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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43화 (244/420)

243화. 어디까지 알려줘야 할까?

[행운 총량 보존의 법칙]이 작동하리라는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하는 듯 보였다.

역풍을 뚫고 가야 했기에 속도는 조금 느렸지만 바다는 평온했고, 해적으로 보이는 선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선내에서도 마찬가지. 피난민들(주로 선원으로 위장한 청장년층 남자들)과 선원 간에 주먹다짐이 십여 번 있었고, 창녀로 위장한 여성들의 선실에 침입하려던 불한당 두 놈(퇴출이 결정된 놈들)이 붙잡혔지만, 그 정도면 아주 평온한 일상이었다.

심지어 아센 항구에서 검문을 나온 항구관리관은 창녀로 위장한 여자들을 보며 ‘혹시 저 여자들이 우리 항구로 들어오는 거요?’라는 음심(淫心) 섞인 한 마디를 물었을 뿐 별다른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선단의 규모에 비해 선원이 약간 많은 편이었지만 애초에 오트라스 호나 피오렐 호가 무장상선 수준의 과무장을 하고 있기에 주목을 받지도 않았다.

다만 니파 항구의 출입항 기록이 없는 것과 벵가로쉬 항구에서 피오렐 호만 출입항 기록이 없는 것에 의문을 표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니파 항구에서는 반군의 공격으로 인해 긴급 출항을 해야 했다고 했고, 벵가로쉬에서는 피오렐 호에 전염병으로 의심되는 환자가 있어서 입항을 거부당했다고 변명했다.

덕분에 피오렐 호의 선원들은 상당히 꼼꼼한 신체검사를 당하는 불합리한 상황을 겪어야 했지만, 눈앞에 다가온 오랜만의 자유(상륙)를 포기하고 진실을 폭로할 정신 나간 선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사히 입항을 마친 나는 오랜만에 우르타와 네이선을 데리고 술집을 찾았다.

역시 술은 술집에서 마셔야 제맛이다.

“…혹시 그거 물이냐?”

“응?”

800mL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잔으로 벌써 다섯 잔째 술을 뱃속에 쏟아붓는 네이선을 보고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꿀주라고 해도 단맛이 약간 감도들뿐 알코올도수로 따지면 적어도 20도는 넘을 것 같은 녀석이다.

그걸 자리에 앉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4리터쯤 마셔대고 있는 거다.

물도 저렇게는 못 마실 거다.

“환자라는 놈이 술을 왜 이렇게 무식하게 마셔?!”

“아, 그만 좀 해, 귀에 딱지 앉겠다.”

내 질책에 네이선은 귀를 후비는 척하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구시렁거리며 하소연을 시작하는데….

“선의님이 대단한 학자고 뛰어난 의사인 건 인정해. 똑똑한 네가 인정할 정도면 말 다한 거지. 그런데 진짜 너무 심하신 거 아니냐? 술도 마시지 마라, 음식도 이것 먹지 마라, 저것 먹지 마라, 심지어 운동도 하지 말라고 하시고, 일도 못 하게 한다니까?”

“…그런데 술을 그렇게 마신다고?”

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자 녀석은 대번에 표정이 밝아지며 코를 치켜들었다.

“히히, 오늘 나오기 전에 술은 ‘조금’ 마셔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셨거든!”

누가 봐도 ‘조금’이 아닌데?

“그른데 이짜나아, 네이서는 이제에 안 아퐈?”

저놈은 누가 저렇게 술을 먹였냐?

좌우로 거의 15도씩 진자운동을 하는 우르타의 앞에 있던 잔을 빼앗아 냄새를 맡아보자, 지독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찔렀다.

어우야, 적어도 50도는 되겠다.

“아안대! 내꼬야! 리안 나아쁜넘! 맨날, 맨날맨날 내꺼 빼서가아….”

“닥쳐, 이 주정뱅이야.”

내게서 다시 잔을 빼앗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우르타를 간단하게 제압하고 네이선에게 물었다.

“그런데 상처는 괜찮냐? 아직 덜 나았으면 술 그만 마시고.”

지금부터 안 마셔도 이미 충분히 많이 마신 것 같기는 하다만.

“상처? 이제 피는 안 나. 아직 똑바로 누워서 잘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데 그렇게 보기 안 좋냐?”

그걸 말이라고.

솔직히 말해서 네이선의 등짝을 본 데보라가 칼을 들고 사생결단을 내자고 할까 봐 걱정이다.

왜 그랬냐고 물어봐도 할 말이 없잖아.

