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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49화 (250/420)

249화. 산 사람은, 그래, 살아남은 사람은

언제 잠이 들었던 것일까?

나는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울어 재꼈는지 눈이 제대로 안 떠진다.

이렇게 울어본 게 얼마 만일까?

그 아이를 보낸 이후로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내 마지막 가족이었던 아이, 일리나.

“부선장님….”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나온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목소리가 죄다 갈라져서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배를 탄 이후로 진짜 마음을 준 사람이 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으으음….”

요상한 소리와 함께 발치에서 뭔가 꼬물거려서 시선을 돌리니, 침대에 엎드려서 불편하게 자고 있는 우르타의 모습이 보였다.

이놈도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데다가 입가에는 허옇게 침이 말라붙어 있다.

…설마 이불에 보이는 저 얼룩이 침은 아니겠지?

“…야.”

“…….”

“우르타!”

벌떡!

우당탕탕탕!

“으어어어….”

뭔가 부서지는 큰 소리에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리니, 엎어진 의자와 바닥을 뒹굴고 있는 네이선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일어설 생각도 못 하고 좀비 같은 신음만 흘리는 중이다.

“리안, 괜찮아?!”

“안 괜찮아. 이불에 침이 잔뜩 묻었잖아!”

“어? 아아니! 침 아닌데!?”

입 주변이라도 좀 닦고 거짓말을 해라.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대충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둘 다 나가. 혼자 있고 싶다.”

만사가 귀찮아서 이 녀석들과 말싸움할 의욕도 안 생긴다.

“어? 그, 그럴까? 네이선, 나가자. 리안이, 응? 네이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선 우르타가 네이선에게 말을 하는데, 자리에서 일어선 네이선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리안. 음식이라도 좀 가져다줄까?”

“생각 없어. 그냥 좀 나가.”

“그, 그래! 네이선, 나가자. 리안이 혼자 있고 싶대.”

우르타가 네이선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지나도 네이선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쫌 나가라….”

짜악!

나는 네이선에게 짜증을 내다 말고 왼쪽 뺨에 격렬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밝아지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입 안이 찝찔한 것을 보니 제대로 터진 모양이다.

“으아아아! 네, 네, 네, 네… 이선! 미쳤어?!”

거의 비명에 가까운 우르타의 말이 들렸다.

순간 욱하고 분노가 치솟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발작하는 것을 막았다.

일단 이길 수도 없고, 네이선이 이유 없이 이런 짓을 할 녀석이 아니니까.

“이유 똑바로 대야 할 거다. 아무리 친구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이성의 끈을 붙잡고 내가 씹어뱉듯이 말하자, 네이선이 냉정한 표정으로 묵직하게 대답했다.

“너만 아파? 너만 힘들어? 우리도 너만큼 힘들어. 그리고 우리는 아파해도 돼. 열흘이건 한 달이건 울고불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도 돼. 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갑.판.장. 님이 이 꼴을 보겠다고 스스로 나서셨을 것 같아?”

이 새끼가 진짜?!

고작 그딴 이유로, 겨우 일하라고 날 때렸어?

“씨발, 내가 뭐 어쨌는데! 그냥 좀 나가라고! 혼자 있겠다는 게 너한테 싸대기를 맞을 일이냐?!”

그래, 너희도 아프겠지.

그런데 너희가 아프다고 내 아픔이 줄어드는 건 아니잖아.

아프면 조금 쉬어도 되는 거잖아!

“혼자! 혼자혼자혼자! 언제까지 혼자서 있을 건데?!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충분히 울었잖아! 우리 살리겠다고 갑판장님이 희생한 거잖아! 도망친 해적 놈들이 다시 오면, 이번에는 내가 죽을까?! 어?! 나도 죽을 뻔했어! 갑판장님 아니었으면 나도 죽을 뻔했다고! 최소한 너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너는 갑판장님 목숨으로 살린 우리들을 책임져야지! 엄살 부리지 마. 어린 오펜도 자기 형을 잃은 다음 날부터 자기 몫은 했어. 그래도 혼자 있고 싶어?”

두 눈에 슬픔과 연민, 그리고 분노를 담은 채 열변을 토하던 네이선이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끼르르륵.

불쾌한 마찰음이 들리고 침대에 앉은 내 허벅지 위로 피가 엉겨 붙은 커틀라스가 떨어졌다.

“혼자 있고 싶다면, 죽여. 널 두고는 안 나갈 거니까.”

