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음흉한 제독
“다른 분들이 반대하지 않으신다면 오트라스와 피오렐이 자원하겠습니다.”
“크흠, 한 척이 부족한데?”
“뭐, 두 척으로 해도 괜찮… 지 않으려나?”
“리안 선장 말대로 이탈한 해적 잔당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 최소한의 전투력은 있어야지.”
“헹! 고작 도망간 해적 놈들이 무서울 게 뭐야?”
“바냐도르, 그럼 자네의 크록커스 용병함대가 가지 그러나?”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은 약해빠진 상선대 놈들이 할 일이지.”
대머리의 도발에 몇몇 사람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저 멍청이는 자기가 날 무시하고 욕할 때마다 오히려 자신의 평판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제가 가겠습니다.”
“뭐?! 베기어 함장!”
조용히 있던 한 사람이 손을 들며 자원했고, 한껏 나를 비웃던 대머리 바냐도르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 질렀다.
“함대장인 나와 상의도 없이 무슨 짓이야?!”
베기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바냐도르에게 조용히 말했다.
“바냐도르 함장, 이 시간부로 드라이언은 크록커스 용병함대를 탈퇴하겠소.”
“뭐, 뭐라고?! 이봐, 베기어!”
바냐도르가 머리끝까지 빨개져서 계속 소리를 질렀지만 베기어 함장은 더 이상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리안 선장님, 제가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어이구, 이게 무슨 경우람?
다른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고, 바냐도르는 발작을 멈춘 채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그렇게 막 결정하셔도 되겠습니까?”
대머리가 날 노려보건 말건 그런 사소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서 대머리 편을 들어준다고 해서 대머리가 날 갑자기 좋게 볼 리도 없고 말이야.
내 말에 대머리를 슬쩍 본 베기어 함장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바냐도르 함장의 독선적인 태도는 이전부터 많은 이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지요. 승조원들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는 있겠지만 특별히 반대하는 녀석은 없을 겁니다.”
“베기어! 이 배신자 새끼! 네가 감히!”
“어, 어, 바냐도르 함장! 지금 뭐 하는 거야?”
“잡아, 잡아!”
원래 팩트로 두들겨 맞은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얼굴이 벌겋게 변해서 창피해하며 자리를 뜨거나, 저렇게 열등감을 분노로 승화시키지.
다른 함장들에게 팔다리가 구속당한 상태로도 발작을 하는 바냐도르를 무시한 채 알센더트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더 이상 회의는 무리겠군요. 우리 세 사람은 이만 퇴장해도 되겠습니까?”
“…리안 선장.”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신 것처럼.”
“후우우, 가 보게.”
바냐도르의 욕설 섞인 저주를 배경 삼아 회의장을 떠나는데 아인델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독, 바냐도르 저 사람, 괜찮겠습니까?”
“알센더트는 바보가 아니야. 대머리가 정신이 나가서 미친 짓을 하려고 해도 그가 알아서 컨트롤할 거야.”
“네? 알센더트 제독이요? 그는 제독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싫어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감정에 휘둘리는 대머리와 달리 알센더트는 매우 냉정한 사람이다.
그는 나를 싫어한다기보다 자신이 가져가야 할 명예와 전공을 내게 빼앗기는 것을 싫어한다.
나를 상대로 노골적인 견제를 하면서도 다른 이들이 볼 때는 대범한 척, 공평한 척하려는 것이 너무 뻔히 보인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내분이야말로 리더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벤트인데, 알센더트가 그 꼴을 그냥 보고 있을 리가 있나?
대머리가 나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건, 오트라스를 침몰시킬 계획을 세우건, 결국 그는 내 욕이나 실컷 하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어리둥절한 아인델프를 향해 한 번 웃어준 뒤 약간 착잡한 표정의 베기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듣는 귀가 많아서 자세한 이야기를 털어놓기는 껄끄럽다.
“베기어 함장님, 괜찮으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문제가 없지는 않으실 텐데요.”
