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87화 (288/420)

287화. 괴물

로프를 발견한 지점부터 10~15m가량 이어진 완만한 경사의 끝에는 칼로 베어낸 것처럼 가파른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절벽 밑으로는 그냥 골짜기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워낙 뜬금없이 나타난 골짜기라 직접 내려와 보지 않았으면 절대로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중간에 있는 덤불과 빽빽하게 자란 얇은 나무들 덕분에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네이선은 로프 하나, 아니, 두 개에 의지해서 망설임 없이 절벽을 향해 몸을 던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흙 위에 썩은 나뭇잎이 잔뜩 쌓여서 발 한번 잘못 디디면 바로 저세상 확정이다 보니 몸놀림에 제법 자신이 있다는 돌격대원들도 표정이 다들 꺼림칙해 보인다.

나는 휘청이는 나무를 단단히 붙잡고 앞으로 살짝 나서며 소리쳤다.

“이봐, 갑판장!”

내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네이선을 부르자 잠시 후에 ‘끄응’하는 신음성과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괜찮, 네,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요.”

“야,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런데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냥 절벽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것도 없다면 굳이 여기에 로프를 묶어놓을 필요가 없잖아.

“아, 맞다!”

갑자기 우르타가 소리쳤다.

“뭐가 맞아?”

“그러니까, 혹시, 누군가가 저 밑으로 떨어졌던 게 아닐까, 요? 그래서 구출하려고 로프를 묶었다가….”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우르타의 추측을 나는 바로 부인했다.

“야, 로프 길이만 30미터는 넘을 것 같은데, 그걸 그냥 버리고 갔다고? 말이 되냐?”

“아?”

자동화 기계가 없는 세상에서 로프는 노동 집약의 결과물이다.

섬유를 실로 만드는 것도 노동력이고, 그 실을 꼬아서 줄로 만드는 것도 노동력이다.

배에서 쓸 정도로 튼튼한 로프라면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배에서 로프는 매우 중요한 자원이므로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다.

나는 살짝 언성을 높여서 네이선에게 소리쳤다.

“갑판장! 그럴 리가 없어. 대충 보지 말고 제대로 살펴봐.”

차라리 우르타를 보낼 걸 그랬나?

눈썰미는 이 녀석이 더 좋기는 한데.

“읏차, 그럼 조금 더 내려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그 낡은 로프가 더 아래까지 이어진 것은 맞아?”

“아, 아까 끊겼습니다. 밑으로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끊어져 있더군요.”

이런 젠장. 얼핏 봐도 골짜기 깊이는 50m도 넘어 보이는데, 당연히 우리가 준비한 로프는 그 정도 길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닥까지 갈 수도 없는데, 어디까지 살펴봐야 하는지 표시해줄 낡은 로프조차 끊어졌다는 것이다.

네이선이 매달린 줄을 잡고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금 더 내려가려고 하니 우르타가 내 허리를 붙잡았다.

“으아아, 위험해! 안 됩니다, 선장님!”

뒤를 돌아보니 우르타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나를 올려다본다.

“어휴… 알았어, 알았어. 이제 좀 놔.”

“진짜 안 가? 요?”

“안가, 안 간다고!”

내가 네이선처럼 안전장치를 한 것도 아닌데 설마 내려가겠냐?!

그냥 골짜기가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엇?! 선장님, 동굴이 있습니다!”

동굴!

드디어 찾았다!

그래, 동굴이 있다면 말이 된다.

이제 밑에서 박쥐 떼가 우르르 날아오르며….

“먼저 안을 살피겠습니다!”

뭐야? 박쥐 없어?

그보다 네이선은 불도 없는데 뭘 어떻게 살피겠다는 거야?

“깊이 들어가지 마! 내가, 내가 내려갈게!”

혹시 몰라서 랜턴을 챙겨왔다.

조잡한 횃불 같은 것보다 랜턴이 훨씬 나을 거다.

“어딜 내려가? 위험하다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다급한 우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한 건 맞는데 그렇다고 네이선 혼자 둘 수도 없는 일이잖냐.

하지만 우르타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나는 일단 네이선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게 했다.

“이봐, 갑판장! 불도 없이 뭘 어떻게 살피겠다는 거야? 그러지 말고 로프 좀 고정시켜봐.”

단단하게 고정된 로프가 있다면 손목을 번갈아 가며 로프에 감고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이 끝났음에도 한동안 대답이 없어서 다시 부르려는 찰나, 네이선의 대답이 들려왔다.

