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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78화 (279/420)

278화. 사망 플래그

“이 미친놈들이?!”

상황은 명백했다.

세 척의 해적선은 동료인 갤리선과 오트라스, 그리고 4번 함을 동시에 수장시킬 생각이다.

동료애라고는 전혀 없는 해적 놈들을 내가 너무 상식적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4번 함도 비슷한 처지겠지만, 오트라스는 진짜 견시수와 오펜, 닥터등 최소 인력 외에는 모든 인원이 이미 갤리선으로 넘어온 상황이라 침수가 발생했다면 그걸 막을 인원조차 없었다.

“일등항해사! 일등항해사!”

“네, 선, 컥!”

행크도 없는 마당에 네이선을 빼는 것은 무리인지라 일단 눈에 보이는 그레이그를 불렀다.

내 외침을 듣자 그레이그는 바로 몸을 돌려 달려왔지만,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해적의 칼을 막으며 발이 꼬여 넘어졌다.

그리고 넘어진 그레이그에게 칼을 내리치려던 해적의 목 앞에서 시퍼런, 아니, 피가 묻어 새빨갛게 변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크르륵!”

“일등항해사님! 빨리!”

채앵!

뭐야? 게론드?!

닥터와 함께 배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에 있어?!

갑자기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게론드가 그레이그를 공격하던 해적을 끝장내고 쏟아지는 다른 놈들의 후속 공격을 막아내는 사이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선 그레이그가 달려왔다.

“선장님!”

아무리 격전 중이었다지만 그레이그 역시 오펜의 목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부른 이유 역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다섯, 아니, 셋만 데리고 오트라스로 넘어가! 침수구역 확인하고 어떻게든 막아! 분명히 후속 공격이 있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차라리 선장님이…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빨리 가!”

싸우면서 슬쩍 봤는데 그레이그의 칼질은 영 별 볼 일 없었다.

체구가 크고 근육도 있으니 힘 자체는 보통 선원보다 나은 수준이지만 칼질은 영….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좀 더 낫다.

어느 정도냐 하면, 쥐 잡듯이 잡아대던 크리스티앙이랑 1:1로 붙으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질 것 같은 수준이다.

진실을 알고 나면 크리스티앙이 꽤나 억울하지 않을까?

그레이그가 비교적 뒤쪽에 있던 선원 세 명을 빼서 널빤지를 건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칼을 쥐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도망갈 곳도 없이 포위당한 해적들은 악에 받쳐 반항하고 있었고, 아군의 피해도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중이었다.

꽈아아앙!

쿠우우우우웅!

촤아아아악!

다시 해적들의 포격이 적중하고, 서로 연결된 세 척의 배가 동시에 출렁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지근탄이 만들어낸 물기둥이 부서지며 갑판 위로 짠 바닷물을 흩뿌렸다.

“끄아아아악!”

“아아악!”

사방에서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터졌다.

바닷물을 뒤집어쓴 부상자들이 내뱉는 비명이었다.

피가 뭉글뭉글 쏟아지는 상처에 바닷물이 들어갔으니 그 고통이 오죽하겠나.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되는 한 사람 역시 커다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세 번째 포격이 적중했을 때는 갑판 위에 서 있는 해적이 열 명 남짓에 불과했다.

내가 일부러 선원과 용병들의 배치를 조절해서 선미 쪽으로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준 것이 주효했다.

최소한 30명 이상의 해적이 선미 방향으로 도망가는 것이 보였으니까.

“너, 그리고 너, 따라와!”

다시 한번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나는 가까이에 있던 용병과 선원 한 명씩을 지명했다.

두 사람은 군말 없이 나를 따랐고, 나는 포대 옆에 배치된 화약 더미를 향했다.

“뭐 할지 알지? 도화선 만들어!”

선원이 재빨리 화약 주머니 하나를 칼로 찢고 도화선을 만들고, 용병은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해적 한 명을 막아섰다.

운 좋게도 근처에 굴러다니던 횃불에 불씨가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반쪽이 젖어서 불씨가 오래 살아있지는 못할 것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끝났습니다!”

“비켜!”

“커어억!”

선원이 비어버린 화약 포대를 집어 던지는 것과 내가 아슬아슬하게 남은 불씨를 화약에 가져다 대는 것, 용병이 해적의 가슴을 깊게 베어버리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파아앗!

주황색의 불꽃이 빠르게 타들어 간다.

“모두 충격 대비!”

