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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85화 (286/420)

285화. 합류

“어떻게 술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직 남은 술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베기어는 사양하려는 제스쳐를 취하다 말고 말을 바꿨다.

델라 항구를 떠난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다 보니 각 함선의 장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고급술들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나야 뭐 워낙 많이 챙겨놓기도 했고, 혼자서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아서 아직 약간 여유가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부터 네이선이 당연하다는 듯이 내 방에서 술병을 까지만 않았다면 지금 남은 것의 두 배도 넘게 남았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에 획득한 녀석이 있지.

“이건 가지고 가시죠. 해적선의 선장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좋은 녀석들은 아닙니다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마셔야죠.”

“오오, 그런데 두 병이나 주셔도 됩니까?”

내가 건넨 두 병의 술에 반색하던 베기어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인델프 선장은 자기가 좋아하는 녀석으로 한 병 미리 챙겼고, 저는 아직 남은 술이 조금 있어서요. 저번에 지나가면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실수로 마지막 녀석을 깨뜨리셨다고.”

“이것 참,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받으세요.”

내가 서랍에서 꺼낸 주머니를 건네자 베기어의 얼굴에 의문부호가 걸렸다.

“돈인 것 같은데, 갑자기 이걸 왜?”

“해적선의 선장실과 금고에서 나온 귀중품이 꽤 됩니다. 정확하게 삼등분하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제가 임의로 환산한 금액입니다. 선원들에게 조금씩 풀면 어수선한 분위기 수습에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함장님이 쓰셔도 되지요.”

“뭘 또 이렇게까지….”

나는 주머니를 건네며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과연 베기어는 이 주머니를 혼자 먹을까, 아니면 승조원들과 나눌까?

섬에서 출항하기 전에 해적선에서 입수한 포탄, 화약, 자재 등은 각 함선별로 적당히 분배했다.

그리고 선원들은 선실과 선창, 마을에서 나온 물건들을 적당히 나눠 가졌다.

대부분 버리기는 아깝지만, 부피는 크고 가치 비교가 쉽지 않은, 그런 물건들이었다.

그런 물건이야 적당히 나눠도 상관없지만, 귀중품과 돈은 정확히 나누는 것이 깔끔했다.

“생각보다 많군요? 제대로 나누신 것 맞습니까?”

“이유는 모릅니다만, 금고에 돈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놈들 본거지에서 도주할 때 훔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하하, 승조원들에게 면이 조금 서겠네요. 사실 불만이 조금씩 나오고 있어서 난감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적당히 분위기를 말랑하게 만드는 몇 마디를 나눈 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실지 모르지만 제가 이번 고용 계약을 주도한 스코타 후작 각하를 모시고 있습니다. 복귀 후 잔금을 지급하기 전에 제가 각하께 말씀드리면 드라이언이 크록커스 용병함대와 따로 완수 금을 받는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물론 얼마간의 손해는 감수하셔야 합니다만.”

내 말에 베기어 함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오, 소문은 얼핏 들었는데 사실이었군요. 알센더트 제독이 리안 제독을 견제하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스코타 후작의 뒷배 때문이라고 말이죠.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한시름 놓아도 되겠군요. 그리고 당연히 처음 분배받기로 한 수준과 똑같은 금액을 받으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을 마친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 타이밍에 베기어 함장이 할 만한 진지한 이야기는 딱 하나밖에 없을 것 같다.

베기어 함장은 침묵의 의미를 이해한 듯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사실…… 드라이언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요.”

“후우. 함장의 무게를 알게 된 후로는 성질을 많이 죽였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뱃놈입니다. 게다가 바냐도르와 오래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한참 전부터 느끼고 있다 보니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했지요.”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함대장인 바냐도르를 대놓고 까버릴 때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마치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겠지.

그런데 막상 머리가 식고 뒷수습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이번 의뢰 잔금 문제야 내가 해결해 준다지만, 앞으로 할 일이 막막한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용병함은 교역보다는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

상선으로 무역을 하는 것보다 효율이 좋지 않다는 말이다.

게다가 교역이라는 것이 아무렇게나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러니 결국 드라이언은 용병함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의뢰를 받아야만 하는데….

언젠가 말했지만, 바다 위에서 머릿수는 저항하기 어려운 폭력이다.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한들 고작 용병함 한 척 보다는 용병함대가 의뢰를 따기도 쉬운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베기어는 한동안 직접 의뢰를 받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한 번도 주도적으로 의뢰를 받아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드라이언에 탑승한 승조원 백여 명을 책임져야 하는 베기어의 입장이 보통 난감했겠는가?

더 나쁜 것은 이번 전쟁이었다.

케르빈 제도에 모여든 해적이 전 세계 모든 해적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이런 대규모 토벌을 당한 후라면 해적들의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전쟁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건 한동안 시논 - 케르빈 일대의 군사 활동은 엄청나게 분주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분간 내해의 모든 항로가 상당히 안전해질 테니 용병함이나 용병함대를 고용하려는 수요가 상당히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저는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은 잘 못 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안 제독께서는 저와 드라이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경전 따위는 때려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것은 좋은데, 질문의 목적조차 설명하지 않으면 어쩌라는 거야?