“아, 괜찮습니다. 크록커스 용병함대는 바냐도르가 소유한 두 척의 함선과 각 함장의 소유인 함선 세 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드라이언(베기어의 함선)이 바냐도르의 소유가 아닌데 그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드라이언에 갔다가 오셔야겠지요?”
“네, 부하들을 설득한 후에 선장님의 숙소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참, 이번 의뢰에 대한 비용 정산이 골치 아프실 텐데 그 부분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감사하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말이죠.”
“설득이 잘 되면 저녁쯤에 뵙도록 하죠.”
베기어 함장이 드라이언의 소유주라고 해도 일단 계약 당시에는 크록커스 용병함대의 일원이었으니 계약은 바냐도르가 대표로 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앙심을 단단히 품은 바냐도르가 계약금과 의뢰 완수금을 곱게 나누려고 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돈을 지불하는 ‘갑’이 내가 모시는 후작 각하라서 말이지.
전쟁이 끝나고 완수금이 지급되기 전에 후작에게 이야기만 꺼내면 후작이 아예 지급을 따로 해줄 거다.
후작 입장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도 아니라서 딱히 거리낄 것도 없으니 거절할 리가 없다.
“아인델프 선장, 인원 좀 재편성하지. 오트라스에 뱃일할 사람이 너무 적어.”
“알겠습니다. 갑판장과 함께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지금은 시간이 애매하니 베기어 함장이 오는 저녁 시간에 식사나 함께하도록 하지.”
***
“닥터, 별일 없어요?”
“아, 제독님이 오셨나. 뭐, 별일 없네. 배탈 난 녀석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깨끗해 보이는 취수원이 있다지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를 대충 알고 있다.
그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말이다.
그래서 식수만큼은 가능하면 끓인 물을 보급하려고 하는데, 날씨가 덥다 보니 선원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들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고.
그래서 배탈 환자는 하루에 몇 명씩 꾸준히 나오는 중이었다.
“게론드는요?”
“이제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열도 거의 다 내렸고, 상처도 별 이상 없이 아물고 있더군.”
아인델프, 베기어와 약속한 시간이 좀 남아서 임시로 설치한 치료소(?)를 방문했다.
쉬지 않고 흔들거리는 배보다는 아무래도 육지가 환자의 회복에 더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라는 특성상 청결과는 거리가 좀 멀어서 감염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닥터 롱베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인기척이 들리며 초췌한 모습의 게론드가 나타났다.
“아, 선장님 오셨습니까?”
“회계사! 몸은 좀 어때?”
“괜찮아지는 것 같습니다. 몸의 균형이 조금 안 맞기는 합니다만.”
씁쓸한 웃음을 짓는 게론드의 왼쪽 소매가 힘없이 흔들렸다.
왼쪽 팔꿈치 아래로 전체 단면의 2/3 정도가 잘려 나갔던 게론드는 진짜 죽을 위기를 겪었다.
수혈 기술이 없는 세상에서 과다출혈은 정말 답이 없는 것이었으니.
닥터의 빠른 조치로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그의 왼팔은 살리지 못했다.
신경이고 혈관이고 죄다 끊어진 팔을 다시 연결할 기술은 없었으니까.
원래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는데 자기 발로 걷는 것을 보니 확실히 회복되는 중인 것 같기는 하다.
“입맛이 없더라도 식사는 잘 챙겨 먹으라고. 잃어버린 피를 빨리 보충해야 빨리 건강해질 것 아냐?”
“건강 말입니까….”
“어, 음….”
아오, 하루아침에 팔을 잃은 사람 앞에서 건강이라니.
내가 미쳤지.
나는 민망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도주를 시도했다.
“이런, 벌써 이렇게! 그럼 푹 쉬라고, 회계사. 닥터, 우리 회계사 좀 잘 부탁해요. 내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
치료소를 벗어나 네이선의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걷던 나는 게론드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인권의 개념조차 없는 이 세상은 장애인에게 잔혹하다.
