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의심을 확신으로
나는 초췌한 인상의 피어스 선장의 거친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단장님.”
“후우, 난 사실 지금도 불안하오만.”
“인원은 줄였지만 다들 숙련된 선원들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내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소!”
나는 벌컥 화를 내는 그를 다독였다.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에 적극적으로 움직일만한 해적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감히 8척이나 되는 선단에 덤벼들 만큼 간이 큰 놈이 있겠습니까? 선단장님도 동의하신 부분이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만약이라도….”
“에이, 모든 만약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유일한 위협은 해적 연합에서 기습을 가하는 것인데, 그 부분은 호위함대가 해결할 테니 편안하게 다녀오시면 됩니다. 가능하면 빨리요.”
“…알겠소. 시간을 지체해서 좋을 게 없으니 인사는 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나는 돌아서는 그의 손에 편지 한 통을 쥐여주었다.
“이건?”
“론 항구의 발레리아 백작가에 전하시면 조금 더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허, 발레리아 백작과도 연이 있었소?”
“남들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깊은 인연은 아닙니다.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보았을 뿐이죠. 그래도 지금 상황은 그런 얄팍한 인연이라도 동원해야 할 상황 아닙니까?”
내 말에 피어스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품에 넣었다.
“발드 선장.”
“제독….”
피어스를 지나쳐 발드 선장 앞에 선 나는 그의 손을 잡아주며 어깨를 두드렸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살짝 안으며 그의 귀에 대고 짧게 속삭였다.
“최악의 상황이 되면 혼자라도 도주하세요.”
그와 떨어지자 발드 선장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아인델프와 그레이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선장님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독, 차라리 제가….”
“그만. 이미 결정된 일이야, 일등항해사.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아인델프 자네가 할 수 없는 일이고. 큰 문제는 없겠지만, 오트라스를 잘 부탁하네, 그레이그 일등항… 아니, 임시 선장.”
“곱게 다시 데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선장님.”
마지막은 알센더트였다.
“이봐, 리안 선장.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자칫하면 남은 인원이 전멸할 수도 있어.”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 아닙니까? 위험한 일이니 제가 자원한 것이구요.”
“아무리 그래도….”
“막말로 여기 있는 인원이 전멸해봐야 함대 단위에서는 큰 손실도 아닙니다. 고작해야 선박 한 척과 100여 명 아닙니까?”
여전히 뚱한 표정의 알센더트에게 나는 조곤조곤 설득을 했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내게 계속 끌려 다니며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 속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지만, 이 꼴을 보기 싫으면 지휘를 좀 그럴듯하게 하던가.
“제독, 이미 이야기 했듯이 해적들이 우리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반드시 그들을 속여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놈들이 우리 사정을 모르니 위험할 일도 없습니다. 딱 하루거리만 움직이셨다가 돌아오시면 됩니다.”
“휴우, 알겠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
휑해진 해안을 바라보고 있으니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준비를 시킬까요?”
“아, 베기어 함장님.”
“아주 휑하기는 하군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고 해도 막상 눈으로 보니까 살짝 떨리기는 합니다.”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뒷말을 굳이 하지 않았지만, 그는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차피 혼자 남을 수는 없는 일 아니었습니까? 그렇다고 제독의 밑에 있는 선장을 남겨봐야 남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을 것이고. 이왕이면 그래도 제독과 안면이 있는 제가 남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대머리, 아차! 바냐도르 함장이 꽤 화를 냈다고 들었습니다만.”
“원래 그 사람은 화가 많습니다. 친동생처럼 아끼던 갑판장이 죽고 나서는 더 많아졌죠.”
나에게 괜한 트집을 잡아서 짜증나게 했던 바냐도르.
하지만 내막을 알고 나니 그가 약간 불쌍해지며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려 10년을 넘게 동고동락하던 갑판장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우르타나 네이선 같은 이가 죽은 것이다.
제정신일 리가 없지, 쯧….
“남은 이들 사기는 별로 좋지 않죠?”
“하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녀석도 있는 것 같더군요.”
“일단 선원들부터 안심시켜야겠네요.”
방금 전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수송선 8척이 론 항구를 향해 떠났고, 그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전투함 23척이 떠났다.
남은 게 얼마나 된다고 그 많은 전력이 떠났냐고?
모두 떠나고 남은 전력이 나와 베기어 함장, 그리고 네이선을 포함한 선원 92명이다.
그래도 남은 선박은 좀 많다.
