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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76화 (277/420)

276화. 남겨진 사람들

잠자리가 바뀐다는 것은 숙면에 방해가 된다.

심지어 그 잠자리의 질이 매우 떨어진다면 더 안 좋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자기 전에 못 볼 꼴을 봤으니 뭐….

덕분에 깊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근처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행크가 보였다.

“이봐, 행크. 신호는 아직이야?”

“네? 아, 선장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신호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신호는 다름 아닌 현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와 중요 정보를 획득했다는 내용이다.

신호를 섬에서 오트라스로, 오트라스에서 근처를 돌고 있는 분함대로, 분함대에서 다른 섬 근방의 분함대로 보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영 시원치 않았다.

일단 오트라스가 움직이지 못하니 분함대가 근처에 있을 때만 신호 전달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분함대가 다른 분함대와 신호를 주고받을 거리가 되는 것은, 음….

답답해 죽겠군.

“신호가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늦었는데 좀 쉬시지요.”

“알았어. 그런데 자네는 언제 쉬려고?”

“갑판장님과 교대하기로 했습니다.”

“둘이서만?”

“갑판장님이 선장님 곁은 다른 녀석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하셔서요. 혼자 지킨다는 것을 겨우 뜯어말리고 저랑 나누기로 한 겁니다.”

짜식, 새삼 고맙네.

“작은 일이라도 깨워, 그럼.”

“쉿, 선장님, 잠시.”

약간 느슨한 자세를 하고 있던 행크가 갑자기 몸을 긴장시키며 허리에 매달린 칼 손잡이를 잡았다.

저벅저벅.

“누구야?”

“아, 대장. 접니다.”

날카로운 행크의 질문에 다가오던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얼굴을 보니 돌격대원 중 한 명이다.

“무슨 일인데?”

내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묻자, 돌격대원이 내게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대답했다.

“오트라스 호로부터 신호가 왔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에 기함 리에나가 이쪽으로 온답니다.”

“그래? 알았어. 혹시 모르니까 경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돌격대원이 떠나자 행크가 자세를 풀며 말했다.

“그래도 리에나 함장은 좀 괜찮은 사람 같지 않습니까? 일전에 전투에서도 지휘를 꽤 잘하기도 했고, 내일 아침에 바로 온다는 것도 그렇구요.”

“뭐,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능력과 인성이 늘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

애석하게도 깊은 잠을 자는 것에는 실패했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참에 소란이 감지된 것이다.

이번에는 그냥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바로 몸을 일으키며 머리맡에 놓아둔 칼을 집어 들었다.

행크는 이미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란의 근원지를 노려보는 중이었고, 언제 나타났는지 네이선 역시 부스스한 머리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 때문에 영 웃기는 모습이기는 하다.

“잔당인 모양입니다.”

“정신 나간 놈들이군.”

고함과 칼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비명.

하지만 습격이라고 하기에는 소란의 규모가 좀 작다.

하긴, 다른 배가 섬에 닿은 것도 아닐 테니, 섬에 남은 잔당들이 습격하는 경우밖에 없다.

어차피 우리는 내일이면 떠날 텐데 굳이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네.

“행크, 네가 가봐.”

네이선의 말에 행크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소란의 근원지로 뛰어갔다.

“쯧! 불나방도 아니고, 내일이면 떠날 우리를 굳이 왜 공격하는 거야?”

아무리 밤에 기습을 한다고 해도 경계 서는 인원만도 자기들의 두 배가 넘는데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내 혼잣말에 네이선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저놈들은 우리가 내일 갈지, 한 달 후에 갈지 모르잖아? 위치를 보아하니 우리 단정 하나를 훔쳐서 도망가려고 한 모양인데?”

아하?

잠시 후, 소란이 가라앉고 행크가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도 혈향이 물씬 풍겨온다.

“기습해온 적 여섯 명은 모두 사살했습니다. 용병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용병대장이 수습 중입니다.”

“쯧, 죽은 친구는?”

