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약속된 선물
“일단 뛰어!”
나는 뛰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지금 상황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애초에 아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는 이곳을 다른 자가 찾아왔다는 것부터 비약이 심하다.
그리고 거대 선박은 분명히 우리의 배들보다 더 육지에 가깝게 정박해있다.
저 위치에 있으려면 밤새 네 척이나 되는 우리 쪽 선박을 뚫고 지나왔다는 말이 되는데, 배에 남은 사람들이 모두 장님,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에야 말이 안 되잖아.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가 질리는 크기였다.
일단 중형과 대형 선박 중간의 어디쯤에 속한 오트라스 호보다 전장이 두 배쯤 길다.
네 개에 이르는 거대한 마스트는 그 높이를 보면 돛이 몇 장이나 걸릴지 아득해질 지경이다.
최고의 압권은 현측의 포구 수.
네이선이 단정을 푸는 동안 미확인 선박을 구경하던 우르타가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대포가 몇 개야…? 셀 수도 없네.”
우르타의 말대로 현측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포구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무려 2열로 배치된 어마어마한 수는 그 자체로 이미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저런 어마어마한 전함이 지금 존재할 수 있어?
일레드 왕국의 최신예 함이라는 엘베도라급 전함도 저 옆에 붙여 놓으면 초라해 보일 지경인데?
네이선의 재촉에 단정에 오르면서도 나는 넋이 나간 듯 그 배를 바라보았다.
모습만으로도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저런 배를 알기는 한다.
“전열함….”
“어?”
“아는 배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독백에 네이선과 우르타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리 배 네 척이 최상의 상태로 덤빈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은 압박감에 신경이 날카로운 모양이다.
‘…그대를 위한 마지막 배려가 준비되어있으니, 다시 돌아오는 날 그분의 호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득 생각나는 말이었다.
아마 저번에 만났을 때 헤어지며 했던 말인 것 같은데….
배려라는 게 저것이었나?
“저 배로 가자.”
“위험해.”
내 요청을 노를 젓던 네이선이 딱 잘라 거절했다.
“저거 내 선물이야.”
“…….”
“리안, 우리 몰래 술 마셨어?”
두 사람의 눈빛이 매우 불손하다.
나는 선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만만한 우르타의 머리통을 한 번 쥐어박았다.
“왜 나만 때려!”
“어허, 눈빛이 불손하다!”
“치잇!”
“그런데 무슨 말이야? 선물이라니?”
네이선이 냉정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에 페리아 족 마을에 갔을 때 신전에 간 것은 이야기했지?”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그때 받기로 했던 거야.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지만.”
약간의 거짓이 섞이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나를 믿기로 한 모양이다.
“그럼 위험하지 않아?”
“당연하지. 안에 아무도 없을걸?”
***
“선장님이 왜….”
우리보다 조금 먼저 배 위에 올라가서 내 손을 잡아준 돌격대장 행크가 당황하며 물었다.
“이거 우리 꺼야.”
“네?!”
내 대답에 행크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에 모여 있는 돌격대원 7명도 마찬가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하고 지시를 내렸다.
“인원 절반으로 나눠서 돌격대장은 함수 방향, 갑판장은 함미 방향으로 돌면서 탐색해. 포술장은 날 따라오고.”
“선장님, 위험합니다. 행동하시려면 갑판장님과 함께….”
“돌격대장, 이 배에는 사람 없어. 딱 봐도 수백 명은 탈 것 같은 배에 이렇게 인적이 없을 수가 없잖아.”
“그렇기는 합니다만….”
말꼬리를 흐리던 행크는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속에 묻어둔 말을 꺼냈다.
“그, 전에 유령선 사건도 있고….”
“이렇게 맑은 날에?”
“으음….”
“괜찮으니까 명령대로 시행해. 어서.”
직속상관인 네이선에게 눈빛으로 지원 사격을 요청하던 행크는 네이선마저 어깨를 으쓱거리자 결국 내 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야 원, 갈수록 선원들에게 설명할 게 많아지는군.
행크와 네이선이 각자 무리를 이끌고 떠난 뒤, 나는 우르타를 데리고 함장실이 있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예감은 함장실에 가야만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여긴가 봐.”
“응. 누가 봐도 함장실이네.”
나는 가볍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누군가가 방금 전까지 사용한 것 같은 넓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회의용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종이가 있었다.
홀린 듯이 그 종이를 집어 들자 익숙하지만 낯선(표현이 이상한데, 진짜다)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뭐라고 쓰여 있어?”
“아무것도.”
“응? 어라? 지도네? 어디 지도지?”