“네, 네이선!”

네이선이 천천히 자세를 낮추더니 그대로 침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내밀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떨어지지 않은 피딱지와 얼룩이 눈을 찌른다.

“으아, 으아, 너네 왜 그래애애… 리, 리안?!”

나는 천천히 네이선의 칼을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가득 차니 새삼스럽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 칼에 도대체 몇 명이 죽었을까?

이번에 내가 알던 사람이 몇 명이나 죽은 걸까?

언제쯤이면 내 사람을 잃지 않게 될까?

…….

적어도 이 칼은, 죽인 사람보다 살린 사람이 더 많을 거다.

그리고 갑판장님, 그래, 부선장은 무슨, 늘 갑판장님이었지.

갑판장님은 어제 최소한 200명의 목숨을 살렸다.

갑판장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을 내가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후우, 칼 좀 닦아 놓지. 이래서 또 쓰겠냐? 나가자.”

“어?”

울먹거리던 우르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고, 고개를 든 네이선이 희미하게 웃었다.

“일어나, 너 허벅지 다치지 않았냐?”

“아오, 터졌나 보다. 닥터한테 갔다 와야겠어.”

“미친놈아, 닭살 돋게 왜 무릎을 꿇고 난리야?”

“하하하….”

***

네이선을 닥터에게 보내고 우르타와 함께 선교에 오르자, 선교에 있던 그레이그와 크리스티앙, 오펜이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선장님!”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선장님….”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 뭘. 그보다 오펜 항해사는 괜찮나?”

“네! 상처만 아물면 움직이는 데 지장 없을 것이랍니다!”

“좋아, 일등항해사. 출항 준비는?”

“곧 완료됩니다. 침로는 어떻게 잡을까요?”

“현 위치는 파악했고?”

“네, 어젯밤에 별자리를 보고 확인했습니다.”

“일단 침로는 정북 방향, 세부 조정은 해도를 확인하고 진행하지. 피오렐과 리버티에도 전달해.”

“넷!”

크리스티앙이 대답과 동시에 선교에서 뛰어 내려갔고, 해도실로 향하는 나에게 그레이그가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

“선장님, 출항 전에 나포한 선박과 포로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아, 그렇지. 흠…. 나포한 선박으로 가보자. 포로가 몇 명이라고?”

“오늘 아침에 확인해 보니 두 명이 죽고 남은 인원은 21명입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고민을 했다.

해적은 죽이는 것인 관례고, 그편이 뒤탈도 없고 깔끔하다.

하지만 섬 개척에는 적지 않은 노동력이 필요하고, 젊은 남자로만 구성되니 해적들은 꽤 입맛이 당기는 노동력이었다.

특히나 피난민 중에 적지 않은 남자들이 희생된 지금은 더욱 말이지.

물론 위험성이 너무 높아서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오트라스, 피오렐, 리버티 호에 포위당한 해적선의 선창으로 가자, 피곤한 표정으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두 선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별일 없지?”

“네, 제독. 아침에 시체를 빼낸 이후로는 조용합니다.”

“열어봐.”

“네.”

해치가 들리고 나는 미리 준비한 랜턴의 전원을 켰다.

온갖 오물과 썩은 냄새 사이에 옅은 혈향이 함께 올라왔다.

그리고 처참한 포로들의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팔다리가 묶인 상태로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는 해적들의 모습은, 인간의 존엄성에 똥물을 뿌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일등항해사, 어떻게 생각해?”

“네? 뭘 말입니까?”

“저놈들, 다 죽여야 할까?”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그레이그가 반문했다.

“섬에 말이야, 이런저런 일을 하려면 힘 좋은 남자들이 필요하잖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레이그가 한 박자 늦게 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서, 설마 저놈들을 살려두자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경악하는 표정을 보니 내가 정신이 나갔는지 의심하는 것 같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어디까지나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한 결과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런데 죽는 것보다는 살아서 계속 고통받는 것이 저들에게 더 큰 벌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선장님! 정말, 정말 위험한 생각입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려는 곳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으음… 안 됩니다. 섬에서 탈출이야 못하겠지만, 함께 있는 피난민들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외부의 도움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있으니 특별히 실수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 무엇보다 저놈들은 우리 선원들을 죽인 개잡종들이란 말입니다! 무조건 죽여야지요!”

