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복귀
“잘 만든 세공품이군요.”
“…그게 끝이야?”
“네? 뭐, 더 이상 뭐가 있다는 겁니까?”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금속판 위에 금을 아낌없이 사용해 세공된 예술품.
용사가 드래곤 비슷한 괴물과 싸우는 모습인데, 생동감이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그 옷의 주름 하나, 비늘 하나까지 정교하게 세공한 폼이 보통 공을 들인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감상이 고작 ‘잘 만든 세공품’이라니.
실망스러운 내 반응에 그레이그는 당황하며 세공품을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딱히 기발한 감상이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혹시?
“저는 진짜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전 교역 쪽 일은 맡아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역시나 그럴 리가 없지.
교역 업무를 해봤는지가 문제가 아니고 예술적인 감성이나 섬세함의 문제인 것 같지만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관두지. 급한 일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보다 물자 재분배는 끝났어?”
내가 화제를 돌리자 울상을 짓던 그레이그가 바로 표정을 바꾸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각 함선 조리장의 합의하에 인원수에 맞게 정확히 분배했습니다. 약 열흘 정도 항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러면 이제 아인델프 선장만 무사히 돌아오면 되는 건가.”
“그보다, 오늘 베기어 함장을 초대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깜빡하고 있었네. 마침 대충 저녁 시간인 것 같은데 조리장에게 선장실로 2인분 식사 준비해 달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서 베기어 함장 좀 초대해 줘.”
“알겠습니다.”
그레이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떠난 뒤, 나는 금세공품을 귀중품 보관함에 고이 모셔 두었다.
아무래도 도시에 가서 귀금속점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베기어 함장에게는 또 얼마나 정보를 공개한담?
***
“선장님, 베기어 함장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어, 열려 있어. 모시고 와.”
방금 조리장이 가져다 놓은 음식 정돈을 마치고 술을 준비한 나는 바로 손님을 들였다.
문이 열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꾸벅 숙인 선원이 자리를 떴고, 뒤에 서 있던 베기어가 살짝 목례를 하며 선장실로 들어왔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제독.”
“별말씀을요. 어차피 먹는 건 거기서 거기죠. 이번 탐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공유하려고 뵙자고 하였습니다.”
“크흠, 제독. 말씀을 조금 편하게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같은 예의 바른 존칭은 제게도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아, 네. 노력해 볼게요.”
비록 우리 선단에 합류를 결정했다고 하지만, 다른 선장들과 베기어 함장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아인델프 선장과 발드 선장은 내가 임명한 선장이다.
배의 소유주는 나이거나 내가 위임받은 상태이며, 선원들도 서류상으로는 내가 고용한 형태이다.
하지만 베기어 함장의 드라이언은 온전히 베기어 함장의 소유이고, 그 안에 타는 간부부터 말단 선원까지 모두 베기어 함장이 고용하고 급료를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부하라기보다는 협력업체 사장님 같은 느낌인데 어떻게 편하게 대하겠냐고.
“대충 선원들 사이에 도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선원들이 하는 말은 허풍이 너무 많이 섞여서 말이죠.”
“일단 천천히 드시면서 들으시죠.”
습득품을 제외하면 딱히 숨길 만한 내용은 없었다.
좌표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끝난 다음이고, 괴물에 대한 것은 이미 세 개의 대가리라는 뚜렷한 증거물이 있다.
문제는 바로 그 습득품인데….
“그러니까 금화가 한 상자, 그리고 이 비단보가 열두 장, 그리고 보석 원석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뭐 금세공품도 하나 있습니다만, 기념품으로 간직할까 합니다.”
“흐음….”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베기어 함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독, 이게 조금 무례한 질문을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 보석 원석이 맞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독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번에 습득한 물건들이 결국 이전의 누군가가 빼돌리지도 못한, 비밀 창고에 숨겨둔 물건들일 확률이 높은 것 아닙니까?”
“그렇죠?”
“금화야 뭐,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 정도라고 하고, 비단의 경우는 가치도 그렇고 처분이 쉽지 않은 녀석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보석 원석은 뭐랄까, 너무 결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게….”
뜨끔한 내가 열심히 변명을 생각하고 있는데 베기어 함장이 그대로 말을 이었다.
