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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45화 (246/420)

245화. 기울어진 저울

어느새 선교에 사람이 가득 찼다.

부선장님을 비롯해서 일등항해사 그레이그와 삼등항해사 크리스티앙은 물론이고 갑판장 네이선과 포술장 우르타까지 선교에 올라오니 시큼한 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일등항해사. 거리는?”

“현재 4,500 정도입니다. 점점 가까워집니다.”

“마스트 하나짜리는 갤리선 맞지?”

“네….”

그냥 갤리선도 아니고 700톤은 너끈하게 넘을 것 같은 대형 갤리선이다.

돛 하나로는 속도가 나오지 않아서인지 마스트 세 개짜리 배가 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레드 왕국 상선임을 표시하는 국적기를 내걸고 있지만, 저게 어딜 봐서 상선단이야?

누가 봐도 해적이구만.

여기는 지나다니는 배도 별로 없는데 뭘 주워 먹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난리인지, 원.

“우리를 공격할까?”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도 안다.

그래도 사람이 가끔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도 있잖아.

“선장님, 지금이라도 화물을 파기하시지요. 두 시간 정도만 더 가면 일레드 해군의 경계 구역에 진입합니다.”

크리스티앙이 불안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런데 크리스티앙, 미안한데 그게 좀 힘들 듯.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는 오펜을 힐끗 보았다.

원래 340도 진행 중이었어야 할 배가 320도로 진행 중이었다.

일레드 왕국이 있는 육지는 오른쪽에 있으니, 원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보다 육지에서 더 멀리 떨어진 셈이다.

그러니 앞으로 두 시간 정도만 버티면 일레드 해군이 짠! 하고 나타날지, 세 시간을 가도 망망대해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게다가 일레드 왕국의 해군이 나타나도 문제인 게, 지금 오른쪽으로 계속 가면 에쉬노르 항구가 나온다.

그리고 아센 항구에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에쉬노르 항구에서는 우리가 비공식적으로 수배되어 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이거야말로 똥 맛 된장이냐, 된장 맛 똥이냐를 고르는 수준이 아닌가.

…….

그래도 똥보다는 된장이 낫지 않겠어?

“총원, 전투 배치. 리버티 호는 이탈하라고 하고, 피오렐도 전투 배치시켜. 어떻게든 한 놈만 조지면 나머지는 튀겠지, 뭐.”

나는 일부러 쾌활하게 희망이 담긴 사족을 붙였다.

승산? 내가 언제 그딴 거 신경 쓰면서 싸웠어?

그래도 최근 2년 사이에 겪었던 지랄 맞은 전력비보다는 지금이 좀 낫지 않을까 싶다.

보아하니 저쪽도 한 척은 수송선, 3마스트 선박은 쾌속선이다.

실제 전력은 3.5척쯤 되는 거다.

우리는 2척이니까, 전력 차가 2배도 되지 않는다.

저쪽에 변수로 대형 갤리선이 있기는 한데, 그건 일단 생각하지 말자.

…망할, 저 정도 크기면 해적 놈들이 얼마나 타고 있을까? 200명? 300명?

갤리선은 흘수가 낮은 편이고 노를 젓는 공간이 필요하므로 선박 내부에 대포를 보호할 수 있는 포갑판을 만들기 어렵다.

그렇다면 포를 외부에 노출된 주갑판에 배치해야 한다는 뜻인데, 주갑판에는 여러 가지 구조물이 놓이므로 많은 포를 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노를 저어야 할 인력까지 필요하니, 결국 필연적으로 갤리선 자체가 포격전보다는 백병전에 특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정도 크기의 갤리선이면 노를 젓는 인원을 전력에서 제외한다고 쳐도 순수 전투원만 100명이 넘을 것은 확실하다.

“부선장님, 피난민들 모두 귀빈실에, 부족하면 금고도 사용해서 격리해주세요. 민간인은 어차피 전력에 도움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선장실과 귀빈실, 금고 등은 선미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위치한다.

배가 나포되거나 침몰하면 그들도 별수 없겠지만, 적어도 전투 중에 부상이나 사망자가 나오는 것은 피하고 싶다.

***

여기저기에 지시를 내리고 방향을 돌릴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리버티 호의 기동이 이상했다.

