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초대하지 않은 손님
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
“에이 씨, 뭐야?!”
멀리서 아련히 울리는 급박한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머리맡의 칼을 잡았다.
아무리 어설프게 급조했다고 하더라도 육지의 막사가 선실보다는 편하다지만, 어디까지나 일반 선실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배에서 가장 편안한 주거 공간에 해당하는 선장실에 비하면 육지에 어설픈 솜씨로 급조한 잠자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다.
만약 배를 직접 계류할 수 있는 접안 시설이 없다면 단정을 타고 복귀하고 다시 오는 과정이 귀찮아서라도 육지의 숙소에서 잠을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충이나마 접안 시설이 만들어져 굳이 단정을 탈 필요가 없는 지금은 그냥 선장실에서 자는 중이었다.
뇌는 잠에서 깨기 싫어 비몽사몽일지 몰라도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입으로는 욕을 내뱉으며 칼을 뽑고 일어서자, 여기저기에서 타종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정박한 모든 함선이 종을 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쯤 되면 슬슬 잠도 깨고 불안감이 드는 게 당연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죄다 경고 타종을 울리는 거야?
이제 제법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두꺼운 코트를 입고 방문을 나서는데,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던 선원이 나를 보고 반색하며 소리를 질렀다.
“선장님! 어, 어떻게 합니까?!”
“무슨 일인데? 연락 온 거 있어?”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당연한 말이지만 고작 타종 소리만 가지고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다.
수기 신호나 발광 신호가 오건 전령이 오건 뭔가 자세한 메시지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아침 먹을 시간이라고 경고 타종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뭐라도 준비를 해야겠지.
“지금 견시대 아무도 안 올라갔지?”
“네. 정박 중이라서….”
“지금 선내에 남은 인원이 몇이나 돼?”
“열 명쯤 됩니다.”
딱히 당직을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원이 대거 빠져나간 선실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어서 배에 남는 인원이 꼭 있게 마련이었다.
“젠장, 전원 중앙갑판에 소집하고, 자네는 바로 견시대 올라가. 경고 시작점이 이쪽은 아니었으니까 육지 쪽도 자세히 살피고.”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았다는 것으로도 약간 마음이 놓인 듯 한결 편안해진 표정의 선원이 급하게 뛰어갔다.
하필이면 오늘은 일등항해사도, 이등항해사도 다 푹 쉬라고 했는데.
한 달에 이르는 항해를 마치고 쉴 시간도 없이 전면전에 투입되는데, 오늘까지 당직을 세울 정도로 내가 악덕 선장은 아니거든.
탁, 탁, 탁, 탁, 탁.
부지런히 중앙갑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통로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보아 한 명인데, 우리 선원인가?
저 방향은 개인실 쪽인데 선원이 왜?
“선장님! 오펜입니다!”
“엥? 오펜? 너 왜 여기에 있어?!”
갑작스러운 오펜의 출현에 내가 놀라서 묻자, 오펜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육지는 좀 불편해서요. 여관처럼 자리가 편한 것도 아니구요.”
그래, 파도마저 잔잔한 오늘은 급조한 숙소보다 익숙한 개인실이 더 낫겠지.
“여튼 잘 왔다, 따라와!”
“알겠습니다!”
오펜과 함께 중앙갑판으로 가자, 짙은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선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 주목!”
아직 날조차 밝지 않는 시간.
어슴푸레한 밝기를 보면 30분 내에 해가 뜰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정(시야, 해상에서 육안 관측의 쉽고 어려움을 결정하는 종합적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욱한 해무(海霧, 바다에서 끼는 안개) 덕에 조금만 멀리 떨어진 배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듯하다.
물론 해가 뜨면 해무야 금방 사라지겠지만, 그 30분 정도가 문제지.
“현문 그대로 두고, 너희 둘은 내려가서 계류색 풀어. 일단 계류색 두 개는 풀고 한 개만 유지해. 그리고….
지시를 내리는 중에 메인 마스트 꼭대기에서 비명에 가까운 보고가 들려왔다.
“선장님! 육상에서 발광 신호입니다! 미확인 선박 12척 접근 중! 방향 북서쪽!”
지금 상황에서 미확인 함대라니, 도대체 누가?
나는 급히 머리를 굴렸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아군이라면 추가 지원 함대다.
발드 선장의 말대로라면 상당히 큰 세력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같으니 추가 지원 함대를 편성했을 수도 있다.
피어스 제독, 발드 선장과 함께 오지 못한 이유는 출발지역이 론 항구가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잠깐, 그럼 여기를 어떻게 찾아 와?