공권력이 보호를 안 해주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에서 배제하려 하고 경원시하는 게 당연할 정도다.
게론드는 오른손잡이이고 회계사가 주로 하는 일은 문서를 만들거나 계산을 하는 일이니, 머리와 오른손에 문제가 없다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미래가 상당히 어두워 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나는 그가 원한다면 앞으로도 함께할 용의가 있지만 게론드가 계속 나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할까?
게론드와 결혼하자던 시니아 양은 팔 하나가 없어진 게론드를 보고 뭐라고 할까?
시니아 양이 그를 붙잡을 때, 그때 차라리 따라오지 못하게 할 걸 그랬나?
***
“그러면 모르아 갑판장이 스무 명 정도 추려서 오트라스로 보내도록 해. 가능하면 오트라스에 타보지 않은 경력자로 말이야.”
“알겠습니다.”
오트라스에 타지 않더라도 어차피 내 사람들이다.
최대한 나와 접점을 만들어 두는 쪽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에 좋다.
“용병대장, 용병 중에 사고 안 치고 믿을만한 녀석들로 스무 명 정도 뺄 수 있나?”
“사고 안 치는 용병이라니, 가끔 제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녀석들을 찾는 게 문제요.”
뺀질뺀질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레건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일 온순한 놈들로 한번 뽑아보리다.”
네이선과 레건 덕분에 오트라스에서는 용병들이 사고를 치지 않지만, 그들이 없는 피오렐로 넘어가서도 사고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오트라스와 반대로 선원이 절대다수인 피오렐에서 사고를 쳐봐야 얼마나 크게 치겠냐 싶기는 한데, 전체적인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사고는 없는 편이 좋았다.
“선장님,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내일 아침으로 결정된(알센더트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출항에 맞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원 한 명이 손님의 방문을 알려왔다.
“손님들? 아, 모셔오도록 해.”
“네.”
‘손님들’이라고 해서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인가 싶었는데 아마 베기어 함장이 맞을 거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니 항해사나 갑판장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까 싶다.
“어서 오십시오, 함장님. 이쪽은?”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안 제독. 여기는 드라이언의 일등항해사입니다. 앞으로 자주 마주쳐야 하니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함께 왔습니다.”
나를 ‘제독’이라고 부른 베기어 함장의 소개에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다소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뵌 적이 있는데 정식으로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드라이언의 일등항해사 오스발입니다.”
“반갑소, 오스발 항해사. 낯이 익기는 하군. 일단 모두 앉읍시다. 곧 음식이 나올 테니.”
조리장 비에론이 준비한 나름 고급(?)스러운 식사를 하며 우리는 내일 있을 항해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식사 재료야 어차피 보존식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일단 장작을 넉넉하게 이용할 수 있기만 해도 제법 사람이 먹을 만한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언제 구했는지 몰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파릇파릇한 식물들이 들어가다 보니 요리의 색이 확 좋아지기까지 했다.
“조리장의 실력이 상당하군요.”
“아, 네, 뭐… 그렇죠.”
베기어 함장의 진심 어린 칭찬에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조리장 실력이 좋으면 뭐 해? 그걸 써먹을 일이 별로 없는데.
“…대충 이 정도면 마무리된 것 같군요. 지금 논의된 대로 보급 추진하시고 내일 출항 전에 제가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제독.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목례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베기어 함장에게 제안했다.
“함장님, 그래도 한동안 함께 움직여야 할 텐데 바쁜 일이 없으시면 저와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내 말에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던 베기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좋은 위스키가 있으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
나와 아인델프, 베기어 함장은 보란 듯이 책상 위에 놓여있던 위스키 한 병을 모두 비웠다.
오간 이야기는 별것 없었다.
여자 이야기, 싸움 이야기, 유령과 전설, 미신에 대한 이야기, 보통 뱃사람들이 술 마시고 하는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
“제독, 혹시 제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까?”
술자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선 베기어 함장을 배웅하고 돌아온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야 할 이야기? 왜?”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반문하자 아인델프가 당황하며 급히 대답했다.
