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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67화 (268/420)

267화. 전투의 끝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휘청.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 잠깐 중심을 잃은 것뿐이야.”

“피곤하시겠지만 아직 정신 챙기셔야지요.”

“음….”

피곤한 것도 피곤한 것이지만, 당장 생명에 위협이 없다 보니 긴장이 풀려서 더 그런 듯하다.

나는 난간에 부딪혀 통증이 느껴지는 무릎을 주물렀다.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 같던데, 혹시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걱정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말이지.”

“네? 무슨…?”

일등항해사 그레이그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도 말을 하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언뜻 생각해보면 걸리적거리는 부분은 많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럴듯하기도 하고….

당장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만한 시간도 없었지 않은가.

“아니,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지.”

“포격 대비!”

타이밍 좋게 견시수의 외침이 들리자 우리는 재빨리 자세를 낮췄다.

촤아아악.

지근탄이 있었는지 갑판 위로 물줄기가 떨어지며 용병 몇 명을 쫄딱 젖게 만들었다.

거칠고 저열한 욕설이 난무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그레이그에게 지시했다.

“조금 더 붙지.”

“지금도 아슬아슬합니다만?”

“저놈들, 도주가 우선이야. 걱정 말고 조금 더 붙어.”

“알겠습니다, 선장님.”

그레이그가 타륜을 잡은 오펜과 조범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놈들의 집결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거리가 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엉망진창이던 순간에 들이치지 않고 이제 와서야 들이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격 시점이 아주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분함대를 이끌고 나서기 전이었다면 제대로 대응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찬찬히 생각해보니, 놈들이 두 갈래로 병력을 나눌 때 우리가 먼저 싸운 쪽은 포격보다 백병전을 목적으로, 이쪽은 포격을 목적으로 했던 것이 확실하다.

당장 날아오는 포탄의 수부터 차이가 나는 데다가 정확도도 확연히 다르다.

쿠우웅!

둔중한 소음과 함께 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우현 선수 피탄! 우현 선수 피탄!”

“갑판장! 피해 상황 보고!”

꽈과과광, 꽈광, 콰과과광!

견시수의 피격 보고를 듣기 무섭게 네이선에게 소리를 쳤지만, 내 목소리는 이내 우리 쪽 포격음에 묻혔다.

제어에 약간 실패했는지 깔끔하지 못한 포성이 울리고 우리에게 포를 쏘았던 해적선 근처에 물기둥이 치솟았다.

“큭, 이쪽이 변침 중이라 앞으로 한두 번은 포격에서 불리할 겁니다.”

그레이그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괜찮다.

정확한 보고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느낌상 데미지는 크지 않다.

“후열은 잘 따라오나?”

내 말에 바로 뛰어가 후방을 확인하고 온 그레이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에서 따라붙을 정도로 우리를 믿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레이그의 보고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통 용병함대는 해적들을 ‘토벌’하지 않는다.

막말로 해적을 다 토벌해버리면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 것은 본인들이니까.

그래서 그저 해적들을 ‘쫓아내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용병들이었다.

그러니까 후퇴하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해적선들을 피해를 감수하며 굳이 쫓아가서 두들겨 패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두 집단의 목적이 다르지 않나.

원래 해적의 목적은 ‘약탈’이고 용병함대의 목적은 ‘격퇴’였다면, 지금 해적들의 목적은 ‘격퇴’ 우리의 목적은 ‘토벌’이다.

그저 쫓아내기만 해서야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바닥없는 늪과 같은 전투가 기다릴 뿐이다.

“상대가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괜히 혼자 다가가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물러날까요?”

“아니! 한 놈이라도 더 잡아야 해! 앞에 가는 놈은 포기하고, 세 번째 녀석에게 집중하지.”

해적선을 선도하는 녀석은 덩치도 덩치지만 그냥 봐도 피해가 거의 없는 녀석이었다.