아군이 아니라면 적군이라는 뜻인데….
적군이라면 딱 한 가지 가능성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바로 일레드 왕국 해군.
12척이라고 했지?
일레드 왕국이 정규 해군 전함 12척을 보내서 이쪽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면, 아마 발드 선장이 말한 ‘소문’이 사실일 확률이 높다.
“선장님, 출항 대기 상태였던 다섯 척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알센더트 제독은 내일의 전면 공격을 준비한다고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구축한 두 곳의 해안 포대에 파견된 인원과 물자까지 회수했다.
하지만 망루의 경계병과 야간 당직이라고 할 수 있는 출항 대기 분함대는 평소처럼 준비를 시켰고, 지금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알센더트는 최소한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이라는 타이틀을 달지는 않을 수 있겠다.
…그것도 살아남은 다음에나 할 이야기지만 말이다.
***
내가 지시한 대로 계류색 두 개를 풀어서 회수할 때쯤에 선원과 간부들이 속속 복귀하기 시작했다.
네이선과 행크가 머리를 산발한 채로 내게 달려오고,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거지꼴을 한 선원들이 배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뒤에서 눈곱이 덕지덕지 붙은 괴물이 고약한 입 냄새를 풍기며 소리를 지른다.
“선장님! 무슨 일입니까?!”
“일등항해사! 긴급 출항한다! 현문 철거하고 계류색 걷어!”
내가 입 냄새를 피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명령을 내리자 그레이그와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 네이선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갑판장, 계류색 걷어. 현문은 내가 치우지.”
“알겠습니다. 일등항해사님.”
네이선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선원들을 닦달해서 마지막 계류색이 남은 선미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어정쩡하게 남아있는 행크에게 지시를 내렸다.
“돌격대장은 지금 복귀한 인원 파악해서 선교에 보고해.”
“알겠습니다!”
“오펜, 우리는 선교로 간다.”
“네, 선장님!”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아주 난장판이었다.
우리와 달리 야간 경계를 맡아 출항 준비를 마치고 있던 다섯 척의 함선은 천천히 속도를 올리며 해안을 벗어나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함선은 우리보다 더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게다가 육지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오래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거의 계획 없이 지어진 천막과 가건물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 때문에 미로에 가깝게 변했고, 누가 실화(失火)라도 했는지 몇 군데는 작게 불이 난 곳도 보였다.
12척의 미확인 함대가 설마 우리의 작전계획까지 알고 이 타이밍에 출현한 것은 아닐 테니, 우리가 그냥 운이 없는 것이겠지?
“그런데 선장님, 괜찮을까요?”
“뭐가?”
“아직 복귀하지 못한 사람이 많은데요. 포술장님도, 선의님도 못 본 것 같습니다.”
“으음…. 어쩔 수 없어.”
행크에게 인원 파악을 시키기는 했지만 대충 봐도 간부뿐만 아니라 선원들 역시 절반도 복귀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하고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바다가 넓은 것 같아도 수많은 배가 한 번에 같은 행동을 하면 당연히 교통체증이 생긴다.
조금만 늦어도 긴급 출항을 하려는 배들 때문에 섬 앞바다는 난장판이 될 거다.
그러니까 무조건 남들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만약 접근 중인 함대가 적이라면, 대열도 없고 혼란에 빠져 뭉쳐있는 아군 함선들은 첫 번째 먹잇감이 될 테니까.
서서히 밝아오는 바다를 배경으로 미확인 함대가 있다는 북서쪽을 노려보고 있으니 그레이그가 헐레벌떡 선교로 뛰어 올라왔다.
“선장님! 긴급 출항 준비 완료입니다!”
“출항한다.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지. 메인 마스트만 반개, 침로 030도 잡아.”
내 말에 그레이그가 마스트 쪽으로 보고 소리쳤다.
“네, 메인 마스트 반개!”
오펜 역시 재빨리 타륜을 잡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이등항해사 오펜이 타륜 잡습니다, 030도 잡아!”
그레이그의 지시를 받은 네이선이 선원들을 시켜 급히 돛을 올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망원경을 써도 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고작 2km 정도나 보일까?
2km면 순풍을 받은 배가 10분 내에 도달 가능하고 5분 내에 포격을 쏟아부을 수 있는 거리니, 사실상 반쯤 눈이 멀었다고 봐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피오렐, 리버티, 드라이언도 챙기고 싶지만, 당장 내 코가 석 자니 뭐.
***
“진짜 씨발, 이 정도면 나를 엿 먹이기 위한 신의 안배 아니야?”