물론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대답을 미루던 나는 빠르게 마음을 정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고, 나 역시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 괜히 힘 뺄 필요는 없겠지.

“우리 선단과 함께하고 싶으신 겁니까?”

“지금까지 본 것만 해도 제독의 선단에 더 이상의 무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먹이가 커지면 더 큰 물고기가 달려드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닐까요? 오트라스와 피오렐은 훌륭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화물 운송을 중점으로 하다 보면 갑자기 발생하는 불행한 사태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마음이 급했는지 조금 빠른 말로 나를 설득하려던 베기어를 무례하지 않게 제지한 나는 입을 열었다.

“드라이언의 지휘권과 운영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함대 운용에 대해서는 제 지시에 반드시 따라주셔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원치 않는 화물을 실으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교역이 끝날 때마다 수익의 일정 부분을 지불해 드릴 것이고, 전투 수당과 전리품 분배는 선단의 다른 선박과 동일하게 할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말에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베기어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베기어 함장.”

내가 웃으며 손을 뻗자 거친 손이 내 손을 마주 잡아 왔다.

“감사합니다, 제독!”

나는 손을 몇 번 흔든 뒤,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베기어 함장은 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지금 다 이야기해 드리기는 그렇지만, 앞으로 복잡한 일 몇 가지를 해야만 합니다. 타인에게는 공개하기 어려운 부분이지요. 후작 각하와 엮인 부분도 있고 해서요.”

“아, 천천히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일을 다 이야기하실 수는 없겠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식의 전개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까지 부드럽게 잘 풀릴 줄은 몰랐다.

마치 주사위를 세 번 던져서 6이 세 번 연속으로 나온 기분이랄까?

***

지금 생각해 보면 나중의 일을 미리 고민하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인 것 같다.

에른스트 촌장이 있는 섬에 돌아갈 적당한 구실을 찾기 위해 내 두피에서 자유를 찾아 떠난 머리카락이 최소한 세 자릿수는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선장님, 작은 웅덩이 몇 개는 찾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마시기에는 꺼림칙합니다.”

항해에서 식수의 중요성은 몇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제도에서만 항해를 한다면 식수를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모든 섬에 인간이 무리를 지어 거주할 정도의 담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크기가 되는 섬이라면 수백 명이 필요한 만큼의 물을 취수할 정도의 담수는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애매한 크기의 섬이라면 담수가 있더라도 식수로 쓰기에 부적합한 물만 있거나, 아예 적당한 수원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조리장, 식수가 얼마나 남았다고?”

“오트라스에는 사흘 정도 버틸 분량이 남아있고, 다른 두 함선도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행크, 더 찾아볼 만한 곳이 있나?”

“지형이 험해서 중앙의 절벽을 넘지는 못했으니 배를 타고 섬의 남쪽으로 상륙해서 더 찾아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돌격대장 행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제멋대로 널브러진 선원들과 용병들이 있었다.

요 며칠 동안 탐색했던 섬들에서는 식수로 쓸만한 수원지를 찾지 못했다.

최근에 조달(?)한 물건들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실었던 식수는 금방 부족해졌고, 그나마 다른 섬들보다 규모가 큰 이번 섬은 제법 기대를 했는데 그마저도 꽝인 것이다.

내게는 오히려 당첨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등항해사! 여기에서 그 마을 생존자들이 있던 섬까지 얼마나 걸리지?”

“지금 보고 오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해도실로 뛰어 들어간 오펜이 잠시 후에 보고를 했다.

“바람과 조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재 풍향이 유지된다면 이틀이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괜히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행크에게 명령을 내렸다.

“관두자. 섬 지형 자체가 험한 것 같은데 괜히 무리해서 움직이다가 부상자라도 나오면 우리가 손해야.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선원들과 용병들은 쉬게 할까요?”

“어.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행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선교에서 내려가려다가 곧 내게 제지당했다.

“아, 돌격대장. 잠시만.”

“네?”

“조리장, 식수가 사흘 치 남았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제독.”

“그럼 오늘 탐색하고 온 친구들에게는 물 좀 넉넉하게 풀어 줘. 남들보다 고생했는데 뭐라도 보상을 받아야지. 어차피 이틀 안에 물은 충분히 보급할 수 있으니까 여유 있게 풀어도 돼.”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행크가 씩 웃었다.

“선장님의 배려에 모두 감사할 겁니다.”

“아부는. 돌격대장은 그만 내려가고, 이등항해사는 출항 준비시켜. 그리고 다른 두 함선과 합류하면 우리 다음 목적지가 생존자들이 있는 섬이라고 신호 보내고. 안전하게 거기에서 식수를 보급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선장님.”

***

다음 날 정오쯤에 우리 함대는 무사히 생존자들이 있는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리 한번 지나온 곳이라고 해도 경계를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한동안 섬 주변을 배회하며 이상 징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우리가 불태운 해안가 마을의 잔해만이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진입하자.”

“네, 오트라스가 진입합니다.”

