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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64화 (265/420)

264화. 임기응변

최대한 빨리 4척의 선박을 수습해서 서쪽으로 달려가니 저 멀리 5, 6, 7번 함선으로 구성된 분함대가 포격을 쏟아붓는 것이 보였다.

상대는 보이지 않지만, 흑색화약 특유의 검은 연기가 계속 치솟는 것을 보니 아직 전세가 완전히 기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 정도 속도면 도착까지 약 30분 정도, 너무 늦지는 않아야 할 텐데…….”

“네?”

“아, 아니야, 그보다 다른 선박들에게 신호 보내, 전투 돌입 전까지 신호기에 집중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피 냄새를 풀풀 풍기는 네이선을 돌아보았다.

“선원들이랑 용병들 상태는 어때?”

“최고입니다. 체력 소모도 별로 없어서 바로 백병전이 벌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이번에는 양쪽 합쳐서 20척이 넘어. 백병전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영혼까지 탈탈 털릴 테니까 당분간 백병전은 피할 거야. 돌격대는 쉬기 힘들겠지만, 용병들은 쉬게 해.”

“음, 알겠습니다.”

두 배가 붙어서 백병전을 벌이는 동안은 사실 외부의 위협을 회피할 방법이 없다.

누군가 미친 척하며 충각으로 때려 박아도 그대로 맞아야 하고, 포를 쏘면 그냥 맞아야 하며, 누군가 반대쪽으로 접현하려고 다가와도 저지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상대의 수가 우리보다 많을수록, 양쪽의 함선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아군 집단과 멀리 떨어질수록 백병전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트리토나 함(폰테 섬에 남겨둔 전열함) 정도가 되면 체급이 워낙 차이가 나다 보니 혼자서 무쌍을 찍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

5, 6, 7번 함선과 신호기를 교환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가자, 개판이 된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하다.

사방에 배들이 서로의 진로를 방해하며 엉망진창으로 엉켜있었고, 그중 절반은 지원함대로 보이는 배들이었다.

접현해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으로 보이는 선박은 지원함대 6척과 해적선 7척, 나머지 지원함대 3척과 해적선 4척은 서로 포격 각도를 내주지 않기 위해 느릿느릿 기동 중이었다.

원체 좁은 지형인데다가 사방에 백병전 중인 아군과 적군이 장애물로 있다 보니 메인마스트는 펼 엄두도 못 내는 모양이다.

어떻게든 해적선을 위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포격각을 찾아 포를 쏴 재끼던 567 분함대는 냉큼 이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5번 함선에서 신호입니다! 복귀하겠답니다!”

견시수가 받은 신호를 전달하기 무섭게 내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졌다.

“제기랄, 이런 난장판에서는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해?”

“그러게 말입니다.”

늘 자신감에 차 있던 그레이그 일등항해사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혼전이었다.

“일단 합류하라고 해.”

방금 전 초전에서 남은 해적선을 내쫓은 것처럼, 해적들에게는 위협적인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 저항한다는 선택지가 없다.

지금도 해적선 한 척은 마음만 먹으면 1:1로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동료를 도울 수 있는 위치다.

그런데 굳이 접현을 피하고 있다는 것은, 이 네 척이 해적들 중에 가장 눈치를 보는 네 척이라는 뜻이겠지.

자, 생각해보자.

지금 상황이 백중세라고 가정하고 뒤에서 세 척이 얼쩡거리는 것도 눈에 거슬렸는데, 그게 일곱 척이 되면 과연 반응이 어떨까?

과연 지금 눈치를 보고 있는 네 척의 해적선이 마지막까지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막아설까?

“목표는 가장 북쪽에 있는 해적선이다. 다른 배들에게 전파해. 포격으로 저놈만 조진다.”

“일곱 척이 한 타겟을 노리면 효율이 떨어집니다. 차라리 반으로 나누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레이그가 냉큼 제안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저쪽, 2:1로 악전고투를 하는 쪽은 빨리 지원해 줘야 해. 그러려면 일단 길을 비워야지.”

그랬다. 지금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지원함대는 6척, 해적선은 7척으로 해적선이 한 척 더 많다.

그 말은, 지원함대 소속 선박 한 척은 지금 2:1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주변을 돌고 있는 세 척의 지원함대가 감히 지원하지 못하는 이유도 알만했다.

지금은 2:1이 한 곳이지만, 그걸 돕겠다고 한 척이 빠져나가고, 그렇게 하나씩 달라붙으면 결국 2:1로 불리한 곳이 두 곳이 되어버린다.

