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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71화 (272/420)

271화. 버티기 위한 준비

다행스럽게도 그날 밤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저 멀리 함대가 보이더니 빠르게 가까워졌다.

“총 23척, 아군 함대 맞습니다.”

어지간히 빨리 달려온 모양이었다.

한 두 시간쯤 더 늦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네, 멀쩡한 걸 보니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야.”

“일은 이쪽에 있었죠.”

자신 있게 해적이 안 올 것이라고 했던 어제가 생각나서 조금 창피해졌다.

“뭐, 예측이라는 게 늘 맞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도 결국 아무도 다치지 않았잖아?”

“그렇기는 합니다만.”

짜악!

선원의 애매한 대답에 괜히 등짝을 한 번 때려 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흑!”

“아무리 함대가 도착했다고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방심하지 마.”

“거참, 그냥 말로 하시지 왜 때립니까?”

“혹시 졸릴까 봐.”

“안 졸았습니다!”

울컥하는 선원의 눈이 상당히 작았다.

***

그래도 한 번 왔던 곳이라고 준비를 잘했는지, 임시 거주지에 함대가 정박하는 것은 이전보다는 빠르고 체계적이었다.

섬의 좌측과 우측의 진입로에 각 다섯 척의 함선이 천천히 움직이며 경계를 했고, 나머지 13척만 정박한 것도 저번처럼 교통 대란이 일어나지 않은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리안 선장. 별일 없었나?”

“사소한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잘 해결했습니다.”

“뭐?”

알센더트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나를 훑었다.

하지만 그렇게 봐도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

“회의 시간에 말씀드리죠.”

“음, 복귀한 함선들이 모두 정박하면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지.”

알센더트가 자신의 천막으로 향하고, 그레이그가 다가왔다.

“선장님, 다녀왔습니다.”

“고생했어, 일등항해사. 아인델프 선장은? 아직 정박하지 못했나?”

“피오렐은 우측 경계 함대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래? 별일 없었고?”

“네, 선장님 말씀대로 해적 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단하다는 듯 감탄하는 그를 보며 나는 괜히 코를 문질렀다.

“그놈들이야 떠나는 우리를 굳이 공격해서 피해를 키울 필요가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함대가 돌아온 걸 알면 지금쯤 땅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우리가 돌아온 것을 해적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제 왔다 갔어, 이 섬에.”

“네?!”

나는 목소리가 커지는 그레이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그는 급히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하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갑판장이 있었으니 괜찮으셨겠지만, 어, 다친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딱히 전투 흔적은 안 보이던데….”

“흥분하지 마, 싸우지 않았어.”

“네에?”

“적당히 함정인 것처럼 꾸며서 알아서 도망가게 만들었지. 아마 지금쯤이면 자기들이 속았다고 생각하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지.”

“허어…. 그렇다면 큰일 아닙니까? 허장성세라고 느꼈다면 오늘 당장 기습할 수도 있습니다.”

“쉽지 않을걸? 전력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기습을 당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은 아니니까. 지금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대에게 들이받으면 그쪽 피해도 상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 저들은 해군이 아니야, 그러니까 피해가 큰 공격할 감행할 수 없을 거야.”

“그래야 할 텐데요.”

나는 불안한 표정의 그레이그를 보다가 말을 돌렸다.

나도 그냥 해적들의 심리를 추측한 정도라서 더 이상 우기기도 곤란했다.

“수송선들은 얼마나 걸릴까?”

“글쎄요, 빨라도 한 달하고 보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론 항구가 델라 항구보다 조금 더 가깝다지만 항구에서 준비하는 시간도 필요할 테니까요.”

“후우, 너무 긴데. 그동안 버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러게 말입니다.”

***

잠시 후 회의에서 나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보고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질문 하나를 붙였다.

“특이한 포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명히 전 전투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던데요. 물론 저와 함께 분함대에 파견되었던 다른 선장, 함장님들도 지금쯤이면 다 들으셨겠지만, 공식적으로 저희에게 밝히지 않으신 이유가 뭡니까, 제독?”

나는 질문을 마치고 주의 깊게 알센더트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게 중요한 일인가, 리안 선장? 굳이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낼 만큼?”

이게 무슨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야?

그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뭐가 중요한데?

“적의 신무기 아닙니까? 심지어 그로 인한 피해도 상당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신무기는 맞지만 피해는 미미하고, 심지어 그 신무기를 가진 해적선은 이미 바다에 수장시켰네. 이미 상황이 끝났는데 굳이 그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나?”

다른 함장들 표정을 보니 다들 알센더트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나와 함께 있었기에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몰랐던 함장들조차도 말이다.

기가 막히다.