“아, 아니, 굳이 베기어 함장을 불러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나 했는데 중요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제가 끼지 말아야 할 자리에 끼었나 싶기도 하고….”
“무슨 소리야. 자네가 끼어서 안 될 자리도, 들어서는 안 될 말도 없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오히려 내가 미안하군.”
최소한 선단의 운영 같은 공식적인 일에서 아인델프가 몰라야 할 일은 없다.
누가 뭐래도 선단에서 단 세 명에 불과한 선장 중의 한 명이며, 내가 네이선과 우르타 다음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아인델프니까.
“그냥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술 한번 마셔보고 싶었어.”
“베기어 함장 말씀이십니까?”
“응. 이왕이면 비슷한 위치의 자네가 함께 있는 편이 더 좋기도 했고.”
“어, 음…. 저는 베기어 함장과 제독이 이전에 밀약이나 공감대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만?”
이 자식은 나를 얼마나 음흉한 놈으로 보는 거야?!
“그딴 게 어디 있겠어? 나도 오늘 놀랐다니까? 어휴… 아 참!”
“네?”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이번 일에 자원한 이유가 뭘 것 같아?”
잠시 고민하던 아인델프가 대답했다.
“흩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해적 잔당을 색출해서 없애는 것 아닙니까?”
“뭐, 그것도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지.”
“그렇다면 방치되거나 숨겨져 있는 해적들의 근거지를 찾아서 불태우는 일입니까?”
“발견하면 그것도 해야지.”
내가 계속 오답이라고 하자 한숨을 내쉬던 아인델프가 백기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본 목적은 뭡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일레드 왕국의 개입 여부 확인.”
“네? 그건 뭐 확실한 것 아닙니까? 국가 단위의 개입이 없다면 해적 놈들이 이렇게까지 조직적으로 반항하는 것은 말이….”
“심증이잖아. 물증을 찾아야지.”
“아….”
찾으면 좋기는 한데, 아마 이건 조금 힘들 거다.
일레드 왕국의 해군이 대놓고 해적 연합을 돕지 않는 이상 그 흔적을 어떻게 찾겠어.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일레드 왕국 소속의 선박이 해적 연합에게 보급을 한 정황이나 흔적을 찾는 정도겠지.
“두 번째가 조금 더 중요해.”
“뭡니까?”
“해적들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
“네에?”
아인델프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해적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노리는 함선의 수가 줄어드는 것인데 그게 왜 압박이 되냐는 것이다.
“해적들이 들어가 있는 섬이 조금 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백, 수천 명을 부양할 정도의 땅은 아니야. 그렇다면 그놈들,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르면 말라 죽겠지? 우리는 보급을 받을 본국이 있지만, 그들은 없으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섬이라는 지형 자체가 담수를 구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니 농사를 짓기도 쉽지 않고 어찌어찌 농사를 짓더라도 가뭄, 태풍 등의 천재지변에 취약하다.
결국 제법 크다고 해도 한 바퀴를 도는 데 하루도 안 걸리는 섬이 수백 명을 부양하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지.
“하지만 그게 압박이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왜 떠나는지, 무슨 짓을 할지는 첩자들이 해적들에게 알려 줄 거야. 만약 그들이 외부에서 지원이 올 것을 믿고 있다면 당황스럽겠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우리가 장기전을 치를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답답할 테고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반쯤 납득한 표정의 아인델프. 뭔가 하나 부족하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이리 좀 와 봐.”
어차피 이야기를 해주려고 마음먹은 상태였기에 나는 아인델프를 데리고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구석에 숨겨놓은 항해일지를 펼쳤다.
“어디 보자…. 그래, 여기, 여기 있네. 이것 좀 봐.”
내가 가리키는 부분을 본 아인델프가 물었다.
“어디 좌표입니까? 대충….”
나는 담담하게 에른스트 부선장과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리고 기겁을 하며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인델프는 배신감과 놀라움, 기대 등이 섞인 요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독의 음흉함은 정말,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