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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52화 (253/420)

252화.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바쁘지만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한 달쯤 지난 건가?

임시 거주지는 다 만들어졌고, 이제는 우리도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다.

“허허, 이게 다 제독님 덕분입니다.”

“아, 촌장님 오셨어요?”

슬레어 항해사의 부친인 허비 씨는 만장일치로 개척마을의 촌장이 되었다.

조만간 대장간을 만들고 혹시 광맥이 있는지 탐사도 할 예정이라고 했다.

“혹시 앞으로도 이주민들을 계속 데리고 오실 겁니까?”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요. 아마 다시 온다면 겨울이 지난 다음 봄이나 될 것 같은데, 식량은 괜찮을까요?”

“그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제독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봄이면 농사를 시작할 테고, 정 급하면 사냥이나 채집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을 수도 있으니까요.”

“다음에는 소나 말도 가능하면 데리고 올게요.”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마을이 커지는 것은 나도 환영이다.

다시 살이 오르고 있는 가축들은 죄다 내 것이고, 마을은 사실상 내 영지나 다름이 없으니까.

물론 어느 정도 개척촌이 궤도에 오르면 후작의 마수가 뻗치기는 하겠지.

그 전에 뭔가 획기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할 텐데 말이야.

“죄수들은 어때요?”

“제독님 말대로 개별 공간에 재우고 나서는 한풀 꺾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음식을 너무 많이 주지 마세요. 먹을 가치도 없는 것들이니.”

“허허허….”

항복한 포로는 이제 17명이 남았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녀석이 한 명, 병이나 사고로 죽은 녀석이 세 명이다.

그나마 탈출 시도는 땅굴을 파다가 발각되어 주동자 한 명이 처형된 것이고, 그 이후로 감금 장소를 단체수용소가 아니라 개별 수용소로 바꿨더니 아예 시도 자체가 없어졌다.

금속 숟가락은커녕 손바닥보다 큰 돌조차 없는 공간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개인의 힘으로 탈출한다? 망상에 가깝다.

누군가의 부름에 허비 촌장이 떠나고, 잠시 후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닥터 롱베르가 다가왔다.

“이제 떠날 시간이군.”

“연구는 좀 진척이 있어요?”

“하하, 처음 보는 식물이 무려 30종이 넘어. 그중에는 저 식물도 있지.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뭘요?”

“그, 이름을 정말 내 이름으로 지어도 될지.”

“당연하죠. 제일 먼저 연구한 사람이 닥터잖아요.”

베르엘바, 침대의 내장재로 썼던 식물이자 지금 차곡차곡 배에 실리고 있는 식물의 이름이다.

닥터 롱베르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는데 그는 이것을 상당히 고마워했다.

앞으로 최고의 인기 교역품이 될 식물에 자기 이름을 붙여도 되겠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더라.

나는 뭐, 그런 데는 별로 욕심이 없어서.

한 가지 원하는 것이라면 새로 발견(?)된 북동쪽의 섬에 붙이고 싶은 이름은 있다.

에른스턴.

그리운 사람을 추억하기에 좋은 이름이잖아?

그나저나 이제 가야 하는데 이 녀석들은 왜 안 나타나는 거야?

페리아 족을 말하는 거다.

분명히 다시 방문해 달라고 했는데, 내가 거기가 어딘지 모르잖아.

페리아 족의 마을 위치는 지도에도 안 나와 있더라.

임시 거주지가 완성될 무렵, 밤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광장에 엄청난 양의 곡물을 갖다 놓기는 했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페리아 족이 주식으로 사용하는지 이전에 표류했을 때도 보았던 곡물의 정체는 한 피난민이 알고 있었다.

곡물의 이름은 ‘밀렛’, 일레드 왕국 북동부 일부에서나 먹는다는, 그 지역 외부 사람은 보기 힘든 곡물이었다.

수확량이 밀보다 적고 빵으로 만들기에도 적합하지 않지만, 곡물죽을 끓이기에는 좋다고 한다.

추위에 강하다고 하니, 위도가 꽤 높은 폰테 섬에서 재배하기 좋은 작물인 것 같다.

***

오늘도 정신없이 지휘하다가 피곤함을 못 이겨 잠이 들려는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들어 침대에서 다시 일어났다.

달라진 것은 없는데…?

“이제 떠나시나요?”

아오 씨! 심장 튀어나올 뻔했네.

제발 인기척 좀 하고 문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거냐?!

“기다리고 있기는 했는데, 꼭 이런 식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나는 어느새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서 있는 그, 아니, 그녀? 하여간 아름다운 페리아 족에게 불퉁거렸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이들의 등장 방식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나저나 이제 텔레파시 같은 거 안 쓰네?

말하는 것도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 같고.

