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동명이인(同名異人)
“으으으아으아으아아아!”
우르타가 기지개를 켜며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어디 아파?”
“아니?”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어. 아니, 그보다 너 지금 바쁠 때 아니냐?”
“히힛, 그럼 이제 섬에 파견 안 나가도 되는 거지?”
“뭐, 아마도? 굳이 우리 세 척에서 인원을 뺄 필요도 없고, 가능하면 부상자 위주로 돌린다고 했으니까.”
똑, 똑, 똑.
오호, 어떻게 하면 절제된 분노를 노크 소리에 담을 수 있는 거지?
저 문 뒤에 분노한 네이선이 있다는 것에 우르타의 목을 걸 수도 있다.
우르타도 뭔가를 느꼈는지 어깨를 움츠리며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어.
“열려있어, 들어….”
끼이이익.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네이선에게 말해서 언제 한번 기름칠을 해야겠군.
“갑판장입니다, 선. 장. 님. 들어가겠습니다.”
“히이익!”
“어? 어, 그, 좀 살살 해….”
분노로 이글거리는 네이선과 눈이 마주친 우르타가 이상한 신음성을 내며 방구석으로 도망갔다.
…지금은 기름칠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
“너 지금 바쁜 거 알아 몰라?!”
“아야야얏! 놔! 이거 안 놔?!”
“놓긴 뭘 놔?! 이게 갈수록 농땡이만 늘어가지고!”
“나 파견 나갔다 왔잖아! 일하고 왔다고!”
“하루 종일 넋 놓고 바다 보는 것도 일이냐? 일이야?! 까불지 말고 포갑판 청소해!”
네이선에게 귀가 잡힌 우르타가 끌려 나가자 반쯤 열려있는 방문 뒤로 머리통 하나가 나타났다.
“응? 오펜?”
“안녕하세요, 선장님.”
“그래, 무슨 일인가 이등항해사?”
“헤헤헤….”
아, 너로구나. 네이선에게 우르타가 여기 있다는 것을 고자질한 사람이.
난 지금까지 네가 네이선보다 우르타랑 친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럼 들어오고.”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오펜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안에 들어왔다.
공적인 일이라면 바로 이야기 했을 녀석이 저리 행동한다는 것은 할 말이 사적인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내가 의자에 앉으며 느긋하게 묻자 잠시 망설이던 오펜이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요,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알았어. 뭐가 그렇게 궁금해?”
“그 해적선에서 구했다는 좌표요, 꼭 지금 가볼 필요가 있을까요? 벌써 몇십 년이나 지났다면서요? 지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굳이 강행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흐음….”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오펜의 말이 옳다.
지금처럼 전쟁 중에 몰래 찾아보는 것보다는 전쟁이 다 끝나고 천천히 찾아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나?
“단순하게 생각하면 네 말이 맞아. 전쟁이 끝나고 이곳이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진 후에 찾아보는 것이 더 안전하고 합리적이지.”
“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내 말에 오펜이 반색하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전쟁이 끝나면 과연 이곳은 어떻게 될까?”
“어… 해적들도 다 소탕된 다음이니 적어도 당분간은 아무도 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패배하고 일레드 왕국이 이긴다면?”
“그건….”
오펜이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다 이기고 있는 전투에서 갑자기 패배를 입에 담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해적 연합? 처음부터 그들은 이 전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아. 우리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말이야, 만약에 일레드 왕국의 해군이 개입한다면? 과연 우리가 그들과 맞설 수나 있을까?”
“하, 하지만! 벨로키나 왕국과 쿠샤 왕국의 해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패배한 뒤라면?”
“어, 그, 그건….”
나는 작게 웃으며 손을 내 저었다.
“물론 이건 너무 비관적인 가정이지. 하지만 반대의 상황이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게 없어.”
“어째서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서 케르빈 제도가 자세히 표시된 지도를 가지고 와서 펼쳤다.