사실대로 ‘배 위에서 딴 여자랑 뒹굴던 것을 발견해서 조금 패줬습니다.’라고 하면 복중 태아는 아비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의외로 닥터가 별말이 없네?

내가 닥터였으면 네이선 저놈 치료는커녕 일단 때려죽이고 봤을 텐데.

“어이, 친구들. 혹시 오늘 입항한 무장상선 타는 친구들인가?”

누군가가 해롱거리는 우르타의 옆에 앉으며 쾌활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물론이고 네이선과 우르타도 리버티 호를 탄 이후로는 보통은 선원들과 다른 꽤 고급의 옷을 입는다.

후질구레한 선원용 옷을 입으면 고급 음식점이나 주점에서 입구 컷을 당하기도 하거든.

다만 오늘은 옛날 추억을 되살린다고 선원용 옷을 입고 선원들이 자주 다니는, 더럽고 시끄럽지만 익숙한, 그런 주점에 온 참이다.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전형적인 선원 복장의 남자였다.

“무장상선은 아니지만 뭐… 대충 비슷하지. 오트라스 호의 리안이야.”

“오트라스라면, 오, 그래! 그 꽤나 큰 무장상선이지? 딱 내가 찾던 친구들이군!”

갑자기?

나는 급히 남자의 모습에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셜록 홈즈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

뭐야, 아무 특징이 없는데? 왼쪽 팔뚝에 제법 큰 흉터가 있지만, 뱃놈이 그 정도 흉터 정도야.

“우리를 찾았다고? 왜? 볼일이라도 있나?”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탁자 아래로 내린 네이선이 약간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했지만, 저놈과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르겠나?

“내가 들은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거기에 예쁜 여자들이 엄청나게 타고 있다던데, 사실인가?”

참고로 창녀로 위장한 여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오트라스에 태웠고, 당연한 말이지만 외부 출입을 금지했다.

허가를 해줘도 감히 밖으로 나갈 용감한 여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쓸데없는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오펜과 크리스티앙, 행크까지 붙박이 당직으로 놔두고 온 참이다.

그런데 이놈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었어?”

내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여상하게 묻자, 그는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원래 항구의 소문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없지? 있어 봐야 늙은 할머니들이나 몇 명 태웠겠지 응? 그렇지 않아?”

나는 괜히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시간을 끌었다.

일단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제비뽑기에서 진 운 없는 당직자들을 제외한 다른 선원들은 모두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항구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 인원만 거의 150여 명. 그렇다면 배를 지키는 당직자가 너무 적은 게 아닌가 싶지만, 어차피 피난민들은 항구의 향락을 즐길 여유도, 조건도 안 돼서 모두 남았으니 인원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물론 상륙하는 선원들에게 피난민에 대해서 떠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야 했지만, 풀려나간 150개가 넘는 입을 다 단속할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한없이 가벼운 그 입들에 술까지 들어갔다.

그렇다면 진실에 기반한 허풍과 과장을 막기는커녕 ‘피난민’이라는 키워드만 숨길 수 있어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아쉽지만 맞아. 우리 배에 젊은 여자들이 타고 있어. 선장이 보지도 못하게 해서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뭐? 그게 진짜야?”

“돈 많은 포주가 창녀들을 다른 항구로 옮겨달라고 했나 봐. 가끔 있잖아 그런 일.”

“허, 나도 이야기만 들었는데, 그런 일이 진짜 있군? 그래서, 그 아가씨들은 목적지가 어딘데?”

“그거야 선장 정도 되어야 알겠지. 확실히 이 항구는 아냐.”

“…젠장. 그 말 진짜지?”

그는 신기해하다 말고 갑자기 우울한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쯧, 그러니까 왜 그런 쓸데없는 도박을 해서는.

“진짜니까 가서 친구들에게 술이나 돌려.”

“제엔장!”

그는 벌컥 화를 내더니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거 말해줘도 괜찮아?”

“창녀 얼굴 보자고 배에 침입하는 미친놈이 있겠냐? 그리고 이게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고.”

안 봐도 뻔하다.

마초들이 지배하는 선원 커뮤니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화 주제 TOP3가 뭐겠나?

당연히 술, 담배, 마약…이 아니고 술, 싸움, 여자다.

그중에 최고는 당연히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며, 여자와 관련된 싸움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얼마 전에 싸움도 있었고, 배에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있지.

온갖 도발적인 창작이 이루어지기에 아주 좋은 조건 아냐?

“여어! 다들 독주를 마시는구만? 여기는 맥주가 꽤 맛있는데 말이야. 한 잔씩들 하라고.”

