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사냥하는 맹수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진 난장판은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새로운 섬이나 육지의 탐사가 어렵고 위험한 이유는, 존재의 불확실성이 너무 높고, 발견한다 해도 인간이 거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며, 섬 또는 그 주변에 무슨 위험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표류를 했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은 이미 해소가 된 것이고, 원주민이 있다고 하니 인간의 거주 가능성까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흥분이 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모두 조용, 회의는 마무리 지어야지? 그런 이유로 식량은 여유 있게 준비하되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적당히 식수는 한 달 분량 정도, 나머지는 식량으로 채우자고.”
그렇게 해도 대충 250명이 먹어대는 양으로 따지면 50일분도 간당간당 할 거다.
피난민들을 받으면서 욕심을 부려 정착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나 도구를 좀 많이 사서 그렇다.
물론 부피가 작고 오래가는 쉽비스킷만 채워 넣는다면 더 많은 양을 챙길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출항하기도 전에 선원들이 도망가거나 항해가 끝나기도 전에 선상 반란이 일어나겠지.
영양 불균형이나 결핍증은 그다음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리고 선원들에게 원주민 이야기는 당분간 숨기도록 해. 혹시라도 말이 밖으로 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선장님.”
“알겠습니다, 제독.”
이후로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나는 회의를 종료했다.
회의가 길어지면 서로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하나씩 선장실을 나가는 중에 게론드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장님,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응? 특별히 일정은 없는데.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겠어?”
“아닙니다, 지금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죠.”
“음. 그럼 회계사는 잠시 남지.”
몇몇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게론드를 힐끔거렸지만 게론드는 내가 따라 준 물만 홀짝거릴 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모두가 나가고 나와 둘만 남게 된 게론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을 확인한 뒤 문을 잠갔다.
“뭘 그렇게까지 해?”
“하하, 약간 민감한 이야기가 될지도 몰라서 그렇습니다.”
“사람 참 새삼스럽게. 일단 앉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다시 자리에 앉은 게론드는 말없이 물을 들이켜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선장님이 말씀하신 원주민들 말입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말했잖아, 그들이 없었다면 드웰 씨는 물론이고 나와 네이선, 우르타, 아인델프, 오펜까지 거기에서 다 죽었을 거라니까?”
내 말에 고개를 살살 젓던 게론드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선장님, 저는 선장님이 눈치도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설마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것은 아니지요? 선장님 말씀에는 상당한 모순이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섬 주민들이 표류한 외부인에게 호의적인 것도 모자라 탈출할 때까지 협조적이었다니, 말이 안 되지요. 선장님 일행이 세상으로 나가면 자신들이 밝혀질 것이 분명한데 말이죠. 백번 양보해서 그들이 매우 선량하고, 선장님이 신뢰를 주어서 탈출을 도왔다 하더라도, 이번에 섬을 세상에 공개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우리의 행동을 그들이 환영할까요? 심지어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외부인인 피난민들을 체류시키는 것 아닙니까? 제가 그쪽 원주민들이라면 솔직히 적대적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만.”
하여간 똑똑한 놈들은….
“음, 일단 그들의 마을 위치는 나도 잘 몰라. 그리고 우리는 섬의 남서쪽 해안가, 항구가 될만한 곳만 개발할 테니 그들과 부딪힐 일이 없어. 그리고 그들은 꽤나 자신들을 감추는 편이라 많은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편도 아니고 말이야. 이번에도 어쩌면 선원들은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넘어갈지도 몰라.”
조악한 내 변명을 들은 게론드는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너무 낙관적인 추측이지 않습니까? 늘 최악을 대비하시던 선장님의 추측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네요. 개발이라는 것이 항구만 만든다고 끝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열 살 먹은 아이도 알 겁니다. 그들이라고 모르겠습니까?”
“그 부분은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어떻게 잘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선장님!”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어.
나도 확실하게 아는 게 없는 걸?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큰 그림에 포함된 나를 그들이 적대하지 않으리라는 것과, 내가 이렇게 다시 돌아올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정도다.
분명히 내가 다시 돌아온다는 예언을 들었을 때는 내가 내 의지로 그 섬을 다시 찾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말이지.
일단 게론드의 표정을 보니 어설픈 거짓말로는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가 다 깨지게 생겼다.
솔직하게 내 상황을 말하는 수밖에.
“회계사, 답답한 마음은 이해해. 그런데 나도 사정이 있어서 다 말해줄 수가 없어.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말한 원주민들이 나를 적대할 일은 없다는 거야.”
