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약점이 보이면 물어뜯는 세상
퇴거를 강요받은 피오렐은 결국 닻을 끌어 올리고 300톤급 초계함의 감시를 받으며 먼바다로 나섰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선단에서 피오렐을 방출한 오트라스 호와 리버티 호는 해가 수평선 너머로 까무룩 사라질 때쯤에야 겨우 입항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선원들은 당장이라도 항구의 번화가로 뛰쳐나가 놀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침에 바로 출항할 거야. 발드 선장은 출항 수속 미리 끝내놓으시고 공금에서 적당히 빼서 기름칠 좀 해줘요. 쉽게는 안 내줄 거야.”
“알겠습니다, 제독.”
“회계사는 바로 선원들 차출해서 교역소로 가. 식량과 식수 최대한 챙겨야 해. 알았지?”
“걱정 마십시오, 제독.”
“다른 사람들은 선원들 불만을 최대한 다독이도록 하고, 갑판장들은 이거 가지고 가.”
내가 네이선과 왓킨 앞으로 주머니 두 개를 밀어 놓자, 두 사람의 얼굴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오늘 밤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동안 식사도 부실했는데 오늘 밤마저 딱딱한 쉽 비스킷이랑 염장 고기로 때울 수는 없잖아. 두 사람이 나가서 제대로 된 음식 좀 사 와. 대신 술은 적당히 사고. 오늘 밤에 술 마시고 사고 치는 놈은 진짜 버리고 갈 거야.”
“알겠습니다, 제독.”
“혹시 애들 몇 명 데리고 가도 됩니까?”
“어. 음식 들고 올 사람은 있어야지. 그런데 괜히 누가 누구를 편애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 음식만 사고 바로 오라고.”
“알겠습니다!”
내 허락에 씩 웃는 네이선의 표정이 살짝 얄밉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런 작은 재량권이라도 줘야 간부들의 권위가 사는 법이지.
***
생각만큼 선원들의 반발은 크지 않았다.
원래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당장 쥐꼬리만큼 식량을 배급받던 피난민들에 비하면 자신들의 처지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었고, 이제 그나마 남은 식량도 없어서 감시 중인 해군에게 약간의 식량을 얻어(당연히 시세보다 수배의 금액을 지불했다) 그것을 쪼개 먹어야 하는 피오렐 호의 선원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굉장히 행복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제기랄, 간식도 다 떨어졌네.”
개인실을 가지면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이거다.
술도 그렇고 간식도 그렇고, 안전한 보관은 물론 남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먹을 수 있다.
선실에서 선원들과 함께 지낼 때는 꿈도 못 꾸던 일이지.
몰래 숨겨둔 간식을 털려서 주먹다짐을 한 게 몇 번이더라?
한 가지 문제라면 네이선과 우르타, 그리고 부선장님까지 곳간 드나드는 생쥐마냥 심심하면 내 방에 와서 술과 간식을 탐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선원들의 불만 완화를 위해서 선장부터 간부들까지 선원들과 똑같은 식사를 공개된 자리에서 하다 보니, 배가 고픈 네이선과 우르타가 매일같이 내 방에 쳐들어와 내 간식을 뺏어 먹었다.
네이선은 환자니까 이해를 하는데, 우르타 이놈은 도대체 뭐야?
고급 육포와 스낵은 물론이고 견과류와 설탕에 절인 과일까지 남은 게 하나도 없다.
똑똑똑.
혼자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흠, 누구야?”
“선장님, 게론드입니다.”
“아, 회계사. 일찍 왔네?”
내가 문을 열어주자 침울한 표정의 게론드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 있는 모양인데?”
“선장님, 우리가 요청한 물량을 대려면 이틀은 필요하답니다. 지금 남은 보존식이 얼마 없다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가 무슨 20척짜리 대선단도 아니고, 꼴랑 30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먹을 보존식이 구비가 안 되어 있다고?”
무려 교역항이다.
하루에 출입항하는 선박만 해도 수십, 혹은 수백 척인 곳이 바로 교역항이라는 말이다.
출항 전에 보급은 필수이니, 교역소는 늘 수백 척이 보급할만한 보존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작 280여 명, 300명도 안 되는 인원이 먹을 보존식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오트라스를 가득 채울 정도의 양을 주문했으니 단순하게 300명이라고 퉁치기에는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항구관리관이나 그 일행들이 장난을 친 모양입니다.”
“이런 젠장….”
오트라스에 승선했던 항구관리관과 몇몇 경비대는 우리가 무조건 하루 만에 출항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교역소 쪽에 뒷돈을 받고 이 사실을 찔러줬다면, 그쪽 직원이 이런 장난질을 치는 것도 가능했다.