베기어 함장의 드라이언을 위시해 반파된 선박이 5척, 나포한 해적선이 4척이다.
…어쩔 수 없잖아, 당장 우리가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부풀려서 보여줘야 하니까.
우리는 재편성을 위해 전 함대에 대해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했다.
먼저 수송선의 선원을 최소로 줄이고, 싣고 온 자재나 짐은 모두 섬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수송선들은 지원 요청을 가서 추가 인원과 물자를 싣고 와야 했기 때문에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할 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로 반파된 선박들은 모조리 포기했다.
나중에 제대로 수리를 할 수 있게 되면 모르겠지만, 당장은 쓸모도 없고 론 항구까지 예항할 엄두도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남는 인원으로 선원 손실이 심각한 함선들에 나눠서 태웠다.
가능하면 같은 용병함대 소속의 선박에 태웠지만, 일부 인원은 졸지에 다른 용병함대와 계약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대충 그렇게 수습을 마치니 총 24척의 전투함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 베기어의 드라이언 함을 제외한 모든 함선이 떠난 것이다.
만약 해적들이 이 상황을 본다면 철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
“여기로 하지.”
“도대체 여기는 왜?”
네이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곳은 전초기지를 만들기로 한 섬에 위치한 산기슭.
해안과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우리도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지.”
“아?”
머리에 느낌표를 띄우는 네이선을 뒤로하고 불만에 가득 찬 선원들을 돌아보았다.
“자 여기에 대피소를 만든다!”
“대피소?”
“무슨 대피소요?”
“모두 조용!”
나는 소리를 질러 소란을 가라앉힌 뒤,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해적 놈들이 오늘 여기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내일이면 떠났던 함대가 다시 돌아오겠지. 나는 그렇게 믿어.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만약 해적들이 미친 척하고 이곳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굳이 대항할 것 없이 이곳으로 대피한다.”
“싸우지 않는 거요?”
“당연하지. 여기를 공격하는 해적이 우리보다 적을 리가 없는데, 내가 왜 지는 싸움을 해? 어차피 이 섬이 점령당하더라도 내일 함대가 돌아오면 바로 탈환할 수 있을 텐데?”
솔직하게 말해서 상황이 그 정도로 꼬이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
진짜 해적들이 미쳐서 이 섬에 남은 물자들을 얻겠다고 모두 몰려오면 떠났던 함대도 근처에서 내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왜 하겠어?
쓸모없을 것 같은 대피소를 만드는 첫 번째 이유도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서인데.
네이선의 지휘 하에 열심히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는 선원들을 두고 약간 멀리 떨어진 나와 베기어는 물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원래 저런 몸 쓰는 일은 나나 베기어 같은 선장, 함장은 열외다.
같이 하면 오히려 더 불편해한다니까?
“제독, 그런데 정말 해적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만약 이 상황을 눈치 챈다면 무조건 이쪽의 물자들을 가지러 올 것 같은데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베기어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비록 함대가 떠났어도 남은 배가 10척이고 눈에 보이는 곳에 쌓인 물자도 한가득하다.
어떤 해적이 욕심내지 않겠어?
“대가리가 많아서 안 돼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도 지휘체계가 엉망이지만, 저쪽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 공격을 했어야 하죠.”
“그렇기는 합니다만….”
나는 땀을 한 번 훔쳐내고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오지게 덥다.
“분명히 몇 놈은 함장님이 생각한 대로 이곳을 점령하고 물자를 취하자고 하겠지요. 몇 놈은 떠난 함대를 쫓자고 할지도 모릅니다. 몇 놈은 함정일 수 있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목적을 생각하세요.”
“네?”
“해적들의 목적이 뭘까요?”
“그거야 당연히 우리와 싸워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죠.”
내가 단호하게 부정하자 베기어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들의 목적은 우리가 이 제도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겁니다. 승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같은 말 아닙니까?”
“해적들 입장에서 우리 함대가 완전히 떠난 것이라면 굳이 추격을 할 필요도 없고, 이곳의 물자는 천천히 수습해도 됩니다. 물자에 발이 달려서 도망가지는 못할 테니까. 만약 함정이라면 조금 더 두고 보는 게 좋겠죠. 이런 식으로 의견 충돌이 나면 결국 ‘일단 기다리자’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 자체가 우리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니까 급하게 우리의 거점을 점령할 필요가 없는 거죠.”
내 설명을 들은 후에도 베기어는 긴가민가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이 대피소를 만드신 이유는 단순하게 선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입니까?”
“뭐, 그런 부분도 있고.”
