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66화 (267/420)

266화. 주사위를 던져라

“여기는 오트라스, 피오렐, 들리나?”

“치치익, 제독! 괜찮으십니까?! 여기는, 치이익.”

“피오렐! 무슨 일인가?”

“기습당했습니다! 확인된 적 함선 총 14척! 곧 교전에 들어갑니다!”

제기랄, 도대체가 해적선이 몇 척이나 모인 거야?

여기서 후퇴한 해적선이 바로 그쪽으로 모이지는 않았을 테니 여기와 양동, 혹은 양면 포위를 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이쪽에 동원된 해적선이 총 18척이었으니, 저쪽이 14척이면 최소한 32척이다.

의용 2함대 전력이 39척이라고 해도 8척은 전투력이 보잘것없는 수송함 개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해적 연합의 전력은 이미 우리의 전력을 상회한다.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이쪽 해적은 격퇴했다. 최대한 빨리 합류하겠다. 상황은?”

“치익, 섬 점령 중에 기습을 당해서 쉽지 않습니다! 윽!”

무전기 너머로 상당히 큰 소음이 들려왔다.

“피오렐! 무슨 일인가?!”

“후읍, 괜찮습니다, 지근탄입니다. 그런데 대비가 전혀 되지 않아 힘듭니다! 당장 8척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알겠다. 버텨!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만 있으면 구하러 가겠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 치이익….”

“피오렐! 피오렐!”

“…….”

나는 무전기를 내리며 인상을 구겼다.

마지막에 들린 소리는 무언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아인델프가 무전기를 놓친 모양이다.

“선장님….”

“젠장, 일등항해사! 현재 전황 보고!”

“아군 여섯 척, 해적 네 척이 접현 중입니다. 기동 중인 아군 선박 다섯 척, 적 함선 한 척이 도주 중입니다.”

나는 재빨리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폈다.

나를 따르던 3, 4, 6, 7번 함선이 분함대를 이루어 포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군 전체 선박에 신호, 포격 및 추격 포기하고 오트라스를 따르도록.”

“선장님, 그렇게 되면….”

“지금 접현 중인 아군 선박들은 어차피 신호를 보지도 못할 거다.”

“그게….”

나는 미적거리는 그레이그를 보았다.

그의 눈에 탐욕과 갈등이 넘실거린다.

“일등항해사! 정신 차려! 지금 전과나 전리품이 문제가 아니야! 피오렐과 리버티가 전멸할 상황이다! 당장 신호 보내!”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장!”

옅은 한숨을 내쉰 그레이그가 전령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동안 바로 해도실로 달려갔다.

최단거리로 잡아도 본대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 필요한 시간은 1시간 남짓.

아니, 아직 가보지 않은 섬 사이의 해협으로 지나면 30분 안쪽으로 줄일 수 있다.

하지만 해협은….

늘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해협은 와류가 있거나 급류가 흐르기도 한다.

특히나 내가 지금 통과하려는 해협은 섬 사이의 최단 거리가 100m도 되지 않는 좁은 곳, 심지어 수심 체크도 하지 않은 곳이라 자칫 잘못하면 좌초되거나 와류에 휩쓸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근탄까지 터지는 상황이라면 1시간 후는 전투 종료 시점이 될 게 뻔하다.

해도실 밖으로 나온 나는 바짝 긴장한 오펜과 그레이그에게 말했다.

“좌측에 보이는 두 섬 사이로 진행한다. 풀 세일! 160도 잡아.”

섬을 확인한 오펜의 눈이 두 배쯤 커지고, 그레이그가 기함하며 내 팔을 붙잡았다.

“서, 선장님! 너무 위험합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저 좁은 곳을 최대 속도로 돌파하신다는 겁니까?!”

“어차피 늦게 가나 우리가 좌초되어서 못가나 결과는 똑같아. 본대가 전멸하면 우리끼리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안 됩니다! 절대 반대입니다!”

그레이그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흥분해서 소리쳤고, 오펜 역시 몇 번이나 섬 사이를 확인한 후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장님, 제 생각에도 이건 너무….”

오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레이그의 커다란 목소리가 그의 말을 덮었다.

“우리야 그렇게 간다고 해도, 다른 함선들이 따를 리가 없습니다. 기껏 통과한다고 한들 오트라스 혼자서 뭘 하겠습니까?!”

이성적으로 보면 그레이그의 말이 옳았다.