아무리 정식 군대가 아니고 교육 수준이 처참하다지만 정보 공유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부족할 줄이야.

“만약 적에게 더 많은 신무기가 있다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네. 해적들에게 그 폭발하는 포탄이 더 많이 있었다면 굳이 그 순간에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뭔가? 우리를 끝장낼 심산으로 오는 길이었을 텐데.”

쩝,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기는 하네.

해적 놈들이 혹시 모를 뒷일까지 꼼꼼하게 준비해가며 일을 벌였을 리가 없지.

“그래도 그런 중요한 정보는 함께….”

“아, 그만하지. 이미 끝난 일 아닌가?”

귀찮다는 듯이 짜증을 내는 알센더트를 보며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 알센더트를 보니 아무래도 앞으로 일이 쉽지가 않을 것 같다.

해안 포대 건설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나있었기에 각자 건설할 포대를 할당하는 작업만 필요했다.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 14척의 가용 전력을 2척과 3척씩 조를 나누었고, 각자 포대 한 군데씩을 작업하기로 했다.

거창하게 포대를 만들 것도 아니고 적당히 내가 원하는 방향의 바다로 포를 쏠 수만 있으면 되는 정도라 하루 정도면 충분히 끝낼 수 있을 터였다.

해안 포대라 하면 육지에서의 공격에 취약하기 때문에 적당한 방어시설을 건설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우리는 육지에서의 공격은 완전히 배제하기로 했다.

물론 해적들이 해안 포대를 발견하고 상륙해서 포대를 공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면 우리는 포대의 대포를 파기하고 오히려 비어버린 해적선을 불태우면 그만이다.

지금 우리가 만들려는 포대는 다섯 곳에 이르니, 그걸 다 처리하려면 최소한 다섯 척의 해적선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섬에 남은 해적들 역시 전투가 우리의 승리로 끝나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배도 없이 섬에서 어떻게 탈출하겠어?

“노파심에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포대 건설뿐만 아니라 섬에 대한 수색도 함께 진행하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정보가 샌다면 그만큼 우리가 불리해지는 것이니까요. 최소한 주둔지 근처의 섬들은 완전히 우리의 통제하에 있어야 합니다.”

“거, 알겠소, 리안 선장. 한 번만 더 들으면 귀에 딱지 앉겠소.”

***

“제독, 제 말대로 새로 모집한 인원들은 다 빼셨지요?”

“나와 최소한 1년 이상 함께 했던 녀석들만 골라서 태웠다. 걱정 말고 그쪽이나 챙기지.”

“네, 그럼 섬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불퉁거리는 알센더트와 인사를 나누고 오트라스에 승선했다.

고작 하루만인데 굉장히 오랜만에 오르는 기분이다.

“제독! 용병대는 다 내리라고 하셨다던데 정말입니까?”

“아, 포대 축성도 중요하지만 여기 거점 건설도 중요하니까 말이야. 배 타는데 익숙하지도 않은 용병들을 굳이 태우고 갈 필요는 없잖아.”

용병대장 레건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 참,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나름 배려니까 그냥 순수하게 감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어차피 삽질을 한다면 차라리 배를 좀 덜 타는 쪽이 낫다고 할 녀석들이 꽤 되기는 할 거요.”

“그럼 저녁쯤에 보자고. 용병들이 괜히 다른 선원들이나 용병들과 시비가 붙지 않도록 자네가 좀 챙겨줘.”

“그러죠.”

용병들을 모두 내려놓자 배가 아주 썰렁해졌다.

진짜 운항을 위한 최소 인원만 남은 셈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리버티나 피오렐이 있다면 인원을 충원하겠는데, 리버티는 지원요청을 위해 수송대에 편성돼서 떠났고, 피오렐은 경계함대에 포함되어 있으니 원.

“선장님, 기함 마르티엘이 출항했습니다. 따라오라고 합니다.”

“좋아, 우리도 출항하자.”

***

포대를 만드는 것은 예상대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포격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위치이면서 바다까지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서 반파된 배에서 떼어 온 대포를 설치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문제는 무겁기 그지없는 대포를 포대 위치까지 끌어 올리는 것과, 대포가 지나갈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 역시 치워야만 했다.

“제, 젠장! 삽질을 할 줄 알았는데 도끼질을 더 많이 해야 하잖아!”

우르타가 연신 팔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울상을 지었다.

우리도 그렇고 마르티엘도 태우고 온 인원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각 배의 간부급들도 이번 일에는 예외가 없었다.

회계사인 게론드까지 도끼를 들고 헉헉거리고 있으니, 뭐.

아, 알센더트와 나 외에 작업에서 열외된 사람이 딱 두 명이 있기는 했다.