“우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대답을 하며 사뿐사뿐 움직여 내 책상에 놓인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내일 이곳으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하얗고 얇은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을 확인한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겠어요. 그런데 혼자 가야 합니까?”

내 질문에 잠시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준비할 게 많기도 하네.

그러니까 혼자 오라는 말이겠지?

지고스(신) 님은 내게 전열함을 만들어 줄 일이 아니라 자기 모시는 저 친구들을 좀 도와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전열함, 언제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 판인데.

“우리는 이미 그분께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

생각을 읽는 것 좀, 어휴, 이것도 다 읽겠지, 뭐.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살짝 웃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설마 그냥 몸만 보이지 않게 만들고 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아니겠지?

***

다음 날 아침, 두 선장과 일등항해사, 그리고 네이선과 우르타를 불러놓고 말했다.

“오늘 원주민 마을에 다녀올 거야. 나 없는 동안 사고 안 나게 하고, 출항 준비 마쳐 둬.”

발드 선장이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혼자 가십니까? 호위로 몇 명 데리고 가시지요.”

“그러시지요. 여러 사람이 불편하면 저라도 따르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네이선이 말을 받았지만, 혼자 오라고 했으니 안 될 일이다.

저번처럼 정신 조작을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잖아.

“저들이 외부인을 워낙 기피해서 어쩔 수 없어요, 발드 선장님.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합니다.”

“으으음….”

나는 네이선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갑판장은 선원들 관리해야지, 그리고 초대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할 것 없어.”

“초대요?”

우르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는데, 저놈 저러다 진짜 제명대로 못살지, 어휴.

“그런 게 있어. 하여간 별일 없으면 내일 아침에 출항할 테니까 선원들에게 개척민들과 인사 미리 하라고 전하고.”

나는 말을 마치며 저도 모르게 발드 선장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저 아저씨, 열애 중이시다.

상대는 아이가 둘이나 딸린 중년 여인인데, 나이에 비해 상당히 예쁘기는 했다.

아이가 딸린 것은 뭐,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여자가 이 시대 기준으로 애를 낳기에는 너무 고령이기도 하고, 어차피 애 만들 시간도 없는데 뭐. 으헤헤헤!

이제 막 십대 초반 쯤 되는 아이들 역시 꽤 발드 선장을 따른다고 한다.

배에서의 피난민 생활을 하며 보아온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선장은, 아이들 눈에 꽤나 멋져 보였던 모양이다.

***

육포 한 움큼과 물통 하나를 챙긴 나는 혼자서 지도를 보며 걷기 시작했다.

지형의 난이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네 시간은 걸어야 할 거리다.

제기랄, 이 정도 거리를 혼자 걷게 만들다니, 얘들은 뭔가 호감을 가질 만하면 자꾸 이렇게 점수를 깎아 먹는다.

한두 시간쯤 걸었을까? 나는 나무 그늘을 찾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송글송글 맺힌 땀이 부드러운 바람에 식어갔지만, 기분은 영 나아지지 않았다.

고르지 않은 땅을 계속 걷는 것은 굉장한 노동, 아니, 차라리 고행이었다.

심지어 이 시대의 신발 수준이라는 게, 쿠션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발싸개에 불과했으니.

평평한 갑판 위에서만 걸어 다니다가 굴곡진 땅바닥을 걸으니 아주 죽겠다.

“젠장, 발바닥에 물집 잡히겠네.”

신발을 벗고 향기로운 발 냄새를 맡으며 아픈 발을 조물딱거리고 있는데, 머릿속으로 사념이 전해졌다.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바로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잠깐 머리가 띵하면서 눈앞이 흐려지더니, 어느새 내가 처음 보는 해변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바다에 작은 쪽배를 띄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단정 크기도 안 되는, 잘해봐야 서너 명이 탈만 한 쪽배다.

저런 배로는 바다에 나가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사람들은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바다에 띄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해안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나름대로 돛이라고 할 만한 천 쪼가리를 장대에 걸치는 것이 보였다.

어허허, 저렇게 되면 저것도 나름 범선이다.

스케일이 매우 옹졸하기는 하지만.

돛을 다 설치한 사람들은 배에서 뛰어 내렸다.

.

.

.

진짜 뛰어내렸다니까?

내가 이건 또 무슨 종류의 미친놈들인가 싶어서 해변으로 달려가 구경을 하는데, 총 네 명의 사람들이 다시 해변으로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아니, 배를 버릴 거면 좀 더 멋지고 세련된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굳이 이렇게 어렵게 버린다고?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그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변은 사람들이 아닌 점점 멀어지던 쪽배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저 몇 개의 기포였다.

기포 정도야 항해를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보는 것이고, 보통은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대충 100m는 떨어진 해변에서도 잘 보일 정도로 큰 기포가 여러 개인 상황만 아니라면 말이다.