나는 이쪽으로 집중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우리 중에 첩자가 없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허?! 그렇다면.”
사실 그렇잖아.
전체 인원 중에 급하게 끌어 모은 선원이 절반이고, 어중이떠중이 용병이 수백이다.
그중에 해적의 끄나풀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보다,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쪽이 더 맞출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첩자가 바글바글해도 통신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다.
만약 이곳이 육지라면 어떻게든 몰래 숨어들어 접선을 하고 정보를 넘기겠지만, 사방이 바다인 섬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첩자가 많아도 연락할 방법만 제대로 단속할 수 있다면 정보가 빠져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대피소를 만드는 위치는 임시 주둔지에서는 찾기 힘들지만 반대로 임시 주둔지는 잘 보이는 곳이다.
만약 대피를 하게 되면 주둔지의 상황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 위치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지만, 이곳에 감시 인원을 상주시키면 외부로 몰래 나가는 사람,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포대를 만들어야 하는 곳이 가장 가까운 저 섬인 겁니다.”
“아, 만약 멀리서 신호를 준다면 받을 수 있는 곳이 저 섬뿐이니까요?”
“그렇죠, 저 멀리 북동쪽에 있는 섬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저렇게 멀리까지 보일 신호를 보낸다면 주둔지의 사람들도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요.”
“과연! 이미 다 고려를 하셨군요!”
나는 베기어의 찬탄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쪽의 정보가 새지 않게 하면서 전장이 될 만한 곳을 노려 쏠 수 있는 임시포대를 건설하고, 적의 진입로를 한정시키면 함선이 조금 부족해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
반파된 함선이 많으니 포대를 만들 대포는 충분했고,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쏘는 포보다 단단한 지상에서 쏘는 포가 강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게다가 포각을 조절하기 힘든 함포로는 고지대에 위치한 해안포대를 공격하기 어렵다.
포대 위치만 잘 정하면 말 그대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는 것이다.
해안포대가 그토록 강력하지 않았다면 해군 전력이 형편없는 몰로스 제국은 진즉에 바다와 맞닿은 모든 영토를 잃었겠지.
***
저녁나절까지 대피소를 완성한 우리는 대피소 안에 적당량의 식료품 등을 비축한 뒤 주둔지로 내려왔다.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물자가 많다는 것을 다 보이게 해도 되는 걸까?”
“오히려 그렇게 보라고 놔둔 거야.”
“어?”
내 말에 네이선이 깜짝 놀라며 나를 보았다.
“네가 생각해도 물자가 좀 많지?”
당연한 말이다.
수송선들은 최대한 선창을 비우고 갔고, 전투함들도 하루면 복귀할 예정이라서 거의 물자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물자의 양이 얼마나 많겠어?
“조금 과하긴 하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우리 함대가 모두 떠났다고 믿는 녀석들은 의심하겠지. ‘왜 굳이 물자를 저렇게 많이 버리고 갔을까?’하고 말이야.”
“그게 중요한 거야?”
“당연하지. ‘왜’라는 의문을 가지는 순간 내 함정에 빠지는 거니까. 사람은 보통 자신을 위주로 생각해. 대부분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지. 그러니까 해적들은 ‘왜’라는 의문을 갖고 고민을 하다가 자신이 굳이 물자를 보란 듯이 두고 갈 경우를 생각해 내겠지.”
“…함정?”
“빙고. 상선들을 유인하기 위해 여러 가지 꼼수를 쓰는 녀석들이니, 이 물자들도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우리의 계획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역시 잔머리는 끝내준다니까.”
“그래도 경계는 해야 하니까 불침번 좀 짜 줘. 가능하면 다른 선박 소속인 친구들로 짝지어. 서로 감시하게.”
“알았어.”
그렇게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땀범벅이 된 선원 하나가 다가와서 보고했다.
“헉, 헉, 선장님, 북서쪽에서 미확인 선박이 발견되었습니다. 헉, 헉, 헉,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입니다.”
“뭐? 숫자는?”
“제가 떠나기 전까지는 두 척이었습니다.”
“네이선!”
내 외침에 선원들과 낄낄거리던 네이선이 번개처럼 뛰어왔다.
“무슨 일이야?”
“지금 당장 불피운 흔적 지우고 선원들과 함께 대피소로 피해!”
“너는?!”
“나는 알아서 피할게, 어서!”
“하지만….”
“선원들은 제가 인솔하겠습니다. 제독.”