바로 닥터 롱베르와 마르티엘의 선의였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잊을만하면 발생하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포가 너무 적은 것 같은데?”

“공격을 할 때는 포가 많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포대를 관리할 인원도 더 많이 필요합니다. 혹시라도 저들이 상륙 공격을 시도하면 포를 파괴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구요.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인원이 여유가 없지 않습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해안 포대를 건설하면 포대에서 포를 쏠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인원 부족에 시달리는 우리가 포대에 주둔하는 인원을 수십, 수백 명씩 둘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포대당 10문 내외의 대포만 놓기로 했다.

단단한 땅 위에서 안정적으로 쏠 수만 있다면 10문의 대포도 충분히 위협적인 화력이다.

배에서 백날 쏘는 것보다 포대에서 쏘는 쪽이 명중률이나 효과가 좋다 보니 각 함선의 포 좀 쏜다 하는 인원은 전부 해안 포대에 배치하기로 했다.

물론 하루씩 돌아가며 포대에 주둔하기는 하겠지만, 우르타와 클라톤(피오렐 포술장)이 이끄는 대포 담당 선원들도 모두 포대에 배치되었다.

승선 인원 중 절반 정도는 포를 다룰 줄 아는(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용병함들과 달리 포 담당 인원을 전문화(?)시킨 오트라스와 피오렐은 확실히 화력이 떨어질 것이다.

포대가 완성된 후에도 일은 남아 있었다.

먼저 섬의 수색이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자세하게 수색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해진 인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적당히 배를 숨길만 한 지형과, 다른 섬이나 숨어있는 배와 발광신호, 혹은 수기신호를 주고받기 좋을 만한 지형만 적당히 훑어봤을 뿐이었다.

해적들이 설마 특수전 훈련을 받지는 않았을 테니까 위장 은신처 같은 것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수색이 끝나고 한 일은 해협 봉쇄였다.

지난번 전쟁에서 나와 4척의 함선이 통과했던 해협은 통과만 한다면 아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 절묘한 지형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지형까지 전력을 파견해서 틀어막을 정도로 여유 있지는 못하다 보니 차라리 해협 자체를 봉쇄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오트라스의 지휘를 그레이그에게 맡기고 마르티엘에 옮겨탔다.

“저 해협을 말하는 건가?”

“네. 지난번 전투에서 우리가 지나오는 것을 봤으니 해적들도 통과하려고 시도할 겁니다. 그리고 이곳을 통과하면 주둔지의 좌우 바다를 틀어막은 아군의 진형 중앙을 바로 때릴 수 있는 자리를 잡을 수 있죠.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으로 과연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모래톱이 몇 군데 있더군요. 그 모래톱 위에 장애물 몇 개만 얹어도 충분히 통과하기 어렵게 될 겁니다.”

“흠, 모래톱이라….”

“네. 그래서 첩자일 가능성이 없는 선원들만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사실이 놈들에게 알려지면 우리는 가장 좋은 패를 잃게 될 테니까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해협에 접근한 오트라스와 마르티엘은 내가 기억하는 모래톱 위치의 근처까지 갔다.

그리고 단정을 내려 모래톱이 있는 위치로 가서 부서진 대포나 싣고 온 바위 따위의 무거운 것들을 던져 넣기 시작했다.

네 척의 단정이 십여 번을 왕복한 후에야 만족할만한 보고가 들려왔다.

“수심 2~3미터 정도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좋아, 다음 지역으로 가시지요, 제독.”

수심이 고작 2~3미터면 저곳을 지나가는 배는 뭐가 되었건 바닥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될 거다.

내가 겪었다시피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경우는 해류도 빠른 편이라 아차 잘못하면 배가 좌초되거나 심각한 파손을 입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딱 한 척만 중간에 멈추면 이쪽 해협은 통과 불가라고 봐야 한다.

워낙 좁기도 하고, 그렇게 배 한 척이 멈추면 그 꼴을 본 다른 배들은 진입 자체가 무서워질 테니까 말이다.

만약 놈들이 이곳을 통한 회심의 일격을 시도한다면 아마 배 몇 척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이쪽으로 온 함선들은 모조리 전투에 참여가 불가능한 잉여 전력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루 만에 필요한 공사를 대충 끝낸 우리는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지속적으로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드디어 경계를 하던 함대에서 신호가 들어왔다.

이제 막 눈곱을 떼며 선장실에서 나오는 내게 급히 달려온 오펜이 보고를 했다.

“적 함대가 출현한 모양입니다!”

“어느 쪽?”

“지금 들어온 신호는 북서쪽입니다!”

“선교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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