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의용함대 창설
하늘을 보니 정오가 다 되어간다.
아마 호출한 사람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내가 제일 늦지 않았을까 살짝 걱정이 되는데.
“우리가 가장 늦게 왔나?”
“네? 아니, 그건….”
내 질문에 앞장서서 안내하던 병사가 화들짝 놀라며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손님이 오시면 모시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나는 살짝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일개 병사인 그는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고,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외부인인 나에게 공개할 권한은 없을 것이다.
병사의 안내를 받아 우리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전투함이 정박한 부두 앞에 설치된 임시 연회장(?)이었다.
아직 행사를 준비 중인지 여러 병사들이 바쁘게 걸어 다녔고, 여기저기에 장교들이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긴 테이블을 여섯 개 정도 길게 붙여서 만들어진 연회석에는 몇몇 사람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리안 선단장님 되십니까?”
말끔한 정복을 차려입은 장교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계급은 소령.
대략 30세나 되었을까? 계급에 비해 상당히 젊은 사람이었다.
“네, 리안입니다.”
내 대답에 아인델프와 발드에게 잠시 시선을 돌려 확인한 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벨로키나 왕립 해군 제2함대 소속, 서스텐 소령입니다. 선단장님의 좌석은 이쪽입니다. 다만 사전에 방문이 고지되지 않은 일행 분들은 미리 마련된 좌석이 없는 부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의자 몇 개만 가지고 나오면 되는 것을 치사하게 진짜.
나는 두 사람에게 살짝 미안했지만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서스텐 소령이 안내한 자리는 상석에서 오른쪽, 두 번째 테이블이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상석에 가까울수록 더 대우를 해주는 것이니, 상당히 높은 대우였다.
실제로 나보다 먼저 왔음에도 뒤쪽에 앉아있던 40대, 50대 남자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 손님들이 다 오시지 않아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편안하게 쉬고 계시면 됩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여기 있는 수병들에게 말씀하십시오. 그럼 전 이만.”
“안내 고맙습니다.”
별것 아닌 손짓 하나에도 배어있는 미묘한 품격, 귀족 가문 출신이 확실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계급이 이해가 되었다.
서스텐 소령이 자리를 뜨자 나는 내 뒤에 시립한 두 사람에게 조용하게 말을 건넸다.
“두 사람에게는 미안하네. 아무래도 1함대 사령관이 기선제압을 위해 심술을 부리는 모양이야. 조금 불편해도 참아줘.”
평소 배 안에서야 발드 선장의 경력과 나이를 존중해 존대를 해줬지만, 밖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상남자들의 세상에서 그렇지 않아도 어린 선단장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볼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자기 부하에게까지 존대를 하면 내 첫인상이 어떨지는 안 봐도 비디오니 말이다.
“괜찮습니다, 선단장님.”
살짝 웃으며 대표로 대답하는 발드 선장의 왼쪽 다리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해적선에 잡혀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발드 선장의 다리 부상은 결국 회복되지 않았다.
닥터 역시 몇 번 치료를 시도했다가 결국 손을 들었으니, 현시대에서 그의 다리를 치료할 의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다리를 아예 쓰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편한 다리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평소에 걸어 다닐 때도 다리를 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두 다리로 서 있어야 하는 지금 상황이 그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힘들 것이다.
선교에서도 계속 서 있기는 하는데, 자세를 조금 편하게 하거나 벽에 기댈 수 있는 선교와 달리 이곳에서는 두 다리로 굳건히 버티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내 시선을 느낀 발드 선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도 뱃놈인데 고작 몇 시간 서 있는 다고 쓰러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너무 힘들면 말해. 어떻게 해서든 의자 하나를 더 얻어낼 테니.”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때 내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어차피 같은 처지인 것 같은데 인사나 합시다. 나는 피어스요. 상선단을 운용하고 있지.”
묘하게 질투심과 무시가 섞인 그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은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선단장 리안입니다. 반갑습니다. 피어스 선단장님.”
“선단? 거, 어린 나이에 대단하군? 부친이 돈이 많으신 모양이야.”
“돌아가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 눈을 감기 힘드셨겠어. 어렵게 일군 선단을 어린 아들에게 넘겨줄 것을 생각하면.”
쯧, 단순하기는.
고작 그 정도로 도발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러게요. 좀 오래 사셨다면 빈민촌에서 살던 당신과 다르게 선단장이 된 아들 덕 좀 보셨을 텐데.”
“흠?”
피어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정도의 머리는 있으니 선단장을 하고 있겠지.
그의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두 명.
그렇다면 잘해봐야 세 척짜리 선단을 운용한다는 말이다.