***

시간이 흘러 5, 6, 7번 함선이 우리 꼬리에 붙어 기동을 시작하자 해적선들에서 다급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흐흐흐, 이제 와서 허둥대봐야 늦었지. 도망가려면 진작 움직였어야지.”

나도 모르게 비열한 웃음과 함께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가 흔들리며 포격이 시작되었다.

“조타수, 좌로 15도, 북쪽 섬에 최대한 붙어서 기동한다. 지옥을 보여주자.”

“넷! 좌로 15도 잡습니다!”

오트라스를 따라 기동하던 배들이 포각을 잡기 무섭게 우리가 포격한 배에 계속해서 포격을 가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유효타는 피하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조만간 난타당해서 바

다 속에 가라앉을 운명이 확실해 보였다.

제삼자의 눈으로 봐도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길이 없다고 해서 바다 위가 교통체증 걸린 고속도로마냥 배로 가득 찼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배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상당히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아슬아슬할 정도로 좁은 공간을 요령 있게 빠져나갈 정도로 미세한 컨트롤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포격을 받던 해적선은 선수를 우리 쪽으로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섬을 끼고 있는 우리를 돌파하면 뒤가 비었으니 도박수를 던져 보겠다는 뜻인데….

“뻔히 보이는 수작질을. 2번 함선에 신호, 지금 두들기는 선박 침로 차단해. 그리고 우리가 붙으면 반대쪽에 붙으라고 해. 그리고 3번 함선에 신호. 7번 함선까지 모두 데리고 선회해서 다른 해적선 조지라고 해.”

한 번 보여줬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충 알겠지.

***

“거리 200, 속도 줄이지 않고 있습니다!”

“저 미친놈들이….”

꽈과과과과과과광!

오트라스의 좌현 포대가 다시 불을 뿜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해적선에서 나무 파편이 튀고 메인마스트가 휘청거렸다.

어떻게 맞으면 메인마스트가 휘청거리… 응?

“으아아악! 넘어갑니다!”

견시수가 겁에 질려 주어도 없는 보고를 소리 질렀지만, 굳이 뭐가 넘어가는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거대한 메인마스트가 만화의 한 장면처럼 꺾여 넘어지고 있었다.

꺾인 지점은 대충 하단부터 1/3쯤 되는 지점, 한쪽으로 무게가 쏠리면서 배 전체의 균형도 크게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꽈으으응!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한 메인마스트가 굉음과 함께 완전히 부러졌고, 해적들은 갑판 위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부러진 마스트와 연결된 로프를 끊느라 정신이 없었다.

“흐음, 지금 돌격해? 말아?”

“굳이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이미 기동력을 거의 상실했는데요. 그냥 둬도 될 겁니다.”

“뭐 그렇기는 하지. 그나저나 메인마스트 부러지는 것은 처음 봤다. 어마어마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포술장의 실력이 날로 좋아지는군요.”

글쎄. 그냥 이건 실력보다는 운 아닐까?

운도 실력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한데.

“2번 함선에게 신호, 반파된 선박은 두고 오트라스를 따르도록.”

***

…그렇게 기동력을 ‘거의’ 상실한 녀석이라고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1로 싸우던 지원함대 소속 선박을 돕기 위해 2번 함선과 해적선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급한 견시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견시 보고! 후방 반파된 적선이 2번함에 접현했습니다!”

“뭐?!”

마스트가 망가져서 기동성은 극단적으로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백병전 전투력이 크게 상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누가 그걸 걱정이나 했겠냐고.

나보다 한참 느린 놈에게 따라잡히는 멍청이가 어딨어?!

“2번함은 도대체 뭘 한 거야?!”

“도주 경로를 막아섰다가 충돌 당한 모양입니다!”

상대가 충각을 달고 있던 것도 아니고, 속도도 느렸으니 배에 큰 피해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걸로 양쪽의 배가 서로 붙어버렸다는 것이겠지.

“지금 배를 돌릴 수 있나?!”

이미 주변을 살피고 있던 그레이그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늦었습니다. 그리고 선장님, 전면을 봐주십시오.”

“뭔데?!”

꼬여버린 상황에 짜증이 난 나머지 신경질적으로 전면을 보자, 어느새 움직이기 시작한 두 척의 해적선이 보였다.

“씨발….”

지원하려던 아군 선박의 인원이 전멸한 것으로 보였다.

하필이면 해적선 중에 한 척은 우리가 진행하는 방향과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방향, 이대로라면 3분 내에 접현 가능 거리에 접어들 판이었다.

저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3분이면 바리케이트 쌓기도 빠듯한 시간이고, 앞뒤로 공격을 당하면 불리하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

“조타수 비켜!”