배가 거칠게 흔들렸다.

고작 기포에 배가 뒤집어질까 싶지만, 그 정도로 기포가 컸다.

그리고.

꾸우우우웅!

촤아악!

어디에서 포탄이라도 날아와 떨어진 줄 알았다.

갑자기 바다가 폭발(?)하더니 엄청난 물보라와 함께 거대한, 그러니까, 익숙하지만 매우 거대한, 그런 게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환공포증 걸린 사람은 보자마자 기절할만한 비주얼.

오트라스의 메인 마스트보다 굵을 것 같은 두꺼운 촉수, 그리고 그곳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하나하나가 내 머리통 크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빨판들.

살짝 데쳐서 먹으면 맛있는, 문어 다리였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오는 법이다.

나는 비현실적인 장면에 입을 헤 벌린 채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초초초초초초 거대 문어 다리에 직격당한 쪽배는 나무 조각 몇 개만 남긴 채 사라졌고, 출렁이는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입을 닦았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저기에 대면 전에 봤던 거대 고래는 귀여운 수준이다.

“북동쪽 해안의 괴수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멈추면서 생겨난, 틀을 벗어난 생물이지요.”

“으히힉!”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깜짝 놀라 기묘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언제 다가왔는지 한 남자와 세 여자가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이제 보니 다들 옷을 안 입었… 은 아니고 얇은 재질의 옷이 몸에 찰싹 붙어서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노출이 왜 자연스러운데?!

민망한 마음을 밀쳐내고 힐끔거리며 보니, 네 사람 모두 아름답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확실히 인간은 아니다.

피부는 매끄럽기 그지없었고… 그냥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어, 그러니까, 인간은 피부가 다 매끄럽지는 않지 않나?

체모도 있고, 올록볼록 나온 곳도 있고 그렇잖아.

…….

에에잇! 그러니까 체모도 없고, 배꼽도 없고, 유두도, 성기도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거의 지구의 마네킹을 보는 것 같다.

얘네는 생식을 어떻게 하는 거야?

난태생(卵胎生)인가?

아, 지금 중요한 게 이게 아니지?

“저런 비슷한 것들을 본 적이 있어요. 고래라던가….”

“저 가련한 생물에게 안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섬을 가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잠깐만요?

이런 상도덕 없는 인간, 아니, 페리아 족을 봤나.

공짜라며!

음식 다 먹고 나니까 음식 값을 바가지 씌우는 것도 아니고, 저런 괴물을 어떻게 잡아?!

저런 괴수를 잡으려면 구닥다리 전열함이 아니라 대함미사일이 달린 현대 군함이 필요하다고!

당황해서 내가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다시 눈앞이 어지러워졌고, 나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 멀리 임시 거주지가 보이는 숲속이었다.

나 아무래도 호구 잡힌 것 같은데?

그, 그래도 언제까지 해달라고 기한은 정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

“어엇?! 벌써 오셨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내가 오트라스 호에 오르자 그레이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걸어서 서너 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이미 탐사가 끝난 상황이라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던 것이다.

“아냐, 중간에 마중 나왔더라고. 그래서 일찍 왔어.”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십니다. 혹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응, 아주 안 좋은 소식이 있지.

지금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적당히 손사래를 치며 화제를 돌렸다.

“트리토나의 고정상태는 확인했고?”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더라도 괜찮을 겁니다. 그런데 저렇게 방치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트리토나는 창조신 지고스 님에게 받은 선물, 전열함의 이름이다.

저 정도면 현시점에서 ‘바다의 신’이 되기에 충분하지, 암.

…그래도 그 문어는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지만.

현재 트리토나는 항구 건설 예정지 옆에 단단히 고정되어있다.

마음 같아서야 육지로 끌어올려서 안전하게 보관하고 싶지만, 아무런 장비도 없이 저 녀석을 육지로 끌어올릴 방법이 없다.

“아까워도 어쩌겠어. 당장 저 무식한 덩치를 운용할 방법이 없는데. 그리고 우리가 지금 누구랑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랬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뭔가 멋지고 가슴이 웅장해지기는 하는데, 그뿐이다.

당장 쓸모가 없다.

게다가 훗날 후작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려면 나도 숨겨놓은 비수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선원들의 입을 다 막을 수는 없지만 일단 섬과 트리토나에 대해서는 함구하라는 명령은 내렸다.

적당히 소문이 돌더라도 워낙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 결국 헛소문이나 허풍 취급을 당하겠지만, 그래도 모두가 입을 모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과, 몇몇이라도 부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콘베르테(나포한 해적선)까지 두고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여기에 남는다는 선원들이 감을 잃지 않게 할 필요도 있고, 혹시 모를 외부 위협에 대응할 수단도 필요하고. 여차하면 도망이라고 가야 하니까.”