시논 섬, 케르빈 섬과 달리 제도 부분은 대충 그려진 지도에는 이번 전쟁에서 새로 알게 된 섬들의 정확한 위치와 형태, 조류의 흐름과 풍향까지 표시되어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자, 전쟁에서 일레드 왕국이 패배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시논 섬과 케르빈 섬, 그리고 인근의 제도들은 어떤 나라의 소유가 될까?”
“벨로키나 왕국인가요?”
“아니, 내가 보기에는 시논 섬과 시논 섬 북서쪽의 시노타 제도는 쿠샤 왕국에게 넘어갈 확률이 높아. 그렇지 않다면 쿠샤 왕국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시논 섬 일대의 지배권을 일레드 왕국이 가지건, 벨로키나 왕국이 가지건 별로 다를 게 없거든.”
내 말에 한참 동안 지도를 들여다보던 오펜이 케르빈 제도를 손가락으로 찍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는 케르빈 제도는요?”
“반반이지. 케르빈 섬과 케르빈 제도를 쿠샤 왕국이 가져가거나 벨로키나 왕국이 가지거나. 만약 쿠샤 왕국이 가지고 가면 괜찮아. 그들은 원래 시논 섬 일대를 지배할 때에도 케르빈 섬과 제도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벨로키나 왕국이 지배한다면….”
“어, 그러면… 아! 폰테 섬!”
오펜이 눈을 빛내며 지도의 오른쪽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 인생의 목표가 된 섬, 폰테 섬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 자식, 이제 이해했구나. 내해와 향료제도만으로 한정 지으면 케르빈 섬과 케르빈 제도는 별 가치가 없어. 케르빈 섬은 내가 듣기로 크기에 비해 항구를 만들기 수월한 지형이 없다고 알고 있거든. 특산물도 없고. 심지어 제도의 자잘한 섬들은 지금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가치가 거의 없는 똥땅일 뿐이야.”
군사적인 관점을 배제하면 본국이 있는 대륙에서 열흘이 넘는 거리에 위치한 케르빈 제도의 섬들은 영토적 가치가 0에 가깝다.
인구를 부양할 생산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산물도 없으며, 항구를 만들기에 입지 조건이 좋지도 않다.
거리가 멀고 대부분이 무인도라서 실효 지배를 하는 것도 어려우니 말 그대로 깃발만 꽂아 놓고 ‘우리 땅!’이라고 외쳐야 할 판이다.
인구가 포화상태에 이른 상황이라면 일단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겠지만, 대륙에도 빈 땅이 넘쳐나는 세상인데 누가 이런 외딴 섬까지 와서 거주하려 하겠나.
하지만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조금 달라진다.
남쪽의 델라 항구와 서쪽의 케르빈 제도가 연계할 수 있다면 일레드 왕국과 쿠샤 왕국의 내해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폰테 섬까지 연계되면 사실상 일레드 왕국의 영향력은 내해의 동쪽으로 제한된다.
그뿐인가?
만약 폰테 섬에서 노던테라까지 항로가 발견된다면 론 항구나 델라 항구에서 케르빈 제도의 중계점, 폰테 섬을 거쳐 노던테라까지 이어지는 주 항로가 만들어지고, 이 항로상의 모든 항구를 벨로키나 왕국이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 과한 예측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전쟁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사람이 바로 스코타 후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꽤 높은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계획에는 내가 이곳 케르빈 제도의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세력을 완전히 잃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던 것 같다.
각설하고, 어찌 되었건 벨로키나 왕국이 케르빈 제도에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면 아마 한동안은 일반인 출입 금지 지역이 될 것이다.
그리고 훗날 항해 제한이 풀린다고 하더라도 군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좌표에 표시된 섬이 개발되거나 다른 사람의 손이 닿을 확률도 높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지.
이미 시간이 꽤 지난 만큼 특별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갑판장님과의 약속이잖아.
적당히 각색한 내 생각을 들은 오펜은 밝은 표정을 한 채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선장님은 다 생각이 있으시군요! 정말 대단해요! 저는 언제쯤 선장님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펜, 너는 반드시 나보다 뛰어난 제독이 될 거야. 그러니까 나 말고 더 높은 곳, 더 먼 곳을 목표로 잡으렴.”