오펜이 제법 능숙하게 조타수와 조범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뒤에서 대기하던 전령 역할을 맡은 선원을 불렀다.

“피오렐과 드라이언에게 신호. 오트라스가 상륙하는 동안 두 척은 주변을 경계할 것. 오트라스 복귀 후 피오렐, 드라이언 순서도 상륙해서 식수를 보급한다.”

“넷!”

무사히 정박한 오트라스에서 내린 나는 무너진 우물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너무 잘한 짓 같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럼 돌격대장이 인원 인솔해서 전에 보았던 강에서 식수 보급하도록 해. 갑판장과 돌격대는 현 위치에 대기하면서 주변을 경계한다.”

“알겠습니다.”

“네, 돌격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쪽으로!”

내 지시는 타당했고 자연스러웠다.

선원과 용병 일부는 경계를 맡은 돌격대를 보며 작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도 아직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곳에서 경계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조차 두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는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아마도 아무 일도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그 경계를 자신이 맡고 싶다는 작은 이기심의 표현일 뿐이다.

“네이선.”

“음.”

“배에 남은 인원들은?”

“야간 당직자들만 남겼어. 지금 자야 할 시간이니까 선실 밖으로 나오는 놈은 없을 거야. 우르타에게 감시하다가 문제 있으면 신호 보내라고 했어. 보다시피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네.”

“좋아, 시작하자.”

내 말이 떨어지자 돌격대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피오렐과 드라이언이 이쪽을 관찰하기 힘든 사각지대로 들어갔으니 아무도 모르게 귀빈실의 여자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만 했다.

***

섬에 무사히 도착한 여자들과 아이들은 살짝 겁에 질려있었다.

내가 미리 설명해주기는 했지만, 막상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섬에 내려놓으니 불안한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다.

칼을 든 깡패들의 두목이 날 때리던 양아치들을 다 찔러 죽인 다음에 ‘괜찮아! 우리 애들이 얼마나 착한데?!’라고 아무리 주장해봐야 씨알이 먹히겠냐고.

뭔가 나름대로 착한 짓을 하고 있는데, 일은 일대로 힘들고 생색내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괜히 입맛이 썼다.

“전에 이야기한 대로 이 섬에 내려주는 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요. 비록 남자는 없지만 그래도 이 섬에 남은 주민의 수가 꽤 되니 서로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연명은 가능할 거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움직입시다.”

내가 고갯짓으로 돌격대원 두 명에게 지시를 내리자 두 사람이 옆에 있던 자루를 집어 들었다.

생존자들에게 전해줄 식량이다.

굳이 더 주지 않아도 이전에 줬던 식량을 아껴 먹는다면 이 정도 인원이야 감당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이들의 입장이 좀 곤란할 것 아냐.

“내가 가는 게 낫지 않아?”

“아니야, 내가 가는 게 나아.”

걱정스러운 네이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노인네들과 여자, 애들뿐인 집단이다.

아주 노골적으로 대놓고 함정을 파지 않는 이상 나와 돌격대 두 명이면 충분한 무력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우리를 적대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그런데 리안 너도 그들이 숨은 곳을 모르잖아?”

“응, 모르지.”

“그런데 어떻게 찾으려고?”

“내가 왜 찾아? 그들이 알아서 찾아올 거야.”

“어?”

“저기 저 산. 그 노인네가 발견된 산이지?”

“어? 어, 그렇지.”

“그때도 그 노인네가 우리에게 일부러 온 거잖아. 우리가 찾은 게 아니고.”

“아하?!”

나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하고 있는 네이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후 발걸음을 옮겼다.

“힘들겠지만 빨리 움직입시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으니.”

내 재촉에 여자들이 아이를 안거나 걷게 하면서 천천히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

탁, 탁, 탁.

챙!

갑자기 뒤쪽에서 급한 발걸음이 들리더니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선 돌격대원 한 명이 칼을 뽑아 들었다.

이미 들고 있던 식량 자루는 뒤쪽에서 내팽개쳤는지 빈 몸이었다.

부스럭.

그리고 잠시 후 전방 10m 정도에 있는 수풀이 부스럭거리더니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독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보아하니 약속대로 저희를 데리러 오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전보다 조금 더 초췌해 보이는 에른스트 촌장이 양손을 살짝 든 상태로 비무장임을 강조하며 내게 인사를 했다.

“에른… 음, 촌장. 당신 말대로 아직 약속을 이행하기에는 시간이 좀 일러. 보다시피 오늘은 군식구를 좀 받아줬으면 해서 말이야.”

내가 부탁처럼 보이는 명령을 내리자 촌장은 건조한 눈빛으로 여자와 아이들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대충 예상이 되는군요. 굳이 이들을 이곳에 데리고 오셨다는 것은 제독께서 하신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처럼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식량을 조금 더 챙겨왔어. 괜히 군식구라고 구박하지 말라고.”

“물론입니다. 염치없지만 식량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양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능청스러운 촌장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 노인네는 여기 있는 인원들에게 나누어 준 식량 덕분에 내 계획을 조금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까?

하여간 밉살스러운 노인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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