저런 녀석을 고작 오트라스 혼자서 반파나 완파 상태로 만들려면 한 두어 시간은 쉴 새 없이 두들겨야 할 거다.

물론 럭키샷이 터져준다면야 그딴 거 다 필요 없이 한방이겠지만, 럭키샷이 하루에 두 번이나 터질 리가 없다.

이전 전투에서 해적선의 돛대를 부러뜨렸으니 오늘 운은 다 썼다고 봐야겠지.

그에 반해 세 번째에 위치한 해적선은 크기도 오트라스보다 조금 작고, 상태도 영 좋지 않았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면 선체 여기저기에 급히 수리한 흔적도 보이고 피탄된 곳도 상당히 많았다.

이미 도주 중인 적을 포격을 주고받으며 추격하는 것은 위험한 것을 넘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줄일 수 있는 적을 최대한 줄여놓는 것이 옳다.

“다른 함선들에게도 신호 보내. 잡을 수 있는 놈만 잡으라고. 지금 수를 줄여놓지 않으면 진짜 년 단위로 숨바꼭질을 해야 할지도 몰라.”

“넷!”

지시를 하는 그레이그에게 시선을 떼고 후방의 본대를 확인했다.

부랴부랴 추격을 위해 선회 중이었지만, 해적 함대는커녕 우리보다 한참 뒤쪽이다.

그래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혹시 모를 적의 지원군에 대한 대비는 될 것이다.

뭐, 지원군을 보낼 병력이 있었다면 같이 왔겠지만.

아마도 해적 연합 함대에서 오늘 공격에 가담하지 않은 전력은 갤리선밖에 없지 않을까?

***

이후로 30분쯤 추격하며 포격을 가했지만, 해적선을 더 침몰시키거나 하지는 못했다.

아예 맞추지 못한 것은 아니고 꽤 많이 맞추기는 했다.

하지만 포탄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구형탄은 선박에게 데미지를 잘 주지 못했다.

정말 선박의 중요한 구조물을 때리지 않는 이상에야, 전투 능력이나 항해 능력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기함 마르티엘로부터 신호입니다. 전 함대 철수 및 집결하라고 합니다.”

“선장님.”

견시수가 수신한 내용을 전하는 전령이 쭈뼛거리며 말을 마치자 그레이그가 피곤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쯧, 아쉽지만 더는 우리도 힘들겠지. 귀환한다. 일등항해사가 지휘하게.”

“네, 선장님.”

“갑판장이랑 용병대장은?”

“갑판장은 긴급 수리 지휘 중이고 용병대장은 갑판에 대기 중입니다.”

200미터쯤 되는 근거리에서 포격을 주고받은지라 우리 쪽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세 발이 배에 명중했고, 근처에 조선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긴급 수리를 지시했었다.

“좋아, 전투 배치 해제. 돌아가자. 용병대장은 선장실로 오라고 해.”

내 이야기를 들은 전령이 내려가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마지막으로 망원경을 들어 확인하니, 우리가 선수를 돌리고 있음에도 해적들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도주에 여념이 없었다.

선장실로 향하다가 문득 바닥을 보니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좀 많이 어두워진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더니 웬걸, 빨갛게 물든 해가 이제 막 수평선에 닿으려던 참이었다.

미치겠군, 하루 종일 전투를 벌인 거야?

***

“선장님, 레건입니다.”

“어, 들어와, 용병대장.”

물을 묻힌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후 옷을 갈아입고 잠시 쉬고 있으니 애꾸가 찾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꼴을 보니, 옷에 덕지덕지 피칠갑을 한 것이 꽤나 치열하게 싸운 모양이었다.

힘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을 게 뻔한 용병계에서 고용주가 임명했다고 그냥 대장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어디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얼굴 정도는 닦고 와서 보기에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앉아.”

“옷이 보다시피 좀, 괜찮겠수?”

