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독이 든 성배
“히이잉, 리아야 도대체 뭐하고 다닌거야아….”
울먹이는 우르타가 물 묻은 천으로 고양이의 털을 벅벅 닦으며 울상을 짓는다.
“애애애옹!”
인간이 본다면 우르타가 어미 고양이쯤 되는 줄 착각할만한 모습이지만,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리는 하얀 고양이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우르타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몸 비틀기를 시전하는 모습이나, 솜방망이 밖으로 삐죽 나온 발톱을 보면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여튼 하얀 고양이 리아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지만, 고된 뱃일로 다져진 인간의 근력을 이겨내지 못해 끝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만 좀 해라, 털이 닳아 없어지겠다.”
“그치만! 아직도 얼룩덜룩하잖아….”
고양이라면 그 정도는 대충 자기가 알아서 그루밍으로 지울 수 있지 않을까?
나름 맹수라고 이전에 쥐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은 모양인지, 새하얀 털 여기저기에 피칠갑을 하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온 리아였다.
하지만 집사 놈의 반응이 영 마뜩찮으니 아마 앞으로는 쥐를 잡지 않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나름 신비하기는 하다.
처음 볼 때는 손바닥만 해서 쥐에게 잡아먹히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제 내 팔뚝보다 커져서 확실히 쥐랑 1:1로 붙어도 지지 않을 것 같다.
끼이익.
“여어! 다들 여기 있었군.”
문이 열리며 땀에 흠뻑 젖은 네이선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로 우르타의 침대에 앉으려다가 우르타의 발에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어딜 앉으려고!”
“아, 치사하게 앉지도 못하게 하냐?”
“의자에 앉아! 다 젖었잖아!”
그래, 아무리 친구라도 쉰내 풀풀 나는 그 몸으로 남의 침대에 앉는 것은 선 넘었지.
나는 슬며시 코를 움켜쥐며 엉덩이를 움직여 네이선에게 멀어졌다.
“내가 더럽냐?! 더럽냐고?!”
네이선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지만, 내가 보기에는 억울할 것 없다.
더러워.
한바탕 우르타와 아옹다옹하던 네이선은 결국 쿵쾅거리며 방을 나섰다.
잠시 후에 인간 크기의 뭔가가 바다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마 기분 탓일 거다.
섬에서 여유 있게 가지고 왔다고 해도 늘 물은 부족하니까 당연히 샤워를 할 정도의 물은 없다.
선장인 나도 하루에 겨우 한 번 정도나 바닷물로 씻은 후 작은 통의 민물을 천에 적셔 소금기를 닦아내는 수준이다.
이러니 비단결 같던 내 피부가 해가 갈수록 사포처럼 거칠어지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리안, 후작이 가만히 있을까?”
우르타가 갑자기 그답지 않은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뭐야, 이 녀석? 안 어울리게.
그래도 그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서 성의껏 대답을 해줬다.
“가만히 있겠냐? 분명히 뭔가 수작을 부리겠지. 특히 트리토나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면….”
“트리토나? 그 엄청 큰 배? 그걸 후작이 알 수가 없잖아.”
글쎄, 모를까?
당연한 말이지만 선원 중에는 후작의 첩자가 있을 거다.
덩치가 보통이어야 숨기기라도 하지, 선원 중에 트리토나의 존재를 모르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장님일 게 분명하다.
기대할만한 것이 있다면 예전에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한 것처럼 페리아 족이 선원들의 기억을 조작해주는 것인데….
그때야 고작 30명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이번에는 100명이 넘는 인원이라 솔직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 후작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확실해. 그런데 그런 엄청난 배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어.”
“그, 그럼 어떻게든 해야지!”
우르타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표정만 보면 지금 누가 바다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다.
“호들갑 떨지 마.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 중이니까.”
“역시! 리안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언제 심각했냐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는 우르타를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 아직 아무 계획도 없지만 너의 그 막연한 믿음을 굳이 짓밟을 필요는 없겠지.
콰앙!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네이선이 씩씩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됐냐?!”
“어, 어떻게 씻었지?!”
우르타는 당황하며 중얼거렸지만 나는 네이선이 다가오면서 코를 간질이는 옅은 짠내를 맡을 수 있었다.
이놈, 바다에 빠졌다가 옷을 갈아입고 온 모양이다.
***
바람은 순풍이었고, 항로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항로였다.
문제가 일어날 건덕지가 없다.
유일하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라면 폭풍 정도가 있겠지만, 이제 한여름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나마 기상이 가장 좋을 시기다.
“크으, 이렇게 지루하고 심심한 항해는 정말 오랜만이군요.”