“헤헤헤….”
물론 아직은 18살 꼬맹이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
“혹시나 했더니… 선장님, 정말 예지능력이라도 있으신 것 아닙니까?”
“어?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나도 진짜 해적 마을이 있을 줄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럽다.
아니지, 마을 정도야 지금까지 심심치 않게 발견했지만, 사람이 남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두 시간쯤 전에 견시수가 보고를 했다.
전방에 있는 섬에서 다수의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말이다.
자연발화라는 현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발생하는 연기가 여러 줄기로 올라올 일은 없으니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서 잔뜩 긴장을 한 채로 섬을 돌아 연기가 나던 곳으로 접근해 보니 작은 어촌이 있었다.
어떤 나라의 행정력도 닿지 않는 곳이니 어촌이 아니고 해적촌(?)이겠지만, 하여간 아직 사람이 남아있는 해적의 근거지를 발견한 것이다.
어설프기는 해도 분명히 중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은 만들어져 있는데, 정작 해적선으로 보이는 배가 전혀 없어서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하지만 30분이 넘도록 주변을 경계했음에도 어떤 이변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천천히 배를 몰아 들어갔다.
“오트라스가 상륙하고 피오렐과 드라이언은 주변을 경계한다.”
“넵!”
“갑판장에게 용병 전원과 돌격대 무장시키라고 해.”
“알겠습니다.”
피오렐의 아인델프와 드라이언의 베기어 모두 자신들이 상륙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나는 깔끔하게 제독의 권한으로 찍어 눌렀다.
해적 마을에 해적선이 없다는 것은 남은 자들이 해적이라기보다는 그 일가족들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니,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해적 가족이라니, 정말 정이 안 가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사람 한 번 안 죽여 봤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돼지 살처분하듯이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엄청나게 긴장했던 우리가 민망할 정도로 상륙은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았다.
애초에 마을에 인적이 없었으니, 전방을 경계하다가 로프에 걸려 넘어진 용병의 무릎에 생채기가 난 것이 피해의 전부일 정도였다.
“이거야 원, 마치 우리가 해적인 것 같잖아?”
인적이 완전히 사라진 마을을 보며 괜히 투덜거리고 있는데, 돌격대원을 데리고 수색을 마친 행크가 보고했다.
“마을에 급히 떠난 흔적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고개를 들어 마을 뒤쪽으로 펼쳐진 야트막한 산을 올려다보았다.
마을 인근은 벌목의 흔적이 있고 일부에는 조그마한 밭이 만들어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었다.
하지만 높이라고 해봐야 해발 100미터나 되려나?
진짜 동네 뒷산 수준이다.
우리를 보고 도주했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을 시사했다.
첫 번째는 이 마을의 주민들이 떳떳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의 가족 누군가가 해적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가 그들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마을에 남은 전력이 고작 배 한 척에 타는 인원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었다.
아마 힘 좀 쓰는 성인 남자들은 다 해적선을 타고 나가고, 노인과 여자, 아이들만 남았겠지.
우리가 이 근처를 얼쩡거린 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까 도주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흘렀고.
뭐, 남겨진 꼴을 보니 막상 도주하는 사람들은 기겁해서 도망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작은 섬에서 도대체 어디로 도망가겠다는 건지, 원.
“배는 얼마나 있어?”
“어선으로 보이는 배가 여덟 척 있습니다만, 품질이 조악하기 그지없습니다. 발로 차기만 해도 당장 부서질 것 같더군요.”
하여간 뱃놈들 허풍이란.
대충 만든 뗏목도 사람이 발로 찬다고 부서지지는 않는다.
“갑판장, 용병대장 이리 와봐.”
보고하러 왔던 돌격대장 행크까지 세 사람을 모아놓고 말했다.
“보아하니 저 산으로 올라간 모양인데 그냥 두기에는 좀 찜찜하잖아? 누가 다녀올래? 단, 대부분 여자나 아이들일 테니 반항하지 않는다면 그냥 포로로 잡아 와.”