“의자야 닦으면 되지. 하루 종일 싸운 사람을 세워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고맙수다. 선장.”

의자에 앉자마자 몸이 늘어지는 것을 보니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식사가 준비되려면 시간 좀 필요할 거야. 그동안 피해 상황이나 확인하지. 집계는 했나?”

“허허, 내가 용병 짓 하며 칼밥 먹은 지 대충 20년인데, 전투가 끝나자마자 용병 놈들 피해 상황 물어보는 고용주는 또 처음이군.”

“쉰소리 말고, 얼마나 죽고 다쳤어?”

“죽은 놈이 열, 다친 놈은 굳이 안 세 봤지만 당분간 한 사람 몫 못하는 놈이 열넷이오. 다른 놈들은 긁힌 상처라서 당장 내일이라도 전투에 지장이 없을 겁니다.”

백병전을 벌인 것 치고는 피해가 양호하다.

문제라면 인원 보충이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오히려 인원 부족에 시달리는 배가 많을 게 뻔해서 있는 인원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니.

“그렇군. 이참에 하나 더 묻지.”

“크으, 뭡니까?”

내가 꼬냑을 한 잔 건네주자 냉큼 들이마신 레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용병일 하다 보면 고용주와 안 좋은 일도 많겠지?”

“뭐,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개인적으로 다니는 놈들은 쓰고 버려지거나 입막음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 그러니 익숙하지 않아도 이런 일에 이 많은 인원이 몰린 것 아니겠소? 최소한 입막음 당할 위험은 적어 보이니.”

여상스럽게 말을 하던 레건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뭐요? 우리를 다 쳐낼 생각은 아니신 것 같은데.”

“조금 이상해서 말이야. 솔직히 이번에는 운이 너무 좋았어.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기 창피하지만, 내가 없었다면 아마 전멸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흐음,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소? 난 계속 이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결론적으로 그렇기는 한데… 사실 출발할 때만 해도 고작 해적 놈들을 상대로 이렇게 고전할 줄은 몰랐거든. 오히려 일레드 왕국의 해군이 개입하는 것만 걱정했지.”

해적 놈들은 기본적으로 극한의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놈들이다.

그놈들이 서로 뭉쳐서 뭔가를 할 수 있었다면 각국의 해군이 놈들을 놔둘 리가 없잖아.

그런데 거짓말처럼 웬만한 해군 함대 이상의 수가 모인 것도 모자라 꽤나 능동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의심이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도적들은 근거지가 필요하지?”

“당연한 말을. 그러니 해적이나 도적이나, 그놈이 그놈 아니오?”

“하지만 내가 해적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싸우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근거지가 공격받는데?”

“여기가 근거지라는 증거 있어?”

“에이, 거기까지 가면 할 수 있는 게 없소. 선장님이 좀 과한 것 같소만.”

“이곳이 근거지가 맞다고 해도 마찬가지. 굳이 이렇게 맞서 싸울 게 아니라 적당히 필요한 것만 챙겨서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니까.”

“근거지가 다 파괴되지 않소?”

“해적의 근거지는 육지가 아니라 배야. 배와 선원만 있다면 재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

“흠….”

나는 고민에 잠긴 레건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스코타 후작 가문의 일도 해본 적이 있나?”

“그 정도 고위급 인물과 엮일 일은 하지 않소. 보통 끝이 좋지 않으니까. 내가 듣기로 선장은 후작의 부하라던데, 위험한 생각을 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아니, 생각은 자유지만 제발 내가 떠난 후에 해주쇼. 개죽음은 싫거든.”

“나 따위가 감히 후작 각하를 상대로? 재미없는 농담이네.”

“후우, 할 말은 그게 다요? 술 다 마셨는데?”

“고생했네. 용병들 잘 다독이고, 다친 놈들은 숨기지 말고 닥터에게 치료받으라고 해.”

“알겠수.”

***

어설프게 지어진 전초기지의 가건물에 십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14명이다.