“혹시 원석이 아니라 가공된 것들입니까? 선원들 말로는 비단보에 싸서 대충 들고 다녔다던데, 보석들은 서로 강도가 달라서 그렇게 마구잡이로 운반하면 가치가 크게 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제독, 물론 우리가 아직 신뢰가 쌓인 관계는 아니지만, 저도 승조원들에게 현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베기어 함장을 그냥 싸움밖에 모르는 천상 군인, 그러니까 용병대장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크게 잘못 본 모양이다.
물론 판단력이 좋다는 것은 함께하는 입장에서 딱히 나쁠 것은 없지만 지금은 조금 애매하네.
“……후우, 사실은 저도 이게 확신이 안 들어서 보석 원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한번 보시죠.”
나는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공개를 할 생각으로 주머니에 따로 챙겨둔 마정석을 꺼냈다.
베기어 함장도, 선원들도 어차피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상황을 봐서 진실을 적당히 덮을 수도 있다는 얄팍한 계산도 깔려 있었다.
“이게 뭡니까? 확실히 보석 종류 같기는 한데….”
내가 넘겨준 마정석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베기어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기는 하다.
일반인은 평생 가도 만질 일이 없는 마정석이 자기 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이것 참, 신기하군요. 이런 보석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마치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는 것 같습니다. 이런 녀석이라면 비밀 창고에 있을 만하군요. 잘은 몰라도 가치가 상당할 것 같은데요?”
“놀라지 마세요. 우리도 실물을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 하지만, 고급 마정석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이 나왔습니다.”
“네? 마정석이라면?”
내 말에 깜짝 놀란 베기어가 신중한 표정으로 다시 마정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나는 이야기로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고급 마정석은 물론이고 그냥 마정석도 실제로 볼 일이 없다 보니….”
하긴 평생 상선을 타도 하급 마정석조차 선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끽해봐야 향료 제도에서 본토로 가지고 오는 운송 건 정도인데, 수량도 얼마 되지 않고 다른 더 좋은 교역품이 있어서 남는 공간이 있으면 부득이하게 채우는 정도로 운송하니 말이다.
물론 수요는 충분해서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는 있지만, 서해 항로가 얼마나 험한지 경험한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리 매력적인 교역품은 아니다.
그런데 고급 마정석이라니, 그런 것을 실제 자기 눈으로 본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그래서 확신을 못 해 일단 보석 원석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세상 모든 보석과 원석을 다 본 것도 아니다 보니….”
“하긴 원석과 가공된 보석은 시각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기는 하더군요.”
식사를 마친 우리는 동시에 일어섰다.
“이런 이유로 당장 습득물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대략적인 정산이 끝나면 금액은 알려드리겠습니다만, 실제 지급은 본토에 복귀한 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독.”
“별말씀을요. 같은 길을 가기로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내 말에 베기어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독의 말이 정말 옳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는 사람은 드물죠.”
“아….”
그거야 어쩔 수 없다.
상대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런 시대인 걸 어떡해?
***
다음 날 오후 늦게서야 녹초가 된 아인델프가 복귀했다.
다행히 부상자만 몇 명 있을 뿐 낙오한 사람은 없었다.
“고생했어, 아인델프 선장.”
“휴우, 제독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영 마음이 불안해서… 저기 저게 그 괴물의 머리입니까?”
아인델프는 가죽과 뼈를 제외한 지방과 내장 등을 제거해서 말리고 있는 뱀 대가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 진짜 네이선이 아니었다면 몇 명은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였어. 세상에 저런 괴물이 있을 줄이야.”
환상으로 보았던 폰테섬 북쪽의 거대 문어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상상을 초월한 괴물이기는 했다.
“하하, 배보다 큰 고래도 보지 않았습니까? 이런 외진 섬에 괴물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죠.”
아니, 외진 섬에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하지만 여기에서 ‘환경과 진화’라거나 ‘유전과 종족 번식’ 같은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도 이해를 못 할 테니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빨리 준비하면 해가 지기 전에 출항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따로 보고 할 일이 있어?”
“아닙니다. 그보다 저 친구들 식수 좀 넉넉하게 챙겨주십시오. 점심나절부터 물 한 모금 못 마셨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물은 충분했을 텐데?”