뇌물을 좀 크게 건네기는 했지만 웬일로 우리를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하나 했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교역소 직원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걸린다고 해도 재고 파악을 잘못했다고 하면 될 일 아닌가?
그리고 게론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다음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얼마나 더 달라는 거야?”
“지금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극히 일부의 분량에 대해서는 정가에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정가라고 해도 시세가 올랐다면서 평소의 세 배 정도를 요구했습니다만, 여튼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내일 아침까지 구해줄 수 있기는 한데 정가의 세 배를 달라더군요.”
“미친놈들이군.”
“그게 싫다면 내일 모레까지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원래 가격의 3배를 정가에, 추가로 그 3배를 받으면 무려 9배다.
이래서야 니파 항구에서 접근했다던 암상인들과 뭐가 달라?
“말이 안 되잖아! 여기까지 전쟁의 여파가 미친것도 아니고!”
“며칠 전에 전쟁에 필요하다며 보존식품을 징발해 갔다고 하더군요.”
핑계는 그럴 듯하네, 젠장.
돈이야 있다.
어차피 손해를 감수하고 시작한 탐사이니, 돈을 조금 더 써도 후작에게 땡깡을 부리면 충분히 커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건 배알이 꼴린단 말이지.
“저쪽에 있는 지도 좀 가져다주겠어?”
“네.”
나는 게론드가 가지고 온 지도를 펼치고 일레드 왕국의 서쪽 해안가를 노려보았다.
벵가로쉬는 프레티아의 최북단에 위치한 항구다.
그 위로는 일레드 왕국이니, 결국 일레드 왕국의 항구를 들러야 할 팔자인 것 같다.
“에쉬노르가 가장 좋지만 아무래도 좀 캥긴다는 말이지….”
무려 왕립학회 소속 마공학자를 밀항시킨 곳이다.
우리가 했다는 흔적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 만났던 그 수사관이라면 최소한 심증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원래대로라면 이쯤에서 소문도 수집하고, 뒷골목에서 정보도 좀 사서 에쉬노르 항구 쪽 상황을 충분히 살피고 움직여야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언감생심이다.
“선장님, 그 폰테 섬이라는 곳에 대한 탐사가 시간제한이 있는 급박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피난민들의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보면 한발 물러섰다가 재정비 후에 움직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게론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게 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보이는 것처럼 여유가 있지는 않아. 그보다 정가, 아니, 3배 가격에 준다는 양이면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피난민들까지 정량을 보급한다면 닷새 남짓일 겁니다.”
“빠듯하군.”
“마르셀 항구까지는 충분히 움직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르셀은 벵가로쉬의 동북쪽에 위치한 일레드 왕국 서부의 최남단 항구다.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이 상황, 계속 반복될 것 같지 않아?”
“…….”
내 말에 게론드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안 되겠다. 회의 소집하지. 간부들 좀 호출해줘.”
다음 항구에 간다고 뭐가 그렇게 달라지겠나?
오히려 타국인 일레드는 피난민들에 대해 벵가로쉬보다 더 극단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차피 우리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상대의 대응도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사실 아닌가?
***
리버티 호의 발드 선장 이하 간부들까지 모이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다들 밤늦게 불러내서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괜찮습니다, 제독.”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혹시 출항에 문제라도 생겼나요?”
평소와 달리 간부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불안함이 감도는 것이 느껴진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서 계속해서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계속되는 불안한 상황에 다들 정신력이 바닥을 보이는 것이다.
“회계사가 교역소에 다녀왔는데, 식량을 5일분밖에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는군.”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장 성질머리가 더러운(?) 그레이그 일등항해사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열 내지 말고 앉아, 일등항해사.”
“아, 죄송합니다.”
내 조용한 질책에 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그레이그가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봤는데, 지금 상태를 계속 유지해봐야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야. 어떤 식으로든 피난민을 없애야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겠지.”
“설마 피난민들을 다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그레이그 항해사! 제독께서 말씀 중이시지 않나!”
또다시 급발진하려는 그레이그를 발드 선장이 나무랐다.
그레이그, 저런 성질머리를 가지고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용하다.
“그래, 발드 선장 말대로 내 말을 끝까지 듣고 떠들도록 해.”
“죄송합니다, 선장님.”
급히 사과하는 그레이그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준 뒤, 다음 말을 이었다.
“피난민들을 분산 수용해야겠어. 아이가 있는 부부나 노인들은 여행객으로 위장하고, 남자는 선원으로, 남은 여자들은… 창녀로 위장하지.”
여기저기에서 불편한 신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이것 말고는 답이 없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여러 항구에 영업장(?)을 가진 포주들은 가끔 업소의 여자들을 교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일반적인 세상도 아니고, 여자의 사회활동도 거의 없는 세상이다 보니, 그 외에 다수의 여자가 배에 타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잠시 후, 목소리를 가다듬은 발드 선장이 말했다.