아인델프의 마지막 보고에 의하면 현재 전력 차는 14:8, 본대에 남아있는 전투함이 15척인데 8척이 맞선다는 말은 나머지 7척이 모종의 이유로 현재 전선 투입이 불가능하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오트라스 하나가 가세한다고 해도 전력 차는 뒤집어지지 않는다.

“미치겠군….”

내가 답답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데, 견시수의 보고가 들려왔다.

“아군 중 6개 함선이 신호를 수신했습니다!”

“후우, 선택의 여지가 없어.”

“선장님!”

나는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그레이그를 보았다.

“일등항해사, 이게 무모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를 따르겠다는 6척과 함께 본대가 패배하기 전에 전투 중에 가세할 수만 있다면 대승을 거둘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안전하게 돌아가거나 못 가면 본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야 할 거야. 지금은 주사위를 던질 시간이야.”

“부친께서 생전에 도박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만.”

나는 체념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는 그레이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다고 도박을 안 하고 살지는 않았잖아?”

뱃사람과 술, 도박, 여자는 끊을 수 없는 관계다.

술을 안 마시는 가빈인가 하는 그놈이 이상한 거지.

“목숨 걸고 도박하는 것은 처음입니다만….”

“에이,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성의 없이 하나? 전투 자체가 목숨 걸고 하는 도박인데.”

“선장님과 함께하면 재미는 있습니다만, 건강에는 아주 좋지 않은 것 같군요.”

내가 피식 웃자, 따라 웃은 그레이그가 오펜에게 소리쳤다.

“삼등항해사! 160도 잡아!”

“160도 잡습니다!”

***

“몇 척이나 따라오나?”

“…네 척입니다.”

이해는 한다.

저들은 무전기가 없으니 현재 본대가 무슨 상황인지 모를 테니까.

내가 알려주고 싶어도 본대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을 무슨 수로 설명하겠는가?

심지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수기 신호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판에.

“네 척이라도 따라오는 것을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저는 솔직히 한 척도 따라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만.”

쓴웃음을 짓는 그레이그의 말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제 전투는 끝났고 전리품을 챙길 차례다.

용병함대건 뭐건 제일 큰돈이 되는 것은 전투 후의 전리품 회수인데, 그걸 포기하고 나를 따라오기가 쉽겠냐고.

심지어 따라오라고 하는 방향이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해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갑판장, 선수와 양 현 견시수 추가 배치는?”

물에 젖은 천으로 얼굴과 몸을 닦고 있던 네이선이 급히 대답했다.

“선수에 두 명, 양 현에 세 명씩 배치했습니다. 눈 좋고 경험 많은 녀석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병들 상황은?”

“사망 7명, 중상 3명, 부상 18명입니다.”

“당장 투입 가능한 전력은 그럼 50여 명인가?”

“부상자 중에 전투 가능한 자가 꽤 돼서 60명쯤 됩니다.”

“닥터가 고생하겠군.”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우리 선원들은?”

“돌격대 부상 1명, 포병대 사망 1명, 부상 4명입니다.”

“후우, 포격도 제대로 못 하겠네.”

“우르타가 알아서 잘할 겁니다.”

네이선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장식 대포는 구조가 간단하지만, 장전에 손이 많이 간다.

지금 우르타가 구성한 방식은 포 한 문 당 선원 둘이 붙는 케이스인데, 이것도 포갑판 자체가 협소하여 인원을 최대한 줄인 것이다.

그런데 그 인원마저 줄었으니, 당연히 장전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분은 우르타가 아무리 포술에 재능이 있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다.

“해협 진입합니다!”

오펜의 말에 나는 잡다한 생각을 관두고 전면을 주시했다.

“일등항해사가 타륜을 잡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레이그는 군말 없이 오펜이 비켜준 자리에 서서 타륜을 잡았다.

원래 운전 실력은 경력에 비례하는 법이다.

***

쿠웅! 꾸우우우우웅…!

“뭐야?!”

“암초, 아니, 모래톱 정도인 모양입니다. 스쳤습니다!”

“오펜! 후열에 신호! 현 위치 모래톱!”

“넵!”

그레이그는 이를 악문 채 천천히 타륜을 돌렸다.

충돌을 했다고 급하게 타륜을 돌렸다가는 방향이 완전히 틀어져서 좌초되기 십상인 곳이다.

“갑판장! 좌현 하부에 문제 생겼는지 확인해!”

“넷!”

만약 지금 지나는 섬 좌우에 해안포가 설치되어 있다면 어떨까?