***

두 선장과 그레이그, 그리고 허비 씨와 아히르 씨는 한참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선장들과 그레이그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지만, 결국 포로들을 관리해야 할 허비 씨의 의사가 가장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제독 말씀대로 최소한의 준비만 되면 관리가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노동력은 매우 중요하죠.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에 너무… 크흠.”

허비 씨의 말에 모두들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 죽은 피난민의 수는 리버티 호 3명, 피오렐 호 16명, 총 19명이다.

그리고 사망자는 대부분 청장년층 남자들이었다.

최종적으로 배에 태운 97명의 피난민 중 청장년 여자 41명, 10세 미만의 아이 17명, 60세 이상 노인 24명을 빼면 남은 인원은 고작 15명, 피난민 무리에 남은 청장년 남자의 수다.

막상 개척촌을 꾸려야 할 허비 씨의 입장에서는 고양이 손까지 아쉬울 만도 하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에도 외부의 도움이 없다면 현실적으로 내부에서 그들이 탈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관리만 똑바로 한다면 말이야.”

사실 내 주장은 노예를 만들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나는 어차피 모든 인간의 가치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죗값은 무겁게 받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지.

물론 놈들에게도 희망은 줄 거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10년간 성실하게 일하면 우리 배의 선원으로 받아 주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과연 안전장치 하나 없는 건설 현장에서 부실한 식사와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10년을 버틸 수 있을까?

“그럼 두 분은 피난민들에게 결정 사실을 알려주시고 혹시라도 반대의견이 심하면 빨리 알려주세요. 굳이 피난민분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저놈들을 살리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제독님.”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가고, 우리는 선박 처분 문제로 주제를 바꿨다.

“솔직히 버리기는 너무 아깝잖아?”

“그렇기는 합니다만….”

“현실적으로 네 척을 운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리버티 호를 비우고, 피오렐로 리버티 호를 예항하자.”

“네?”

“흐음,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

새로 나포한 해적선으로 자리를 옮긴 발드 선장, 슬레어 항해사, 왓킨 갑판장은 부지런히 선원들을 재촉했다.

리버티보다 대형선이었기 때문에 인원이 조금 더 필요한 부분은 오트라스와 피오렐의 인원을 재편성하면서 보충해 주었고, 제대로 뱃일을 해보고 싶다는 피난민 다섯 명을 새로 충원했다.

드디어 모든 배에서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가 올랐고, 우리는 뻘 속에 박혀있는 닻을 끌어올리고 돛을 올렸다.

대형은 오트라스를 선두로 피오렐이 리버티를 끌고 중간에 섰으며, 후열을 나포한 해적선이 맡았다.

“콘베르테로 하자.”

“네?”

뜬금없는 내 말에 크리스티앙이 맹한 소리로 되물었다.

“새 배 말이야. 이름을 콘베르테로 하려고.”

“아, 나포한 선박 말씀이시군요.”

“전향자라니, 취향하고는.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어? 닥터?”

“상처 좀 봅시다.”

“네. 혹시 뭐 더 나빠진 사람은 없어요?”

“죽을 사람은 다 죽었고, 남은 사람들은 곧 털고 일어날 겁니다. 이번에는 중상자가 없군요.”

닥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중상자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응급처치가 힘들 정도로 전투가 길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미한 부상자만 두 명 생긴 리버티 호를 제외하고 오트라스와 피오렐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 만큼 상당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닥터를 반으로 자를 수 없어서 일단 모두 오트라스에 태웠다.

붕대를 갈아주며 상처를 확인하는 닥터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아히르라는 의사 양반은 같이 일해보니까 어때요?”

“아히르 씨 말인가? 그 사람 의사가 아닌데?”

“엑?”

“자네에게는 이야기했다던데. 약초상이라고.”

내가 본 웬만한 의사보다 낫던데?

이거야 원, 제약회사 사장이 의사나 약사보다 의술에 뛰어난 꼴이잖아?

의사 자격증이 있는 세상도 아니라서 별 상관은 없지만….

이런 와중에도 무심결에 자꾸 시선이 가는 곳이 있다.

이제는 텅 비어있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걸걸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당분간은 생각이 날 것이다.

당분간은 아프겠지.

그런데 그렇게 점점 괜찮아질 거야.

일리나를 보내고 아파하던 내 옆에 부선장… 아니, 갑판장님이 있었던 것처럼, 갑판장님을 보낸 내 옆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어 줄 테니까.

왠지 오늘따라 닥터의 손이 따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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