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86화 (287/420)

286화. 행운의 우르타

“그런데 좌표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우르타의 질문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관심이 없던 터라 암호 해석이 끝난 이후로 에른스트 갑판장님과 좌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하다못해 갑판장님이 추측이라도 들려주었을 텐데 말이야.

그때는 내가 이 좌표를 찾아갈 때도 당연히 갑판장님이 내 옆에 있을 줄 알았었다.

“그러게? 좌표만 가지고는 찾기 힘들 텐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네이선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지구처럼 실시간으로 위성에서 좌표를 찍어주는 것도 아니다 보니 위도와 경도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았다.

나도 대충 저 섬이 좌표가 가리키는 곳이라는 것은 알지만, 섬 어디쯤인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솔직히 이 좌표를 기록한 녀석도 정확하게 위치를 잡아서 기록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냥 엄한 바다의 좌표를 표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 섬이다!’라고 하는 것이지, 바다 한가운데나 대륙 가운데 어디쯤이면 그냥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한 번 가 보는 거지 뭐. 벌써 20년도 넘었으니까 뭐가 있었다면 진작 누군가가 털어가지 않았겠냐?”

“그건 그래.”

네이선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우르타가 실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둘 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뭐하러 가는 거야?”

“겸사겸사 가는 거지, 탐색도 할 겸.”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가야 하잖아!”

“우와아아! 근육 멍청이가 또 화낸다!”

말을 하지 말던가, 도망을 가지 말던가, 아니, 도망을 갈 거면 잡히지를 말던가!

따악!

“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

“선장님, 저기를 좀 보십시오.”

“음, 보고 있어.”

그레이그와 내가 바라보는 곳은 간이 부두‘였던’ 곳이었다.

해안에서 바다로 길게 뻗어있는 접안 시설물 잔해, 해안을 따라 아마도 집이나 창고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망가진 건물들.

“잘하면 제일 오른쪽에는 정박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단정 먼저 보내지. 이등항해사.”

“네, 선장님.”

“돌격대에서 네 명, 용병대에서 여섯 명 차출해서 정박 가능한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일등항해사,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현 위치에서 대기한다. 다른 배에도 전달해.”

살짝 올라오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나는 다시 망원경으로 해안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불태운 마을들은 얼마 전까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건물들은 멀쩡했고, 접안 시설이 있는 곳들은 썩은 나무 하나 없이 튼튼하게 보수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섬은 달랐다.

최소한 10년, 어쩌면 20년 이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형편없어 보이지만, 저 시설들을 만드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을 텐데 왜 버려졌을까?

저 정도 시설을 지었다는 것은 이 섬이 그 정도 가치가 있다는 뜻이고, 지리적 가치는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니 누군가가 재활용했을 법도 한데 말이야.

“아무리 봐도 인적이 끊긴 지 한참 된 곳 같습니다. 굳이 탐색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좌표만 의지해서 탐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만.”

그레이그가 제안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레이그는 처음부터 좌표에 대해서 약간 회의적이었다.

아무래도 그 좌표라는 것이 20년도 더 지난, 옛날 좌표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조리장 좀 호출해 봐.”

“조리장이요? 알겠습니다.”

나는 조리장이 오기까지 해도실에서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어차피 가지고 올 수 있는 식량의 한계가 있어서 한 번에 끝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식량의 상당량을 섬에서 덜어놓기까지 했으니, 오트라스 같은 경우는 지금 당장 돌아갈 식량도 빠듯할 것이다.

“선장님, 조리장 올라왔습니다.”

“선장님, 부르셨습니까?”

“아, 지금 나갈게.”

해도실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복귀 경로를 확인한 나는 선교로 나갔다.

“조리장, 지금 식량 상황이 어때?”

“닷새 정도 분량이 남았습니다. 아무래도….”

말을 얼버무리며 그레이그의 눈치를 살짝 본 조리장 비에론은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말을 이었다.

“그 섬에서 내려놓은 양이 꽤 되다 보니 다른 배에 비해서 조금 부족할 겁니다.”

내가 계산하기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닷새.

약간 애매한 분량이다.

바다라는 것이, 항해라는 것이 처음 예상과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섬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오늘 전체 적재물 정리 좀 해야겠어. 다른 배들은 돌아갈 정도 여유는 있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겸사겸사 탐색도 하고.”

내 말에 그레이그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상에서도 물자를 교환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적재물을 재분배하는 수준의 대규모 작업이라면 안정적으로 정박하고 하는 쪽이 안전하기도 하고, 시간도 덜 걸린다.