폰테 섬에 있는 콘베르테와 트리토나까지 포함하면 운용 선박이 5척에 달하는 내가 꿀릴 것이 없다는 뜻이지.
“이거 내가 실수한 모양이군. 어리다고 무시할 사람은 아니었구만. 그래, 몇 척이나 끌고 다니시는가?”
잠시 침묵을 지키던 피어스는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사과했다.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니 괜히 분란을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별말씀을요.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그런 오해를 자주 받습니다. 한 척은 운용이 곤란한 상황이라 지금 델라 항구에 있는 배는 세 척입니다.”
“그렇다면 무려 네 척? 하, 그 자리에 앉을 만하군.”
피어스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내젓자, 우리를 지켜보던 피어스의 옆에 앉은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린 나이에 맨땅에서 그만큼을 일궜다는 거요? 대단한데?! 아, 나는 웨버요. 반갑수다.”
스스로 웨버라고 밝힌 남자의 뒤에는 젊은(선장치고는 젊다는 뜻이다) 남자 한 명이 바른 자세로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웨버 선단장님.”
내가 웨버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는데 맞은편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거참, 참새 새끼마냥 시끄럽기는. 이 자리에 지들만 있는 줄 아나?”
선단장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쏠렸지만, 입을 연 남자는 거만하게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쩌다 다쳤는지 몰라도, 눈 아래부터 턱 부분까지 얼굴의 절반을 완전히 망가뜨린 상처가 인상적인 40대 남자였다.
“으음, 알센더트….”
피어스가 작게 신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알센더트라면 꽤 유명한 용병함대인 ‘볼리야 용병함대’의 대장이다.
반 해적이라는 소문도 있고….
착한 선원, 성격 좋은 용병 놈만큼 웃기는 농담은 없는지라 나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누군가 했더니 바다 위의 거지새끼… 아, 미안. 거지 왕초였군.”
굳이 보지 않아도 피어스와 웨버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알센더트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와 호기심이 어렸다.
그는 뒤로 젖혔던 상체를 테이블로 당겨 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호오, 꽤나 배짱이 좋은 꼬마로군. 내 이름을 알면서 그따위로 말을 해?”
“못할 건 뭐야? 그러고 보니 요즘 해적질도 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번에는 데미지가 있었는지, 그렇지 않아도 흉터로 인해 빈말로도 착해 보이지 않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꼬맹이,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해군이 언제나 너를 지켜주는 게 아니야.”
“대놓고 해적질을 하겠다고 예고하는 건가? 해군 기지에서? 용감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뭐? 네놈이 지금….”
그는 기가 막힌 듯 손가락질을 하며 부들거렸다.
우리 사이에 긴박한 기류가 흐르자 그 사이에 몇 명 더해진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국왕 폐하의 충실한 기사이자 필레로페의 남작, 벨로키나 왕립 해군 제1함대 사령관이신 샌더슨 제독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손님들을 안내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던 서스텐 소령이 나타나서 큰 목소리로 거물의 입장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각국의 1함대는 가장 중요한 해역을 지키는 함대이며 최고의 전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1함대 사령관이라 하면 해군 중 최고위직 중 하나이고, 우리 같은 평민들이 감히 앉아서 맞이할 대상이 아니었다.
모두 분주히 자리에서 일어서 대기하는 가운데, 화려한 정복을 입은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 여러 사람을 대동하고 장내에 들어섰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걷는 자세가 꼿꼿하고 힘이 있어 매우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골골거리는 노인네가 맡아도 좋을 만큼 1함대 사령관이 만만한 자리가 아니기는 하지.
상석까지 거침없이 걸어온 노인은 장내를 한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인원 중 두 사람이 그의 가장 가까운 좌우 좌석에 앉았다.
두 사람도 나이가 지긋한 걸 보면 대충 부사령관과 함대 기함의 함장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행사를 주도하던 서스텐 소령은 사령관의 오른쪽 뒤에 바르게 섰다.
예상은 했지만, 아마 사령관의 부관쯤 되는 모양이다.
“모두 앉지.”
샌더슨 제독의 입이 열리고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가 장내를 휘감았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 온 노인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서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발작을 일으킬 것 같던 알센더트까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조용해졌으니 말 다 했지 뭐.
장내 인원들(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제외하고)이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뒤 샌더슨 제독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1함대 사령관 샌더슨이다. 갑작스러운 호출에도 이렇게 응해준 그대들의 충심에 찬사를 보내지. 어차피 뱃놈들밖에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다. 늘 왕국의 안위와 백성들의 고충을 살피시는 폐하께서 나라의 교역을 방해하고 그대들 같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해적을 토벌하고자 용단을 내리셨다. 폐하의 용단을 지지하여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서준 그대들이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오늘 두 개의 임시 의용함대를 편재하고, 작전계획을 하달하도록 하겠다.”