“저거 왜 저래? 이탈하라니까 지금 뭐 하는….”

그때 비명 같은 견시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리버티 호로부터 신호! 명령에 따를 수 없음! 반복합니다, 리버티 호,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발드 선장! 이 미친 작자가?!

리버티 호는 대포는커녕 승조원의 수도 40명이 채 안 된다.

물론 지금은 피난민들 때문에 머릿수는 꽤 많지만, 피난민은 피난민이다.

배 위에서 싸울 줄 아는 이는 얼마나 되겠으며, 설혹 그런 이가 있다고 한들 지금 배를 지키려고 목숨 걸고 싸울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오펜! 좌현 전타! 적에게 돌입한다! 포술장, 당장 포갑판으로 내려가서 포격 준비하고, 좌측이건 우측이건 보이는 대로 다 쏴버려!”

“알겠습니다! 나만 믿어요, 선장!”

“크리스티앙, 해도실에서 무전기 가져와!”

“넷, 선장님!”

우리가 좌측으로 급하게 선수를 돌리자, 후미를 지키던 피오렐도 급히 우리를 따라 방향을 돌렸다.

리버티 호는 이미 우리보다 한 박자 빠르게 선수를 돌린 상황.

오트라스 - 리버티 - 피오렐 순으로 종대를 구성해서 도망치던 대형은 졸지에 리버티를 원탑으로 좌우 뒤쪽에 오트라스와 피오렐이 배치된 대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화물을 양껏 실었더니 속도가 제대로 붙지 않는다.

“돌격대장! 20일 치 식량과 무거운 자재 위주로 화물 파기 실시해! 당장!”

제기랄, 이제 이겨도 손해가 어마어마하다.

그래도 일단 이겨야 사람이라도 살리지 않겠나?

그때 손에 들고 있던 무전기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아인델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독! 들리십니까? 지금 상황이….”

“여기는 오트라스, 리버티 호가 이탈 명령을 무시하고 전투에 가담하려는 모양이다. 불필요한 화물은 파기하고 최대한 속도를 올려!”

“알겠습니다. 첫 목표는 어떤 녀석으로 할까요?”

나는 잠시 동안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다섯 척의 해적선을 노려보았다.

해적들이 원하는 것은 백병전일 터.

반대로 우리는 최대한 포격전을 오래 끌어야만 한다.

한 척이라도 접현을 허용하면 기동력을 잃고 다른 배들에게 햄버거 패티처럼 끼여 압사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일단 적의 기동력을 먼저 제압하는 것이 옳겠지.

“1번 타겟은 기동성이 좋은 3마스트 해적선, 2번 타겟은 갤리선이다. 최대한 빨리 3마스트 선박의 기동성을 뺏거나 전투에서 이탈시켜야 해.”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전기는 계속 켜 두도록.”

“네, 제독.”

그 순간 견시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전면 선단이 졸리로저를 올렸습니다!”

견시수도 대충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딱히 놀람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 외침은 거의 비명처럼 들려왔다.

“으아아악! 저, 전면 해적선단, 라프나의 해적선단입니다!”

지옥에나 떨어진 라프나!

결국 네놈이 내 발목을 잡는구나!

나는 망원경을 들어 놈들의 깃발을 확인했다.

검은색 바탕의 해골 문양, 흔한 해적들의 졸리로저다.

하지만 갤리선에 올라간 깃발은 조금 달랐는데, 검은 바탕에 두 자루의 도끼와 교차된 깃발이었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항구의 술집에서 자주 들었던 ‘외날의 라프나’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

콰과과과광!

배가 휘청하며 거대한 폭음이 고막을 때렸다.

이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오트라스의 좌현에서 짙은 포연이 피어올랐다.

이미 갤리선을 분리한 3마스트 해적선이 우리의 포격 사거리에서 알짱거리며 선미 쪽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우르타가 포를 쏴버린 것이다.

잠시 후 해적선의 주위에 자욱한 물기둥이 치솟았지만, 안타깝게도 명중탄은 없었다.

“조타수, 좌로 5도, 아니, 비켜. 내가 직접 하겠다.”