감탄사를 터뜨리는 그레이그의 표정은 말과 다르게 매우 행복해 보였다.
22일에 이르는 항해 기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큰 일이라고 해봐야 선원 중의 한 명이 극심한 가려움증을 호소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전염병인 줄 알고 긴장했었는데, 진찰을 마친 닥터는 자주 씻으라는 처방을 내렸다.
에잇, 더러운 선원 놈들.
“이제 하루 정도 남았나?”
“네, 별일 없으면 곧 델라 항구가 보일 겁니다.”
“그나저나 평소보다 배가 좀 많은 것 같지 않아?”
물론 이 근처가 많이 이용되는 항로이기는 한데, 그래도 당장 눈에 보이는 선박만 무려 여덟 척이니, 평소보다 두 세배는 많이 보이는 셈이다.
“저희가 출발할 때도 좀 붐비지 않았습니까?”
그레이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여상스레 대답했지만, 나는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는 후작이 해적과 한바탕 하네 마네 하는 소문이 돌아서 그렇고.
그때로부터 벌써 몇 달이야, 거의 세 달은 지났잖아.
“입항하면 항구관리소에는 내가 갈게.”
“아, 직접 가시겠습니까?”
“아무래도 후작 쪽 분위기도 봐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번에 입항하면 얼마나 쉬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항해는 어렵지 않았고, 폰테 섬에서 쉴 만큼 쉬… 에이, 솔직히 쉬지는 않았지.
다들 손에 익지도 않는 건설 인부 노릇을 했으니.
게다가 선단에 술이 떨어진 지 오래라, 대부분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는 선원들의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있었다.
“한 열흘 쉬자. 선원도 모으고, 항해사도 좀 모집해야겠고. 솔직히 이제 우리 선단 정도면 꽤 괜찮은 항해사들이 꼬이지 않겠어?”
“그렇죠. 쉬는 동안 선원들이 선장님에 대한 평판도 좋게 퍼트릴 테고요.”
선원들이 내게 좋은 말을 하는 이유는 별게 아니다.
돈, 많은 돈, 더 많은 돈.
지금 지급하기로 한 금액만 따지면 솔직히 나는 파산 상태다.
그렇잖아, 인원수가 백 단위가 되면 아무리 조금씩 줘도 개인의 재산으로 버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심지어 미지급금이 벌써 두 달째 밀려있는 상황.
이제 이용자가 꽤 많아진 선내 은행 제도 때문에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빠르게 자금을 수혈할 필요성이 있었다.
몇 달이나 술과 여자를 굶은 선원들의 고삐가 풀리면 돈을 얼마나 빨리 쓸지 가늠이 안 되는 판이니.
“선장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회계사?”
“네, 베르엘바(내장재용 식물)의 처분에 관해서 지침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방으로 가지. 일등항해사, 선교를 부탁해.”
“걱정 마십시오, 선장님.”
내 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게론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장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 아이렌 목재는 시중에 풀렸지만, 이 베르엘바는 시중에 풀리지 않은 것이죠?”
“그렇지. 그 고급가구 제작하는 거기 어디더라, 공방 사람들 정도는 알 거야. 그런데 전량을 왕ㄴ, 아니, 아가씨께서 구매하셨으니까 실제로 취급을 해봤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그렇다면 시장 반응도 애매할 수 있겠군요. 알려지지 않아서요.”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내 말에 게론드가 의문을 표했다.
원래대로라면 게론드의 우려는 타당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시장에서 인지도가 없다면 제값을 받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고객이 있지 않은가?
바로 스코타 후작 말이다.
베르엘바는 기존의 내장재들과 격을 달리하는 고급 소재다.
남들과 차별화되고 싶은 귀족들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는 물품이라는 뜻이지.
심지어 희소성까지 있으니, 공신력 있는 사람이 귀족들에게 품질을 보증한다면 원래 가치의 몇 배를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후작에게 베르엘바를 전량 넘길 생각이다.
물론 이번만 그렇게 하고 다음부터는 적당히 비율을 조절해야겠지.
상류층에서 소문이 돌면 차상위 계층에서 욕심을 내게 마련이고, 차상위 계층인 하급 귀족이나 돈 많은 평민 등은 후작이 직접 상대하기에는 격이 떨어지니 말이다.
그들을 상대로 팔 물량을 제공하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이번에 후작에게 베르엘바를 모두 넘기면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이득도 있다.
무엇보다 후작에게 폰테 섬이 실존한다는 것을 각인시킬 수 있으며, 새로운 사치품의 첫 데뷔를 후작에게 온전히 맡겨 정치, 상업적으로 이용할 여지를 주어 나에 대한 후작의 호감을 더 올릴 수 있다.