“리버티 호를 남기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 그건 내 배가 아니라서. 그리고 섬 주변의 탐사도 계속해야 하니, 운용할만한 배가 필요하긴 해.”

섬에 남기로 한 선원이 11명, 모두 연애를 시작한 녀석들이다.

아직 성공하지 못한 녀석들 중에도 남겠다는 녀석들이 있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연애 시작한 녀석들이야 내가 없어도 개척촌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다른 놈들은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그리고 슬레어도 섬에 남기로 했다.

배를 움직이려면 항해사가 한 명은 필요하고, 다른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아버지가 촌장인 슬레어 쪽이 더 믿을만하니까.

“슬레어 항해사는?”

“아마 콘베르테 호에 있을 겁니다. 불러올까요?”

“음, 그리고 갑판장은 누가 하기로 했지?”

“로데스라는 고참 선원입니다. 피오렐에 타던 선원인데 아인델프 선장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 다 부르지.”

***

선장실에서 쉬고 있으니 슬레어 항해사와 새로 갑판장이 된 로데스라는 선원이 찾아왔다.

얼굴을 보니 꽤 익숙하다.

내 기억에 굉장히 과묵한 사람으로, 양쪽 볼에 칼자국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얼굴에 칼 맞고 살아남기가 참 쉽지 않은 세상인데 나름 대단하달까?

“부르셨습니까, 제독.”

“그래, 슬레어 일등항해사, 아니, 선장 대리. 그리고 그쪽이 로데스 갑판장?”

“네, 제독.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 다 임시직이지만 잘 부탁해. 다른 것보다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네.”

나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도 의자에 앉았다.

세상에 배를 처음 타고 멀미로 정신을 못 차리던 그 애송이 슬레어가 임시라지만 일등항해사에 선장 대리라니, 진짜 인재난이 느껴지는구나.

“그리고 이거, 유용할 거야.”

“이건?”

슬레어는 내가 내민 종이를 보고 눈을 빛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북동쪽의 섬, 가명 에른스턴은 표시되지 않았고, 적당히 해안선만 얼추 비슷하게 그려놓았다.

“보다시피 지도. 두 가지 당부할 점이 있어. 이미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거주지에서 걸어서 하루 이상 떨어진 곳까지는 진출하지 마. 괜히 원주민들과 트러블이 일어나면 모두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까. 두 번째, 여기, 섬을 사분해서 북동쪽 부분은 접근 금지야. 가능하면 항구 근처를 벗어나지 마.”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북동쪽은 위험 해역이래. 그리고 원주민들이 굉장히 싫어해.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호의에 기대서 항구를 개발 중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원주민들을 심기를 건드려 몰살당할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 접근하지 마.”

“으음, 알겠습니다.”

거대 문어 이야기는 하려다가 말았다.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해서 참극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물론 슬레어의 소심한 성격으로 봐서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겠지만, 안전한 게 좋겠지.

차라리 보지는 못했어도 존재를 인지하고 있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위협을 가지는 원주민 핑계를 대는 쪽이 더 나을 것이다.

***

당분간 트리토나에 배치된 슬레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리버티 호에 탑승한 크리스티앙이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것이 보인다.

아무리 대열 중간에 위치해서 신경 쓸 부분이 적다고는 하지만 발드 선장 혼자서 선교를 책임지는 것은 무리이기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오트라스에서 항해사 한 명을 보낸 것이다.

평소보다 더 밝아 보이는 것이 잘 보낸 것 같다.

아무래도 그레이그가 크리스티앙을 너무 심하게 잡아서 말이야.

“그럼 제독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네, 촌장님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정착민들 잘 보살펴주세요.”

“허허, 걱정 마십시오. 그나저나 모자란 제 자식 놈에게 저런 큰 배를 맡겨도 될지….”

“슬레어 정도면 제 몫은 하는 항해사니까요. 어차피 장거리 항해도 아니고 근해나 살짝 돌아다니는 정도니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허허허….”

촌장인 허비 씨의 눈에 고마움이 가득했다.

내 자랑이 아니라, 진짜 이 정도면 허비 씨 가족에게는 내가 은인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섬과 개척촌에 대한 내 영향력도 강해지는 것이고.

“선장님, 출항 준비가 끝났습니다!”

저 멀리 오트라스에서 오펜이 뱃전으로 고개를 내밀고 힘차게 소리쳤다.

시선을 돌리니, 마지막 남은 단정에서 선원 두 명이 지루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제독, 정말 감사합니다.”

“허허허허….”

내 인사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슬레어가 단단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짜식, 이제 좀 뱃사람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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