아무리 바다가 잔잔하더라도 배는 계속 움직이고, 연결된 두 배의 사이를 무거운 짐을 들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워낙 위험하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리자 오펜이 데리고 갔던 단정 중 한 척이 복귀했다.

역시 이등항해사가 되고 나니, 오펜도 제법 말과 행동에 권위가 실렸다.

오래된 선원들이야 아직 친근하게 굴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은근히 무시한다거나 깔아보는 일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일부러 이런 일의 책임자를 시키면서 선원들에게 오펜이 더 이상 일개 선원이 아니라 간부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켜준 것도 아마 한몫했겠지.

“선장님, 확인 결과 제일 오른쪽 시설은 이용이 가능합니다. 데리고 간 인원들에게 몇 군데 보수를 지시했습니다.”

“어, 잘했어. 좌측에 드라이언이, 우측에 오트라스가 정박한다. 피오렐은 오트라스 우현에 계류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일등항해사, 움직이지.”

“네, 선장님.”

***

정박을 마치고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리며 바닥의 상태를 확인했다.

먼저 상륙했던 인원들이 건물의 잔해를 가지고 접안 시설의 파손이 심각한 부분을 간단히 손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문제가 많았다.

여기저기에 이가 빠진 것처럼 나무판자가 빠져있는 것은 물론이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안에서 썩어 내구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부분도 많았다.

조금만 주의를 하면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충분하지만, 무거운 짐을 옮기기에는 약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갑판장, 여기 일단 보수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 짐 내리다가는 사고 나겠어.”

내 뒤를 따라 내리던 네이선이 힘을 줘서 바닥을 몇 번 밟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각 함선에서 인원 차출에서 보수부터 하겠습니다.”

“너무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고, 적당히 해. 어차피 우리가 계속 여기를 쓸 것도 아니니까.”

“네.”

돌격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상륙을 마친 나는 적당한 그늘에 자리를 잡고 다른 배들이 정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인원 분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그 전에 베기어 함장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

“흐음,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별게 없을 것 같군요. 발견하기도 힘들 것 같구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기도 했지만, 뭘 찾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아닙니까?”

“네, 그게 문제죠.”

내가 해적선과 좌표에 대한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베기어 함장 역시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딱히 반대를 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냐 싶지만.

“사람의 흔적이 있으니 어차피 섬을 한 번 돌아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섬의 크기가 조금 큰 편이니 두 팀으로 나누어서 움직일 생각입니다만.”

“화물 정리를 총괄할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하하하.”

나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베기어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베기어가 움직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드라이언의 선원들이 문제다.

아무리 같은 함대 소속이라지만 함장이 움직이는데 굳이 다른 배의 선원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것은 너무 이상하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쪽은 제가 맡도록 하지요. 오트라스와 피오렐에서 물자 관리를 하고 있는 인원 한 명씩만 붙여주시면 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아인델프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일 테니 나머지 인원은 얼마든지 쓰셔도 됩니다. 선원들 안전에 신경 써 주시구요.”

“알겠습니다. 일정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지형이 만만치 않아서 이틀은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이 섬의 북쪽에 해당하니, 해안을 따라서 두 갈래로 진행한 뒤 남쪽에서 집결하여 중앙을 통과해서 돌아올 예정입니다.”

“흠, 혹시라도 보물을 발견하시면 제 몫도 있는 겁니까?”

“하하, 물론이죠.”

농담이라는 것은 베기어도, 나도 알고 있다.

설마 동화나 선원들 사이에 떠도는 전설처럼 보물이 산처럼 쌓여있지는 않겠지.

***

“베기어 함장, 그럼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모르아 갑판장과 행크 돌격대장이 잘 도와주고.”

“물론입니다, 제독. 그런데 별게 없을 것 같은데 굳이 선장 두 분이 직접 탐색에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

모르아 갑판장은 좌표에 대해서 모르기에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 대답 정도는 미리 준비해 두었지.

“그래서 나랑 아인델프 선장이 직접 가는 거야. 별거 없어 보이니까 대충할까 봐. 아무래도 우리가 함께 가면 적당한 곳에서 쉬다가 돌아오는 꼼수는 부리지 않겠지.”

“아, 예….”

모르아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럭저럭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인델프 선장은 저쪽 능선을 따라서 서쪽으로 돌고, 나는 이쪽으로 돌아서 동쪽 해안을 돌도록 하지. 섬 남쪽 이 부근에서 만나서 중앙을 통과해 복귀하면 될 것 같아.”