차마 엎드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칼과 칼이 부딪치는 금속음과 비명이 난무하는데 엎드리라고 했다가는 그사이에 대여섯 명의 목숨이 날아갈 판이다.

쿠우웅, 꽈아아아앙!

꽈아앙! 꽈앙! 콰과과광!

폭발력이 약한 흑색화약이라고? 그래도 그게 몇 포대씩 뭉쳐 있으면 연약한 나무판자 따위는 단번에 박살난다.

심지어 근처에 무거운 쇳덩어리(포탄)가 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의도치 않게 세 군데 정도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났고, 갤리선의 함수 쪽은 절반쯤이 박살나서 미친 듯이 바닷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 전원 오트라스로! 4번함! 4번함도 후퇴해!”

이미 내 움직임을 눈치 챈 사람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이 폭발이 발생한 후에야 이변을 알아챘다.

폭발 이후로 더 이상의 금속음은 없었다.

살아남은 해적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빠르게 물에 잠기는 선수 방향을 보다가 단정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용병과 선원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의 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돌격대는 마지막까지 널빤지 사수해! 오펜, 오펜!”

“네! 선장님!”

“당장 이탈 준비해!”

“알겠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용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오펜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나는 슬슬 기울어지는 것이 체감되는 갤리선의 갑판에 서서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남자를 부축했다.

“그냥 배에 있지, 왜 나왔어!”

“으윽, 흐흐흐, 선장님, 한 사람이, 흐으으, 아쉬운 상황, 큭, 아닙니까?”

“조금만 참아, 닥터가 고쳐줄 거야.”

“흐읍, 흐읍, 저 토할 것 같은데, 흐으읍, 괘, 괜찮은 겁니까? 흐으읍!”

쇼크에 의한 과호흡 상태.

“숨 멈춰!”

“흐으읍, 네?”

“숨 쉬지 말라고!”

“흐읍, 흐읍, 숨이, 흐흡, 숨….”

“제기랄! 말 좀 들어! 숨 쉬지 말라고!”

나는 얼굴이 창백해진 게론드를 거의 들쳐업다시피 하고 널빤지를 건넜다.

부상자를 둘러업고 좁은 널빤지를 뛰는 나를 보고 주변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게론드 이 미친 새끼, 그러니까 왜 사람 불안하게 사망 플래그를 세우고 지랄이야?

“닥터! 닥터! 닥터 어디 있어?!”

내 외침에 갑판 위에서 응급환자들을 보고 있던 닥터 롱베르가 달려왔다.

“선장, 무슨 일, 이런! 회계사가 왜 이런 꼴로?!”

“빨리 호흡이랑 출혈부터 잡아줘요!”

***

게론드를 닥터에게 넘기고 나는 아직 갤리선에 남아있는 네이선을 보았다.

냉정하게 보이겠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게론드를 걱정하고 우울해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대충 용병들은 다 넘어왔고 네이선과 돌격대가 마지막까지 버티는 것이 보였다.

“갑판장! 이제 넘어와! 위험해!”

내 외침에 이쪽을 한번 바라본 그는 손짓으로 돌격대원들을 먼저 퇴거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넘어오자, 미리 대기하던 용병과 선원들이 널빤지를 회수할 것도 없이 들어서 던져버렸다.

이미 줄 갈고리는 다 끊어버린 지 오래였다.

“돌격대장! 아니, 용병대… 어휴, 전원, 제 위치로! 지금 당장 이탈한다!”

뭘 시키려고 해도 부재중인 간부가 너무 많았다.

우르타에 행크, 레건까지 없으니.

“갑판장은 선교로!”

“네, 선장님!”

나와 네이선은 뛰다시피 선교에 올랐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그레이그가 온몸이 흠뻑 젖어서는 보고했다.

“선장님! 총 다섯 군데가 피격 당했습니다. 다행히 항해에는 지장이 없고 침수구역은 대충 막았습니다만, 응급 수리는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간단한 응급 수리라도 쇳덩어리에 의한 구멍을 메우는 일이다.

당연히 고작 세 명이서 단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규모가 작았다고 하지만, 겨우 세 명이 침수를 다 잡은 것만 해도 오히려 칭찬할 일이다.

그렇게 그레이그의 보고가 끝나자 오펜이 나섰다.

“침로 340도, 현재 모든 마스트의 돛을 펼치는 중입니다. 곧, 으윽!”

빠지직! 꾸우웅!

갑작스러운 충격에 보고를 하던 오펜이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나 역시 넘어지려는 것을 옆에 있던 네이선이 붙잡아주어 겨우 나동그라지는 것은 면했다.