“제독의 의도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피난민들을 이끌고 다니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말씀하신 대로 피난민들을 갈라놓으면 현실적으로 그들을 조금씩 내리게 하는 것도 매우 어렵게 됩니다.”
“…데리고 갈 겁니다.”
“네?”
누군가의 얼빠진 반문을 끝으로 선장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생각해봐. 저들을 어디에 내려놓으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피난민들은 99%가 빈민으로 살다가 죽는다.
여기에 앉은 이들 중 대부분이 빈민의 삶이 어떤지 알고 있기에, 감히 그것을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부선장님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피난민들이 선장님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것, 두 번째, 저들의 보급 문제. 항해 중의 보급이 문제가 아닙니다. 선장님의 말씀은 저들을 섬에 정착시키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정착민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이번에 항로를 확정하고 천천히 정착민을 늘려가는 것이 계획이었지 않습니까?”
부선장님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문제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폰테 섬의 원주민들, 페리아 족에 대해서 말이다.
수천 명도 아니고 고작 백여 명이라면 페리아 족에게 도움을 청해서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보급을 부탁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들이 내게 호의적이더라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퍼주는 관계는 파탄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부분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구해줌으로써 해결이 될 거다.
나머지 하나야 뭐….
“몇몇 기술자들은 몰라도 대부분 피난민들은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어. 그리고 식량은 아마 자급자족 정도는 가능할 거야. 고작 백 명 정도니까 낚시하고, 산짐승을 잡고, 채집을 하면 몇 달 정도는 괜찮아. 우리가 최대한 빨리 서두르면 될 일이야.”
내 설명이 끝나자 의문을 제기한 부선장님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님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럼 뭘 준비할까요?”
내게 반대하려고 말을 꺼낸 것이 아니라 합당한 이유를 말할 기회를 주려고 말을 꺼내신 모양이다.
“일단 리버티 호는 양, 돼지, 염소, 닭을 키울 축사를 만들어 줘. 많지는 않더라도 그런 가축들은 몇 쌍만 가지고 가도 다음에 크게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오펜과 크리스티앙은 날이 밝는 대로 선원들 몇 명 데리고 옷을 좀 사 와. 피난민들을 입혀야 하니까 적당히 괜찮은 옷으로. 회계사는 건축 자재들과 도구들, 그리고 생필품들을 알아봐서 구매해 줘. 어차피 이번 백 명만 쓸 게 아니니까 양이 조금 많아도 상관없어.”
모두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당부를 덧붙였다.
“그리고 선원들에게 확실하게 경고해. 피난민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섬 탐사니 하는 말 따위 무조건 숨기라고. 다음에 기항해야 하는 곳이 일레드 왕국이야. 입 잘못 놀리면 우리는 다 죽어.”
물론 일개 선원들이야 항해 일정에 대해 정확하게는 모르고 있다.
하지만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면 대충 지금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노던테라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다른 나라들의 북쪽 진출을 강력하게 막아 온 일레드 왕국이다.
그런데 그들의 땅에서 대놓고 북쪽에 섬이니 뭐니 탐사를 하러 간다고 하면 퍽이나 그들이 좋아하겠다.
게다가 제먼 씨의 밀항 소식까지 널리 퍼졌다면, 갑자기 북쪽의 섬을 찾겠다고 나선 우리에 대한 심증이 확증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오늘처럼 선원들의 상륙을 막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왓킨이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안 될 말이었다.
“왓킨 갑판장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선원들을 상륙도 시키지 않고 탐사를 강행할 수는 없어. 선원들이 버티지 못할 거야. 그리고 발드 선장이랑 그레이그 일등항해사는 회의가 끝나고 잠시 남지.”
***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는 아침에 출항할 거야. 그리고 확보한 식량은 고작 5일 치에 불과하지. 식수야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말이야.”
식수는 이러쿵저러쿵할 여지가 없다.
어떤 도시건 식수가 확보되지 않는 경우는 엄청난 가뭄으로 지하수와 수원지가 말라버리는 경우밖에 없으니까.
맛과 상관없이 상당한 공정을 거쳐야만 하는 보존식처럼 양이 부족하네 마네 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닷새면 아센 항구까지는 조금 빡빡할 겁니다. 중간에 피난민들을 재편성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7일은 걸릴 텐데요.”
발드 선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옆 부두에 보니까 배들이 꽤 있던데. 가서 사 오자.”
“네?”
“선장님, 그건 좀….”
그레이그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상선 간의 직거래, 즉 밀거래는 불법이다.