“알겠습니다, 제독. 그럼 이만.”

아인델프는 나와 눈빛을 한번 교환하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팀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네이선과 우르타, 돌격대원을 포함한 오래된 선원 20명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런데 도대체 뭘 찾아야 하는 걸까?

표식? 동굴? 최소한 어떻게 생겼는지 단서라도 있어야지 찾지.

막상 시작하려니 막막하기 그지없다.

이거야 원,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거랑 뭐가 달라?

***

처음에는 꽤 열정적으로 섬을 탐색하던 선원들은 어느새 설렁설렁 걷고 있었다.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고, 인공적인 것이라고는 눈에 띄는 것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인간의 열정과 호기심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아암, 재미없어. 심심해….”

“닥쳐, 우르타.”

“쳇….”

퍽.

퍽.

퍽.

데구르르르.

퍽.

퍽.

“누구야?”

내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약간 뒤쪽에 있던 우르타가 재빨리 딴 곳을 쳐다본다.

하지만 그 밑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는 어떻게 할 건데?

“이봐, 포술장.”

“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녀석을 보니 혈압이 오른다.

뒤를 따라오던 선원들 역시 웃음을 참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휴, 그래, 마음대로 해라. 먼지를 내가 먹는 것도 아닌데.”

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하자 의기양양한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다시 땅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퍽.

퍽.

퍽.

퍼억.

“어, 어, 어?! 아악!”

우당탕탕!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겠다.

분명히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서 넘어졌겠지.

우리가 걷는 길의 오른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물론 기어오르지 못할 정도로 가파른 수준은 아니라서 크게 다치지야 않겠지만, 괜한 짓을 하다가 다쳤나 싶어서 짜증이 왈칵 치솟았다.

“아,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랬지!”

“아야야,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돌… 어?”

뒤를 돌아보자 바닥에 넘어진 우르타가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 정도 굵기의 로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흙과 같은 색으로 염색(?)된 것은 물론이고 여기저기가 낡아서 올이 풀려 있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르타가 그 줄을 잡아당기며 엉금엉금 움직였다.

“여기에 이게 왜 있는 거지? 응? 나무에 매어 놨는데?”

낡긴 했지만 분명히 배에서나 쓰는 로프다.

누군가가 일부러 이 줄을 매어 놓았다는 것인데.

나는 나무 둥치 밑 부분에 묶여있는 로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위장을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인지, 단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로프는 흙 속에 묻혀서 눈에 띄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온 나와 네이선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우르타가 바닥을 차면서 걷지 않았다면 절대로 발견되지 않았을 녀석이었다.

“모두 주변 경계.”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네이선이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선원들은 각자 무기를 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접안 시설이 있던 해안가 이후로 처음 발견한 인간의 흔적이다.

경계는 무조건 첫 번째로 할 일이다.

아름드리나무에 매어진 줄은 오른쪽 경사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오오, 오오오! 이거 내가 발견한 거야! 내가 아니면 못 찾았다구!”

“아, 좀 조용히 해봐!”

“넵, 선장님!”

신이 나서 방방 뛰는 우르타에게 한 소리를 한 뒤 줄을 잡고 경사에 진입하자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챘다.

“선장님, 뒤에 계시지요.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네이선이었다.

정중한 어조와 단호한 표정을 보니 내가 먼저 간다는 말이 먹힐 상태가 아니다.

“어, 그, 그럴까?”

내가 물러서자 네이선은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날 대신해서 줄을 잡았다.

“잠깐! 갑판장, 아직 움직이지 말고 조금 기다려!”

네이선이 자리에서 멈춘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뒤편에 있던 선원의 등짐을 보며 말했다.

“거기 너, 로프 꺼내.”

“네, 선장님.”

선원이 로프를 꺼내서 내가 지시하기도 전에 나무에 로프를 묶었다.

지금 상황에서 로프로 해야 할 일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다 묶었습니다.”

“음, 갑판장, 이거 허리에 묶어. 이 로프가 몇 년이나 묵었는지 모르는데 그걸 의지해서 경사를 내려갈 수는 없잖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네이선이 허리에 새로운 로프를 꼼꼼하게 묶었다.

“그쪽 세 사람, 로프 잡아.”

나는 선원 세 명이 로프를 단단히 붙잡은 것을 확인한 뒤 네이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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