네이선이 미적거리던 그때 베기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여기 친구가 제독을 상당히 걱정하는 모양인데 함께 움직이십시오.”
“그럼 부탁합니다, 함장님. 여기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 흔적이 없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물론입니다.”
“아 참, 그리고 남서쪽에 감시하러 간 친구들도 데리고 가세요. 만약 그쪽에도 발견된 선박이 있다면 북동쪽 초소 지역으로 사람 보내주시구요.”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네이선을 보며 고갯짓을 했다.
“가자, 네이선!”
***
북동쪽 초소(딱히 건물을 지은 것은 아니고, 바다를 감시하기 좋은 지형이다)에 도착한 나와 네이선은 초조한 표정으로 초소를 지키던 선원을 만났다.
“상황은?”
“계속 접근 중입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주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거리가 될 겁니다.”
나는 보고를 들으며 급히 망원경을 꺼내 바다를 살폈다.
선원의 말대로 해적선이 확실한 두 척의 선박이 천천히 주둔지를 향하고 있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야. 자네는 지금 당장 대피소로 가. 그곳에서 베기어 함장의 지시를 따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가 떠나자 자신의 망원경으로 해적선들을 보고 있던 네이선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물자를 모두 빼앗길 거야.”
“아직 속단할 필요는 없어. 일단 좀 쉬자. 혹시 반대쪽에서도 적이 오고 있다면 내 예상이 완전히 틀린 거니까 무조건 숨죽이고 있어야 해.”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도착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해도 절반 넘게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상황.
해적선들 역시 우리 주둔지 해안가 근처까지 접근해 있었다.
“저 두 척이 전부인 모양이다. 가자.”
“어차피 두 척밖에 안 되더라도 우리가 상대할 수는 없어.”
“내게 다 생각이 있어.”
언제나 내 예상이 다 맞을 수는 없다.
그러니 늘 플랜B를 준비해 놔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소수의 정탐선이 오는 것은 내 예상 안쪽에 있었다.
***
주둔지 쪽에 십여 개의 횃불이 일렁이는 것이 보인다.
나름대로 뭔가를 확인하는 모양인데, 이렇게 어두운 밤에 횃불만 가지고 그게 잘 될 리가 없잖아.
일단 놈들이 오늘 물자를 다 싣고 갈 생각은 아니라는 것이 적잖게 안심이 된다.
“제독,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기습을 한다면 어떨까 싶은데요.”
베기어 함장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배에서 모든 인원이 다 내린 것도 아니라서 고작 상륙한 해적 몇 놈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쪽의 규모가 드러나면 저쪽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죠.”
“그렇다고 그냥 두고 봤다가는….”
“내일 아침에 저들이 몰려올까 봐 걱정이 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함대가 들어올 때 기습을 해온다면 큰일 아닙니까?”
“못 오게 하면 됩니다.”
“네?”
“네이선, 내가 오면서 알려준 곳 있지? 가서 시키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네이선이 선원 몇 명과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자, 나는 베기어에게 남은 인원의 지휘를 부탁하고 선원 몇 사람을 데리고 네이선과 반대편으로 나왔다.
“부싯돌.”
“여기 있습니다.”
선원들을 데리고 숲속을 한참 걸은 나는 낮에 보아둔 위치까지 와서 부싯돌을 받았다.
“다들 가려봐.”
“제독, 아무리 가려도 보일 겁니다!”
“응, 보라고 하는 거야.”
“네?”
나는 두어 번 부싯돌을 부딪쳐서 불꽃을 만든 뒤, 다시 선원들과 자리를 옮겨가며 몇 번이나 이 작업을 반복했다.
선원들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군말 없이 내 명령에 따라 주었다.
그나마 피오렐과 리버티에서 차출된 인원만 데리고 온 것이 다행이다.
그렇게 한 시간쯤 시간을 들여 작업을 하고 돌아오니, 베기어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도대체 뭘 하신 겁니까? 제독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지금은 주둔지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해적선은요?”
“아까 돛을 올리는 것 같던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망원경으로 잠시 상황을 관찰하던 베기어가 망원경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을 돌리고 있습니다. 돌아갈 모양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놈들, 내일 아침에 확실히 못 옵니다.”
“네?”
“그래도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고, 내일 아침에 함대가 돌아올 때쯤 복귀하도록 하죠.”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별거 아닙니다. 저놈들, 우리가 함정을 판 것은 아닌가 싶어서 확인한 차 온 거잖아요? 그래서 진짜 함정인 것처럼 착각하게 해준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