“아무래도 단정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어서 기습을 당한 모양입니다. 죽기 전에 일부러 칼을 돌에 던져서 아군에게 신호를 주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그래도 죽은 사람을 되살릴 방법은 없으니….

“다친 사람들은?”

“일단 급한 대로 지혈은 했습니다만, 제대로 치료를 받으려면 오트라스로 돌아가서 선의님에게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심각하면 지금이라도 단정에 태워서 보내.”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행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둡기는 하지만 특별히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큰 배들이야 야간에 해안가에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위험한 짓이지만, 단정 정도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

게다가 단정이 있는 곳에서 오트라스 호까지 거리는 겨우 100여 미터, 과하게 말하자면 헤엄쳐서도 갈 수 있는 거리다.

***

아침이 되었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불침번 때문에 제대로 잔 녀석도 없었고, 중간에 습격을 당하면서 대부분 잠에서 깨었으며, 잠자리 자체도 그리 좋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돌격대장이랑 용병대장이 상태 좋은 녀석들로 20명씩 데리고 저쪽 산 살펴봐. 아무것도 없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찝찝하니까.”

“알겠습니다.”

“알겠수다.”

두 사람이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용병들을 고르러 떠나고, 네이선이 다가왔다.

“나머지는?”

“철수해야지. 오트라스로 돌아가서 리에나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준비하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오펜이 다부지게 대답하고 한 쪽으로 뛰어갔다.

“저 녀석 요즘 들어 더 열심인데? 원래 게으른 녀석은 아니었지만….”

“무려 이등항해사 아니시냐, 흐흐흐.”

내가 키워서 그런지 정말 뿌듯하다.

***

오트라스로 돌아가자 그레이그와 게론드, 롱베르 씨가 뱃전에 서서 나를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장님.”

그레이그가 대표로 인사를 건네고,

“환자들은 괜찮네. 출혈은 잡았고 염증이 나지만 않게 조심하면 될 걸세.”

닥터가 피곤한 얼굴로 환자들의 상태를 보고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게론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회계사, 새벽에 죽은 친구, 사망 시 의뢰비 받을 사람이 있나?”

“네, 사망 시 수령자로 신청한 사람이 있더군요. 여자 같던데요.”

“1만 로스 추가로 지급해.”

“네…?”

“그 친구 아니었으면 더 많이 죽었어. 그 정도는 더 줘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나는 간부들과 함께 선교로 이동하며 물었다.

“리에나의 위치는 파악했나?”

“네, 동틀 때쯤에 함대에서 이탈하여 다가오고 있습니다. 곧 조우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움직입니까?”

“아니, 아직 우리 애들이 섬에 남았는데 우리가 움직이면 어떡해? 올 때까지 기다려.”

***

대략 한 시간 정도가 더 흐른 뒤 기함 리에나 호가 오트라스의 옆에 정박했다.

아무리 우리가 가만히 있는 상태였고 바다가 잔잔했지만 상당한 조함술이었다.

빠르게 설치된 널빤지를 건너온 강인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리에나의 함장, 슐리번이요.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군.”

“오트라스 호의 선장인 리안입니다, 슐리번 제독.”

제독이라는 말에 슐리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비록 임시 분함대이지만 일단 12척이나 되는 함대를 이끄는 사람이잖아? 제독이 맞다.

“일단 자리를 옮깁시다.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고?”

“네, 저 섬에 해적 놈들의 경계 초소가 있더군요. 총 8명을 사살했습니다. 아마 이들이 전부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8명? 혹시 포로에게 얻은 정보요?”

“네.”

나를 따라 귀빈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귀빈실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슐리번은 지도를 노려보며 장고에 들어갔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것이 해적들에게 알려진 것은 거의 확실하고, 포로가 이야기한 적의 위치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황.

만약 포로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해도 이미 우리에 대한 대응 정도는 벌써 준비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했던 것처럼 해안 포대를 만들었을….

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

갑자기 경고 타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귀빈실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지?!”

슐리번이 날카롭게 소리쳤고, 나는 잠깐 사이에 추측한 것을 이야기했다.