내 어깨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종이를 보던 우르타의 말대로 그것은 지도였다.
그리고 이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 어디인지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폰테 섬 지도. 그런데 이 뒤의 섬은 뭐지?”
“어? 아, 잠깐만. 여기가 폰테 섬이야?”
우르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남서쪽의 작은 섬, 그리고 그 위에는 말굽 모양의 조금 더 큰 섬이 자리하고 있었다.
섬이, 한 개가 아니었다.
나는 얼른 지도를 접어 품에 넣으며 우르타를 보고 신신당부했다.
“이 지도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 절대! 누구에게도 하면 안돼!”
“네이선에게도?”
“네이선에게는 내가 말할 거야.”
“그럼 리아는?”
“내가 네이선에게 이야기한, 야!”
이미 내 손이 닿는 범위를 벗어나 히죽 웃고 있는 우르타 녀석.
“아아니, 리아도 입이 무거우니까 리아에게는 이야기해도 되잖아.”
“고양이한테 이야기를 뭣하러 해, 이 멍청아!”
***
“현측포는 양현에 2열로 15문, 17문씩 총 64문, 함수포 2문, 함미포 6문, 총 72문입니다. 그리고 구경이, 그러니까, 솔직히 이렇게 큰 대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선창에는 건설에 필요한 공구들과 철괴들이 있고, 쉽비스킷으로 보이는 식량도 꽤 많습니다.
네이선과 행크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사항은?”
“마치 방금 진수된 선박처럼 깨끗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모든 돛이 접힌 상태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오버테크놀로지 전함, 보고만 있어도 절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래봐야 어차피 큰 범선에 불과하니 다른 나라도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럴 리가.
그렇다면 왜 지구에서 처음부터 전열함을 만들지 않았겠어?
이 세상에 이 배를 똑같이 만들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거다.
한 가지 문제라면, 지금 내 역량으로는 이 ‘바다의 깡패’급의 배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대충 봐도 운용 인원만 400명쯤 될 것 같은데, 그 많은 인원을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당장 쓸 자재와 도구는 이미 많이 싣고 왔으니, 개척지 먼저 확정하고 이놈을 예항해야 할 것 같다.
“돌아가자. 지금 당장은 그 정도로 충분해.”
***
우리가 오트라스 호로 복귀하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미 오트라스에서 대기하던 두 선장은 물론 항해사들과 닥터까지 선박의 정체를 캐묻기 전에 내 돌발 행동을 걱정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 다행이지만, 앞으로는 제독이 직접 그런 일에 나서시는 것은 피해주셨으면 합니다.”
순종적이던 아인델프까지 정색을 하며 딱딱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왠지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별일 없었고, 지금 당장 저 녀석을 옮기기는 무리일 것 같아. 일단 거점을 마련하고 옮기도록 하자고. 어차피 우리밖에 없으니 저렇게 두어도 상관없을 거야.”
“하지만 제독, 그 원주민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없는 사이에 그들이 먼저 저 군함을 차지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 자들은 아니야. 애초에 바다로 나가는 것에 관심도 없으니까.”
“으음….”
발드 선장이 개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물러서고, 크리스티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장님, 이곳에 개척지를 만들려고 하신 것 아닙니까?”
“아아, 원주민들에게 더 괜찮은 곳을 추천받았어.”
사실은 지도를 보고 낙점한 곳이지만, 지도의 존재를 알릴 수는 없으니까.
***
준비를 마친 우리는 섬의 해안선을 따라 남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해서 커다란 만을 찾을 수 있었다.
“정말 좋은 곳입니다. 항구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 같군요.”
망원경으로 지형을 세세히 살펴본 그레이그가 또다시 감탄했다.
“그러니까 추천을 하지 않았겠어?”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그들을 너무 믿으셔도 안 됩니다.”
“우리가 이곳을 너무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일단 모두에게,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허락한 곳은 항구 건설 예정지와 그 근처라고 이야기를 해 두었다.
섬 전체를 다 허락했다고 하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하기도 했고, 괜히 탐사를 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페리아 족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페리아 족과 마주친다면, 예전의 외모라면 괴물이라고 난리가 날 테고, 지금은 지금 나름대로 난리가 날 거다.
오히려 지금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네.
그 정도로 변화한 그들의 외모는 치명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역 작업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각 선박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단정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해 질 녘이 되어서야 겨우 일을 마칠 수 있을 정도였다.
짐이나 겨우 옮겨 놨으니, 잠자리를 만드는 사치를 부리는 것도 어려운 일.