몇 사람은 샌더슨 제독을 만나는 자리에서 봤던 인물들, 나머지는 우리끼리 작전계획을 짤 때 봤던 인물들로 용병함대 혹은 상선단의 대표들이었다.

“두 자리가 비었군.”

피곤한 표정의 알센더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에 오지 못했다면 뭐, 사망이겠지.

“오늘 전투의 결과로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한 함선이 8척이고 2척은 침몰했소. 제도에 입장함과 동시에 전력의 1/3이 날아가 버렸다는 말이지. 뭐, 선원이 괴멸한 3척은 인원만 보충되면 운용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에서 선원을 추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알센더트가 충격적인 피해를 담담하게 읊자, 처음부터 나를 노려보던 대머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다 저놈 때문이오! 저놈이 전력의 절반을 빠지게 만들어서 개판이 된 거 아뇨! 내가 이래서 상인 놈들이랑 일 못 한다고 한 건데!”

“바냐도르, 앉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가 아니었다면 피해가 더 컸을 거다. 아마 이 자리에 아무도 못 앉았을지도 모르지.”

“이봐, 알센더트!”

“닥쳐! 지금 내가 사령관이야! 항명할 건가?!”

“제기랄!”

대머리가 씩씩거리고 자리에 앉자, 알센더트가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군, 리안 선단장. 저놈이 오늘 아끼던 부하를 잃었거든. 자네가 이해하게.”

“괜찮습니다, 제독.”

솔직히 좀 짜증은 났지만, 내가 선선히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자 알센더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최종 보고에 의하면 리안 선단장이 마주한 적은 18척, 이쪽으로 온 17척과 비교해도 적은 수가 아니었소. 리안 선단장의 지원요청은 당연한 일이었지.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쪽은 피해가 좀 줄었을지 몰라도 리안 선단장의 7척은 완전히 전멸했을 테니.”

“흥, 상인 놈들 내빼는 재주는 알아주지 않나? 도망쳤다면 한 척도 안 잃었을 수도 있지.”

아오, 저 대머리 새끼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하고야 말았다.

“맞아. 당신 말대로 도주가 가능한 상황이었고, 내가 보낸 신호도 지원요청의 의미보다는 적이 근처에 있으니 대비하라는 뜻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놈들을 끌고 서쪽으로 진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본대로 치고 들어온 놈들은 해적답지 않게 포격을 위주로 하던 놈들이었지. 그놈들이 그 좁은 공간에서 우리를 기습해 진형을 흐트러트린 사이에 백병전을 준비한 18척이 뒤를 쳤으면, 여기에 몇 놈이나 남았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정답이다.

해적 놈들이 지형을 이용해 우리를 완전히 쌈 싸 먹을 준비를 해 놓은 것이다.

더 완벽하게 하려면 근처에 함대를 숨겨 놓았겠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정보 수집을 위한 세 척을 섬 뒤에 숨겨 놓았던 것이고.

만약 내가 주변 탐사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월아 네월아 하며 진형을 갖추는 데만 한 세월이 걸렸을 것이고, 그 사이에 양면에서 기습을 당했으면 결과는 뻔하다.

“뭐?! 이런 개잡종이!”

“바냐도르! 그만하라고 한 것 같은데?!”

“으아아아아!”

콰앙!

제 화를 못 이겨 소리를 지른 대머리는 결국 테이블을 거세게 내려치더니 쿵쿵거리며 자리를 떴다.

아주 꼴값을 하는군.

“그런데 이쪽으로 온 해적 놈들이 17척이었습니까?”

나는 그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분명히 아인델프는 14척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래. 우리가 자침시킨 해적선이 두 척이고, 한 척은 전투 중에 침몰했으니까.”

씁, 그럼 아인델프가 보고를 잘못한 건가.

정박이 끝나자마자 여기로 끌려와서 무전기가 고장 났다는 이야기밖에 못 들었는데.