“꽤 깊은 동굴인 것 같습니다. 이상한 냄새가 나기는 하는데 특별히 야생동물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몇 명 더 내려와도 될 것 같습니다.”

“좋아, 잠시 대기.”

네이선과 말을 마친 나는 어느새 너댓 명의 경계 인원을 제외하고는 내 근처에 모여든 선원들을 보면서 말했다.

“외딴 섬에 숨겨진 동굴. 다들 뭔가 느껴지지 않아? 위험을 감수한 놈은 당연히 더 큰 보상을 받겠지? 딱 다섯 명만 가자.”

***

제비뽑기로 엄선된 다섯 명의 인원이 먼저 동굴로 내려가고, 우르타까지 내려보낸 나는 남은 인원들을 보고 당부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안 온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게 할게. 밑에 뭔가 있다면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올라올 때까지 경계 철저히 하고, 로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이거 없으면 우리 못 올라오는 거 알지?”

마음 같아서는 네이선이나 우르타를 남기고 싶은데, 우르타는 눈썰미 때문에 데리고 가야 하고, 이미 내려간 네이선보고 올라오라고 하는 것도 웃기다.

야생동물은 없는 것 같다고 했지만, 혹시 모를 위험에서 가장 믿을만한 무력이 네이선이라서 내 옆에서 떼 놓기도 그렇고 말이야.

그래도 나와 오래 지내 온 녀석들만 모아 오기도 했고, 특히 돌격대원들의 충성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괜찮을 것이다.

어우야, 막상 절벽 끝에 서니 다리가 달달 떨린다.

내가 마스트도 안 올라가는 사람인데, 여기는 마스트보다 더 높은 것 같다.

그래도 선장 체면에 뒤로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를 악물고 로프를 움켜쥐었다.

어떻게 내려온 것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길래 화들짝 놀래서 아래를 보니 네이선이 싱긋 웃는 것이 보였다.

“아오, 깜짝 놀랐잖아. 놔, 걸리적거려.”

사실은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왠지 창피해서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발 조심하십시오. 바닥이 고르지 않아요.”

“어. 좀 비켜봐.”

탁.

내가 줄에서 뛰어내리자 네이선과 돌격대원이 양옆에서 어깨를 잡아주었다.

“자, 다친 사람은 없지?”

“흐흐, 선장만 괜찮으면 다 괜찮을 겁니다.”

“이게 뭐라고 우리 선장이 로프까지 타는 건지, 크크큭.”

“손은 괜찮습니까? 엄청 세게 쥐고 오시는 것 같던데, 흐흐흐.”

나는 딴청을 부리는 우르타를 노려보았다.

선장은 원래 로프 타고 다니는 직업이 아니니까 소문의 출처는 이놈이렷다?!

딸깍.

“오오!”

“역시!”

“저게 그거지? 마도구인가? 엄청 비싼 거!”

“이야, 나도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야.”

랜턴을 켜자 다들 감탄을 하며 수군거렸다.

이 시대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지적 수준으로는 감히 이해할 수도 없는 물건이다 보니, 몇 번 본 녀석들도 볼 때마다 감탄을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야?”

“으응, 제가 도착할 때부터 이런 냄새가 났는데,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동굴 안에는 아주 역하지는 않지만 약간 비릿한, 기묘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이게 만약 가스라면 진짜 큰 문제인데.

원래 가스는 냄새가 없다지만, 자연 상태에서 불순물이 섞여 이상한 냄새가 날 수도 있지 않은가.

랜턴을 비추니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조금씩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원래는 괜찮았다가 가스 매장지가 터져서 인적이 끊긴 것일지도 모르니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다들 숨이 가쁘거나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이야기해. 그럼 출발하자. 선두는 갑판장, 뒤에 포술장, 중앙에 내가 선다. 너, 그리고 너, 내 뒤에서 후방 경계해.”

가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

“왠지 공기가 좀, 끈적거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 기분 나쁘네. 냄새도 더 심해지는 것 같고.”

“제가 어렸을 때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기도 한데 말이죠. 마을 뒷산에 동굴이 있었거든요.”

“그래? 혹시 그 동굴에서 누가 죽거나 그런 적은 없어?”

“글쎄요? 워낙 어릴 때 떠난 동네이고, 동굴 자체도 이렇게 길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못 가게 막기는 했습니다만, 원래 애들이 못 돌아다니게 막는 게 어른들 역할 아니겠습니까?”

어른들이 막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이 가본 적이 있을 정도로 느슨하게 관리했다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최소한 누가 죽어 나가거나 정신이상이 되어 나온 적은 없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가스가 아닐 확률이 조금 높아진다.