해전에서의 전술 기동은 항해술에 능숙하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나라고 해서 딱히 경험이 많거나 뛰어나지 않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고 사정이 더 나은 것도 아니고, 선장이자 선단장인 내가 지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빠른 판단과 순발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눈치를 볼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니 내가 타륜을 잡는 것이 제일 낫….

“선장님, 제가 타륜을 잡겠습니다.”

“부선장님?”

“허허, 제가 젊었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바로 타륜을 부선장님에게 넘겼다.

붉은모래 해적단에 있으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의 해전을 겪었을 부선장님이다.

자신 있게 나서는 것을 보면 타륜을 잡아본 적이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확실히 나보다는 나을 거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우르타가 포를 제대로 쏠 수 있게 부탁해요.”

“걱정 마십시오.”

부선장님이 양손으로 타륜을 잡았다.

어? 양손? 왼손은 거의 못쓰시는 것 아니었나?

하지만 내 의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전방에서 포성이 들린 것이다.

“뭐야?!”

“340도 방향 갤리선에서 포를 쐈습니다!”

누군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오트라스의 우현 50m 정도 지점에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았다.

“미친! 선수포로 얼마나 큰 구경의 대포를 설치한 거야?!”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대포 중에는 나름 중포(重砲)에 해당하는 오트라스의 현측포보다 구경이 더 큰 것 같다.

오트라스의 장갑이 상선치고 제법 두껍다고 하지만, 저 정도의 구경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다.

하지만 고작 한 문, 재수가 어지간히 없지 않은 이상 맞지는 않겠지.

저놈들도 아마 협박용으로나 쓰지, 정말 맞기를 바라고 쏘지는 않을 것 같고.

나는 시야를 넓혀 전황을 살폈다.

적들과 너무 거리가 가까워지는 바람에 급히 좌측으로 침로를 변경한 피오렐은 우리와 거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 중이었다.

이왕이면 함께 기동하면 좋겠지만, 압도적인 적의 수와 백병전을 피해야만 하는 제한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리버티는 놈들의 대형 안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저렇게 가다가는 분명히 한 놈에게 진로가 막히고 접현에 걸리고 말 텐데….

콰과과과광!

포갑판에서 다시 포성이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크리스티앙의 함성이 터졌다.

“명중! 명중입니다!”

우르타 이노무시키! 믿고 있었다고!

고작 두 번째 포격 만에 최대 유효 사거리에 겨우 들어온 표적을 명중시키다니, 이 정도면 신이 내린 재능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잖아?!

급히 망원경을 들어 해적선을 살펴보니 피해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주갑판 위에서 해적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놀라기는 한 모양이다.

그때 배가 급하게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부선장님을 바라보자 그가 외쳤다.

“전면의 갤리선이 너무 접근했습니다. 회피기동에 들어갑니다.”

정신을 차리고 정면을 보니 엄청나게 가까워진 갤리선의 선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선수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거포가 불을 뿜는 것도.

“포격 대비! 엎드려!”

내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급히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포탄은 미즌 마스트에 달린 주 돛(러그 세일)을 찢고 배 뒤로 날아가 버렸다.

급히 고개를 들어 미즌 마스트를 확인하니 애처롭게 펄럭거리는 돛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심각한 손상은 아니지만, 분명히 앞으로는 속도에서 손해를 보게 될 터.

무의식중에 입술을 깨문 나는 무전기를 들었다.

“피오렐! 피오렐, 들리나?”

잠시 후, 바우어 항해사의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 바우어, 치이이익, 바우어입니다.”

“바우어 항해사, 피오렐 상황 보고.”

“치이이익, …중입니다. 현재 방위 으아… 치이이익….”

제기랄, 배터리가 좀 닳더라도 간부들은 무전기 사용 연습을 좀 시킬 걸 그랬나?

일단 바우어 항해사가 전투 지휘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되는 만큼, 아인델프는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망원경으로 피오렐을 살펴보니 해적선 두 척에게 진로가 막히지 않으려고 거의 온몸 비틀기 수준의 기동을 하며 포를 쏘아대는 모습이 보였다.

저 둘 중에 한 척은 수송 용도인 듯 흘수선이 다른 배들과 달랐지만, 그래도 진로를 막는 정도야 할 수 있다.

잠깐, 이쪽에 둘, 저기에 둘, 그럼 나머지 하나는?

