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당장 오늘부터 배식량이 줄어들면 벵가로쉬에 내리고 싶은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날 거야. 그리고 벵가로쉬 측과는 따로 협상을 해야겠지.”
“그들이 응하겠습니까?”
“의견 차이를 줄이는 것이 협상이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아인델프 선장?”
“네, 제독.”
“슬레어 항해사의 가족들을 포함해서 우리 승조원들과 관련 있는 피난민이 총 몇 명이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승조원들의 가족들은 따로 챙겨야만 했다.
숫자도 얼마 되지 않을 테니 부담도 줄어들 테고.
“총 12명입니다. 그런데….”
“응?”
여기에 ‘그런데’가 붙은 여지가 있나?
가족은 중간에 생기거나 줄어들기 어려운 거잖아.
“피난민 중 일부가 자기 가족이 선원이고, 그 선원이 오트라스 호나 리버티 호의 선원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지구처럼 통신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은 만큼, 선원들은 집과 자주 연락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골칫덩어리로 자라다가 성인이 되자마자 거의 집에서 방출되다시피 한 녀석도 많고.
그러니까 그런 가족이 선원이 되었다는 소문 정도를 들었다면, 아주 억지스러운 주장은 아닌 셈이다.
물론 그 주장이 진실일 가능성은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제기랄, 선원들을 하나씩 보내서 얼굴을 확인시켜 줄 수도 없고!”
그레이그가 답답했는지 분통을 터뜨렸다.
“분명히 우리는 옳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합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겁니까?!”
그게 바로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아인델프 선장이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다 기록해 둬. 그 사람들, 벵가로쉬에 정박하는 대로 두 배의 선원들 다 만나게 해주고, 아는 사람이 없으면 추방해버리게.”
“알겠습니다.”
그들이 그냥 해본 말인지, 진짜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피난민보다 내 선원들이 더 중요하고, 내 선원들을 위해 피난민들을 희생시키는 것 정도는 못 할 것도 없다.
***
예상대로 배급량이 1/3로 줄어들자 피난민들의 불안감은 극도로 올라갔다.
물론 극단적인 사태가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슬레어 항해사가 허비 씨를 통해 현재의 식량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안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대로 그들의 상황으로 인해 선원들의 불만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선원들 역시 배급량이 2/3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피난민들에 비하면 두 배가 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4일이 지나고, 드디어 견시수에게서 기쁨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항구입니다! 벵가로쉬에 도착했습니다!”
“우오오!”
“와아아!”
견시수의 목소리를 들은 선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나흘째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녀석들이 소리 지를 힘은 남은 모양이다.
잠시 후, 망원경으로 전방의 항구를 확인하던 오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장님, 배가 너무 많습니다.”
“응? 무슨 말이야?”
항구에 배가 많은 것은 당연하고, 사실상 프레티아 왕국군에게 남은 대형 항구는 벵가로쉬가 유일하니 평소보다 조금 더 붐비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오펜이 쓸데없는 말을 하는 녀석은 아닌지라 일단 망원경을 들었다.
항구 근방에는 꽤 많은 수의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지나면서 보아온 선박들의 통행량에 비하면 조금 과하기는 하다.
설마 항구에 자리가 없어서 저러는 것은 아니겠지?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
“이게 무슨…?”
나는 검문을 위해 승선한 항구관리관의 일행을 보고 기가 막혀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보통 항구관리관과 대여섯 명의 경비병들이 타서 검문을 진행하는데, 이번에는 무려 30여 명이 함께 올라왔고, 개중에 한 사람은 장교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그가 당황해서 항구관리관에게 항의하는지 뭐라고 하는 것이 보였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피오렐은 물론이고 리버티 호에도 거의 20명에 이르는 인원이 승선했다.
“이러니 배들이….”
검문을 이렇게 빡세게 진행하니 배들이 항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 하염없이 죽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항구 입구에서 최소한 서너 시간은 기다린 것 같다.
점심 무렵에 도착했는데 이제 해 질 녘이니 말이다.