내 솔직한(?) 대답을 들은 게론드는 깊은 눈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선장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다는 뜻이군요.”
아오, 쓸데없이 예리하기는.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 줬으면 해. 일단 우리 승조원들이 먼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충돌까지 벌어질 일은 없지 않을까?”
“선장님이 통제하는 승조원들은 그렇다고 하고, 우리가 그 섬을 떠나고 나면 남겨진 피난민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십중팔구 피난민들의 전멸이라는 사태를 야기하겠지요.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유의미한 전투력을 가진 인원수는 원주민 쪽이 무조건 압도적일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일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이유를 설명했다.
“게론드, 그들은 호전적인 자들이 아냐. 이쪽이 먼저 도발하지 않는다면 먼저 건드릴 이들은 아니라는 말이지. 그런데 대다수가 여자와 노인인 피난민 그룹이 먼저 그들을 도발하겠어? 그리고 뭔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서로를 인지해야 하는데 말이야.”
“설마 피난민들에게 원주민의 존재를 숨기실 생각이십니까?”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일단 숨길 생각인데?”
“그게 되겠습니까? 호기심이 많거나 특이한 자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섬에 함께 거주하면서 몇 개월이나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아닐걸? 그들의 정신은 하나로 이어져 있어서 돌발적인 개인행동이 불가능한데다가, 걔들은 다른 사람의 기억도 조작한단 말이야.
물론 이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정확한 그들의 마을 위치는 모르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정착지 해안가와 그들의 마을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 그리고 그들의 은신 능력은… 흠, 직접 봐야 믿겠지만, 그때 섬에 표류했던 인원 중 대부분이 그들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내 말에 게론드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그게 말이 됩니까? 분명히 드웰 선주님이 7년인가 8년을 그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고….”
“그랬지.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웰 씨가 그 긴 시간 동안 다 준비했다고 믿었어.”
“허….”
한참 동안 고민을 하던 게론드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휴우, 의문과 의혹투성이지만 선장님도 고충이 있으시다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돼서 다시 시니아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 유령이 되어서도 선장님을 따라다니며 원망할 겁니다.”
“어휴,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도 마. 예쁜 여자 유령도 별로 반갑지 않은데, 말 많은 총각 유령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네.”
***
오랜만에 일선에 복귀한 네이선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원들.
닷새 동안 푹 쉬어서 그런지 얼굴에 개기름이 좔좔… 흐를 리가 있나?
도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다닌 건지 좀비 영화가 따로 없다.
얼씨구, 저놈 지금 토하는 거야?
“이제 한참 더워질 시기인데, 북쪽이라 그런지 그나마 괜찮군요.”
“그러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나는 내 옆으로 다가온 에른스트의 왼팔을 슬쩍 보며 물었다.
언제나처럼 주머니에 깊이 들어가 있는 왼손.
미동조차 없어서 어떻게 보면 의수(義手)처럼 보이기도 한다.
점점 나아지는 네이선과 반대로 에른스트 부선장의 상세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요즘은 닥터의 특제 약, 그러니까 독약과 마약의 중간 어디쯤에 걸쳐있는 그것이 없으면 방에서 나오는 것도 힘겨운 모양이다.
내 질문에 나를 보던 에른스트가 피식 웃으며 고갯짓을 했다.
자리를 옮기자는 뜻이다.
“출항까지 아직 시간 있는데, 가서 차나 한잔하시죠.”
“저는 그 말린 나뭇잎 담근 물보다 술이 좋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만.”
“선장이 주는 대로 드세요, 좀.”
선장실로 자리를 옮긴 후 기어이 위스키 한 잔을 쟁취한 에른스트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으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혹시 말이다.”
“네.”
“섬에 남겨질 사람들을 책임질 사람을 생각해 두었느냐?”
“일단은 허비 씨요. 지금 피난민들의 대표 격이기도 하고, 슬레어 항해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니까요. 고작 100명도 안 되는 인원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당분간은 고작 해 봐야 주거지 정도나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항구를 만드는 것은 조금 더 전문적인 인력이 필요할 테니.”
“…….”
“왜요?”
“…내가 남고 싶구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부선장님을 살펴보았다.
증상이 심하던 왼손이 아니라 잔을 잡은 오른손도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흐흐흐, 이상하냐?”
갑자기 목이 꽉 막히는 기분이다.
그래서 괜히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죽을 때까지 배를 타실 거라면서?”
“쯧! 마음이야 그러고 싶은데, 내가 너무 오래 산 모양이다. 몸이 내 맘 같지 않아.”
