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심문기술
이미 확인된 구역을 지나면서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우리 인원이 한계가 있는지라 모든 섬에 인원을 주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몇몇 섬에서 정보 수집을 위해 남아있던 인원들을 교대해 줄 필요도 있었다.
“저기에도 하나 있는 모양이군.”
“네, 한 줄인 것을 보니 별일 없는 모양입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 남아있던 인원들은 아군 함대가 접근하면 먼저 신호를 보낸다.
연기가 한 줄이면 이상 없음, 두 줄이면 근처에 해적의 소함대가 있음, 세 줄이면 접근 금지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장 심각한 경우는 세 줄의 연기가 아니라, 아예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경우다.
교대할 인원을 태운 함선이 섬 근처에 정박하고, 그 함선에서 교대자를 태운 단정이 섬으로 갔다.
교대가 이루어지는 동안 함대는 섬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섬 주변에 혹시 모를 문제(섬의 아군이 이미 제압당했을 수 있으니)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도 있고, 멈춰있는 함대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만 들어가서 좀 쉬시죠. 무슨 일이 생기면 보고하겠습니다.”
“그럴까? 그럼 선교를 부탁해, 일등항해사.”
하루 정도야 선교에 있어도 별 상관없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나와 그레이그 둘 중의 한 명은 긴장을 풀어놓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선장실로 돌아가는 길에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선원과 용병들이 한쪽 방향을 보고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인사를 하는데, 정작 인사를 받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선원과 용병들끼리 서로 저렇게 친근하게 인사를 할 리는 없을 텐데?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근처로 다가가니 나를 알아본 선원과 용병들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숙이며 비켜섰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의문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하고 우아한 걸음걸이, 도도하게 치켜든 머리, 그리고 그 아래의 아름다운 목과 어깨의 라인, 반짝이는 커다란 눈, 살랑거리는 긴 꼬리….
모습을 드러낸 리아는 나를 보더니 망설임 없이 내게 다가와 바짓단에 몸을 비볐다.
빨리 자신을 쓰다듬으라는 뜻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느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머리를, 등을,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너희들, 고양이에게 왜 인사하는 거야?”
어쩐지 상급자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너무 가볍고 장난스럽더라니.
대충 이유가 짐작은 되지만 신기한 동물을 보듯이 나를 보는 녀석들이 괘씸해서 질문을 던졌다.
나와 눈을 마주친 녀석들은 하나같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그 고양이 이름이 선장님과 똑같다고 하던데요?”
음, 한 명 빼고.
입을 연 용병을 향해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사나운 시선이 쏠린다.
내가 장담하는데 저 눈치 없는 용병 놈은 내일쯤 얼굴이 퉁퉁 부어서 절뚝거리며 돌아다닐 거다.
***
똑똑.
그동안의 불면증이 고쳐졌는지 단잠에 빠졌던 나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누구야?”
“오펜입니다, 선장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오펜은 나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기함에서 신호입니다. 곧 탐사 목표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음, 먼저 올라가 있어. 옷 입고 올라갈게.”
선교에 올라가자 망원경으로 한쪽을 살피던 그레이그가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갑판장과 용병대장에게 상륙 인원을 준비시키라고 했습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고?”
“네, 일단 이쪽 방향으로는 해안가에 어떤 인위적인 시설물도 없습니다.”
해적들의 근거지는 당연히 해안에 접해야 한다.
그러니까 해안이 깨끗하다면 섬 안쪽에 뭔가가 있을 확률은 낮지만, 만약 이곳이 해적들의 근거지 부근이라면 경계를 위한 초소가 있을지도 모르니 상륙해서 직접 탐사하는 과정은 필수였다.
“정박할만한 곳은?”
“저는 저쪽, 45도 방향의 만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위쪽에 있는 절벽 근처라면 수심도 어느 정도 될 것 같고 만에서도 가깝습니다.”
나는 그레이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망원경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나쁘지 않은 곳이다.
“좋네, 기함에 신호 보내. 우리 이탈한다고.”
***
우리가 대열에서 이탈해서 상륙을 준비하는 동안 함대는 둘로 쪼개졌다.
그중 다섯 척은 우리가 탐사하는 섬 주변을 돌았고, 나머지는 조금 멀리 떨어진 다른 섬을 향했다.
멀다고 해봐야 10km 정도, 양쪽 어디에 이변이 생겨도 한 시간 내에 합류가 가능한 거리다.
“더는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네이선의 보고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가까운 해안까지 고작 100m 정도, 이 정도면 꽤 많이 들어왔다.
“충분하겠네. 닻 내리고 정박해. 선발대로 돌격대장과 돌격대 먼저 보내고.”
“알겠습니다.”
네이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교를 내려갔다.