거기까지 단숨에 말을 마친 샌더슨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
저런 사람을 모시고 일하다니, 서스텐 소령은 대단한 사람이군.
그나저나 자발적이라니, 지나가던 갈매기가 웃을 소리다.
과연 이 중에 자발적으로 이곳에 온 사람이 있기나 할까?
상선단들이야 이권을 약속받거나 나처럼 향후 활동에 보장에 대한 암묵적인 협박을 받았을 것이고, 용병함대들도 합당한 보수를 약속받거나 약점이 잡혀서 협박받았겠지.
어찌 되었건 어제 만나던 대위가 제공한 추가 정보로 대충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너무 빨리 일이 진행되어서 조금 당황스럽지만, 해군에서 선단장들과 용병함대장들을 불러 모을 이유가 이것 말고 없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바로 편제를 마치고 움직이라고 하면 지금 배에 있는 화물을 내려놓을 시간이 없는데?
마른 풀 형태를 하고 있어서 대량은 몰라도 소량의 절도는 매우 쉬운 베르엘바를 항구의 대여 창고 같은 곳에 보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작에게 바치기 전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하니 말이다.
후작가에서 직접 사람이 와서 바로 가지고 가는 게 최선일 텐데.
정 안되면 항구관리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보안 부분은 조금 애매하다.
“…그래서 의용 1함대는 프레티아 왕국의 벵가로쉬를 거점으로 마르셀 항구부터 에쉬노르 항구까지의 견제를 맡게 될 것이고, 의용 2함대는 케르빈 섬 동쪽의 케르빈 제도에 숨은 해적들을 토벌하는 일을 맡을 거요.”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샌더슨 사령관의 왼쪽에 앉아있던 부사령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차분하게 설명을 마치고 있었다.
계급장이 준장이면 부사령관이겠지 뭐.
“잠깐 실례합니다만, 설마 해상 봉쇄를 의용함대만 가지고 하라는 겁니까?”
왼쪽 라인에 앉아있던,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러자 잠시 그를 바라보던 부사령관이 차갑게 말했다.
“해상 봉쇄가 아니고 견제라고 말했소만. 그리고 의용 1함대는 실질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쿠샤 왕국 1함대와 본국의 제2, 3함대를 보조하는 것이 주 임무요. 그리고 질문은 설명이 끝나고 받겠소.”
차가운 눈으로 좌중을 둘러본 부사령관은 다시 말을 이었다.
“시논 섬이나 케르빈 섬에 주둔하는 일레드 왕국 해군의 견제는 본국의 1함대, 쿠샤 왕국의 2함대가 맡을 테니, 실제로 의용 2함대만 케르빈 제도를 토벌한다고 해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오. 그리고 의용 1함대 역시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그러니 그대들은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소. 다만 실질적인 전투가 있을 확률이 높은 의용 2함대에 용병함대가 포진하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하오.”
그러니까 돈 받은 놈들은 피해가 예상되는 쪽으로 알아서 빠지라는 말이군.
그런데 이게 막 우리끼리 대충 정해도 되는 거야?
예상되는 상대 전력에 따라 해군에서 정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때 샌더슨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의용 1함대와 2함대의 사령관을 정해야겠지. 1함대 사령관은 베일리 선단장으로 하지. 베일리 선단장은 경험도 많고 군에 종사한 경험도 있어서 해군과의 협조가 쉬울 것 같아. 그리고 의용 2함대 사령관은….”
샌더슨 사령관은 말을 멈추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나와 알센더트를 오가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까?
“아무래도 전투에 익숙한 알센더트 대장이 좋을 것 같아. 혹시 이에 불만 있는 사람이 있나?”
불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어차피 상선단은 전부 1함대에 배속될 것 같으니 상관없다.
어차피 앞으로 볼일도 없을 텐데 저놈이 사령관이건 아니건 무슨 상관이야?
그나저나 원래 케르빈 제도의 해적 토벌에 동원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항구 봉쇄, 아니, 견제를 맡게 되니 생각이 좀 복잡해진다.
바글바글한 해군들 틈바구니에서 군공을 어떻게 세운담?
자잘한 일로 후작에게 생색을 내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아니, 아니다.
일단 최대한 안전하게, 안전이 최고다.
“…그래서 리안 상선단과 피어스 상선단은 2함대에 배속해서 후방지원을 맡기도록 하지.”
잠깐만요?
샌더슨 할아버지?
지금 뭐라고 하셨죠?
뭔가 잘못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억지로 고개를 돌려 맞은편을 바라보니, 알센더트가 징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