시야가 좁은 망원경을 내리고 리버티가 있던 곳을 보니, 진로를 가로막으려는 해적선을 피해 방향을 돌리고 있는 리버티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체급은 비슷해 보이는데, 포가 없는 리버티 호는 해적선을 견제할 수단도 없고 백병전을 벌일 상황도 아니었다.

애초에 리버티 호는 전투가 벌어질 경우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선단을 구성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 자살이라도 하듯이 해적선단을 향해 돌진한 의도가 뭐였는지는 몰라도, 일단 해적선 한 척을 담당해 주는 셈이니 의외로 제 몫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다행스럽게도 아슬아슬하게 당장 나포당할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이쪽 상황에 집중해야겠다.

“오펜! 선미로 가서 해적선 거리 확인해!”

“넵!”

오펜이 선교에서 뛰어나가고, 나는 선교로 올라온 네이선에게 물었다.

“선원들 무장이랑 바리케이트는?”

“무장 완료했고 바리케이트도 다 쌓았습니다.”

“너는?”

“…괜찮습니다.”

1초도 되지 않는 머뭇거림,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네이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마 평범한 해적들 정도는 지금 상태로도 무쌍을 찍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라프나’라면….

그래도 행크와 함께한다면 의외로 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네이선에게 지시를 내렸다.

“갑판장은 지금부터 갑판 상황 책임지고, 적이 접근하면 임의로 전투 개시해. 그리고 돌격대장은 선교에서 대기시키고.”

“네, 선장님.”

네이선이 내려가고 거의 비슷하게 오펜이 뛰어 올라왔다.

“선미쪽 해적선 현재 거리 300입니다, 포격을 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돌아서 우현 후미로 접근하려는 것 같습니다.”

오펜이 보고를 하는 동안 이제 정면에서 좌현으로 위치가 바뀐 갤리선을 확인했다.

바람이 좋지 않다.

아직 갤리선에 제대로 속도가 붙지 않았지만, 노를 젓기 시작했으니 조만간 기동력에서 우리를 압도할 것이다.

그리고 선원들이 지치기 전에 어떻게든 우리에게 달라붙으려고 하겠지.

“부선장님, 우현 전타로 110도까지 돌리죠.”

“110도, 알겠습니다.”

좌측으로 돌아서 풍상을 잡는 것이 가장 좋지만, 당장 좌측으로 돌리면 풍상을 잡으려다 갤리선에게 잡힐 판이니 어쩔 수 없었다.

선회 중의 포격 정확도는 애처로울 정도로 떨어지기에, 포격 기회를 생각하면 직선으로 항해해야 좋은데 그런 기회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시 한번 포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우현 쪽이다.

우르타, 이번에도 나이스 샷이다!

착탄지점은 우현으로 돌아 들어오던 3마스트 해적선의 한참 앞쪽이었지만, 위협이 되었는지 급하게 선수를 바깥쪽으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우리가 빠져나갈 공간이 조금 더 여유 있게 되었다.

해적선들이 서로 부지런히 수기 신호를 보내는 것이 포착되었지만, 당연히 해석은 불가능했다.

모든 배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신호 체계가 있기는 한데, 해적 선단이나 군함들은 그들 고유의 신호 체계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우리 편이 전하는 메시지를 굳이 적에게까지 알게 하고 싶은 바보는 없으니까.

갤리선과 3마스트 해적선의 위치를 계속 확인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옆에서 망원경을 눈에서 떼지 않던 그레이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선장님! 피오렐이 놈들을 명중시켰습니다!”

“어?”

반가운 소식에 피오렐 쪽을 확인한 나는 그레이그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몇 발을 명중시켰는지 해적선 한 척의 현측이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파손된 것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전투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고, 피오렐은 더 이상 빠져나갈 공간이 없어 보였다.

피오렐은 상대가 군함이 아닌 이상 1:1로 포격전을 벌일 경우 상당히 강력할 것이다.

하지만 백병전 전력은 솔직히….

해적들보다 선원들의 머릿수가 부족한 것은 거의 확실했고, 저쪽에는 네이선도 없지 않은가.

각개격파(各個擊破).

내가 가장 원치 않았던 그림이 완성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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