“해적 놈들이 선제공격을 나온 모양입니다. 제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습니다!”

“젠장! 리안 선장, 당장 전투 준비해서 출항하시오. 바로 본 함의 뒤를 따르면 되겠소.”

“알겠습니다. 일등항해사, 제독을 모시게. 나머지는 선교로 간다!”

해적들의 공격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이쪽의 전력과 위치가 그들의 귀에 들어갔고, 해적 놈들의 전력이 우리보다 우세하다면 마지막 승부를 걸어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고작 하룻밤 만에 자기들끼리 의견을 합치시켜서 치고 나올 줄은 몰랐다.

포로에게 들은 본거지의 위치가 사실이라면 동트기 무섭게 달려왔다는 뜻인데, 사기가 박살 난 해적들의 의사결정치고는 너무 빠르잖아?

***

귀빈실을 나오기 무섭게 통로에서 달려오던 선원이 내 앞으로 와서 보고했다.

“적이 출현했습니다! 현재 확인된 적 함선의 수는 16척, 북서쪽에서 접근 중입니다!”

“아군 함대는?”

“지금 막 섬 뒤쪽으로 접어들어서 바로 연락은 불가능합니다! 반대편 섬에 있는 함대 역시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갑판장, 슐리번 제독이 하선하는 즉시 닻 올리고 기동한다! 움직여!”

“넵!”

네이선이 보고하러 온 선원과 함께 떠나고, 나는 오펜을 데리고 선교로 뛰었다.

아직 적 함대와 거리가 조금 있더라도 일단 적의 수가 많으니까 아군 함대와 합류해야 했다.

“선장님, 섬에 남은 인원들은 어떻게 합니까?”

오펜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방법이 없어. 저들을 기다리다가는 우리가 먼저 다 죽을 판이니. 섬에 신호 보내. 상황 종료 시까지 섬에서 대기하라고.”

“알겠습니다.”

섬에 남은 대부분의 인원이 행크와 레건을 따라 섬에 있는 산을 탐색하고 있지만, 오트라스와 신호를 주고받을 사람은 남겨 두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간단한 명령 정도는 내릴 수 있었다.

전 인원이 해변에 대기 중이라고 해도 적 함대가 다가오기 전에 단정 네 척으로는 섬에 남은 인원 모두를 옮길 수 있을지 모르는 판이다.

그런데 이미 산으로 들어간 이들을 찾아서 데리고 온 후에 오트라스에 태운다고?

그때쯤이면 오트라스 호가 아마 판자 조각이 되어있지 않을까?

물론 해적 놈들이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섬에 상륙해서 남은 이들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아마 섬에 남은 인원을 살리기는 어렵겠지.

해적 놈들은 다시 이곳에 경계 시설을 설치하고 싶을 테고, 40명이 넘는 인원이 흔적 없이 숨어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심지어 섬에 남은 이들에게는 남은 식량도 없다.

***

우리가 겨우 기동을 시작할 때쯤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확인된 적 함선의 수가 18척으로 늘어난 것이다.

다 해서 12척인 우리에 비해 무려 6척이나 많다.

그리고 운이 없게도 모든 분함대가 멀리 흩어져 있어서 대응 자체가 느려지는 중이었다.

“일단 섬을 돌고 있는 함대와 합류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응, 그게 정석이지.”

슐리번 제독은 우리가 있는 섬을 돌고 있는 5척에 합류한 뒤, 그들을 이끌고 다른 쪽 섬으로 가서 전 함대를 집결시킬 생각이다.

나는 다시 한번 망원경을 들어 이쪽을 향해 맹렬하게 다가오는 적 함대를 보았다.

현재 거리로 볼 때 이곳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약 30분 정도, 이쪽이 계속 도망갈 생각이니까 아슬아슬하지만 전 함대가 합류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함대가 그대로 후퇴를 결정한다면, 섬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내가 슐리번 제독이라면 과연 내 부하도 아닌 45명을 살리기 위해 불리한 전투를 감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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