네이선과 잠시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술 냄새를 풍기는 다른 남자가 빈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무려 네 잔의 맥주잔이 들려 있었고, 우리에게 맥주를 한 잔씩 주었다.

“고마워, 내기에서 이겼나 보군?”

“으하하하, 자네들 덕분이야. 그 창녀들을 태운 배를 탔다지? 어떻게, 젖이라도 한 번씩 만져봤나?”

“말도 안 되는 소릴.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진짜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그런 것까지 관리할 정도로 선장이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에이, 그게 말이 되나? 어디 닳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허락하지 않아?”

“선장 성격이 워낙 지랄맞아서 말이야.”

“그래? 거 아쉽겠군.”

“필요하면 돈 내고 여자를 부르면 될 일인데 굳이 선장 눈 밖에 날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 선장이 돈은 잘 주거든.”

“오오, 돈을 잘 주는 선장이라니, 하늘을 나는 인어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끌끌끌….”

이 정도면 대충 대꾸해준 것 같은데 그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이,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좀 하던가.

“그러는 그쪽은 어디에서 오는 길이야?”

“나? 나는 북쪽의 에쉬노르. 마르셀로 갈 거라고 하더군. 원래 굳이 여기에 기항할 필요가 없었는데 멍청한 회계사 놈이 식량 수량을 잘못 체크하는 바람에 여기 들른 거야. 내일 다시 출항한다더군.

“순풍이라 편하겠군.”

“편하기는 개뿔. 바람이 워낙 들쭉날쭉해서 돛 방향 바꾸다가 날 샌다니까?”

그나저나 에쉬노르라….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의외의 정보를 얻을지도 모르겠다.

“에쉬노르는 어때? 내가 전에 갔을 때는 좀 어수선하던데. 누가 없어졌다던가? 우리도 그쪽으로 갈 것 같거든.”

“하긴, 이 위로는 에쉬노르 말고는 딱히 갈만한 곳이 없지. 쩝, 잘하면 너희 배에 있는 여자들도 맛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여기에서 영업을 하지는 않겠지?”

“당연히. 포주도 안 탄 모양이던데. 쓸데없는 말 말고 이야기 좀 해봐. 에쉬노르는 어때?”

그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비슷하지 뭐, 없어진 사람이 누구라더라? 마법사? 왕실 사람? 꽤 중요한 사람인가 봐. 얼마 전에 책임을 뒤집어쓴 몇 명이 교수대에 매달렸다더군. 분위기 별로야. 여기에서 최대한 즐기는 게 좋을 걸?”

혹시나 하고 들렀으면 아주 막장 드라마를 찍었을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였을지도 모르고.

***

오트라스의 선장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선장과 항해사들은 테이블에 놓인 항해도를 보며 머리를 싸맸다.

“확실히 델라 항구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정말 바람이 도와주지 않는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내해에서 동서로만 다닐 때는 일 년 내내 불어오는 북풍이 그렇게 좋았는데 이거야 원, 전체 항로가 역풍 구간이네요.”

“끄응….”

항해술이 아무리 좋아도 역풍을 완전히 극복할 방법은 없다.

물론 삼각돛이니 지그재그 항해니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역풍에서도 항해가 가능하다는 뜻이지, 그게 효율적이라는 뜻은 아니니까.

나는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고 말했다.

“여기에서 떠든다고 갑자기 바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얼마나 걸릴지나 생각해봐.”

“제독,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피난민들을 데리고 움직일 항로가 아닙니다. 대충 계산해도 편도로 26일가량 걸립니다. 돌아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리 많은 물자를 들고 가도 부족할 겁니다. 심지어 정착민들에게 일정량의 식량은 주고 와야 할 것 아닙니까?”

편도만 해도 30일분이라, 빠듯하네.

돌아오는 길이야 순풍이니까 괜찮을 거고, 아마 페리아 족으로부터 도움도 받을 수 있겠지.

내가 생각에 빠져있는데 발드 선장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제독, 피난민들을 포기하실 수 없다면 그들의 개인적인 짐이라도 파기하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실상 피오렐 호의 경우는 그들의 짐으로 거의 다 차 있는 상태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발드 선장의 의견은 타당했다.

물론 피난민들이 가지고 있는 짐이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정말 가치 있는 물건은 진즉에 팔아서 자금원으로 써먹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난민들에게는 남은 짐들이 마지막 희망이자 유일한 재산이다.

그들에게 그것을 파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선택일 수 없다.