“정지.”

갑자기 낮게 가라앉은 네이선의 음성이 들려왔다.

스르릉.

“모두 무기 뽑고 경계. 우리 말고 뭔가 있어.”

네이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다.

나 역시 오른손에 칼을 들고 정신없이 랜턴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뭐, 성인 세 사람이 어깨를 붙이고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통로에서 살펴볼 게 얼마나 있겠냐마는.

쿠웅…!

동굴 안쪽에서 작지만 둔중한 소음이 들려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네이선이 한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스륵, 스륵, 스륵, 쿠웅, 쿠웅, 스륵, 스륵, 스륵, 쿠웅, 쿠웅, 스륵….

“씨, 씨발, 도대체 뭔데 소리가….”

무지에서 나오는 근원적인 공포를 이기지 못한 선원 한 명이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수십 개의 칼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미 두 자릿수 이상의 살인을 해본 건장한 남자들이 고작 소리 때문에 공포에 질린다면 어이가 없겠지만, 원래 사람은 비합리적이다.

“쫄지 마! 동굴이라서 소리가 울리는 것뿐이야! 끽해봐야 야생동물이다! 전방 주시해!”

나 역시 피부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지만, 일부러 배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긴장과 공포는 몸을 굳게 만들고, 굳은 몸은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패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혹시 모를 뒤쪽의 기척에 집중했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한 마리가 아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후퇴도 염두에 두어야 하니 말이다.

“으아악! 저, 저게 뭐야!”

“괴, 괴물!”

턱, 턱, 턱, 쐐액!

“하압!”

퍼억!

그래, 소리라도 지른 저 두 놈은 그나마 난 놈들이다.

나와 우르타, 그리고 다른 세 명은 전방에 모습을 드러낸 괴물의 모습에 얼어붙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으니 말이다.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화살처럼 쏘아진 대가리(?)를 막아낸 네이선은 뭐, 말할 것도 없지.

동굴 끝까지 닿는 거대한 세 개의 머리, 짧고, 굵은 두 개의 다리, 그리고 천천히 드러나는 그 뒤의 긴 꼬리….

뱀도, 도마뱀도, 공룡도 아니지만, 그 모습에서 나오는 위화감과 생리적 혐오감은 그들을 합친 것보다 심했다.

저건 뭔가 잘못된 생명체다.

동물, 아니, 동물이라기보다는 괴물, 그래, 저건 괴물이다.

“끼이이이이이이!”

“크흑!”

“아악!”

갑자기 괴물이 기성을 내질렀다.

그 강렬한 음파는 동굴에서 증폭되어 우리의 고막을 때렸고,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가 고통을 느끼며 귀를 부여잡았다.

“모두 물러서!”

빠악!

“키에에에엑!”

“리안! 불, 불!”

나는 네이선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는 재빨리 엉뚱한 곳을 비추고 있던 랜턴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바로 놈의 대가리를 비추자, 눈이 부신지 깜짝 놀라며 빛을 피해 목을 뒤로 빼는 것이 보였다.

문제는 이놈의 대가리가 무려 셋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네이선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지는 놈의 대가리를 피하는 것도 모자라 칼을 한 번씩 내지르고 있었지만, 가죽이 질긴 것인지 유효타가 들어간 것 같지가 않았다.

날붙이랑 생가죽이 부딪혔는데 왜 ‘빠악’하는 소리가 나겠냐고.

다다다다다다!

“흐아앗!”

퍼억!

콰당!

“아야야야….”

갑자기 ‘다다닥’하고 뛰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우르타가 오른쪽 벽에 딱 붙어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나름 회심의 기습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놈이 대가리가 셋이라는 것을 깜빡한 것이 패착이었다.

내가 말리기도 전에 뛰어든 우르타의 몸통이 정확하게 뱀의 왼쪽 대가리와 부딪혔다.

그리고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서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끙끙거렸다.

“야, 우르타!”

“네이선! 집중해! 너희들 뭐 하는 거야?! 공격! 공격해! 저놈 대가리는 고작 세 개고 우리는 일곱 명이다! 고작 뱀 새끼한테 죽을 셈이야?!”

키가 대충 2.3m에 길이는 5m쯤 될 것 같은 괴물을 그냥 뱀 새끼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놈을 지칭할 적당한 단어가 없었다.

“으아아아!”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돌격대원 한 명이 칼을 고쳐 쥐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동굴 안의 처절한 전투의 막이 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