세금이 항구와의 거래세로 붙기 때문이다.
상선들이 몰래몰래 자기들끼리 거래를 해버리면, 정박할 곳을 빌려준 항구는 손가락만 빨아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비록 교역품이 아니라고 해도 내 제안은 정상적인 뱃사람들에게는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등항해사. 먼저 장난을 친 것은 항구 쪽이잖아. 저쪽에서 대놓고 우리 눈탱이를 때리고 있는데 그냥 맞고만 있어?”
“으음, 그렇기는 합니다만….”
“다른 것도 아니고 식량이야. 항구에 기항을 했는데도 여전히 배식량이 적다면 선원들의 불만이 만만치 않을걸?”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아센 항구보다 가까운 마르셀 항구로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매 시간마다 자금이 줄줄 새고 있는 판인데, 굳이 그 시간을 늘리기까지 해야 할까?
정확하게 셈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번 항해의 손해가 천문학적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폰테 섬에 무사히 도착하면 어느 정도 회수가 가능하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휴우, 이번만큼은 정말 어쩔 수 없군요. 그런데 선장님, 지금 시간이 이래서 저쪽에서 응할지 모르겠습니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고 수긍하는 말을 내뱉는 그레이그가 제시한 의문에 나는 만지작거리던 은화를 튕기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돈 앞에서 안 되는 게 어딨어?”
***
내 예상은 적중했다.
한 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을 경계하던 다른 배들은 내가 내민 은화에 선장을 불러왔고, 선장들은 내가 제시한 금액(세상에, 교역소에서 아침에 판다고 한 금액보다 싸게 제시했다)에 희희낙락하며 선원들을 깨워서 모든 보존식품을 부두에 내려놓았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지 뭐.
우리 애들 깨워서 부두에 내려놓은 보존식품을 들고 가면 그만이었으니.
한밤중이 되어서야 일을 마무리한 뒤, 수량을 확인한 게론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식량 중에 상태가 좋지 않은 것들은 피오렐로 옮겨서 피난민들에게 먼저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교역소와 계약한 분까지 들어오면 12일 정도 분량이 나옵니다.”
“해결이군.”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사기꾼 놈들과 계약을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아니지, 그건 더 이상하잖아. 우리가 식량이 없다는 걸 놈들이 알고 있는데, 그대로 출항하면 무조건 트집을 잡을 걸? 괜히 검문하면서 어디서 구했냐며 밀거래 혐의로 나포당할 수도 있어.”
“그렇긴 하네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게론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너무 그렇게 열 받지 말라고. 세상에 불합리한 일이 이것 하나뿐이겠어? 괜히 이미 지나간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자도록 해. 내일 아침부터 바쁠 테니 말이야.”
게론드를 보내고 함수 갑판으로 나와 잠시 바람을 쐬고 있는데, 뒤에서 기척을 죽이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누군지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다.
“와악!”
“으아아악!”
콰당!
그 누군가가 거의 내 뒤에 도달했을 때 내가 한 타이밍 빠르게 뒤를 돌며 소리를 지르자 나를 놀래키려고 양손을 들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뒤로 비명을 지르며 자빠지는 남자가 있었다.
“쯧쯧…. 넌 도대체 언제 철이 들래?”
“아야야야…. 어떻게 알았어?!”
우르타가 끙끙거리며 엉덩이와 허리를 문지르자,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분명히 걸린다고 말했지? 하여간 학습 능력이 없어, 저 멍청이는. 지금까지 눈먼 화살 안 맞고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니까?”
“네이선까지? 둘 다 안자고 웬일이야?”
내 말에 네이선은 손을 내밀어 볼이 잔뜩 부은 우르타를 일으키고는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요즘 바빴잖아? 예전에는 선수에서 이렇게 셋이서 농담 따먹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네. 하하하….”
“리안이 맨날 바빠서 그래.”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일하기 싫어하니까 내가 일을 빼준 거잖아! 너도 네이선이나 나처럼 일해 볼래?”
“아앗?! 그런 거야? 그럼 그냥 너네가 바쁜 게 좋겠다.”
따악!
네이선의 꿀밤이 번개 같은 속도로 우르타의 머리통에 떨어졌다.
“하여간 말하는 것 하고는.”
“아악! 왜 때려! 왜 맨날 나만 때려! 네이선 나쁜 놈!”
“야, 이리와, 너 이리 안와?”
우르타가 후다닥 도망치고, 네이선이 슬슬 그 뒤를 쫓았다.
쯧, 저러다가 한 놈이 물에 빠져야 끝나지.
“아아앗!”
“어, 어? 놔, 이거 안 놔?!”
풍덩!
풍덩!
…둘 다 빠질 수도 있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