“한 녀석이 실수로 식수 일부를 흘리는 바람에 조금 부족했습니다. 재수가 없었는지 이 커다란 섬에 식수로 삼을만한 물이 없더군요. 개울은커녕 깨끗한 웅덩이도 없었습니다.”
“아, 그래서인가?”
“네?”
“아니야, 어서 가서 피오렐 호 점검해. 점검 끝나는 대로 출항하지.”
사실 이 섬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계속되는 의문이 있었다.
‘도대체 왜 이 섬이 버려졌을까?’
케르빈 제도에 수많은 섬이 있다지만 인간이 터를 잡고 거주할만한 섬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만약 살기 좋은 곳이었다면 향료 제도처럼 엄청난 개발 붐이 일어났겠지.
그런데 이 정도 규모의 섬을, 심지어 엄청난 노동력을 들여 접안시설까지 만들어놓고 그냥 방치했다고?
뭔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물론 처음 개발될 당시에는 붉은모래 해적단의 주요 관리지역 중 하나였을 테니 감히 함부로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겠지.
하지만 붉은모래 해적단이 망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입지 조건에 특별한 하자가 없다면 이미 다른 해적마을처럼 사람이 들어와서 살고도 남았을 텐데 왜 아무도 여기를 점유하지 않았을까?
동굴 속의 괴물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 괴물이 동굴 밖에서 활동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지만, 놈이 밖으로 나오면 그리 위협적이지 않을 게 분명하거든.
동굴은 모든 면에서 괴물에게 유리한 전장이었다.
방어하기 힘들었을 측면과 후면을 막아주었고, 어둠으로 우리의 시야를 제한했으며, 고르지 못한 바닥과 좁은 공간 때문에 공격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던 음파 공격(놈은 그걸 공격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역시 사방이 트인 야외로 나오면 별 효과가 없을 터였다.
결론적으로 그런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놈의 숨을 끊었다.
네이선이 없었다면 상당히 불리한 싸움을 해야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이 위협적인가?’라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놈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이 섬에 인간이 터를 잡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밖으로 나온다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 괴물은 거주 불가 사유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인델프의 말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섬 전체를 샅샅이 뒤진 것은 아니지만, 좌측과 우측, 그리고 중앙을 통과해서 왔는데 어디에서도 수원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섬에 수원지가 없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담수를 구할 수 없는 섬이니 잠시 머무는 창고로는 이용을 해도 거주지로는 활용하지 못한 것이지.
똑, 똑.
“선장님, 전 함대 출항 준비 완료입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오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알았어. 선교로 가자.”
***
항해 내내 선원들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내가 살짝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원래 이런 피곤한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선원들이 녹초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 너무 활기찬 거 아냐?”
“하하, 그렇다고 다들 힘든 척을 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선원들의 항해 수당과 각종 수당에 대한 중간 보고를 위해 선교에 올라와 있던 게론드가 말을 받았다.
“어차피 보물섬이 발견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숨길 수 없습니다. 적당히 그 양을 조절해서 보고하는 것이 최선일 겁니다.”
“음,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회계사, 괜찮아?”
“조금 불편합니다.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아니, 적응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군요.”
게론드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다.
그저 괜찮습니다, 아닙니다를 남발하는 것보다 차라리 저렇게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우울해하는 쪽이 낫다.
실제로 두 눈에 피로감이 쌓이기는 했지만, 얼굴은 전보다 나아지기도 했고.
뭐랄까, 이전에는 ‘포기’ 상태였는데 지금은 ‘적응’을 위한 ‘체념’ 상태라고나 할까?
말장난 같지만 대충 조금 더 긍정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어, 저 섬만 돌면 되지 않나?”
“네.”
“피오렐과 드라이언에게 신호, 최고 경계 태세로.”
“네?”
갑작스러운 내 명령에 그레이그가 멈칫하며 의문을 표했다.
“우리가 본대와 연락을 주고받는 지 벌써 한 달이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어떻게 알겠어?”
“으음, 알겠습니다.”
또 모르지, 그 사이에 해적들의 반격, 혹은 기습을 당해서 아군이 후퇴했을지도.
최악의 경우 일레드 왕국 해군이 개입해서 전멸했거나, 심각한 타격을 입고 아예 케르빈 제도에서 완전히 철수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