“많이… 아파요?”
“아픈 거야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지. 하지만 몸을 마음대로 못 쓰는 뱃놈 따위, 너에게 방해만 될 뿐이 아니냐.”
“말씀하시는 것만 봐서는 괜찮겠구만 뭘.”
두렵다.
왠지 그를 섬에 두고 오면, 다시 갔을 때는 그의 묘비를 마주해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페리아 족의 신전에서, 부상까지 있던 내 몸은 갓 태어난 것처럼 회복된 적이 있다.
어쩌면 부선장님의 병도 고칠 수 있을 거다.
“일단 가서 상황을 보자구요. 정말 부선장님 말대로 책임자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
망망대해.
말 그대로 바다와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파란색의 향연 아래 이질적인 것이라고는 내가 타고 있는 오트라스 호를 선두로 하는 내 선단뿐.
어제부터 갈매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 육지에서 꽤나 떨어진 모양이다.
페리아 족에 대한 생각, 부선장님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진 머리를 좀 식히려고 갑판에 나왔는데, 한켠에 선원들이 모여 소란스럽게 떠드는 것이 보였다.
누가 또 싸움이라도 벌이는 건가?
“잡아, 잡아!”
“아이고! 그걸 도망가면 어떡해?!”
“앗, 그쪽 막아!”
우다다다다.
모여 있는 선원들을 헤치고 지나가는데, 다들 어디에 정신이 팔렸는지 선장인 나를 보고도 얼렁뚱땅 고개만 까딱거린다.
“리아, 이 멍청아!”
빠직.
진짜로 머리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내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는 ‘빠직’인 모양이다.
우르타 이 자식, 선원들 앞에서 선장 이름을 막 불러제껴?
심지어 멍청아아아?
“포! 술! 장!”
“으아앗?! 서, 선장님?!”
내가 소리를 지르자 쪼그려 앉아 뭔가에 정신이 팔려있던 우르타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모여 있던 선원들은 ‘앗, 뜨거라!’하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그사이에 회색의 뭔가가 번개 같은 속도로 내 다리 사이를 지나쳐 사라졌다.
“우아악! 씨발! 뭐, 뭐야?!”
깜짝 놀라 옆으로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니, 저만치 사라지는 팔뚝만 한 쥐새끼 한 마리가 보였다.
저 쥐새끼는 아까운 쉽비스킷이랑 염장 고기를 얼마나 처먹은 거야?!
그보다 쥐새끼를 둘러싸고 다들 뭐하고 있었…?
“애옹!”
다시 고개를 돌려 우르타가 있는 방향을 보니, 우르타의 발치에 우아하게 그루밍을 하고 있는 고양이, ‘리아’가 보였다.
아까 우르타가 했던 말이 나에게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묘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뭐하냐?”
“아아니, 그러니까 우리 리아가 이제 쥐도 잡고 해야 하니까….”
한숨이 나온다.
원래 고양이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
작아도 맹수란 말이다.
맹수의 미덕은 모름지기 배부를 때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다.
열심히 사냥하는 맹수라니, 생태계가 다 망가질 소리잖아.
그런데 사람처럼 삼시세끼를 배불리 처먹는 새끼고양이가 처음 보는, 그것도 자기랑 덩치가 비슷한 생물(쥐)을 사냥할 리가 있겠어?
“그냥 굶겨. 배고프면 알아서 사냥하겠지!”
그런지 아닌지 나도 잘 몰라.
원래 사냥은 어미한테 배워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쟤, 쥐를 먹어본 적은 있나?
매일 선원들이 낚시하다가 잡은 잡어 같은 거나 먹는 것 같던데.
“하지만 배가 고프다고 자꾸 우는 걸 …요?”
“그러지 말고 그냥 조리장에게 맡겨. 너 고양이 키워본 적도 없잖아?”
“안돼! 우리도 뺏어가고! 넬도 뺏어가고! 이제 리아까지 뺏어가려고! 요!”
말을 말자.
열성적인 캣맘 나셨네, 아주.
“견시 보고! 좌현 290도 선박 발견, 거리 15,000!”
갑자기 들리는 견시수의 목소리에 나는 우르타와 고양이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이쪽으로 항로가 있었나?
좌현이면 대양 쪽인데?
메인 마스트 아래까지 걸어간 나는 위를 보고 소리쳤다.
“견시! 선박 구분 가능해?”
“아, 이 거리에서 그걸 어떻… 헉! 선장님?”
“어, 선장이다.”