급히 자리를 비킨 조타수의 자리에 선 나는 이를 악물고 좌측으로 최대한 타륜을 돌렸다.

“선장님? 지금 무슨…?!”

그레이그가 깜짝 놀라며 나를 따라왔지만 나는 계속 타륜을 돌렸다.

“양현에 접현 당하면 불리해. 그러면 한 쪽을 틀어막아야지.”

“네?”

“우리는 좌현의 저쪽에 보이는 아군 선박 옆에 접현한다.”

어차피 두 척을 상대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당장 거리상으로 우리를 도와줄 아군도 없으니 차라리 우리가 아군의 옆에 붙는 거다.

그러면 한쪽으로만 적을 맞으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좌현 선박에 신호 보내겠습니다!”

“좋아.”

신호를 볼 여유가 있으면 좋으련만.

상황이 어찌 되었건 곧 우리의 의도를 눈치챈 해적선들이 미친 듯이 우리를 뒤쫓았다.

***

“서, 선장님….”

당황하는 그레이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접현한다!”

“아군은 이미 전멸 직전입니다만.”

“그래도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나아.”

이미 속도도 꽤 죽은 상태고, 근처에는 적당하게 붙은 선박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배라고 지금보다 상황이 더 좋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아, 상황이 어떻냐고?

하필이면 우리가 아군 선박에 접근했을 때, 갑판 위의 상황은 이미 전세가 기운 상태였다.

딱 봐도 해적으로 보이는 놈들 50여 명이 이제 열댓 명이나 남은 선원들을 도륙하는 중이었다.

접현이 지구의 모 게임처럼 붙으면 바로 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접현하고 널빤지 놓는 시간이면 아마 살아있는 아군은 한 명도 없을 것 같다.

“쇠뇌수, 공격해! 나머지는 아군에게 이쪽으로 모이라고 소리 질러!”

나는 최선을 다해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명령을 내렸지만, 그저 최선을 다했다 정도였다.

“돌격! 한 놈도 살려두지 마!”

접현이 완료되었을 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두 명의 선원이 쓰러졌고, 용병들과 돌격대가 함성을 지르며 돌격을 하자 처음에는 제법 맞서는 것 같던 해적들은 썩은 짚단처럼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쪽은 한동안 쉬면서 체력을 보충했고, 해적들은 얼마나 오래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 전투를 벌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일등항해사, 추적하는 적선은?”

“거리 800정도입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 정도라면 거의 4~5분 후면 우리를 따라잡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부터 선교 지휘는 그레이그 일등항해사가 담당한다.”

“선장님!”

“위기의 순간에는 리더가 나서야 해. 잘 부탁해, 일등항해사!”

“선장님, 차라리 제가….”

다급하게 나를 말리는 그레이그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날듯이 선교를 내려가 포갑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 선원들을 데리고 올라오던 우르타와 마주쳤다.

“어! 리안?! 아, 선장님?”

당황한 우르타가 나를 보며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나는 다짜고짜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모두 나를 따라와! 우현에 바리케이트를 쌓는다! 빨리!”

“아얏, 놔, 놔! 놔요! 나 혼자도 잘 가!”

정신없이 바리케이트를 쌓고 있는데 일단의 용병들이 다가왔다.

“선장님, 용병대장 레건입니다!”

“어, 애꾸! 그쪽 상황은?!”

“갑판장이 알아서 정리한다고 저를 보냈습니다. 제일 쌩쌩한 놈으로 30명 추려왔습니다!”

“좋아. 다들 잠시라도 숨 돌리고 있어. 우리의 목표는 후방의 아군이 정리 끝내고 올 때까지 여기 바리케이트를 사수하는 거다. 여기만 지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알겠습니다!”

배 위에서 바리케이트를 쌓아본 적이 없는 용병들은 내 말을 이해하고 바로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고르기 시작했고, 나는 줄 갈고리를 돌리는 해적 놈들을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신이 없어서 쇠뇌를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저쪽은….

“엄폐!”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원들과 용병들이 급히 자세를 낮췄고, 이후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십여 발의 쿼럴이 바리케이트에 박혔다.

“아악!”

움직임이 굼뜬 녀석이 있었던 모양인지 비명 소리도 하나 터졌다.

눈을 돌리니 오른쪽 어깨 위쪽을 감싸 쥔 용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피는 흐르는데 쿼럴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관통하거나 스친 모양이다.

신경이 다쳐서 팔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저 정도는 경상이다.

“모두 적의 쿼럴에 주의하고 막는 데에만 신경 써! 우린 이길 수 있다!”

“으와아아아아아!”

전투 직전의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서 다 같이 한 마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네이선, 너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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