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지원군
“최후미 선박까지 선회 마치고 이탈 중입니다.”
“해적들은?”
“기존의 세 척까지 총 18척이고 계속 따라오는 중입니다.”
“미친 해적 놈들, 많이도 긁어모았네.”
“그래봐야 본대랑 비교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수준 아닙니까?”
본대랑 비교하면 그렇기는 하지.
당장 우리보다 두 배가 넘는 게 문제일 뿐.
“그래도 경계 늦추지 말고, 저 앞에 있는 섬에서 좌측으로 돌지.”
“알겠습니다.”
내놓을만한 전과가 없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적의 기습을 먼저 발견한 덕분에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비록 절반 수준에 불과한 해적선이라도 대열이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기습을 당했다면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피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직력이 워낙 헐거운 의용 함대이니 피해가 커지면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러면 한 번 기습으로 39척의 대함대가 사실상 전멸(?)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데리고 있는 7척의 분함대를 피해 없이 복귀시키기만 해도 상당한 공적이 되는 것 아닐까?
일단 추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이기는 한데, 액션 영화처럼 막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선교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고, 조범수들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최대한의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하고 있었지만, 무장을 마치고 갑판 위에서 대기하던 용병들은 여기저기 주저앉아 따가운 햇살에 투덜거리고 있었다.
누가 무식한 용병 놈들 아니랄까 봐 간략한 수준이지만 갑옷까지 착용한 녀석도 있었다.
갑옷이라는 것이 옷처럼 훌렁훌렁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저놈은 바다에 빠지면 익사 확정이다.
선교로 올라온 애꾸 레건이 내가 용병들을 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가서 한마디 할까요?”
“어? 아냐, 어차피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체력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보다 절반씩 나눠서 교대로 선실 가서 쉬라고 해. 육지에서처럼 갑자기 백병전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땡볕 아래에 다 있을 필요는 없지. 하지만 무장은 그대로 유지하고, 무장을 가지고 있는 만큼 문제 일으키는 놈은 즉결 처형한다고 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덥군요.”
레건이 선교를 떠나자 선회가 시작되었는지 몸이 살짝 쏠렸다.
그리고 오펜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했다.
“선장님.”
“무슨 일이야, 삼등항해사?”
“조금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해적들은 갤리선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순간적인 가속이나 선회도 좋고, 접현 후에는 여차하면 노 젓던 놈들까지 전투 병력으로 쓸 수 있으니까.”
“그런데 뒤따르는 놈들은 전부 범선인데요?”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고 나는 그레이그에게 선교를 맡기고 선미로 향했다.
물론 오펜은 함께였다.
우리 뒤를 따르는 분함대 선박들 때문에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저 멀리 뒤를 쫓는 배들은 모두 범선이었다.
“흐음….”
“어떻게 된 걸까요?”
“조심스럽게 두 가지 정도 추측해 볼 수 있지.”
“두 가지요?”
“하나는 해적들의 주둔지가 꽤 거리가 있다는 것. 갤리선으로 여기까지 와서는 바로 전투를 벌이기 힘들 정도로 말이야.”
“아, 그래서 범선만…. 그럼 두 번째는요?”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인데, 해적의 규모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크다는 거야.”
물론 자잘한 작은 갤리선까지 동원하지는 않았을 테고, 갤리선 자체의 사용이 줄고 있는 추세라 해적들도 최근에는 범선으로 많이 옮겨 타고 있기는 했다.
갤리선은 일단 상선 근처까지 다가가서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선회력과 기동성으로 상선을 기습해야 하는데, 요즘 상선들은 갤리선이 다가오면 정체에 상관없이 일단 자리부터 피하다 보니 기습이 어려워진 이유도 있다.
그래도 해적들이 연합을 했는데 갤리선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그 라프나도 자기 기함이 갤리선이었잖아.
아마 갤리선들은 어딘가에서 기습을 위한 매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별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눈앞에서 뿅 하고 해적선의 갤리선들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
“전방에 함대! 전방에 함대입니다! 함대 선두와 최소 거리 700!, 방향 320!”
섬을 끼고 돌고 있어서 그랬던 거다.
섬 때문에 사각이 생기다 보니 맞은편에서 오는 배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
갑자기 출현한 맞은편의 배는 당장 회피기동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조타수! 우현 전타!”
“우현 전타!”
내 외침에 조타수가 복창하며 있는 힘껏 타륜을 돌리기 시작했다.
“메인마스트 내려!”
“선장님! 그러면…!”
“충돌하면 다 죽어!”
내 말에 그레이그가 이를 악물더니 결국 조범수들에게 메인마스트를 내리라고 명령했다.
섬을 돌아 나오던 선박도 당황했는지 소란스러운 것이 보였다.
아, 연기!
연기를 보고 알센더트가 이쪽으로 지원 함대를 보낸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타이밍이!
“오펜! 지금 당장 후열에 수기 신호 보내! 전방에 지원 함대, 전 함선 속도 줄일 것.”
“네? 선장님, 그러면!”
“어쩔 수 없어! 어영부영하다가 이대로 아군과 얽히면 박살나는 건 시간문제야!”