“선장님, 이번에도 직접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돌격대 빼면 죄다 용병들인데 내가 가야 하지 않겠어?”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네이선 갑판장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그레이그의 말에 잠깐 고민을 했지만, 역시 네이선에게 맡기기보다는 내가 직접 가는 쪽이 나을 것 같다.
네이선이 비록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멍청이는 아니라고 해도 이런 일은 내가 직접 눈으로 봐야 마음이 편하다.
“뭐, 특별히 위험할 것도 없어 보이는걸. 오히려 난 일등항해사가 더 걱정이야.”
“네? 저야말로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오트라스를 살리는 거야. 내가 아니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등항해사. 내가 데리고 있는 인원이 70명이 넘어. 자네는 고작 18명이고. 상식적으로 누가 더 위험하겠나? 그러니 이상한 낌새라도 있으면 무조건 오트라스를 움직여.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그럴 리는 없지만…… 일단 염두에 두겠습니다.”
닻을 내리는 사이에 행크와 돌격대를 태운 단정이 미끄러지듯이 해안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해변에 도착했고,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고는 최소 인원으로 단정을 배에 복귀시켰다.
그 뒤로는 네 개의 단정을 통한 릴레이 수송이 시작되었다.
우락부락한 성인 남자들이 무장까지 하고 있으니 한 척의 단정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은 고작 7~8명에 불과했고, 2명은 다시 단정을 가지고 와야 했으므로 실제 수송 인원은 한 척당 5명 정도였다.
해변에 도착한 나는 망원경으로 일단 해안 근처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러자 네이선이 다가와서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못 끝낼 것 같은데? 지형이 좀 복잡해.”
“음, 그러네.”
이미 해가 기울고 있다.
야간에는 제대로 탐색하기도 힘들고, 괜히 움직이다가 잘못하면 비전투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셈이다.
결국 여기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뜻인데….
“어떻게 할까? 밤에 오트라스로 돌아갈까?”
그게 정석이기는 한데, 지금 하고 있는 릴레이 수송을 생각하면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냥 여기서 대충 자는 게 낫지 않을까?”
“으음….”
거창하게 주둔지라고 할 것도 없다.
날씨도 따듯하니 적당한 평지에 돌을 골라내고 잡풀을 베어 대충 바닥에 깔면 된다.
“선장님, 애들 다 건너왔습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사이에 레건이 다가와서 보고했다.
일단 해가 떠 있는 동안 최대한 탐사를 진행하기는 해야겠다.
“갑판장, 이등항해사에게 가서 오트라스에 신호 보내라고 해. 당일 탐사 완료 불가, 기간 연장 요망이라고 기함에게 신호하라고.”
“알겠습니다.”
“용병대장은 단정 지킬 믿을만한 녀석으로 열 명만 뽑아서 여기에 대기시켜. 오늘은 이쪽에서 자야 할 것 같으니까 저쪽 평지에 돌 골라내고 풀도 좀 깔아 놓으라고 하고.”
단정을 지킬 사람은 당연히 필요한데, 그 외의 일을 안 시키면 형평성에 어긋나는 소위 ‘꿀보직’이 된다.
그러니까 뭐라도 일을 시켜야지.
준비를 마친 나는 네이선, 행크, 레건에게 각각 15명 정도의 용병을 붙여 다른 방향으로 탐사를 보냈다.
그리고 오펜과 나는 돌격대와 함께 한 방향을 맡아 탐사에 나섰다.
“너무 자세하게 볼 것 없어. 해적 놈들이 무슨 은신 전문가들도 아니니까. 인위적인 것은 대충 봐도 티가 날 거야.”
“네, 선장님. 이런 건 포술장님이 정말 잘하시는데 아쉽네요.”
우르타가 이런 쪽으로는 참 눈썰미가 좋기는 하지.
아, 우르타는 지금 해안 포대에 파견(?)을 나가서 여기에도, 배에도 없다.
“어? 선장님! 저쪽을 보십시오!”
대충대충 우리가 맡은 구릉지를 훑어보는 중에 돌격대원 한 명이 갑자기 소리를 쳐서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적나라한 인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름대로 뒷정리를 한다고 땅을 완전히 뒤집은 모양인데, 땅을 뒤집은 것 자체가 눈에 띄었다.
물론 이대로 한 닷새, 아니, 사흘만 흘러도 우리 같은 비전문가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챌 거다.
그러니까 이 흔적은 아직 사흘이 되지 않았다.
선원들을 시켜 그곳을 살살 뒤집어보니 먹다 남은 육포 쪼가리, 재와 타다 만 나무 등이 나왔다.
온기가 아직도 남은 것을 보니 우리 함대를 발견하고 치운 모양이다.