“그건 조금 더 생각해보지. 피난민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내 말에 한숨을 내쉬며 발드 선장이 침묵했고, 잠시 후에는 그레이그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렇다면 돈을 조금 줘서 항로 탐색이 끝날 때까지 여기에서 잠시 있으라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절반이라도….”

“남겨진 사람들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그리고 방출하기로 한 자들을 우리가 출항할 때 풀어줄 건데, 너무 위험하잖아.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할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한참 동안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가고, 그답지 않게 침묵을 지키던 게론드가 불쑥 말을 꺼냈다.

물자 등에 대한 조언을 위해 자리해서 잘 참고 있나 보다 싶었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장님, 뭘 숨기시는 겁니까? 이제 어느 정도는 이야기해 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이상했습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섬을 찾아간다니. 선장님처럼 똑똑한 분이 선택할만한 길은 아니었죠. 보아하니 몇 분은 대충 내용을 아시는 것 같은데,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요. 정확한 정보가 없다면, 제안도 판단도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에쉬노르 항구에 기항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어차피 이 항구를 떠나면 그 섬에 도착하거나, 탐색에 실패하거나 둘 중의 하나니까요. 지금까지야 선장님을 믿으니까 모두들 따라와 주었지만,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만 보면 우리 일행들 중에 저놈이 제일 똑똑한 것 같다.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고….

사실 나도 언제, 어디까지 정보를 공개해야 할지 고민은 하고 있었다.

결정이 쉽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에른스트, 그레이그, 오펜, 크리스티앙, 발드, 슬레어, 아인델프, 바우어, 그리고 게론드.

선장이거나 항해사로서 배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

난 이 사람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는 집단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함이 꿈틀거린다.

“으음….”

“선장님.”

“크흠, 그만하게, 회계사.”

내가 계속 머뭇거리자 게론드가 조용히 나를 한 번 더 불렀고, 결국 부선장님이 게론드에게 인상을 쓰며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게론드의 말이 맞다.

필요한 정보조차 숨기는 제독 따위, 누가 믿고 따르겠나?

“아니에요, 부선장님. 저도 언제 공개할지 고민 중이던 일이었으니까.”

“…….”

“다들 내가 무인도에 표류한 적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거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고작 20대 중반의 선장, 혹은 제독. 이상하지 않아? 내가 어디 고위 귀족 가문의 자제도 아니고 말이야. 나도 고작 몇 년 전만 해도 선원이었어. 아마 여기에 앉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는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겠지. 경력만 따져도 절반 이상이 나보다 많군. 첫 번째 분기점은 제국 1함대에 소속되면서였지.”

“헛!”

“설마 그 몰로스 제국 1함대 말입니까?”

“야심차게 출범했다가 전멸했다는?”

“생존자가 없다고 하던데?”

제국 1함대라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헛바람 삼키는 소리와 다급한 질문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세 명밖에 안 되는구나.

에른스트 부선장, 오펜 항해사, 그리고 아인델프 선장.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그 제국 1함대가 전멸한 곳이 저 북쪽 바다 어딘가야. 그리고 내가 표류한 섬은, 그래, 이제 폰테 섬이라고 불리우게 될 그 섬은 노던테라를 발견하기 위한 중요한 중계지로서 가치가 있지.”

“노, 노던테라라니….”

“진심입니까, 제독?”

“세상에….”

“노던테라가 진짜 있는 것은 확실한가요?”

바우어 항해사는 얼마나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도 못한다.

“노던테라는 확실히 있어. 우리가 전에 밀항시켜줬던 제먼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일레드 왕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를 독점하고 있다고 해. 타국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서 비밀을 엄수해 가며 말이야. 왜 스코타 후작이 내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지 이제 알겠지?”

“믿을 수 없군요….”

“전 선장님이 말씀을 믿습니다! 그럼 우리는 노던테라로 가는 건가요?”

단단한 신뢰를 보여주는 오펜에게 살짝 웃어준 나는 말을 이었다.

“바로 노던테라로 가는 것은 무리야. 일단 폰테 섬을 어느 정도 개발해서 중간 기항지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해야겠지. 솔직히 본토와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몇 년이나 걸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섬에는….”

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페리아 족에 대해서까지 말하는 것은 과하다.

그들이 나와 네이선, 우르타, 드웰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기억까지 조작해가며 그들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은 더욱.

하지만 완전히 숨기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무인도라고 했지만, 사실 원주민들이 있어.”

“네?!”

“그럴 리가요! 사람이 사는데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니?”

“섬이 얼마나 큰 겁니까?”

“어떤 사람들이죠?”

삽시간에 선장실은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이 시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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