게다가 내가 당장 이 베르엘바를 직접 팔기에는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좀 많았다.
폰테 섬의 존재가 아직 비공식이다 보니 출처를 말하기 곤란하고, 출처가 애매하니 지속 공급에 대한 약속도 못 하며, 힘 있는 자들에게 강탈 또는 이용당할 여지도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후작 역시 꽤나 싫어하겠지.
“후작에게 모두 넘길 거야.”
“전체 물량을 말입니까? 선장님,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지금 선단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이번 탐사로 인해….”
“알아. 후작은 바보도 아니고 계산도 빠른 사람이야. 나는 그에게 대금을 요구하지 않겠지만, 그는 알아서 대금을 치를 거야. 그걸 주지 않으면 당장 내가 파산한다는 것과, 그러면 폰테 섬 개발 계획을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테니까.”
내 차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게론드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선장님,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봐 게론드. 우리는 폰테 섬을 간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칼날 위를 걷고 있는 거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런 것으로 위험을 논하기에는 웃기지 않아?”
“후우우…. 그렇기는 하네요.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간당간당하게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말이 많다는 것이 흠이지만, 확실히 게론드의 상황 파악 능력이나 머리 회전은 선단의 그 누구보다 좋다.
이런 똑똑한 놈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붙어있는 항해도를 노려보았다.
“기회가 올 거야. 이미 균형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모 아니면 도다.
***
“여기가 군항이야, 교역항이야?”
황당한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그레이그가 중얼거렸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군항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과장이 많이 섞이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평범한 교역항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일단 저 멀리 한쪽 구석에 정박한 배들, 벨로키나 왕국의 정규 군함들이다.
몇 함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투함만 대략 10척쯤 되어 보인다.
그리고 다른 부두에도 상선의 수보다 무장상선이나 용병함의 수가 더 많아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기가 질린 표정의 오펜이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며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인데, 대답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의미 없는 질문이 맞다.
“선장님, 항구관리관이 접현했습니다.”
“진짜 항구관리관?”
내 질문에 선교에 올라온 네이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엉덩이 무거우신 분이 여기까지 온 걸 보니 큰일이 벌어진 것 같기는 한데.
네이선과 항해사들을 데리고 급히 우현으로 가자, 이제 막 갑판 위에 올라서는 항구관리관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항구관리관님.”
“아, 리안 선단장님!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좋군요.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받고 바로 나오는 길입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숨기고 최대한 평온하게 항구관리관을 대했다.
이 사람이 후작과 나의 관계를 얼추 알고 나서는 꽤나 조심스러워진 것은 맞는데, 오늘은 유독 정중하다.
“후작 각하께서 선단장님이 오시면 바로 전하라고 하신 서신입니다. 너무 늦지는 않을지 걱정했는데 딱 맞춰서 오셨군요.”
나는 항구관리관이 품에서 꺼내어 조심스럽게 내미는 편지를 받으며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출발 전에 보고를 했으니 당연히 후작은 나의 대략적인 일정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타이밍 좋게 내가 볼 수 있도록 편지를 맡겼다는 말은, 알 수 없는 지금의 이 사태에 나도 모르게 내가 끼어들어 있다는 말인데….
솔직히 이 분위기에서 예상되는 이벤트는 하나밖에 없잖아.
전쟁.
꽤 오랜 시간 국가 단위의 전쟁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잊고 있는데, 전쟁 나면 제일 먼저 징병당하는 인간들이 바로 선원들이고, 가장 먼저 징발당하는 물자는 선박이다.
최근에 발생한 프레티아 내전은 그 성격상 평민들의 지지를 무시하기 힘들어서 징발, 징병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발발 이후 프레티아 국적의 상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니 말 다했지, 뭐.
나는 불안한 느낌을 애써 감추며 편지를 품에 넣었다.
급한 것은 후작이지 내가 아닌데, 굳이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편지를 읽을 필요는 없다.
내가 편지를 품에 넣자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은 항구관리관은 곧 표정을 수습하더니 품에서 입항허가서를 꺼냈다.
“항구관리관님? 검문은…?”
“네? 아하하, 농담도. 선단장님께 괜한 불편을 드릴 수는 없죠. 정박하실 부두는 여기 이 친구가 안내할 겁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항구관리관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낯익은 항구관리관… 그러니까 진짜 항구관리관의 부하는 거의 사색이 되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의 원인은 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흐흐흐, 저놈이 나한테 받아 간 뇌물이 얼마더라?
***
정박을 마친 후, 당직에 걸린 몇몇 선원들의 비통한 절규를 배경음 삼아 다른 선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항구로 향했다.
저마다 허리춤이나 가슴팍이 불룩한 것을 보니 다들 양껏 돈을 인출한 모양이다.