노인은 왜 뺐냐고?
해적이 늙어서 배를 못 탈 때까지 안 죽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지.
그래서 ‘남자 노인’은 거의 없을 테니 ‘노인’은 빼도 된다.
할머니도 여자잖아.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한 열댓 명만 데려가면 될 것 같군요.”
용병대장 레건이 먼저 나섰다.
마을에 세워진 건물은 대략 40여 채.
공용 건물 같은 주거 외 용도인 건물도 있을 테니 거주하는 가족은 한 20~30가구 정도 될 거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레건을 보았다.
용병 놈들에게 반항할 의지가 없는 여자와 아이들을 맡긴다라….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기분인데?
“그럼 제가….”
“돌격대만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내 표정을 보고는 얼른 나서려는 행크를 네이선이 제지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역시 이런 일에는 가장 믿을만한 네이선이지.
“좋아, 갑판장이 돌격대 데리고 다녀오고, 용병대장은 눈썰미 좋은 용병들 뽑아서 마을에서 쓸만한 거 다 징발해. 적당히 슬쩍하는 것은 봐주겠지만 너무 대놓고 하지 말고, 징발한 물건들은 여기에 다 모아 둬.”
“흐흐, 알겠수다. 그런 건 또 우리가 전문이지.”
“선장님, 저는…?”
“돌격대장은 갑판장 따라가는 게 낫지 않겠어? 딱 봐도 여기서는 할 일이 없어 보이네.”
“알겠습니다.”
***
네이선과 행크가 떠나고 용병들이 마을을 약탈하는 동안 선장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가빈입니다.”
나는 문을 열고 오랜만에 오트라스로 복귀한 낯익은 선원을 반겼다.
“여어, 가빈, 무슨 일이야?”
“갑판장 외 11명이 포로를 잡아서 복귀했습니다.”
“어? 벌써?”
네이선이 출발한 지 이제 고작 30분 정도가 흘렀다.
갔다 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대로 잡아도 산속으로 고작 15분 들어갔다는 말인데, 이게 말이 되나?
“일단 가지.”
“네. 지금 갑판에서 대기 중입니다.”
갑판으로 나가니 중앙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명이 손이 결박된 상태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우, 적어도 60은 되어 보이는 노인네가 저러고 있으니 보기 정말 안 좋네.
“무슨 일이야? 이 노인은 누구고?”
내가 나타나자 고개를 살짝 숙인 네이선이 대답했다.
“산으로 조금 올라갔는데 이 노인이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본인 말로는 이 마을의 ‘촌장’이라고 합니다. 선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일단 데리고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수색하러 갈까요?”
“아니, 잠시 대기. 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왔다면 이야기를 듣고 출발해도 늦지 않겠지. 일단 결박부터 풀어드려. 노인네 뼈 시리겠다.”
“크흠, 네.”
저 노인이 소드 마스터쯤 되지 않는 이상 손발이 멀쩡하고 무기까지 들고 있어도 네이선과 행크를 비롯한 돌격대에 둘러싸인 상태에서는 뭘 할 수가 없다.
포박 정도는 풀어줘도 되겠지.
“고맙습니다, 제독.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포박이 풀리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주름과 늘어진 눈꺼풀에 가려져 있지만, 아직 살기가 감도는 눈빛. 언뜻 드러나는 목 아래와 팔, 손에 가득한 흉터, 드러난 맨다리 한쪽에 보이는 로프 자국까지.
촌장은 개뿔.
“아무렇게나 불러, 늙은 해적.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흐흐, 그저 늙은이입죠. 촌장도 맞구요. 에른스트라고 합, 커헉!”
“이 미친 노인네가 지금 뭐라고…?!”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순간적으로 움직인 네이선이 노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갑판장, 그만!”
나는 소리를 질러 네이선을 제지하며 순간적으로 뛰어 오른 심박수를 가라앉혔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 세상에 ‘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다 모으면 수천, 어쩌면 수만 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 노인의 이름이 ‘에른스트’여도 그저 우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