젠장, 언제까지 이렇게 얻어맞아야 하는 거야?

우리 편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제대로 견제를 하는 건 맞나?

“…곧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시 자세를 잡고 보고를 마치는 오펜의 입에서 핏물이 튄다.

“괜찮아?”

“…혀를 살짝 씹었습니다.”

“봐.”

어떻게 혀를 씹으면 말하는데 피가 튈 정도야?

밍기적거리는 오펜의 입을 강제로 벌리자 피투성이가 된 입 안과 혀가 드러났다.

말을 제대로 할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혀가 잘리거나 하는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게 찢어진 상처에서 나오는 출혈량이 상당했다.

나는 오펜의 입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닥터가 바빠서 널 봐주기 어려울 거야. 가서 깨끗한 천을 찾아서 입에 물고 있어.”

“괜찮….”

“나중에 빈혈로 쓰러지지 말고 그냥 물어.”

“네.”

입에 천 뭉치를 물고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오펜은 사실상 본래 역할인 이등항해사를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애지중지 키워온 녀석이 숨을 껄덕거릴 정도로 피를 흘리는 것을 보면서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펜이 선교를 떠난 뒤, 나는 네이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내려가서 선원들 지휘하고, 용병들 재정비해. 그리고 용병들 뽑아서 위험한 곳부터 긴급 수리 실시해. 최대한 고쳐!”

응급 수리는 배에 익숙하고 경험이 있는 선원들이 하는 쪽이 당연히 효율적이다.

하지만 돌격대까지 포함해도 고작 20명 남짓한 선원들을 당장 빼버리면 뱃일은 누가 하겠어?

효율이 떨어져도 멀뚱멀뚱 서 있을 용병 놈들을 써먹어야지.

그나마 네이선의 무시무시한 실력에 질려버린 용병들이 네이선의 말은 잘 듣는 편이라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네이선마저 선교를 떠날 때쯤, 오트라스와 4번함이 침몰하는 갤리선을 두고 천천히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를 추월한 2, 11, 12번함은 선수를 돌려 본대를 쫓아가려는 해적선들을 향해 무자비한 포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진작부터 저럴… 아, 원래 저러고 있었으려나?

“일등항해사! 우리도 포격에 가세한다! 포술장이 없기는 하지만 아주 안 쏘는 것보다는 낫겠지.”

“알겠습니다!”

죽어라고 도망가는 표적에 선측포를 쏘는 것은 쉽지 않다.

시작 지점이 같다고 해도 최소한 30도 이상의 각도를 유지하면서 달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계속해서 적과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적선을 거의 다 따라잡은 2, 11, 12번 함이야 몇 발 정도 더 쏘겠지만, 아마 오트라스와 4번 함은 한 발도 못 쏠 확률이 높다.

그래도 힘들다고 멍하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

“백기! 백기가 올랐습니다!”

행운의 신이 이번에는 나를 향해 웃어주기로 한 모양이다.

선장의 판단력이 조금 모자랐는지 다른 두 해적선보다 선회가 느려서 뒤처졌던 녀석이 아군의 집중포화를 견디다 못해 백기를 게양했다.

멀리서 봐도 선체가 기울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

“무시해.”

백기는 개뿔, 언제부터 우리가 해적 놈들 항복을 그렇게 잘 받아 줬다고.

이전 전투에서 항복을 받아 준 것은 어디까지나 포로가 필요했고, 우리의 주둔지 근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저놈들을 포로로 잡을 여유도 없고, 살려 놔봐야 어차피 다시 해적이 될 텐데 왜 항복을 받아 주겠나?

다른 함장들도 나와 의견이 같은지 백기에 개의치 않고 포격을 계속했다.

어차피 다른 놈들은 잡기에 너무 늦었으니 이놈이라도 확실히 박살을 내려는 것이다.

꽈아아앙!

그렇게 3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해적선에서 폭음과 함께 섬광이 터져 나왔다.

굴러다니던 횃불 같은 것 때문에 실화로 화약이 터진 것이다.

저렇게 되면 배는 회생 불가다.

침몰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해적선을 뒤로한 채 우리가 위풍당당하게 남은 두 척을 뒤쫓는데, 우현 쪽에서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섬을 탐색하던 6번 함이 합류합니다!”

우리는 5:4로 시작한 전투를 6:2라는 기적의 스코어로 바꾸어 마무리 지었다.

그렇다면 무려 11척에 쫓기던 기함 리에나를 포함한 다섯 척은 어떻게 되었을까?

설마 전멸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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