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이놈이나 저놈이나 무슨 생각이야?
리에나에서 신호기가 요란스럽게 흔들린다.
맞은편에서 다섯 척의 선두에서 다가오던 2번 함에서도 열심히 신호기를 흔든다.
“곧 선회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라고 보낸 신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 함선 사이에 오가는 신호기를 보지 못할 것도 없다.
미리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다음 지시에 대해 대응하기 편하기도 하고.
예상대로 곧 리에나에서 선회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우리는 2번 함이 이끄는 다섯 척과 합쳐 총 일곱 척의 무리를 이루어 나머지 다섯 척이 남아있는 섬을 향해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본 함대 후미와 적 함대 선두 간 거리 약 1,500입니다. 아슬아슬하게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풍이라 다행이야. 갤리선들이 힘을 못 쓰네.”
“그러게 말입니다. 역풍이었다면 정말 난감할 뻔했는데요.”
풍력과 조력을 동시에 이용하는 갤리선은 역풍 상황에서만큼은 범선보다 빠르다.
물론 돛의 숫자에 따라 순풍일 때도 조금 빠를 수는 있겠지만, 지속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만약 노잡이들을 최대한 몰아쳐서 1.5km나 떨어진 우리를 따라잡으려고 미친 듯이 달려오면 막상 전투가 벌어질 때쯤이면 노잡이들이 몸도 제대로 못 가누지 않을까?
그렇다고 우리가 딱히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놈들은 무리하지 않고 여유 있게 우리를 뒤쫓는 중이었고, 우리 함대의 숫자가 불리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지원도 바랄 수 없고, 기책을 펼칠 여유도 없다.
순수하게 힘 대 힘으로 겨루어서 12척이 18척을 이길 확률이라….
“아마 퇴각하겠지?”
“…그럴 겁니다.”
그레이그가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대답했다.
섬에 남겨진 이들을 두고 퇴각한다면 아무리 빨리 돌아온다고 해도 적어도 이틀은 필요하다.
그것도 말도 안 되게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야기고, 공격 전략을 짜고, 선원과 용병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하면 아마 빨라도 닷새는 걸리지 않을까?
그렇다고 혼자서 단독행동이라도 해서 저들을 구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미칠 노릇이다.
***
이변을 눈치 챈 4척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다가 측면을 드러낸 상태로 대기했다.
함선의 대포는 대부분 현측에 몰려있으니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배의 숫자와 상관없이 우세한 화력을 살려 적 함대를 견제하려는 의도다.
물론 견제만 하다가 우리가 합류할 때쯤이면 바로 꽁무니를 빼겠지.
내 예상대로 아군의 함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아군보다 우리를 뒤쫓던 해적 함대의 선수포가 먼저 포탄을 토해내기는 했지만, 열 발씩 일제사로 날려도 안 맞는 포탄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고작 한두 발씩 쏘는 선수포가 맞을 리가 없었다.
“최후미 9번 함 피격!”
…가끔 맞기도 한다.
하필이면 아군이 첫 포격으로 일제사를 날리자마자 아군이 피격 당했다.
“이 거리에서 맞았다고? 선수포를?”
“운이 없군요. 찝찝한데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견시! 기함의 신호에 집중해!”
나는 불길한 말을 내뱉는 그레이그에게 살짝 핀잔을 주고,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견시수에게 주의를 주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흐르다 보면 견시수도 신호를 제대로 캐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추격을 늦추려는 경고 사격 개념으로 쏘아진 아군의 포탄은 대부분 해적 함대와 우리의 중간쯤에 착탄했다.
해적들은 맞추고 이쪽은 못 맞췄으니 오히려 안 쏘는 것만도 못했다.
하지만 원래 운이라는 것은 공평한 법이라 세 번째 사격은 양상이 조금 달랐다.
“명중탄이 나왔습니다!”
“또?”
“또?”
어이가 없어서 부지불식간에 그레이그와 똑같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뒤이어 견시수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아군이 맞췄습니다! 적 선두 함선 두 척 피격!”
얼른 망원경으로 후방을 살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피격당했다는 최후미의 9번 함의 거리가 그사이에 상당히 벌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부분에 맞은 것 같았다.
“씨발, 저거 못 살리겠는데….”
후퇴 중에 낙오되는 병사의 운명은 뻔하다.
그리고 대열에서 이탈한 함선의 운명 역시 별로 다를 바 없었다.
***
결국 속도가 떨어진 9번 함이 돛을 내리고 백기를 올렸다.
네 척의 아군 함선이 쏘아붙인 일방적인 포화에 해적 함대에서도 한 척이 낙오되었지만, 비율로 따지면 아군의 피해가 더 컸다.