“알겠습니다!”
오펜이 떠나자, 나는 타륜을 오른쪽 끝까지 돌린 채 버티고 있는 조타수를 보았다.
잠깐,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조타수! 타륜 풀어! 우로 15도만 잡아!”
“네?!”
“빨리!”
“네넷!”
내 말에 그레이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선장님! 왜 그러십니까?”
“일등항해사도 생각해봐! 당장 좌측에는 섬이라서 저쪽도 오른쪽으로 돌지 못해. 그럼 저쪽이 좌현전타하고 우리가 우현전타를 하면 어떻게 되겠어?!”
“아, 그럼…!”
배는 선회와 증감속이 느리다.
타륜 돌렸다고 곧바로 배의 진행 방향이 바뀌지 않고, 돛을 내린다고 바로 속도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두 선박의 700미터 거리는 단 한 번의 찍기 기회만 제공할 뿐이었다.
“우현 충돌 대비! 완충재 설치해!”
네이선의 지시하에 충돌 때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 우현에 여러 가지 그물망과 나무통, 별별 잡동사니가 매달렸다.
만약 충돌하면 잡동사니들이야 다 부서지겠지만, 그래도 선박에 주어지는 데미지는 줄어들 것이다.
거리 400.
배가 천천히 선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맞은편의 선박도 선회를 시작했다.
초조하게 망원경으로 상대의 선회크기를 확인하던 나는 조타수를 밀쳐내고 직접 타륜을 잡았다.
그리고 힘차게 타륜을 좌측으로 돌렸다.
“오펜! 전방 선박에 신호! 해적선 21척이 추격 중! 전투준비!”
“넷!”
우리는 이미 속도를 잃었다.
이대로는 곧 따라잡힐 터. 괜히 대열이 얽힌 상태로 뒤를 잡혀 얻어맞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한 판 붙는 게 나았다.
게다가 선두 선박의 뒤를 이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맞은편에서 오던 함대는 총 9척, 우리와 합치면 총 16척이니 한 판 붙어볼 만했다.
거리 150.
저쪽의 갑판 위에서도 선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온갖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풀 세일! 메인마스트 올려!”
완전히 내려갔던 메인마스트에 다시 돛이 걸렸다.
거리 50.
각도 좋고, 대참사는 확실히 피했다.
“총원 우현 충돌 대비!”
내 말과 함께 저쪽의 선교에서도 아련하게 선장의 명령이 들려왔다.
“총원 좌현 충돌 대비! 뭐든 붙잡아!”
잠시 후.
뿌드드득, 빠각! 쿠우웅!
우리 배와 저쪽 배에서 매단 온갖 완충재가 서로 부딪히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우현을 확인했다.
두 선박 간의 거리, 거리, 거리가 아무리 봐도 1미터는커녕 30cm도 안 되는 것 같다.
진짜 타륜을 돌리는 것이 3초만 늦었어도, 속도가 조금 더 빠르거나 느렸다면, 한쪽이 다른 쪽의 옆구리를 들이받는 대참사가 날 뻔했다.
선도하는 선박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래서 선단이나 함대를 구성할 때 선도하는 선박은 경험이 많거나 강력한 선박이 맡게 된다.
그런데 두 선단, 아니, 함대의 선도함이 서로 충돌이 난다면?
그 뒤는 줄줄이 다 박살 나는 거다.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물론 거리상의 여유가 있으니까 선도함들만큼 대형 사고는 나지 않겠지만, 뒤를 쫓아오는 해적선단의 맛있는 먹잇감이 되었겠지.
지금도 봐라, 우리 애들은 위기가 지나갔음에도 기가 질려서 다들 바닥에 주저앉아있는데 후열 선박들에서 함성이 터진다.
누가 보면 전투에서 이긴 줄 알겠다.
“으흐흐흐, 진짜 심장이 쫄깃하군요.”
“말도 마, 난 숨이 안 쉬어지더라.”
그레이그의 너스레에 나는 피식 웃으며 소리를 쳤다.
“지원도 왔고, 저 해적 놈들 박살 내버리자! 다 일어서! 총원 전투 배치! 용병대장은 선실에서 쉬고 있는 용병들 다 올려보내!”
“넷!”
“포술장에게 현 상황 전파하고, 다시 포격 준비하라고 해!”
“네!”
사실 속도를 잃어서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것이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
그래도 이전에 겪었던 전투들만큼 아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16:18, 고작 두 척 차이, 화력은 우리가 우세하니 해볼 만하다.
***
“이 섬, 돌아서 동쪽으로 빠져나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네?”
“잘 봐, 저 뒤에는 섬 때문에 다수의 선박이 포격을 위한 횡진을 펼칠 수 없어. 딱 봐도 지원 함대가 자리 잡으면 우리는 그 뒤에서 놀아야 해.”
“으음….”
“화력이 부족하면 당연히 해적 놈들이 백병전을 벌이려고 달려들 테고, 그렇게 정직하게 머릿수로 붙으면 우리가 불리하지. 그러니까 이 섬을 돌아서 놈들 뒤쪽을 잡으면….”