해류가 꽤 빠른 지역인데다가 선회를 할 정도로 폭이 넓은 곳도 아니니, 최대한 빨리 통과하는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데 출구를 막고 좌우 포대에서 포탄을 날리면, 상상만 해도 오싹하네.

물론 지금은 그럴 걱정이 없으니 이렇게 진입한 것이기는 하다.

그보다 부디 뒤따르는 함선들도 노련한 사람이 타륜을 잡아야 할 텐데.

대략 10분 사이에 비슷한 위기가 네 번쯤 더 찾아왔다.

하지만 노련한(?) 그레이그 일등항해사는 배에 큰 피해 없이 위기를 지나쳤고, 덕분에 뒤따르는 함선들 역시 큰 문제없이 해협을 통과할 수 있었다.

“후우, 이제 좀 안심해도 되겠군.”

“네, 이 정도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제 돛을 다 올리지.”

“네, 조범수! 풀 세일로!”

솔직히 해협을 통과하면서 풀 세일로 하겠다는 것은 너무 무모해서 이 부분은 양보했다.

오히려 해류가 너무 빨라서 내가 추가로 돛을 더 내리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한 쪽 섬은 이미 통과했고, 다른 섬도 끝이 보이는 지금 풀 세일로 하기에는 충분했다.

해도상으로는 볼 때, 이렇게 10분 정도만 달리면 본대가 전초기지를 건설하기로 한 섬이 보이게 될 것이다.

***

“전방에 연기 다수! 아군 본대가 교전 중인 것 같습니다!”

견시수의 보고가 터지기 무섭게 바로 명령을 내렸다.

“후행 함선에 신호! 전방 본대 교전 중! 함대 전투 배치!”

“전투 배치합니다! 총원 전투 배치!”

그레이그의 복창이 끝나기 무섭게 갑판이 소란스러워지며 선원과 용병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하늘을 보니 태양이 수평선에서 한 뼘쯤 위에 떠 있다.

앞으로 두 시간 안에 해가 지리라.

점심도 제대로 못 챙겨먹어서 그런지, 이런 와중에도 속없이 배가 고프다.

잠시 후, 성능이 좋지 않은 망원경을 쓰는 견시대의 견시수보다 내가 먼저 수평선에 걸린 배들을 보았다.

그런데 배치가 좀?

“이봐, 일등항해사. 지금 교전이 발생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왜 붙어있는 배가 없지?”

“네? 설마…?!”

“아니, 아니야. 아직 서로 포격하고 있어. 그런데 이건 마치….”

마치 정석적인 포격 대형 같은데?

해적선이 용병함대를 상대로 포격전을 걸고 있다고?

목적이 서로 다른 해적선과 용병함대는 주력하는 공격 방식이 전혀 다르다.

용병함대는 어찌 되었건 적을 격퇴하기만 하면 되니까 원거리 공격, 즉 포격에 더 비중을 두고, 목적이 약탈인 해적선은 기본적으로 포격은 위협용이고 백병전에 중점을 둔다.

그러니까 용병함대와 해적선이 붙으면 해적선은 접현을 하기 위해 기를 쓰고, 용병함대는 최대한 거리를 확보해서 더 많은 포탄을 쏟아붓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우리와 싸운 해적선들도 마지못해 몇 발의 대포를 쏘았을 뿐, 실제로 제대로 포격을 한 경우는 거의 없지 않았던가.

조금 전 그 난장판을 거쳐 왔는데, 오트라스는 포탄에 단 한 발도 피격되지 않았다.

“오펜, 무전기 가져와.”

“네!”

“선장님, 어떻게 할까요?”

그레이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명령을 내렸다.

“일등항해사는 일단 현재 침로 유지하고, 후열에 신호, 전 함대 포격 준비! 그리고 포술장!”

“넵, 선장님! 준비할까요?!”

“어, 인원이 줄어서 힘들겠지만, 고생 좀 해줘.”

“걱정 마십쇼! 진짜 대포가 뭔지 보여줄 테니까!”

냅다 뛰어가려는 우르타의 팔목을 잡아 붙든 용병대장 애꾸, 아니, 레건이 말했다.

“포술장, 잠시만. 선장님, 용병 중에 포병대에 잠깐 있던 녀석들이 있습니다. 포술장에게 붙여 주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흠, 믿을 만한가?”

“농담도. 믿을만한 녀석이 왜 포병대를 관두고 용병 짓을 하고 있겠습니까?”