“기함 리에나로부터 신호! 좌우로 산개, 2번 함 우측으로!”
“뭐? 산개라고? 제대로 본 거 맞아?”
잠시 후 견시수의 확신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네! 우측 두 척에 합류하랍니다!”
“젠장, 일단 우현 전타!”
설마 이 상황에서 전면전을 벌인다고?
아직 섬에서 탐색하던 함선이 합류하지 못해 아군은 총 10척, 적은 17척이다.
앞으로 서너 번쯤 일방적인 포격을 퍼부을 수 있겠지만, 고작 그 정도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할 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좌우로 5척씩 흩어진 우리는 쉴새 없이 포탄을 날렸다.
선박의 선수 부분은 선측에 비해 피탄 면적이 작지만, 선수포밖에 운용하지 못한다는 것 외에도 재수 없으면 포탄 한 발에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추가로 해적선 두 척을 기동 불능으로 만들 수 있었다.
범선 한 척은 선수와 우현이 너덜너덜해져서 기동력이 극도로 떨어졌고, 갤리선 한 척은 침수를 막지 못해 바다 한복판에서 반신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적 함대는 나머지 15척 모두가 기함 리에나가 있는 좌측의 5척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리에나를 선두로 하는 5척의 분함대는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우리는 졸지에 해적 함대를 추격하는 포지션이 되고 말았다.
“바보들인가? 반씩 나눠서 대응하면, 아니, 이쪽에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의 전력만 남겼어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적들도 바보는 아니었고 단지 손발이 잘 안 맞았을 뿐이었다.
우리가 신나게 추격하며 두들기자 범선 세 척과 갤리선 한 척이 반전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사소한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충돌한 당사자들이 문제 삼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갤리선이 한 세 척 정도 반전했다면 우리도 달려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두 척이었어도 쉽사리 달려들기 어렵다.
하지만 고작 한 척?
“4번 함에 신호, 갤리선 요격한다.”
내 말에 반사적으로 달려 나가던 오펜의 발걸음이 멈췄다.
“네?”
오펜의 반문과 함께 그레이그가 나를 보며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선장님, 굳이?”
나는 반전해서 달려오는 선박들을 망원경으로 다시 확인한 후에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저놈들 세 척의 화력이면 나머지 6, 7, 12번 함의 화력을 넘지 못해. 갤리선만 제압하면 이곳의 전투는 우리가 이긴다.”
본대 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같은 크기의 함선이라도 용병함과 해적선의 ‘선원 : 포대’ 비율이 다르다.
하물며 해적선의 크기가 용병함보다 작다면 말할 필요도 없지.
그리고 내가 알기로 오트라스 뒤에 있는 4번함은 포문 수는 좀 부족해도 백병 전력이 상당하다.
배 이름이 뭐였더라?
비록 우리가 용병을 너무 많이 내려두어서 전력에 문제가 있지만, 해적들이 그 부분까지는 알지 못할 터, 양쪽으로 치고 들어가면 갤리선의 인원이 200명쯤 된다고 해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2번 함이 상당히 싫어할 겁니다.”
그레이그가 살짝 우려를 표하기는 했지만 오펜에게는 손짓으로 내 명령을 그대로 이행하라고 전달했다.
원칙적으로 함대가 분산될 때, 분함대의 기함은 함번이 높은 배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함이 대열의 맨 뒤에 있어서는 제대로 된 지휘를 하기 어렵다.
어차피 최후미에 위치하는 2번 함에서 신호를 전달하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기도 하고.
“좆까, 책임을 묻고 싶으면 우리가 진 다음에 하라고 해.”
당연히 전투에서 패배하면 책임을 질 사람은 없을 거다.
이미 죽었을 테니까.
내 말에 그레이그가 피식 웃으며 칼집에 넣어둔 커틀라스를 반쯤 뺐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선장님은 평소에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생각이 깊지만, 가끔은 진짜 뱃놈 같습니다.”
“알아, 나도 가끔 내가 미친놈 같거든.”
다행이랄까, 우리의 신호를 받은 4번 함은 두말없이 바로 침로를 바꿔서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갤리선의 우현을 향해 치고 들어갔다.
달려들던 갤리선이 당황했는지 급하게 좌현으로 침로를 수정했지만, 그쪽은 이미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상황, 아무리 선회력이 좋은 갤리선이라도 이렇게까지 압박이 들어오면 절대로 선회할 수 없다.
꽈과과과과과과광!
타이밍 좋게 4번 함과 오트라스가 동시에 포격을 가하자 대충 열 대쯤 얻어맞은 갤리선의 노가 부러지고, 나무 파편이 휘날렸다.
50m도 안 되는 근거리에서 얻어맞은 포격이라 피해가 심각했다.