분노에 찬 혼잣말에 타륜을 잡고 있던 오펜이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네?”
“접근 중인 미확인 함선들, 일레드 왕국 해군기를 달고 있다.”
“어, 어, 그, 그러면….”
“선장님, 정말입니까?!”
그레이그까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다시 봐도, 저 멀리 접근 중인 함선의 메인 마스트에 달린 깃발은 일레드 왕국 해군기다.
정확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대충 봐도 선두 함선의 배수량은 1,000톤 이상, 저 정도면 선측포만 36문이 넘을 거다.
12척이 비슷한 수준의 전함이라면, 화력만 놓고 볼 때 거점에 정박 중인 24척이 모두 나서도 비슷하거나 밀리지 않을까?
24척이라고 해봐야 8척은 수송선이니 전력 외라고 봐야 하니 말이다.
“저, 저, 위험한 거 아닙니까?”
“설마 저렇게 다짜고짜 공격한다고?”
고조되는 위기감과 별개로 더 이상 접근하기는 껄끄러워서 속도를 늦추고 여차하면 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쪽으로 위풍당당하게 접근 중이던 일레드 해군 함선들이 일제히 선회하며 측면을 노출시키는 것이 보였다.
절제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 일단 우리와 훈련도부터 다르다.
지금 달려드는 다섯 척이 미친 척하고 맞대응하려고 하면 아마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하다가 전멸할 것 같다.
“서, 선장님, 어떻게 할까요?”
“제기랄, 정면 주시하고 있어.”
나는 두 사람에게 선교를 맡기고 뛰다시피 선교를 벗어나 후방을 살폈다.
우리 뒤로 허겁지겁 뛰쳐나온 함선들이 따르고 있었고, 그 중간쯤에 알센더트가 지휘하는 기함 마르티엘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지시를 내리려는지 견시대에 있는 신호수가 열심히 깃발을 흔들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될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대형이고 뭐고 없는 엉망진창인 모습인데 뭘 어떻게 지시를 내리겠나?
신호에 사용할 함번조차 정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우리 바로 뒤를 쫓는 배가 드라이언이라는 것과, 저 멀리 피오렐과 리버티가 보인다는 것 정도일까.
아직까지 돛을 올리지 못하고 접안 시설에서 낑낑거리는 다섯 척의 함선 중에 우리 선단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이따위 상태로는 절대로 싸울 수 없었다.
포격이 시작되면 절반쯤은 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지 않을까?
내가 다시 선교로 돌아갔을 때 그레이그와 오펜 두 사람이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앞다투어 말을 꺼냈다.
“선장님, 백기가 올랐습니다!”
“선장님, 일레드 해군 전함에 백기가 게양되었습니다. 교섭할 의지가 있는 모양입니다.”
“휴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실 방금 전까지 어떻게 후퇴를 하면 섬에 남은 인원들을 데리고 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차피 공격을 안 할 거면서 왜 포격 대형을 취한….
아, 경고구나.
***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황이 수습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레드 해군까지 모두 정박할 정도로 접안 시설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분함대 혹은 전대의 기함으로 보이는 함선 한 척만 섬에 정박했다.
대충 봐도 1,200톤은 될 듯한 갤로아르 급의 전투함이었다.
일레드 왕국에서 ‘엘베도라’라는 최신예 함선을 선보이기 전까지 최강을 다퉜을 육중한 녀석이다.
일레드 해군 소속 함선 11척이 바다 위에 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모두 정박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원한(항해 중인 모든 배가 자원했다, 오트라스만 빼고) 13척의 함선이 경계를 맡고, 나머지 13명의 함장, 선장들이 중앙 회의 막사에 모였다.
나도 그냥 경계나 맡고 싶었는데 일레드 놈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야 할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직 배에 타지 못한 우리 인원을 챙겨야 했다.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정박한 군함에서 손님을 모시기 위해 파견되었던 마르티엘 호 항해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천막 입구가 거침없이 젖혀지며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한 일레드 왕국 해군 정복에는 번쩍이는 치장물이 여러 개 달려있고, 구두는 빛이 날 정도다.
날카로운 눈매와 얇은 입술이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미남형인 남자.
이제 고작 서른이나 되었을까?
그런데 계급장이 무려 준장이다.
“다들 모여 있었군. 나는 국왕 폐하께서 직접 서임하신 남작이며, 일레드 왕국 왕립 해군 준장, 제4함대 부사령관인 디아즈 에이디엘이다. 이에 합당한 예를 받았으면 하는데?”