“아무래도 근처에 놈들의 소굴이 있는 모양이야.”
나는 온기가 남은 나무를 대충 던지며 중얼거렸다.
이 근처에 놈들의 본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감시할 인력을 파견했을 리가 없다.
“추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오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무슨 재주로 추격해? 이미 떠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지금쯤이면 산골 어디 으슥한 곳에 숨어있지 않겠냐?”
흔적을 보아하니 인원수는 고작 서너 명 수준. 교대하는 인원이 있다고 가정해도 열 명이 채 안 될 것 같다.
우리 중에 추적 전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큰 섬에서 이미 도망친 열 명 내외의 인간을 어떻게 찾아내겠어?
해가 붉게 물들 때까지 탐사를 한 탐사팀들은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겨우 다 모일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한 탐사팀들도 도운 덕에 임시로 만든 잠자리는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리고 행크가 자신도 누군가 머문 흔적이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네이선은 무려 포로를 잡아 왔다.
“도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아서 자세히 보니 수풀 뒤쪽에서 시선이 느껴지더군요. 제가 뛰어들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길래 한 놈은 죽이고 한 놈만 잡아 왔습니다.”
꽁꽁 묶인 포로는 이미 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심문했어?”
“그냥 뭐, 간단하게 다른 놈들이 어디 있는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내가 우쭐거리는 네이선과 포로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자, 네이선이 더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를 발견하고 그대로 흩어져서 다른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고, 여기에서 우리가 접근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벌써 신호를 보냈다네요.”
“그걸 순순히, 음, 그러니까 순순히 대답하지 않아서 저렇게 잘 다져놓은 거야?”
내 질문에 네이선이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무식한 방법을 썼겠습니까?”
“뭐?”
정황상 분명히 ‘심문기술-물리’를 사용한 게 확실한데?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제압하는 것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네이선 정도의 실력이면 상대를 굳이 저렇게 잘 다진 고깃덩어리처럼 만들지 않아도 충분하다.
“제발 아무거나 물어봐달라고 빌 때까지 일단 때렸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거짓말로 밝혀지면 치료해가면서 때릴 거라고 했거든요.”
…앞뒤만 바꾼 거잖아.
어쨌든 포로의 말은 다 사실인 듯하다.
내가 예상한 바랑 비슷하기도 하고.
나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마지막 질문이야. 네놈들 본거지가 어디야?”
“…….”
나는 거칠게 포로의 오른손을 잡아챘다.
포로의 눈에 공포가 어린다.
그냥 손만 잡았는데 이 정도라니, 정말 잘 다져놓았구나, 네이선.
“어, 선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선장님, 이런 험한 일은 제가….”
내 돌발행동에 네이선과 행크가 동시에 나섰다.
하지만 나는 칼을 든 오른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부하들이라고 하지만 내 소유물도, 인성이 없는 무생물도 아니다.
내 명령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미룬다면, 그건 좀 도리가 아니잖아.
“난 그렇게 인내심이 좋지 않아. 넌 어차피 죽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편하게 가.”
그 말을 끝낼 즘에 빠르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끄아아아아아!”
검지, 중지가 잘려 떨어지고, 비정상적으로 휘어져 살점이 도려내진 약지가 보인다.
옷과 얼굴에 피가 튀었지만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한 번 더 물을게. 너희 본거지가 어디야?”
“끄으으으, 모, 몰라요! 모릅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끄아아아아아악!”
반쯤 잘린 손목에서 피가 튀었다.
“똑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게 하지 마. 넌 어차피 죽어. 그전에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만 다를 뿐이야.”
나는 말을 마치고 하얗게 질린 오펜을 보며 말했다.
“붕대 가져와서 지혈시켜.”
“네? 네, 네!”
오펜이 허둥지둥 뛰어가는 사이에 포로의 왼손을 잡았다.
“흐흐윽, 흐윽, 제, 제발….”
속에서 신물이 넘어오는 것을 인상을 쓰며 꿀꺽 삼켰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손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네 몸에서 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눈물과 콧물, 핏물로 엉망이 된 포로의 눈이 떨린다.
“끄아아아아아!”
이번에는 손가락 네 개가 깔끔하게 떨어졌다.
미지근하고 찝찔한 피가 입술에 튀었다.
“흐으윽, 지, 지도, 지도를 보여주십시오! 제발….”
***
“아무래도 불침번은 좀 많이 세워야겠어.”
내가 얼굴을 닦으며 말하자 굳은 표정의 네이선이 대답했다.
“전체 인원을 다섯 조로 나눠서 불침번을 세우겠습니다.”
“그래, 어차피 다 해서 여섯 명이라니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
나는 선원들이 수습하는 목 없는 시체를 일부러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