“그럼 성과는 어떻게 됩니까?”

“자네의 보고와 여기 뒷수습을 했던 베기어 함장의 전과까지 합산하면, 해적선은 총 10척이 침몰했고 나포한 선박은 4척이네. 문제는 자네를 따라갔던 함선들의 인명 피해가 만만치 않아. 솔직히 자네를 따라간 함선 중 7척은 인원 보충 없이는 전투가 불가능할 지경이지.”

“…심각하군요.”

“말이 좋아 1/3이지, 실제 전력은 반토막이 났어.”

우리는 10척을 잃고, 해적 연합은 14척을 잃었다.

피해 숫자만 놓고 보면 우리가 약간 우세한 상황에서 마무리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남은 전력을 따져보면 절망적이었다.

동원된 해적선은 35척, 이 중에 퇴각한 녀석은 21척이다.

놈들에게 더 이상의 범선이 없다고 해도 적어도 10~20척의 갤리선이 남아 있을 테니, 실제 전력은 우리가 14~21척, 해적 놈들은 31~41척 정도가 된다.

심지어 우리는 인원이 부족해서 21척을 운용할 수도 없지만, 해적 놈들의 근거지가 진짜 이곳이라면 그놈들은 추가로 모집할 수 있는 인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도 수송선 8척이 더 있기는 한데, 전투함에 태울 인원도 모자랄 판에 장갑이나 무장이 빈약한 수송선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지원을 요청해야겠군요.”

“으음….”

알센더트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표정도 어둡기 그지없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나만 불안해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내가 제일 평온한 것 같으니 이게 또 웃기다.

“차라리 철수합시다. 애초에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은 저쪽이 문제잖소! 시작과 동시에 전력의 반이 날아갔는데 500개도 넘는다는 섬을 언제 다 뒤지고 다니면서 해적 놈들을 찾겠소?”

“옳소. 지원을 요청하려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전력을 또 쪼개야 하는데, 남은 전력으로는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지도 못 할거요.”

“오늘 온 놈들 중에는 갤리선이 없었지. 해적들이 모였는데 갤리선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오? 지금쯤 새벽에 우리를 기습하려고 저 섬 뒤쪽에 갤리선들이 모여 있을지도 모르잖소?”

그래도 용병함대의 제독, 상선단의 선단장을 하던 사람들이다.

나보다 바다 위에서 지낸 시간도 길고, 해적도 많이 겪어서 눈치는 빠삭하다.

문제는 결론이 죄다 철수하자는 쪽이라는 것인데….

철수한다고 하면 해적들이 곱게 보내줄까?

그리고 철수하면 우리 후작 각하께서 가만히 있으실까?

“일단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들 피해 수습하고 좀 쉽시다. 수송선들을 바다에 띄워 놓았고, 내 휘하의 함선들은 출항 준비를 마친 상태로 대기할 테니, 다른 분들은 편히 쉬시오.”

이런저런 말이 오갔음에도 결론이 나지 않자 결국 알센더트는 회의를 파했다.

다들 피곤한데다가 흥분까지 해서 도저히 뭘 결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 자리를 이탈한 사람까지 있는 상황이니.

다른 사람들이 온갖 욕을 쏟아내며 흩어지는 틈을 타서 나는 알센더트에게 접근했다.

“오늘 제가 고생을 좀 한 것 같은데, 재수 없게도 선장실의 술병이 다 깨져서 말이죠. 술 한 병만 주시겠습니까?”

“리안 선단장?”

“오늘은 술 없이는 못 잘 것 같은데.”

“크크큭, 그래, 술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하군. 따라오게.”

꽤나 껄끄러운 관계인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부탁하자 미친놈 보듯이 나를 보던 알센더트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내 부탁을 수락했다.

그렇게 나는 알센더트를 따라 그의 배, 의용 2함대의 기함인 마르티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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