현재 각 배에 남은 식량은 0, 만약에 오늘 입항을 못 하면 저녁은 모두 쫄쫄 굶어야 할 판이다.
꼼꼼하게 검문을 마친 항구관리관이 그레이그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오트라스, 피오렐, 리버티 선단의 선단장 되십니까?”
“네, 리안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입항한 곳이 남부의 니파, 그런데 출항 기록이 없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니파 항구가 제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폭도가 날뛰고 반군으로 추정되는 선박들이 항구를 봉쇄할 판이었지요. 항구관리소는 이미 폐쇄되었고, 가만히 있다가는 반군이나 폭도들에게 모든 것을 약탈당할 판이라 일단 이곳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흐음, 그렇다고 해도 니파 항구에서 정식 절차 없이 출항한 것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옆에 정박 중이던 피오렐이 눈에 띄게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챙챙챙!
잔뜩 긴장해 있던 항구경비대의 경비병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허리춤의 커틀라스나 아밍 소드를 뽑아 들었다.
근처에 있던 선원들도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지고 갔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말렸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고,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은 선원들이 괜한 짓을 하다가 상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관리관님, 반항할 생각은 없습니다. 칼은 넣으라고 하시죠.”
“으음, 좋소. 다들 칼 집어넣게.”
잠시 고민하던 항구관리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경비병들이 천천히 칼을 수납했다.
날붙이의 시린 광채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관리관이 내게 물었다.
“그래, 저 소란에 대해서 선단장님이 할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 배에 니파 항구에서 태운 피난민 104명이 타고 있습니다.”
“피난민?!”
“인간 된 도리로서 맨발로 달려와 목숨만 살려달라는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먼저 인정에 호소해 보았다.
“하, 선단장이 무슨 말을 하건, 우리 항구는 외부인을 받지 않소. 괜히 저들을 여기에 내려줄 생각이라면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군. 게다가 저들이 니파 항구의 피난민이라는 것은 선단장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않소?”
실패로군.
“어차피 항구가 발전하려면 인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피난민들의 건강에 특별히 신경 써서….”
“항구 외곽에도 빈민이 드글드글한 판이요. 인력 부족? 도대체 그게 뭐요?”
“하지만….”
내가 말을 더 이으려고 하자, 그는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그만합시다. 아무래도 귀 선단은 이만 떠나는 것이 좋겠소. 입항 허가는 내어드리기 어렵겠군.”
아니, 이건 좀 예상 밖인데? 입항 거부라니!
나는 급히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미리 준비한 녀석 중에 가장 큰 녀석이었다.
“항구관리관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보셨겠지만 식량이고 식수고 다 떨어진 판입니다. 이대로 입항 허가를 안 내주시면 저희는 다 굶어 죽습니다!”
손에 잡힌 묵직한 주머니와 나를 보며 한참 동안 갈등을 하던 관리관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웬만하면 봐주고 싶지만, 상황이 좀 심각하오. 상부에서 이미 ‘피난민을 가장한 첩자들의 침투를 막을 것’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단 말이오.”
“그럴 수가…!”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래도 자국민인데 굳이 피난민을 콕 찍어서 받지 않겠다고 했다면 도대체 그 ‘윗분’들은 무슨 생각인 걸까?
단순하게 빈민이 늘어난다거나 치안 악화를 우려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쯧, 우리 영주님은 거북이 같은 분이시지. 이번 전쟁에 절대 관여하고 싶지 않으신 게요. 어차피 전쟁은 남쪽의 수도를 누가 차지하는지에 대한 싸움 아니겠소? 굳이 피난민 같은 것을 받아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은 거지.”
그동안 입이 근질근질했던 것인지, 건네준 주머니가 무거웠던 것인지, 항구관리관은 내가 묻지도 않은 일까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입항 허가인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저 많은 피난민들을 다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선단장.”
그의 설명을 들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진짜 항구관리관도 아닌 항구관리관의 대리인에 불과한 그에게 그 이상의 뭔가를 요구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