“어휴, 간당간당했습니다. 멍청한 놈들이 쓸데없이 돈을 많이 빼가려고 해서….”
“그래도 모자라지는 않은 모양이군.”
“네, 선박 세 곳의 돈을 합쳐서 조절해서 겨우 맞췄습니다. 아무래도 은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행크에게 이야기해서 돌격대 애들 데리고 가. 사람들이 붐벼서 좀 위험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게론드가 떠나고, 네이선을 위시한 세 선박의 갑판장들이 올라왔다.
“선장님, 갑판장들을 불러왔습니다.”
“응, 수고했어, 네이선.”
나는 모르아, 왓킨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입을 열었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 화물은 외부에 노출되면 안 돼. 그래서 힘들겠지만, 갑판장들이 오늘부터 이틀 정도는 믿을만한 녀석들과 함께 당직을 서면서 선창을 지켜주었으면 해.”
“알겠습니다, 제독.”
“으음, 제독, 그게 좀….”
왓킨은 시원하게 대답했지만, 모르아 갑판장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응? 모르아 갑판장은 무슨 문제가 있어?”
“...아닙니다. 약속이 하나 있기는 한데, 며칠 늦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건 내가 미안하네. 그래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부탁 좀 할게.”
“네, 걱정 마십시오.”
내 당부를 들은 세 사람이 떠나고, 한참 전부터 내 주변을 얼쩡거리던 우르타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뭐야, 아까부터 정신 사납게.”
“오늘 뭐 할 거야?”
“뭘 하다니?”
“술 마시러 안 가?”
“야, 지금 내가 술 마실 상황이냐?”
“그럼 후작에게 갈 거야?”
“그래야 하지 않을….”
대답을 하다 말고 묘한 느낌에 우르타를 돌아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나를 반긴다.
설마 이놈?
“하지 마.”
“이히히히!”
“안 돼!”
“아직 말 안 했는데?!”
“뭐가 되었건 안 돼!”
“그런 게 어딨어!”
“일등항해사랑 갈 거야.”
“나도 같이 가, 응?”
우르타와 한바탕 끝없는 실랑이를 벌인 보람도 없이, 나는 결국 우르타 오펜을 데리고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셔야 했다.
후작이 지금 저택에 없다는데 어쩌겠냐고.
나는 여급이 새로 가져다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도 계속 목이 탄다.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길래 그렇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어?”
“선장님, 괜찮으세요?”
두 사람이 연신 내 눈치를 봤다.
‘리안 선장, 본국은 케르빈 제도의 해적을 토벌한다고 공표했네. 일레드 왕국은 극렬하게 반발해왔고, 쿠샤 왕국과 본국의 해군은 연합하여 일레드 왕국의 해군을 견제해야 하지. 대외적으로 공표한 해적 토벌은 사설함대로 해야 한다는 뜻이야. 군공을 세우게,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테니.’
후작의 서신은 대충 이런 내용이다.
고작 해적을 토벌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
시비를 거는 거다.
일레드 왕국에게 시논 섬과 케르빈 섬, 그리고 그 일대의 지배권을 내놓으라고 압박을 하는 것이지.
말이 좋아 견제지, 이 상태라면 언제 함대 간의 결전이 발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그사이에 우리가 끼어든다면?
당연히 고래 싸움에 터져나가는 새우가 되는 거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일레드 왕국의 해군을 해군으로 견제하고, 케르빈 제도의 해적을 사설함대로 토벌한다는 계획은 굉장히 합리적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까?
내 생각에, 일레드 왕국의 해군은 알려진 것보다 강하다.
함대까지 갈 것도 없이 딱 한 개의 전대만 빼돌려서 사설함대를 공격할 수 있다면, 벨로키나 왕국의 작계는 완전히 박살이 날거다.
위험하다. 굉장히 위험한 느낌이 팍팍 들어.
그런데 만약, 후작의 참전 요청, 아니, 명령을 거절하면?
그것으로 후작과 나의 관계는 끝날 확률이 높다.
폰테 섬이고 나발이고 죄다 날아가는 것은 물론, 상업 허가니 뭐니 하는 것까지 취소될 수도 있다.
사실상 나는 은퇴해야하는 판이 되는 거지.
그리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다면, 일레드 해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지금 항구에 모인 전력만으로도 웬만한 해적들은 박살내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케르빈 제도가 진짜 해적들의 소굴이냐는 부분도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기도 하고….
심지어 해적 중 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외날의 라프나’마저 내 손에 명을 달리하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후작이 두루뭉술하게 언급한 보상, 군공을 세워야 얻을 수 있는 것.
이번만큼은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