한쪽에 쌓인 짐은 예비 돛으로 꼼꼼하게 덮어 두었고, 사람들은 해변에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불을 마음대로 쓴 따듯한 음식)을 먹었다.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피난민들은 불안과 희망이 섞인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리안 선장님?”
“네? 제가 리안입니다만.”
나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아가씨의 부름에 대답했다.
처음 보는, 아… 그 아가씨구나.
“감사드려요. 이 말, 꼭 하고 싶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부족해서 큰 슬픔을 겪게 해드렸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흑… 죄송해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말을 하다 말고 투명한 눈물을 흘린 그녀는 빠르게 말을 마치고 뒤로 돌아 멀어졌다.
“그 여자네요. 노인의 손녀라고 했지요?”
그레이그의 말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족을 잃은 사람이 많네.”
“그 노인, 칼을 맞은 뒤 해적 한 놈을 끌어안은 채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한 사람 몫은 한 거죠.”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괜찮은데.”
“글쎄요…?”
***
다음 날부터 임시 거주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은 우습게도 사람이 살 집이 아니라, 가축이 살 축사였다.
장기간의 항해로 폐사한 가축도 몇 마리 있었고, 전체적으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배에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나 말도 가지고 왔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발드 선장의 말대로 소와 말은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가축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가격도 비싸지만, 그 덩치 때문에 배로 옮기는 것은 보통의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라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처럼 거의 한 달이나 걸리는 장거리 항해라면 아마 전문가가 최선을 다해서 돌봐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심지어 이놈들의 먹이와 물을 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니까.
이번에 가지고 온 양이나 염소처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녀석을 데리고 오면 조금 나으려나?
“임시 거주지 건설에는 얼마나 걸릴까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선원들의 손을 쓸 수 있으니까요.”
“선원들 반응은 어때요?”
“뭐, 싫다는 놈이 있겠습니까?”
발드 선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피난민, 아니, 정착민 중 청장년 여성은 41명, 그중에 무려 38명이 남편이 없거나 남편을 잃었다.
원주민이라지만 이종족인 페리아 족과 통혼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으니,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남편감은 같은 정착민이거나 우리 선원들밖에 없는 것이다.
알다시피 정착민 중 청장년 남자의 수는 매우 적었고, 나는 선원들에게 그녀들과의 결혼 혹은 연애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평생 창녀 엉덩이나 두들기다가 객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원들의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도 괜히 힘자랑을 하거나, 되지도 않는 수작질을 거는 선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 철저히 하죠. 정착민들은 무조건 우리 편이어야 하니까요. 아시죠?”
“물론입니다. 이전에 제독이 했던 것처럼 괜한 짓을 하면 변명의 여지 없이 사형이라고 했으니, 그런 미친 짓을 하는 놈은 없을 겁니다.”
“밤에는 선원들 모두 배로 철수시키고요.”
“그건 좀….”
시원하게 대답하던 발드 선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왜요?”
“적당히 한쪽에 몰아 두고 여럿이 나가지 못하게만 막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위험해 보이는데요.”
“으흠, 제독은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만, 원래 남녀관계라는 것이 낮보다는 밤에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슬슬 구겨지는 내 인상을 살피던 발드 선장이 재빨리 사족을 달았다.
“물론 상호 합의하에,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앞으로 열흘. 열흘 동안 모든 승조원은 배에서 잡니다. 그리고 열흘 안에 30명쯤 들어갈 수 있는 임시 숙소를 하나 건설하세요. 이후에는 숙소 규모에 맞춰서 돌아가며 육지에서 잘 수 있도록 허락하죠.”
“휴우, 알겠습니다.”
이 아저씨는 자기가 연애할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실망하는 건데?
터벅터벅 걷는 발드 선장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인다.
“발드 선장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어째 뒷모습이…?”
“몰라 나도. 시킨 일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발드 선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네이선이 보고를 시작했다.
“행크 돌격대장과 왓킨 갑판장에게 눈썰미 좋은 선원 둘을 붙여서 군락지를 찾게 했습니다. 근처에 있다면 오늘 안에 발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시간은 많으니까 너무 무리하게 시킬 필요 없어.”
바쁜 와중에 사람을 빼가면서 찾으라고 한 것은 침대의 내장재로 쓸 풀이다.
상품성 있는 목재를 만들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 풀은 그저 잘 베어서 말리기만 하면 되니 복귀할 때 빈 선창을 채울 화물로 적당했다.
후작이 희소성과 유용성을 잘 알고 있으니 제법 잘 팔릴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당장은 이 풀을 조달할 방법이 이렇게 무식하게 군락지를 찾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섬에서 자체적으로 풀을 재배하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