내 말을 듣고 있던 그레이그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선장님, 방법은 좋습니다만, 너무 위험합니다. 저들에게 우리가 돌아가는 것을 숨길 수도 없으니, 놈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우리를 막아서면 선두의 오트라스 혼자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해적 놈들의 진형을 보면서 확신이 생긴 것이 있다.
저놈들의 조직력은 우리보다 더 개판이라는 것 말이다.
단지 양면 전선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대응체계에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인간은 의외로 이성적이지 못하고,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게 마련이니까.
“저놈들이 과연 그럴까? 그렇게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그건….”
“장담하는데 우리가 섬을 돌아서 뒤를 잡으려는 모습만 보여도 저놈들은 자기들끼리 싸움이 날걸?”
물론 그 싸움이 서로 대포를 쏘고 칼을 휘두르는 종류는 아니겠지만,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을 피하고 일을 서로에게 미루면서 지휘계통에 혼선이 올 거다.
“선장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레이그는 전령으로 올라온 선원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우리가 전선을 이탈한다고 오해할 수 있으니 지원 함대에도 미리 알려줘야 했고, 후열의 함선들에게도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려야 했다.
***
투덜거리는 용병들 중 절반을 다시 선실로 들여보내고, 초조한 마음으로 약해진 바람을 원망하고 있는데, 멀리서 아련하게 포성이 울렸다.
“저쪽은 시작한 모양입니다.”
“으음, 빨리 가야 할 텐데. 견시수에게 정면과 우현 쪽 주시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늦으면 물량에서 밀린 지원 함대가 박살이 나고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었다.
그러면 살아남기도 힘들겠지만, 아마 해전사에 기록될 멍청한 졸장에 내 이름이 올라가지 않을까?
“선장님?”
“어? 우르, 아니, 포술장? 포갑판은 어쩌고 여기까지 올라왔어?”
“아아니, 계속 준비만 하라고 하고 포격 명령이 없어서….”
진짜 전성관을 하루라도 빨리 설치해야지.
그래도 폰테 섬의 허비 씨와 그의 아들 레이튼에게 트리토나 함의 전성관을 보여주고 비슷한 것을 다른 배에 설치할 수 있도록 연구해 달라고 했으니, 아마 다시 폰테 섬에 돌아가면 전성관 설치가 가능할 거다.
“일단 좀 쉬고 있어. 준비해야 할 상황이 오면 사람 보낼 테니까.”
“으응, 그냥 나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좀 답답한데.”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포격 준비가 끝났다면, 사람을 보내는 것이나 우르타가 바로 뛰어가서 지휘를 하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겠다.
“그런데 용병들이 불만이 많네? 요?”
“왜? 뭐라는데?”
“기운 빠지게 깔짝깔짝 준비만 시키고 화끈하게 붙지는 않는다고. 이게 애들 장난이지 무슨 전투냐고 그러던데.”
“하아아…. 냅 둬. 불만 좀 토했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지.”
무식한 용병 놈들은 모른다.
육상전에 비해서 해전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육지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병력손실의 대부분은 사상자가 아니라 탈영자다.
죽는 놈보다 부상당하는 놈이 더 많고, 그보다 더 많은 게 도망가는 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함선 간의 백병전은 전혀 다르다.
패배는 거의 전원 사망으로 종결될 때가 많고, 승리한 쪽도 사망자가 만만치 않게 나온다.
나만 해도 100명도 안 되는 선내 총원 중에서 10명 이상 죽어 나간 전투가 도대체 몇 번이었던가.
지금이야 웃고 떠들지만, 과연 백병전을 한 번 겪고 나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바다 위에서는 도망갈 곳도 없고, 몇 번이 될지 모르는 전투를 계속 참여해야 하는데도?
“섬의 끝단입니다!”
견시수의 외침에 나는 바로 다시 물었다.
“해적들은?”
잠시 시간을 끌던 견시수가 다시 소리친다.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흠, 설마 섬 뒤쪽에 숨어있나?
“우현 30도, 약간 바깥쪽으로 빠진다.”
“넷!”
타륜을 잡고 있던 오펜이 부지런히 타륜을 돌렸다.
“후열 함선에게도 전달해, 남쪽으로 조금 더 빠져서 섬을 빠져나간다.”
“알겠습니다.”
기습이니 매복이니 하는 것들은 상대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의미가 있다.
설마 우리가 이쪽으로 돌아올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 이쯤이면 우리를 막을 해적선들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도 없다는 것은 뭘 의미하겠어?
만약 우리를 그냥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함대 전체가 거대한 포위망에 갇혀서 신나게 두들겨 맞을 텐데 말이야.
놈들이 지휘 통제가 전혀 되지 않아서 대응을 못 했거나, 섬 뒤편에 숨어서 우리가 지나가면 달려들어 백병전을 시도할 생각이겠지.
만약 놈들이 매복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섬에서 조금 떨어져서 섬을 벗어나는 순간 정확하게 포격 사거리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꼴이 된다.
제발 나름대로 짱구를 굴려서 매복하고 있어라, 멍청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