신나게 달려온 갤리선의 뒤를 따라오던 세 척의 해적선이 선수포로 포격을 가했지만, 물장구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에서야 급하게 선회하며 선측면을 들이대고 있지만, 저건 쏴 봤자 자기들이 손해다.
갤리선을 가운데에 두고 4번 함과 오트라스가 양쪽을 잡고 있는데, 포를 쏴서 갤리선을 안 맞출 확률은 0%에 가깝다.
시공을 초월해서 아군 오사(誤射)만큼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은 없으니, 저 놈들은 우리가 아닌 다른 함선들과 포격전을 주고받아야 할거다.
“돛 방향 70도! 메인마스트 내려! 갑판원 전투 대기!”
선회하느라 속도를 잃은 데다가 노의 절반이 파괴된 갤리선은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했다.
4번 함이 십여 개의 줄 갈고리를 던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범선이 갤리선을 향해 백병전을 걸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다.
4번 함에서 널빤지를 놓으며 쿼럴을 쏘았다.
어설프게 급조한 바리케이트 뒤에서 대여섯 명의 해적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이 보인다.
저놈들은 자기들이 돌격을 하면 했지, 돌격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모양이다.
쉭, 쉭, 쉭, 쉬쉬쉬식!
대여섯 발의 쿼럴이 우리를 향해 불규칙적으로 날아왔다.
“끄아아악!”
“커허헉!”
뱃전에서 대기하던 용병 세 사람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미 전투준비를 마치고 인원수도 더 많아 보이는 4번 함보다는 이쪽을 먼저 제압하려던 것 같은데,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마음으로 쏜 쿼럴은 대부분 허공을 갈랐다.
“갈고리만 걸고 잠시 대기.”
내 말에 오펜이 급하게 달려 나가 살기를 풀풀 날리는 네이선에게 전달했다.
“와아아아아!”
“죽여!”
“개잡놈들! 다 죽, 어어억!”
4번 함에서 돌격이 시작되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이쪽을 견제하며 우왕좌왕하던 인원의 절반쯤이 4번 함이 붙은 우현으로 달려갔고, 나는 그때서야 명령을 내렸다.
“돌격 준비!”
쾅!
콰아앙!
끼이익!
쿠웅!
“돌격!”
단번에 대여섯 개의 널빤지가 갤리선의 뱃전에 걸리고, 기다렸다는 듯 돌격대와 30여 명의 용병들이 널빤지를 건너기 시작했다.
“오펜! 선교 지휘해!”
원래는 그레이그에게 선교를 맡기려고 했는데 이미 그레이그는 칼을 뽑아 들고 선교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동안 대부분 선교를 지키기만 해서 몸이 달았던 모양이다.
“서, 선장님!”
“이등항해사! 명령이다!”
“네, 넵!”
고작 수십 명이 아니다.
네이선을 위시한 최정예 돌격대 10명이 얄팍한 적의 방어라인을 뚫어버리자 그 뒤를 용병과 일반 선원(포격을 담당하던)들이 그 뒤를 따르며 패닉에 빠진 해적들을 학살했다.
내가 선교를 내려가 널빤지를 건널 때는 이미 악귀처럼 해적을 죽여 대는 네이선과 돌격대에 의해 해적들의 사기가 출렁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전면에서 맞이하는 4번 함의 선원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칼에 맞아 나뒹구는 녀석이 속출할 정도니, 머릿수가 조금 우세한 것은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노잡이들은 미처 동원하지도 못했는지 해치를 열고 올라오던 꾀죄죄한 몰골의 노잡이들은 그 앞에 대기하는 용병들에 의해 추수철 밀이 수확 당하듯 머리통을 상납하는 중이었다.
쿠우우웅!
갑자기 갤리선이 크게 흔들렸다.
여기저기에서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해적이건 선원이건 용병이건 상관없이 아주 공평하게 넘어진다.
어떤 놈은 죽기 직전에 기사회생으로 살아나고, 어떤 놈은 다 죽였던 놈에게 오히려 칼을 맞았다.
“씨발, 뭐야?!”
넘어지면서 엉겁결에 상대하던 해적 놈의 허벅지를 크게 베어 낸 내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내게 허벅지 안쪽을 베인 녀석은 바닥에 넘어져서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체중이 반쯤 실린 칼이 깊게 들어갔는지 피 분수가 치솟는다.
저 정도면 지금 당장 지구의 종합병원으로 이송해도 못 살린다.
그 전에 출혈 과다에 의한 쇼크로 사망할 테니까.
저 멀리서 오펜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선장님! 퇴각하십시오! 저놈들이 이쪽으로 포를, 억!”
뒤를 돌아보니 나무 파편이 튀는 오트라스의 선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