“아직 정확하게 파악은 되지 않습니다! 마스트는 세 개입니다!”
3마스트면 상당히 큰 배이거나 쾌속선인데?
오트라스 호도 원래 3마스트였으나 내가 개장하면서 마스트 하나를 날려버려서 지금은 2마스트다.
쾌속선이라면 뭐, 주요 항로가 아니어도 돌아다닐 법하지. 방향을 보아하니 시논 섬에서 일레드 왕국으로 향하는 연락선일 수도 있겠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나는 선교를 향해 소리쳤다.
“선교! 상대 진행 방향 봐서 사고 안 나게 조심해!”
“알겠습니다, 선장님!”
선교를 지휘하던 오펜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기동에 제한이 심하고 배가 많은 근해나 항구 근처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오펜 혼자서도 잘 할 거다.
리아를 안고 내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사라지는 우르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뒷목이 당기는 것 같아서 다시 선장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냥 한 잔 마시고 잠깐 눈이나 붙여야지.
“견시 보고! 좌현 290도 선단 발견, 두 척입니다!”
뭐야, 한 척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대충 시논 섬에서 일레드로 향하는 상선이거나 일레드 왕국 군함일 텐데.
하여간 일레드 왕국 놈들, 도대체 시논 섬에 꽁꽁 숨겨놓은 꿍꿍이가 뭘까?
나는 생각을 바꿔 선교로 향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바람직한 선장의 자세다.
내가 선교에 올라서자 느슨하게 타륜을 잡고 있던 조타수가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꼿꼿이 세웠다.
“조타수.”
“네! 선장님!”
“편하지? 오펜 항해사가 아주 만만한가 봐?”
“아, 아닙니다!”
“침로 보고.”
“혀, 현재 침로, 340도입니다!”
나는 선교에 비치된 나침반을 확인한 후 서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340도 맞아? 나침반에는 320도로 나오는데?”
“죄송합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안절부절못하는 오펜을 보았다.
“오펜 삼등항해사. 계속 이런 식으로 선교 맡은 거야? 5도, 10도도 아니고 무려 20도나 틀어졌잖아! 정신 안 차려?!”
“죄, 죄송합니다, 선장님.”
나는 다시 조타수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선교에서 당직 항해사를 무시하는 것은 선장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조타수, 저녁에 채찍 5대.”
채찍이라는 말에 조타수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오펜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하지만 이건 오펜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
선교를 맡은 항해사가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라서야 되겠나?
현재 위치를 특정할 GPS도 없고 주변에 지표로 삼을 지형도 없는 바다에서 말이다.
“오펜 삼등항해사는 오늘 야간 전체 당직, 5일간 감봉이다.”
“네, 선장님. 죄송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여기에서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겠지.
나는 조타수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조타수, 우로 15도, 현 위치를 다시 파악하고 진행한다. 육지가 보일 때까지 045도 유지해.”
“넷!”
“오펜 항해사는 견시수에게 전달해. 후방의 리버티에게 ‘현 위치 파악 불가, 오트라스를 따를 것.’, 신호 보내.”
“네, 선장님!”
오펜이 선교에서 뛰어 내려가고 잠시 후, 견시수의 목소리가 다시 고막을 때렸다.
저 자식은 신호 보내라니까 무슨….
“견시 보고! 좌현 290, 아니, 280도 선단, 총 네 척입니다! 아앗, 총 다섯 척입니다!”
뭐가 그리 많아?
나는 견시수에게 소리쳤다.
“견시수! 마스트가 몇 개야? 제대로 본 거 맞아?!”
수를 세는지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견시수가 소리쳤다.
“3마스트 한 척, 2마스트 세 척, 1마스트…? 어, 음, 1마스트 한 척입니다.”
마스트 한 개짜리 소형 선박이 이런 먼바다에 왜 나와 있어?
사고가 나서 마스트가 부러졌나?
아니지, 거리가 있으니까 단지 마스트에 문제가 있어서 돛을 걸지 못했다면 안 보일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엄청 대선단이잖아?
“견시수, 혹시 군함으로 보이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지구처럼 군함이라고 회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것도 아니고, 흐린 망원경으로 멀리서 봐서는 구분이 안 될 수도 있겠다.
견시수용 망원경을 좀 더 좋은 것으로 바꿔줘야 하나?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는 견시수용 망원경은 고장도 자주 난다.
그렇지 않아도 항해 용품은 죄다 비싼데, 괜히 고급 망원경을 보급했다가는 내 돈이 먼저 바닥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