기분은 나쁜데 너무 팩트로 두들겨서 반격할 말이 없다.

내가 인상을 구기고 레건을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돌리며 턱을 긁었다.

“…그래도 당장 문제를 일으킬 녀석들은 아닙니다.”

“후우, 몇 명인데?”

“셋입니다.”

“포술장, 용병대장과 함께 가서 포병대에 있었다는 용병들 함께 데리고 가.”

“알겠습니다!”

그래, 뭐 고작 세 명이서 열댓 명이나 되는 선원들을 상대로 뭔가 하지는 못할 테니 일단 쓰자.

최소한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선장님, 여기 무전기 가지고 왔습니다.”

“어. 그래.”

나는 무전기를 받아들고 피오렐을 호출했다.

“여기는 오트라스, 피오렐, 응답하라.”

“…….”

“피오렐, 들리나?”

“…….”

몇 번이나 반복해서 호출했지만, 무전기에서는 노이즈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크흠….”

“선장님….”

그레이그는 침음성을 흘렸고, 오펜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나를 불렀다.

“아니야. 설마 그사이에 무슨. 아인델프가 얼마나 유능한지 다들 알잖아?”

“네, 물론입니다, 선장님.”

“그, 그렇죠!”

분명히 아인델프는 유능한 선장이고, 피오렐은 뛰어난 함선이다.

그리고 선원들은 대부분 나를 오랜 시간 따라다닌 뛰어난 이들이지.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고작 30분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에 불행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으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글쎄요….”

망원경을 들고 있던 그레이그도 당황스러워하며 애매한 대답을 뱉었다.

“일단 좌현 전타, 저놈들이 해적들 같은데 두들겨 패고 보자.”

“네, 조타수, 좌현 전타!”

그레이그가 돛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 바람을 확인하는 것을 보며 오펜에게 말했다.

“오펜, 포갑판으로 가서 전달해, 우현 포격 준비.”

우리를 발견한 해적선이 허겁지겁 선수를 돌리고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상대하고 있던 본대 쪽으로 파고들 생각이 아니라면 후퇴밖에 없는데, 그러면 필연적으로 본대에게 후미를 내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전황을 확인하니 아군 피해가 적지는 않았다.

백기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기동을 멈춘 아군 선박이 다섯 척이나 보였다.

대충 봐도 선체가 너덜너덜한 것이, 백병전이 아니라 포격에 당한 것 같다.

심지어 두 척은 심각할 정도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화약고에 불이라도 났나, 뭔 연기가….”

“화약고가 터졌다면 이미 바다에 가라앉았을 텐데요.”

“그것도 그렇네. 그럼 저건 뭐야, 도대체? 어떤 얼간이가 불이라도 낸 건가?”

“그나저나 피오렐은 무사한 것 같군요.”

“음.”

그레이그의 말대로 피오렐은 아직 괜찮아 보였다.

여기저기 피격 흔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 무사하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지만, 아군 함선 중에 다섯 척이나 기동을 멈춘 상황에서 아직 기동에 문제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우리가 돌아서 왔다면, 확실히 늦었겠군.”

내 말에 그레이그가 고개를 저으며 불퉁거렸다.

“이번에야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 또 이러시면 진짜 화를 낼 겁니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라고. 그래도 이번에는 주사위 운이 좋았잖아?”

우리가 개입하기 전에 아군은 신나게 두들겨 맞는 중이었던 것 같다.

남은 아군 함선은 8척에 불과했고, 얼마나 급했는지 리버티가 포함된 수송함대까지 뛰쳐나와 한쪽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봐야 해적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살짝 신경이 쓰이게 하는 정도였겠지만,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은 해적선은 아직도 14척.

잠깐만, 그런데 뭔가 계산이 안 맞는데?

본대에 남은 전투함이 15척이었으니 5척이 기동 불가면 10척이 남아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해적선이 14척이라며?

저기에 침몰 직전 상태로 겨우 바다 위에 떠 있는 2척의 해적선은 뭔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넘어가고, 일단 지금부터는 우리가 유리하다.

진입한 방향이 아주 좋아서 풍상을 우리가 잡고 있고, 해적선들은 ㄱ자로 포위되어 이대로 붙으면 진행 경로가 제한되는 것도 모자라 십자포화까지 맞아야 할 판이다.

함선의 수도 아군이 13척, 해적들은 14척으로 거의 비슷한 상태, 이런 상황에서 해적들의 선택은 딱 하나, 도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